고부봉기와 사발통문은 동학혁명사에 있어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발통문과 고부봉기가 동학농민혁명에 있어 결정적이었다는 주장에 반대합니다 사발통문은 당시 주모자를 알 수 없도록 하면서 연락을 취하는 보편적 방식입니다 고부봉기때 쓰인 사발통문은 일반적 통문 형식에 맞지 않아 사실 여부를 두고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논쟁이 뜨겁습니다 또한 우매한 농민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러 상소에서 앞장서기를 마지않았던 전봉준의 살아온 행적과 공초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아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할려고 해도 전봉준이라는 인물이 큰 혁명을 앞두고 주모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뒤로 숨었다는 것은 상상되지 않습니다 사발통문이 사실이다 가정하더라도 세상에 포고문을 선포한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하고 주모자 이름과 대의를 대내외에 발표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주모자를 감추는 지도부가 어떠한 자격이 있어 일반 대중을 결집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또한 고부지역민들은 고부봉기 이후 조병갑 후임 박원명의 회유에 의해 지역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고 해산해 버리는 시대적 인식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볼 때 고부봉기는 1862년 진주민란 이후 30여년 동안 일어난 100여건의 민란 중 하나일 뿐입니다 반면 안핵사 이용태 탄압을 피해 고창으로 피신한 전봉준은 손화중 김개남 그리고 지역주민 4000여명(전봉준 공초에 여러 전투에서 자주 거론되는 농민군 숫자임)과 함께 무장 기포지에서 만천하에 대의를 떳떳이 선포하였습니다 고부민란과는 달리 고창 무장 기포후 부안 백산과 정읍 고부로 진격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부 의식의 좀더 나은 성숙과 지역주민들의 높은 시대의식 수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당시 그 많은 수가 반역이라는 의식을 뒤엎고 지역을 벗어나 혁명의 기치를 내걸고 나아갔으니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며 다른 지역 주민들에게 우리도 일어나 참여하여야 한다는 각성을 심어주는데 있어 황토현 전투 승리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민중의 위대함을 드러낸 역사적인 날입니다 싸움에서는 질 수도 이길 수도 있습니다 특히 일본군과 관군이 연발총을 가지고 있는 반면 죽창을 들고 나서는 동학군에 있어서는 더욱 결과는 의미없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민중이 평등한 세상, 정의로운 민주주의 사회 실현을 위해 자기 한계를 넘어섰다는 것입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 조상이 싸움 잘 했다는 황토현전승일을 백의민족의 후손인 우리가 기념일로 계속 삼고 기려야 하는지... 전봉준과 조병갑 중 한 사람이라도 출연하지 않으면 최대 40만명의 동학농민군의 희생으로 쓰여진 동학농민혁명사는 왜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는지... 군사정권이 지어낸 막장드라마에 매몰되어 있는 지금의 우리가 참으로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우리 후손들이 동학농민혁명을 지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참여 조상들의 정신을 두 번 죽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때라고 봅니다
사발통문과 고부봉기에 역사 왜곡이 있어 안타까움이 큽니다 ○ 고부봉기때 쓰였다고 하는 사발통문은 원본이 아닙니다 20명 서명자 모두 한 사람 필체이기 때문입니다 명단에는 전봉준과 함께 3대 거두라 일컬어지는 손화중, 김개남이 빠져 있고, 역시 동학교도이자 고부민란 당시 장두의 한명이었던 장익서의 이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20대가 1명도 없는 반면, 당시 14세였던 송국섭 등 10대가 2명이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사발통문은 일반 통문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고 있으며, 결의 4개 항목 중 2개 항목이 고부민란 당시의 상황과 맞지도 않아 진위 여부를 두고 학계에서 많은 논쟁이 일고 있는 상황입니다 또한 당시 사회에서 주동자를 알 수 없게 하기 위해 쓰였던 사발통문은 전봉준의 그동안 행적(앞장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음)과 공초(심문 조서)에서 보이는 정황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 고부봉기는 1800년대 전국에서 일어난 100여 사건 중 하나에 속하는 민란입니다 민란을 입증하는 증거는 많은 대중을 결집할려면 지도부가 죽기를 각오하고 떳떳이 이름을 밝혀 대의를 선포하는 것이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그러나 위와는 반대로 주모자를 알 수 없게 비밀리에 추진하는 사발통문(실제 존재했다 가정할 경우)을 사용한 것은 아직까지는 지도부의 의식이 민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또한 이 지역 주민들이 조병갑의 익산군수로의 전임과 고부군수로의 잉임 여부에 따라 해산과 결집을 하였고, 후임으로 온 군수 박원명의 회유에 의해 지역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고 해산해버렸다는 점도 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러 민란과 마찬가지로 시대적 인식의 한계를 드러낸 것입니다 고부민란 이후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고창으로 피신하여 온 전봉준이 손화중, 김개남, 지역주민 4000명(전봉준 공초 기록에 여러 싸움에서 자주 언급되는 농민군 숫자임)과 함께 고창 무장 기포지에서 한 지역을 뛰어넘어 전국화를 선언한 포고문을 최초로 발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