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on7645 하륜이나 이황같은 신하들이 좀 더 많이 나오고 그랬어야하는데 이후 집권하는 사림들 중에서 개혁적이고 개방적인 세력이 제대로 집권하지 못하고,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무서워해 뛰어났던 화약의 기술발전을 막으며 제자리 걸음을 시켰던 점. 기술을 천시하는 것 때문에 일본 등으로 도공이나 여러 기술자들이 유출되었던 점도 있죠. 일본이 서양과의 교역이 활발하게되고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발전하게되게 만든 교역품이 바로 도자기였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끌려갔던 도공들이 일본에 남았기 때문이죠. 솔직히 조선에서는 상놈 취급 받으며 천시되는데 일본에서는 도자기의 신이시다!!! 이렇게 우대를 받으며 대우를 잘해주니 어디에 남고 싶을까요... 실제 조선인 도공 중에 그를 위한 신사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합니다.
유교가 병신이었다면 조선이란 나라를 500년간 못굴렸음... 유학자들은 인간답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를 주제로 탐구하는 사람들이지 지금 흔히 보이는 "아 니네가 뒤질것같아도 조상님 제사 못지내면 상놈이라니깐" "어르신 뵙자마자 대가리 안박으면 넌 상놈이다" 이ㅈㄹ 하는것들은 유학자가 아니라 걍 버러지임
기대승이랑 20살 가까이 차이났는데 사단칠정 논쟁을 하면서 이황은 기대승 얘기를 듣고 자신의 학설을 수정해주기도함. 현대 기준으로도 대인배인데 그당시 사람들한텐 성인으로 보였을 듯. 이황의 학파가 조선에서 주류세력이 아니였음에도 두루 존경을 받는 아이콘이었던 이유도 이런 곳에 있었겠죠.
이황선생님은 현대 사회에서도 크게 깨달음을 주시네요. '부부생활 중 사회생활은 문지방을 넘지 못하게 하고 사립문(오늘날 대문같은 개념)에서 맘 깨끗히 정화 한 뒤에 집안으로 들어가는게 맞더라'라는 말이 정말 인상깊네요... 부부생활하면서 사회생활 속 얘기를 안할수는 없지만 사회생활 스트레스를 집안에서 푸는 건 안하는게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존경스러운 분이십니다.
둘째 며느리 재가시킨 것도 사연이 있다고 하는데 밤에 이황이 과부가 된 며느리 방 앞을 지나가는데 며느리가 다정하게 남자한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상황을 확인해보니 며느리가 죽은 아들이 쓰던 베개에 죽은 아들 옷을 입혀놓고 말을 걸고 있었던…ㄷㄷ 며느리가 베개끌어안고 엉엉 우는 모습에 스윗황이 마음아파서 재가하라고 하셨다 하네요
굉장히 현명한 삶 사신거 같음 주변 평판 신경 안쓰고 본인이 베풀고 잘해주니 아랫사람들이 다들 존경심 갖고 더 잘해주는거 같네요 완전 선순환 인거 같아요 옛 말에 가정을 다스릴줄 알아야 나라를 경영할수 있고 천하를 다스릴수 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황 선생께선 이 말을 실천 하신거 같네요
사실 유교 때문에 망했다고 유교 욕하고 조선 욕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유교는 원래 그런 의미가 아님. 남존여비라는 것도 본래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음. 예를 들어 음양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위아래로 되었음 유교보단 유교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변질된 거라고 보면 됨. 마치 탈레반의 교리 해석 처럼.
@@kyuyoon4937 유교가 그렇게 변화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웃기게도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두 어르신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긴 함. 하도 학문적인 완성이 높아서 더이상 보완할 것이 없는 성리학으로 받아들이게 되서 그게 일종의 교조화 되어버린 것도 있고해서. 사실 학문에는 완성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학문을 추가하고 계속 보완해가야 하는데 기존의 성리학을 완성시켜버린 당대의 대 유학자들의 높은 학문적 완성도가 독으로 작용한 사례
@@별마을 일단 이황 = 사림의 영수입니다. 유학의 변질을 정확히 따지자면 사림의 집권이 문제가 아니라 양란과 경신대기근으로 인해 무너진 사회상을 어떻게든 다시 잡아보겠다고 예학을 강화하고 교조화 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중세시대엔 합리성에 기반하여 마녀사냥을 막던 최후의 보루역할을 하던 기독교와 성당이 근세에 들어선 마녀사냥에 앞장 서던 것이나 중세시대 땐 나름 진취적이었던 이슬람이 현대에는 가장 고리타분하고 교조적인 꼴이 된 것과 비슷하죠 사림의 집권으로 일어난 동서분당과 같은 사건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볼 수 있는 정당간의 갈등이거니와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겠다고 양쪽에 분쟁을 조장하여 그렇게 된 점도 있습니다. 또한 후기 조선 유학의 교조성의 대표가 되는 예송논쟁같은 사건도 말이 상치르는 기간으로 찌그락 대던 사건이지 사실은 조선을 관통하던 갈등인 왕권-관료-지주 vs 신권-선비-소작농의 정치대결의 일각이기도 했죠. 유학, 그리고 성리학은 그 스탠스가 어떻게 되든 '실학'이라 자신을 칭하며 일상의 차원부터 실행을 중시하는 학문입니다. 아무리 꼬장꼬장한 학파도 결국엔 실천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것이 교조화되어 꼬장꼬장한 행태가 된 것도 이용후생과 국가발전보다 무너진 사회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아서 국가 질서를 안정화 해야한다는 '현실적'인 판단의 결과인 것이죠 당시 조선을 한국으로 대입하면 전쟁이 연거푸 일어나서 민주주의건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이건 다 무너지고 미국이 나치화된 멕시코에게 완전히 점령당해버리고 세계에 갑작스런 대 보호무역 열풍이 불어오는 바람에 한국이 밥줄로 삼는 수출위주 경제에 '대기근'이 일어나버립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스탈린주의와 나치즘을 비롯한 전체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당시 조선 후기 유학이 선택한 '안정화'가 마냥 이상을 좇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겠죠?
말씀하신 성균관 카르텔이나 유교 탈레반으로 유명한 사람들은 사실 개혁적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황도 그렇고 유교 탈레반 끝판왕인 송시열도 여성 인권이라던가 서민의 삶에 대단히 개혁적인 인물이였죠 송시열의 고리타분의 끝판왕 사건인 예송 논쟁도 3년상이 아닌 1년상을 주장함으로서 왕권-관료-지주 vs 신권-선비-소작농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권력투쟁사에서 후자에 힘을 실어준것이니 말입니다
@@user-vz4vk8be2f 예송논쟁은 고리타분의 끝판왕이 아니라 정치알력의 끝판왕이죠. 당시 누가 정실 왕비로 인정되냐에 따라 다음 왕의 후계자의 명분도 생기고 그에따라 계파간 정치적 입지가 결정되는데 그 알력싸움이 대신된게 예송논쟁이잖음 즉 당시 후계자 명분 싸움이지 고리타분으로 넘길 일이 아님 왜 예송논쟁이 벌어졌는지 역사적 맥락을 살피지 않으신것 같은데
@@pign5229 유학적 측면으로는 일리가 있는 말씀이지만, 사단칠정 논쟁이 당시 성리학 논쟁의 전부가 아닐 뿐더러 사단칠정 논쟁의 당사자 역시 이황 vs. 기대승, 이이 vs. 성혼입니다. 이이가 이황의 학설에 반박한 것도 이황이 죽은 다음의 일입니다. 기대승도 이황과 학문적인 대립은 있었지만, 라이벌이라고 하기에는 연배가 한참 차이가 납니다. 사학계에서 보는 이황의 라이벌은 조식이 맞습니다.
학자로서 사변적이라는 선입견이 많지만 당시 농업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인 관개수로, 병법, 의술 등 다방면에도 당시 대가였고 우리가 실학자로 알고 있는 정약용, 유형원, 유득공 등도 퇴계학맥을 계승한 분들입니다. 오느날 퇴계 종택도 예법도 시대에 맞게 해야한다고 하여 명절날 차례를 간소화하거나 가족단위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고 들은적이 있어요.
@@_Punisher_ 당시 중국, 명은 미국이었으니 말이죠. 거기에 양란에 대기근으로 나라 뒤집어진걸로 더 해진거고요 만약 한국에서 전쟁 두번 일어나서 국토 박살나고 민주주의랑 자본주의 시장경제 박살나고 미국이 전체주의가 득세한 멕시코한테 멸망해서 전 세계가 전체주의가 되고 우리나라에도 전체주의 정치 세력이 들어온다치면 한국에서 온갖 학자와 명사와 정치가들이 어떻게든 안정화하려고 민주주의를 유일하게 계승한 국가랍시고 이론적인 민주주의 철학에 몰두하고 미국을 신격화하며 대한민국을 '소미국'이라 하고 자유민주주의적 메카시즘을 시전한다고 해서 그걸 마냥 '멍청한 짓'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요?
@@user-vz4vk8be2f 그런걸 사대주의라고 하죠. 더군다나 기자 조선설은 현재 부정되고 있는 학설인데 대학자라는 두분께서 받들고 계셨으니.. 더 우낀건 요즘 혐중 분위기 때문에 대체로 친중 하는 사람들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데 이 학자들은 칭송만 받고 있으니 코미디처럼 보이네요
꼰대가 아니라 마인드가 열어 있는 사람이잖아.. 진짜 퇴계 이황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다.. 소간zi 용안에 공부 잘하시지 낮져밤이에 밤에는 짐승이 되는 반전 매력에 쏘스윗이시지.. 진짜 다 가지신 분이다 이거 보기 전에는 그냥 천원짜리 지폐에 있는 유명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거 보니 생각이 달라지게 된다.. 현대에 오시면 진짜 인기 많겠다.. 그간 퇴계 이황님을 천원짜리 지폐 위인이라고만 생각한 소인을 용서하시옵서서
낮져밤이 천원 선생님 ㅋㅋㅋ 사실 유학 자체도 제대로 보면 당시에 이렁 생각을? 싶은 게 많죠. 흔히 알려진 유교 문화는 막상 일제 시대 악습의 잔재일 뿐인 경우가 많죠... 유학을 떠나서 당대 시라던가 일화를 봐도 지금이나 예나 한반도의 유쾌한 사람들 중 존경할 점도 많은 이황 선생님입니다!
사실 이 영상에 소개된 이황과 관련된 일화들이 거의 다 야사라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 있긴 하지만, 저게 설령 야사라 할지라도 그만큼 이황이 당대에 엄청난 존경과 사랑을 받은 위인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겠죠. 애초부터 한참 먼 후배인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했던 것 자체만으로도 이황의 인격과 융통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밤일부분은 찾아보니 구비설화니까 즉 야사라 믿거나 말거나고 집안이 망해서 유아퇴행 온아내(조부가 연산군 불쌍한 우리 엄마 ㅠ 난리때 연루되어 기록된 집안이라 출신은 확실함)를 들여서 보살핀거랑 족보에 적서차별 금한것, 그리고 이미 재가 금지법을 시행한 후인데 재가를 허한 것은 사실인듯해요
저게 진정한 학자 아닌가 싶습니다. 개념과 체계는 분야를막론하고 어느것이든 궁극적으로 실존과 실재를 보살피기위한 도구임을 알고있었기에 충분히 설명되고 규명되지 못한것에대하여서는 그무엇도 양심보다 우선될수없음을 꺠닫고 제대로 실천한, 진정으로 행복의길을 걸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