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의 판타지 사전님이 고정함 오랑의 판타지 사전 1개월 전(수정됨) *본 영상은 시리즈 중 25번째 영상으로 이전 영상들을 먼저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본 영상부터 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 1. 칼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hfEzUsx3gbc.html 2. 창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KELXTgQmVqI.html 3. 활/석궁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UipVIHOjxr0.html
중국 역사상 아이러니 하게도 문화 정치 경제 사회면에서 가장 발전한 시기 웃긴건 관료들이 더럽게 부폐 했는데, 명재상 및 뛰어난 관료 판관이 가장 많이 나왔던 시기가 이 시기라 국민들 삶은 오랑캐 침략 빼면 살만 했음. 더욱이 무까지 천시 했는데, 반발심으로 정말 다양한 무기와 무술이 나왔던 시기도 송대였고, 뭐 결국 이 때 중국의 무는 끝이 나버리지만 지금 중국 무술은 그냥 체조임
송나라가 약골이라는 것도 일종의 편견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송나라는 시작부터 주요 요충지인 연운 6주를 내주고 시작했습니다. 한국사로 이에 비유하자면 고려가 의주를 요나라에게 먹히고 거기를 도저히 뚫어낼 수 없자 부국강병의 차선으로 여진정벌을 하다가 그것도 실패해서 침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곳이죠. 요나라의 전신인 거란은 송이 중국 통일하기 이전부터 강력한 세력으로 군림했고 연운 6주까지 먹자. 거기의 영토를 이용해서 평생 유목민족이 이루지 못한 식량 자원의 확보나 선진 문물의 확보까지 이루어내죠. 게다가 지금까지 만리장성이 중국과 유목민족의 문화권을 구분해주었는데 연운 6주의 상실로 이것이 의미 없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중국사의 수많은 유목민족을 상대한 통일 왕조 중에서 가장 불리한 조건에 놓인 것이죠. 그래서 요충지란 요충지는 다 내어준 상태인데 송의 수도 카이펑은 발달에는 유리하지만 중간에 별다른 요새와 천연 방어물이 없어서 더더욱 불리했습니다. 물론 이래도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송을 약골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계시겠지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몽골을 상대로 수십년을 버텼고 몽골이 '전력'을 기울여도 수십년 동안 이 송 하나를 넘지 못했다는 것은 엄청난 결과입니다. 당장 남명이랑 비교해봐도 각이 나오죠 중원을 모두 잃고 사실상 국토를 반절을 잃어버린데다가 화북지방에 쌓아둔 인프라와 인력을 모두 잃은 남송이 이 정도의 전력을 보여준다는 것을 생각하면 왜 약골이라고 평가 받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몽골의 진출군 중에서도 겨우 일부분에 유럽이 털려버린 것을 생각하면 과연?. 고려는 그 일부에서도 일부에 전토가 털리고 결국 항복을 했습니다.
연운 6주가 없는 상태인 송이 얼마나 고심을 했냐면 수도와 요 사이의 별다른 천연 지형물과 요새가 부족하자 아예 평지다가 나무를 미친듯이 키워서 나무숲으로 자연방어물을 삼을 생각까지하고 성공합니다. 물론 이는 송의 막대한 인력과 경제력으로 커버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도 이미 요나라 및 이민족은 연운 6주의 상실로 공자의 입장에서 배후를 걱정없이 중원 곳곳을 다 쓸어버릴 수 있으니까 모든 곳에 요충지를 세울수도 없고 요충지를 세워도 돌아가서 침입하기도 하고 송은 그 어떤 통일 왕조도 경험하지 못 한 어려움에 빠집니다. 거기다가 서쪽에선 서하까지 세워지니 군대를 더 나누어야했죠. 더 골치아파집니다. 서하도 고려 이상으로 병력을 징집하는 병영국가의 성격이 강해서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였습니다
송의 군사력이 약한 이유는 당의 절도사 (지금의 도지사 + 군사령관)의 횡포와 안사의 난이 원인이었죠. 그래서 당이 멸망한 후 5대10국 후주의 절도사였던 조광윤 즉 송태조가 쿠데타를 이르켜 송을 건국했죠. 그런데 송태조가 절도사 출신이니까 절도사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문치주의를 실시해서 황제의 권한을 강화했죠.
근데 2차 세계 대전에서 군복 멋진 놈이 무조건 진다는 미군은 누가 말한건가요? 오히려 패튼 장군은 어떠한 상황에서 군복은 멋있고 정갈하게 유지하도록 했고 행군할 때는 언제나 제식을 유지하도록 했는데 오히려 미군이 군복을 멋지게 유지하도록 한 군대였고 그 정신이 지금의 한국 군에도 적용 되어서 밤마다 군화 닦았었는데 ㅋㅋㅋ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 장군 중 한명도 갑옷은 무조건 멋지게 만들어서 왜군들이 그 모습만 보고 도망가 승리한 전적이 있는데 군복이 멋있어서 이긴 사례가 생각보다 많네요 ㅋㅋㅋ
중국 배경 무협지의 시대 대부분이 바로 송나라 시대죠. 사조영웅전을 시작으로 한 우리가 영웅문 시리즈로 기억하는 진융의 무협지도 남송이 배경이고, 그리고 수호지도 바로 남송 시대고요. 수호지에서 보면 갖은 무기 다 등장합니다. 아마 수호지 하나만 아이템으로 삼아도 여러편 영상 만드실 수 있으실 겁니다. 참고로... 금병매도 남송이 배경이네요...
문혁은 핑계 입니다. 일단 대륙이 현대적 의미의 고고학 과 역사학의 뼈대가 잡힌 때가 1990년 대 입니다. 90년대 말 대륙을 다녀오셨던 지도 교수님이 대륙의 소위 석학들과 교류하신뒤 내린 결론이 사실 국내 대학원생 수준의 지적능력 과 연구 성과를 가지고 이름 팔이를 하는 자들이 넘쳐 나는 곳이라 말씀하셨습니다. 1972년 장사 마왕퇴 발굴도 지금 시점에서 보면 도굴에 가까울 정도로 엉터리 발굴이었고 당시 일본 고고학계의 몇몇 연구자들의 헌신적 노력과 지원이 없었다면(대륙 학계는 부인하지만 당시 일본학자들이 현지에서 급하게 작성된 보고서 및 조잡하게 촬영된 사진을 근거로 유물 분류 및 편년 추적을 지도했고 보존법 까지 전수했습니다.) 현재의 아쉬운 성과 마져 잿더미로 사라졌을 지 모를 일 입니다
@@PrettyT-rex 일본은 기록의 역사 자체가 짧은편이라 그렇습니다.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전란이 많아 기록 유실이 많았고 삼국을 통일한게 신라였던게 큽니다. 지금처럼의 민족성이 없던 시대라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는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애초에 역사서 자체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구요. 본격적인 사서의 편찬은 고려시기부터 이루어지는데 역사 연구 자체보다는 목적성에 의해 시작합니다. 김부식과 일연 스님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대표적이죠. 특히 삼국사기는 누가 신라계 아니랄까봐 신라 위주로 작성되었고 고구려와 백제 부분의 내용은 비교적 적은편에 속합니다.
송나라는 정치적 안정을 달성하고 문화나 과학기술이나 경제면에서 확기적으로 발전을 이룩한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계 최초로 군장비를 제식화시켰다고 하더군요. 무기도 개량을 거듭하여 다양한 노와 화약무기의 개발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다만 아직 전장의 주역인 기병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화북은 기병에게 유리한 지역이라 고전을 면치 못했던것 같습니다. 송나라 군대가 특별히 부패했다면 당시 도덕성이 충만한 신유학자들이 가만히 있었을까요? 개봉성이 금나라 군대에 포위되자 도적 때까지도 구원하러 왔다는 사실은 조정이 명분과 신뢰를 잃지 않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닐까요?
@@Orang_Fantasy 합리와 공정과 비판으로 무장한 신유학자들이 집권 세력이며 실제 관료였기에 군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한 이후 송나라 이전까지 제대로된 관료 체계도 부재한 상황이라 군은 반독립적 군벌이기에 송대의 군과 비교 자체가 어렵지 않을까요? 송의 군대가 상대적으로 약체였던 것은 알고 있으나 다른 시대에 비해 부패가 심했다는 것은 잘 납득이 않되네요.
1.경제력이 좋아도 없는건 없는것이다. 미국이 돈이 많다해도 중국 제조업 없이는 힘든것 처럼 경제력이 있어도 없는건 없는것 2.당시 수송능력으로는 말이 답인데 말이 없으니 나아가도 유지 하기 어렵다. 설사 말을 사도 적들에게 사야한다. 적이 쉽게 줄까요? 안줌 3.국경은 길고 지킬게 많다. 통신도 부실하다 말이 없으니 멀리 나아가지를 못한다. 따라서 주둔해야한다 근대 주둔을 해도 도시와 도시 사이의 땅은 적의 것이다. 그래서 비효율적이라도 도시와 도시사이에 성벽을 잇는것이다.
중국땅에서 그나마 대규모 말을 키울수 있는 지역은 초원에 가까운 만리장성 지역부근 뿐입니다. 다른 지역들은 초지가 없고 평지는 죄다 논 밭으로 만들어 버렷기 때문이죠. 대량의 말을 기를수 있는곳이 만리장성 넘어서나 만리장성 바로 안쪽 지역일 뿐이니 화북을 잃은 송은 장강아래 지역에서는 키울수 없었습니다. 숲이 울창한데다 습지 늪 또한 많아서 소규모는 몰라도 몇만 마리정도의 말을 키우는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죠. 인위적으로 초지를 만든다해도 장강이남은 아열대성 기후라 비만 왔다하면 다른 식물들이 사람 허리까지 자라니 무리엿습니다. 이러니 대규모의 말을 만들수 없고, 말을 대규모로 키우거나 파는곳인 북쪽은 전부 적이고 서쪽으로는 티베트를 넘어서 페르시아 지역 뿐인데 티베트 고원을 넘어서 수만마리의 말을 수입할수 없으니 돈이 있어도 못사는것이죠.
당나라 시절 군마 생산지역인 농우 지역 상실 및 오르도스 상실 및 삼국지 원소 와 공손찬 땅인 하북 상실. 거기에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사료 먹이면서 키운 군마들은 초원에 풀어놓은 군마들을 이기지 못 합니다. 송군이 아무리 훈련 해도 이들에게 좋은 군마를 지급 못 하면 망합니다. 그러니 기병을 족쳐야 하니 각종 노궁을 만들어 버리지요
@@크루-g3e 제 생각은 결국 노동력의 낭비로 인한 생산성 저하에 따른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무기와 군복 같은 물품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결국 가성비입니다. 단순히 성능을 위시한 갑옷이 아니라 외양이 화려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즉 성능을 확보 하고서도 여유가 있거나 남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나타내고자 하는, 과시하고자 하는 성격이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외양이 화려해진다고 성능이 덩달아 뛰어나지는 것이 아니며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은 크게 늘어난 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은 과시적 성격의 화려한 갑주를 보고 본인도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것을 얻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창이 일반 병사들의 주 무장이 된 이유도 결국에는 가격 문제임을 고려하면 화려한 갑주는 그야말로 노동력이 비효율적으로 낭비된 물건입니다. 이게 단순히 지휘용 장수 수준에서만 머무는, 소위 극소수를 위한 갑주가 되면 모르겠으나 전반적인 문화로 퍼져 백인장, 십인장 급의 현장 지휘관까지 퍼졌다면 되면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당장 우수한 갑주 몇 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노동력을 화려한 갑주 하나를 만들기 위해 소모하게 된 꼴이 되었을 테니까요. 상공업이 발달해 경제가 부강했다는 송나라였다고 하니 저러한 이유로 인해 망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을 까 생각해봅니다.
@@Orang_Fantasy화학이라는 학문은 연금술에서 시작되어 화학으로 정립시킨 것입니다 이 위대한 업적은 우마이야 왕조 때와 아바스 왕조 때 중동의 무슬림 학자들이 이룩한 것입니다 아랍.페르시아의 흑색화약이 중국에서 개량되어 몽골의 세계 정복 전쟁 뒤로 전세계에 퍼진 것입니다
@@Orang_Fantasy 중국의 3대 발명은 고고학계에서 잘 인정되지 않습니다 동아시아 자체가 구조적으로 고립된 변방입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찾아볼 수 있지만 반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영향을 끼쳤다는 증거는 전혀 찾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재료의 입장에서 송나라의 철기제작에 석탄의 도입은 철기의 입장에서는 시련이였습니다. 지금이야 석탄을 탈황작업을거쳐 코크스로 만들어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탈황작업이 없이 사용되어서 이전에 비해 황이 철에 들어가게되고 황화철 종류는 철의 품질에 악영향을 줍니다. 제대로된 석탄을 코크스로 만들고 코크스를이용한 제철은 18세기에나 도입됩니다. 송나라에서 거의 천년후죠,. 그전에는 목탄이 좋은철을 만드는 방법이였죠. 아니면 황이 극단적으로 낮은 저황탄이나요. 다마쿠스강의 비밀이 철에 있을것으로 십자군들은 생각했지만 지금은 딱히 철에 비밀이 있다기보다 제련법에 있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중하나이기도합니다. 이런 다른문제지만.... 해서 송나라 멸망의 원인을 철의 품질저하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양적팽창과 질적하락으로 보는것이죠. 군납비리.. 또한 거푸집을 사용한다는 것은 완전히 금속을 액화시킨다는것을 의미하는데 철을 두드리는 단조가 초기철기에 유행한 것은 철의 액화가 어렵기때문에 내부에서 공기를 빼는 작업을 위해 단조가 필요했던 것으로 좋은 철은 굳이 이 작업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죠. 모양을 잡는것 이상으로 철의 강도를 위해서 이 작업이 필요한데......뒤집어말해서는 이작업을 극단적으로 많이 하면 질낮은 사철에서도 쓸만한 칼을 만들수 있기 때문에 신병이기의 전설이 있는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예로는 일본도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송나라가 석탄을 사용해서 철생산량을 늘린 것은 맞다. 그러나 석탄을 사용하는 바람에 철기의 질적하락을 야기하고 부실무기의 생산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도 많다.(여기에 부패한 송의 군납까지 맞물리면서 송의 군사들이 썻던 철기는 이전 왕조에 비해 좋은 철기라고 보기어려웠다) 최고의 철기를 쓰면서 바보같이 원나라에게 망했다고 보기어렵다.... (거꾸로 원나라 검과 부딪치면 칼이 부러지는 일도 벌어졌을 겁니다. 네 우리가 오해하는 철검과 부딪친 청동검처럼요)... 사족으로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청동기 철기 교체기에 청동검이 철검에 부러졌을거라는 것과는 다르게 오히려 청동기는 구부러지기는 쉬워도 초기철검에 비해 쉽게 부러지지않았고 제련기술이 부촉한 철기에 비해 더 좋은품질이였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다만 경제성이 너무 떨어져서 사라졌다고 보는게 요즘 견해입니다.
일반적인 석탄은 당시 기준으론현신적인건 사실이나 무연탄이든 유연탄이든철을 부식하는 인과 황에 발생으로 좋은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석탄을 코크스로 만들거나 숫을 사용 해야 했을겁니다 즉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하였으나 결국엔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숫이 필요 했겠지요 이건20세기 들어와서도 마찬가지 였으며 주철대포를 만드는데도 큰걸림돌 이였으럽니다...
칼의 전성기는 중국의 민간무술이 발전된 이후라고 생각합니다. 당랑감 태극검 곤오검 등등 펜싱과 유사한(특히 사브르쪽) 면이 많습니다. 우슈에서 검을 찰랑거리는 연검을 사용하고 연무용 동작이라 실전성이 없다 라고 하는데 우수는 몰라도 문파 쪽 검술은 많이 다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문파들은 찰랑거리는 검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또 가벼운 검도 아니고요.😢 그리고 스포츠화에 대해 얘기해 보자면 실제로 격검이라는 게 있긴 합니다. 예전에 마현달이라는 사람이 산타와 격검을 둘다 우승해서 유명해진 적도 있구요. 하지만 룰 문제때문에 검토와 펜싱의 어중간한 모습이라 아직도 문제가 많습니다.
당시 경제규모는 산업혁명 오기 직전 까지 갔습니다. 기성복과 문수 별로 맞춤신발이 시장에 판매 되었고 밤에 음식점에서 외식이 가능하고 수도였던 카이펑은 100만 이상 인구를 유지했죠. 직조에 수력을 사용하고 이 사이트에서 지적한 것 처럼 제철에도 수력을 이용해 대량생산을 이룩했죠.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외세의 침입이 아니였다면 인류 최초의 산업혁명은 송나라가 이뤘을 겁니다. 문제는 그 외세가 몽고였죠.
좋은 무기, 많은 군사! 강력한 군대를 위한 기본이다. 허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좋은 무기로 무장한 수 많은 군사들도 이들을 어떻게 운용할 지 전략 전술이 부족하다면 그냥 당나라군대다! 몽골군이 군사들의 머릿수로 아시아를 정복하고 유럽까지 공포에 떨게 한 게 아니지. 고구려가 엄청난 쪽수를 자랑하는 중국을 맞아 비록 힘겨웠지만 고수전쟁, 고당전쟁에서 승리한 이유는?
중국의 무술,무기의 발전은 송대가 아니더라도 많았음 애초에 중국의 한,수,당대 부터 중국의 땅은 개방적이여서 다른 민족들의 침략을 받기 쉬웠음 특히 유목민족들의 침략이 잦아 한나라와 당나라때는 그냥 정벌을 하기도 했음 하지만 송나라는 많이 달랐음 당나라는 군사력이 강하였지만 오히려 그게 독이되어 지혼자 멸망했음 이것을 직접본 송나라는 군대의 비중을 줄였고 관료들도 무관대신 문관을 대거 등용하고 혜택도 많이 주었음 그로인해 경제력과 문화,문학,학문등이 매우 발전하였음 뿐만 아니라 외교나 교류도 잘하여 국제적 ㅆ인싸였음 그래서 당시 고려,월지와 같은 군사력 측면에서 강한 국가들과 동맹을 맺어 방어 하였고 돈으로 딜을 걸어 한방에 해결해 버리는 진정한 값부의 힘을 과시하기도 하였음 하지만 내가 무기쪽으로는 잘모르기 때문에 송대에 칼이 발전했고 안했고는 잘모르지만 역사적 흐름으로 봤을 때는 송나라때 무기가 대거 발달됬던 시기라는게 나로써는 이해가 되질않는다
고려 시대때가 국가방어에 있어서 더 효율성이 좋았음. 해당 지역 호족이 사병을 키우는 방식 자체가 일반 모집병하고 질적 차이가 매우컸음. 게다가 한반도 북부는 산악지형이 많았고 아무리 밀고나가도 결국 보급선이 길어져 한계가 생김. 그리고 고려 모토가 고구려의 계승이자 회복이라 명분상 사병을 모집하고 훈련하는데 문제가 없어서 호족들이 기를쓰고 병사들을 긁어모은점도 있음. 하지만 일부 호족들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너무 쌔져서 정치적인 불안은 항상 있었음.
@@Orang_Fantasy 원래 방어전이니 국내에서 싸우는 건 너무 당연합니다. 나라에 산악 지대가 너무 많아서 변경에서 지연전을 펼치면서 후방 기지화가 되기도 했다지만, 성을 다 거치는 전략으로는 우리 역사상의 국가들에게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늘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경우를 보면, 전격전 느낌으로 순식간에 수도까지 들이치는 방식을 썼을 때입니다. 처음부터 그래야만 성공하죠. 수도 그걸 알았지만, 정공에 열을 올리다가 대부분 소진된 다음에 별동대를 꾸리거나, 수군이 공에 눈이 멀어 따로 노는 통에 대패한 것이죠.
@@rkfjfjdnxnzjajk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권도 결국은 해악이 드러나 혁명으로 이어졌고 로마는 교묘하게 제1시민이라는 이름하에 제정을 펼쳤기에 황제권이 그리 강하지 않아 툭하면 황제가 교체될 정도였고 명나라 당시의 유럽은 이제 막 대항해시대로 들어섰기에 동아시아에 소규모 병력밖에 투입 못해 전면전을 펼치기 어려웠습니다. 그럼에도 동일 병력이 교전하면 충분히 중국, 일본 병력을 부수고도 남았지요.
漢대에는 월도가 없었습니다. 후한은 물론이고 위촉오조차 뒤안길로 사라진 시점에 쓰인 진수의 《삼국지》에서도 월도는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趙宋 때에야 만들어진 월도가 후한 때 이야기에 등장한 것은, 원말명초 나관중의 《삼국지 통속 연의》가 집필될 무렵의 극화에서 추가된 것입니다. 즉, 관우의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한 아이템으로 주어진 거지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데 접하는 게 늦으셨네요.
@@이휘영-l7m 漢자도 漢족이 발명한 문자가 아닌데 자기이름 박아놓고 훔친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다민족국가가 아니지. 만주족이 넓혀놓은 땅을 漢족이 넓힌것 처럼 사기를 치지. 그렇다고 현재 漢족이 장악한 공산당은 만주족의 적통을 이은 것도 아니고. 만주족, 몽골, 신장위구르, 티벳, 홍콩, 대만은 독립을 원하지. 중국 분열이 되면 漢족은 테러당하기 딱 좋은 민족이지.
송나라와 조선은 군사력을 포기한 대신, 내적 통일성을 중요시했습니다. 이게 뭔말이냐 근대 이저, 통신과 교통, 행정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에 국가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안보체계는 봉건형태의 군사체계입니다. 즉, 동네의 영주가 해당 지역의 군인들을 징발해서 독립적으로 방어를 담당하는 형태의 체계가 가장 효과적으로 외부 적으로부터 지방 지역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죠 근데 문제는, 이 방식으로 하면 자꾸 지방에 군벌들이 생겨서 오히려 오랑캐들보다 더 위혁적으로 중앙정부를 위협한다는 거죠. 따라서 중앙의 행정 체계를 강화하고 지방의 독자적 군사권을 없앤 나라가 송나라와 조선이었죠 국가적 통일성은 어느정도 효과를 봤지만, 기존의 효과적인 봉건 군사체계를 흔드는 바람에 외부의 침입에는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습니다.
@@rkfjfjdnxnzjajk 조선도 바보가 아니라서 여진족 근처 지방은 봉건 비스무리하게 관리하긴 했는데 조선 전체 국력으로 보면 훨씬 못미치는 군사력임 함경도 쪽 정예부대 빼면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도 없었음 임진왜란 때 신립 기마대 작살나고 멘탈 나간 이유가 그 함경도 군대가 터져서 그럼 일반 농민군 100만 모아봐야 훈련도 제대로 안되어있어서 식량만 축내지 전투력 의미없음 반면 임진왜란 때 일본이 끌고온 15만 군대는 대부분 전투 부대였음
@@긱테도 임진왜란 때 전근대에 전래가 없는 해상원정으로 정예27만명이 상륙했고 (동원인원은 48만명) 조선은 3만 5만정도의 소규모 침략정도로 예상했기에 초반에 대응 제대로 못하고 쭉 밀린거지 임진년 6월부터 조선군이 전열 가다듬고 대규모 병력 투입하니까 일본군들도 피해크게 입고 조선군이 이기는 전투도 훨씬 많았는데 개소리를 하노 병력투입도 손실입으면 계속해서 육상에서의 주요 전투도 의병이 아니라 대부분 정규군이 이긴건데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