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너무 잘 들었습니다 니체를 사랑하게 되었네요 모든 것을 받아들여 정화시켜버리는 바다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고통과 고난을 피하고자 할 때 힘들었는데 받아들이면서 더 편해져가고 있는 중에 니체를 들으면서 큰 위안을 받습니다 초인이 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꿋꿋이 삶을 받아들이면서 살아야겠네요 감사합니다
방송 너무 잘 보고 있습니다~ 책 혼자 읽는거 너무 외로웠는데 일당백이랑 같이 읽으면서 텍스트가 더 풍부해지는걸 느낍니다. 팟캐스트때부터 생활 속에 항상 함께하는 일당백이에요! 정박님은 얼마나 책을 많이 읽으신건지 내공이 장난 아니시네요 ㄷㄷㄷ 오늘 방송 보면서 전에 읽었던 니체를 다시 꺼내봅니다....... 모집인원 열 명에 포함시켜주세요 !! ㅋㅋㅋㅋ
맞긴한데 착하고 행복하게가 아니라 어떤 짓이든 행복하면 됩니다. 결국 착함은 개인의 자기기만(위선)에 지나지않고 악함 역시 오만에 지나지않죠. 살인은 악한가라는 도덕문제를 보았을때도 살인 자체가 악이라면 우리 모두의 선의가 살인자를 간접적으로 도왔을 때 우리 모두는 악한가 착한가? 착하다면 살인을 간접적으로 도왔는데 이게 착할수가 있다고 대답할수 있는가? 이는 자기기만이 아닌가?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을 위한 선함이 세상에 있어 어떤의미를 가지는가? 생각해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 행위가 악할때 우리는 악함의 정도에 있어서 판단하죠. 흔히 1명을 죽인 죄와 100명을 죽인 죄 어떤게 더 악한가에 대한 문제가 돼버리죠. 이런 선악의 이원론적인 그러면서도 계층적인 구조를 부수기위해 우리는 본질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이 과정에서 즐겁게 살 수 있도록 자기긍정을 하는게 행복의 최종적인 삶이라고 니체가 생각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나르시시즘과는 달라야겠죠. 자신을 긍정하는거지 자만에 넘쳐 고통을 벗어던졌다는 환상은...뭐랄까 사이비 불교네요. 생각할 점이 많아 보이네요.
@@minjae92 어떤 일이든 행복하면 되는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위선은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자신의 양심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선한 선택을 하는것이 진정한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말한 긍정은 현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저는 이해했어요. 현재의 내가한 행동은 과거의 나를 변화 시키기에. 또한 과거의 나의 행동의 지금 현재에서 자신이 그 과거를 돌아봄으로서 현재에 영향을 미치기에 삶은 새로운 인식의 연속이고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손을잡고 미래로 나아간다고 저는이해햤어요 이해했어요
니체에게 선악은 의미가 없는 것이지만 '선과 악의 절대적 구분은 없고 다만 행복을 느끼면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악의 저편에서 자기긍정을 할 수 있는 것은 강자 뿐입니다. 어떤 짓이든 자기 긍정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건 실상은 자기 기만이요 자기 마취일 수도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구요. 자신만이 알뿐.) 어쨌든 약자가 하는 긍정은 자기기만입니다. 힘이 없는 자는 자기 긍정을 할 수 없고 자기 부정과 강자에 대한 원한 감정과 노예의 도덕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니체는 행복을 추구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니체의 현세의 긍정과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현실에서의 행복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연성과 결정론이 지배하는 이 현세를 니체는 운명이라고 합니다. 이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지 말고 의식의 자유를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가치를 창조하는 삶의 예술가가 되라고 말합니다. 가치를 창조하는 삶을 살아라는 말입니다. 이는 행복을 추구하라는 말과는 전혀 다른 말입니다. 니체의 삶이 행복한 삶이었나요? 가치를 창조하는 삶은 행복한 삶이 아니고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힘이 있는 자만이 가치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삶을 놀이로 인식하고 명랑하고 쾌활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려고 앞부분 읽었는데 왜 자기를 경멸하는지, 이해가 안됐는데 위버멘시가 되기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죽이고 새롭게 태어나야한다는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미녀님, 제가 하고싶은 질문들을 많이 해주니 넘 죻아요. 모르는 건 당근 질문해야하는데 보통은 창피해서 못하잖아요.
게으름이 어때서요~^^ 노예근성에서 우리는 성실을 강요받고 길들여진것 일수도~^^ 성실은 자발적이어야지 억지는 악의 발로에서 나오는 것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몸과 마음에 메시지를 무시하지 말라는 말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낄수있어야 타인도 그리할 수있다는 점 고로 그것이 나의 기쁨으로^^
차라투스트라 읽어보려고 합니다. 현재의 나를 계발시키고 계몽시켜주는 것은 쉽게 무언가를 키거나 누구나가 말하거나 혹은 그렇게 행하는 간편한 단체험이 아닌 영겁의 시간을 자신과 대면하고 부정하며 자신을 얽매는것과 투쟁을 한 후에서나 최종적으로 돌아가 본연의 자신을 대면하여 느끼게된바를 자신 마음가는데로 쓴 이시대 대중문화의 일축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중 하나인 제가 반드시 읽어보아야할 자기계발서가 바로 이 차라투스트라라고 마음에 강하게 와 닿았기 때문에라도 쉽진 않겠지만 저 또한 끝까지 읽어보려고 마음먹습니다. 니체의 이런 경구들을 이제서야 알게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앞으로도 채널 구독하며 하나하나 함께하겠습니다.
@@user-ut6ut4xg4n 니체 - '초인'과 '노예'라는 두 개체를 두고 상대적인 가치 기준을 부여하며 초인으로 거듭나라고 함. 즉, 상대방보다 더 우월해지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얻기 때문에 우월감에 빠짐 장자 - 인생은 소풍처럼 놀다가는 것이고, 니가 잘났니 내가 잘났니 따위는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함.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 붓따(장자의 확장판) - 우주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라고 칭함), 나 혼자 잘났다라는 것은 있을 수 없음. 따라서 겸손함을 갖고 평화롭게 살자. 비트겐슈타인 -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 한다"라는 어록. 즉, 어떤 현상들에 대해 가치 평가를 두지 말라는 의미로,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다들 자기 필요에 따라서 갖가지의 철학을 받아들이며 사는것을 존중하라는 뜻.(가령 님이 무신론자이고 종교를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이만~큼이나 있어도 그게 종교에서 삶의 안정을 느끼는 상대방의 마음을 뭉갤 수 있는 합당한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
정말 정박님의 탁월한 견해와 해박한지식..정미녀의 허를 찌르는 질문들..정영진씨의 넉살들 절대 정면카메라를 응시하지않는 시선은 늘 아래로 비껴거는 영진씨.. 이 세분들 조합 어찌 출발되었는지 진심 궁금하네요. 니체...짜라트스트라의 입을 빌려 니체의 생각을 쓴책이라고 보면될까요? 근데 왜 짜라투스트라를 콕집어 책 제목으로 썼을까요?
니체의 교묘한 표현 방식이 아닐까요? 그 사회 국가에 편만한 지적성향, 흐름, 보편적인 진리라 간주되는 인식들을 제3의 인물의 등장을 통해 ,적어도 내가 말했다가 아닌 그가 말했다 라고 멀리 떨어져 이야기 함으로 직접 닥쳐올 무거운 시선과 반응을 가볍게 덜어 내 보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네요
현재가 과거를 바꿀 수 있다.란 인식은 자연계의 법칙과 원리를 부정하는 것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과거가 자기 혼자만의 과거라면 현재의 자기를 위해서 얼마든지 바꾸어 해석할 수 있지만 타인과 연결된 과거라면 과거의 현재에서의 재해석은 과거의 심각한 왜곡이 될 것이다. 세계는 나 혼자만의 세계가 아니라 수많은 타인과의 직조가 이루어낸 현상인 것이다. 이 사람의 철핰은 궤변이다.
1:30:40 니체가 강조했던 것: 근대를 살아가는 개인이 어떻게하면 자기의 주체가 되느냐, 내가 스스로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계에 잡혀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명확히 알기. 자기의식, '나는 21세기의 한국사회에서 이런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내가 영향을 받고있다'를 인식하는 것과 다르게 '내가 생각하는 것이 인류보편의 진리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유치한 행위, 극복이 안되는 인간으로서 초인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20대에 읽으면 감탄하게 만드는 책. 40대에 읽으면 시시한책 60대가 읽으면 유치한책... 읽으면서 "신은 죽었다" "초인은 누구이고 어디있나? "나는 무엇인가" 대해 생각하며 찾으며 잃어보세요. 그리고 크리스챤이면 "선과악의 저편에서" 잃어 보시고. "신은 죽었다." 까뮤-- 신이 없는 세상에서 어떻해 살아 갈것인가? 니이체--신은 죽었다. 신이 없는 세상을 누가 이끌어 갈것인가? 짜라투스트는 죽은신 대신 세상을 이끌고 갈 초인을 찾으러 다님 시장.깊은 산속.거리.등에서 초인을 찾으러 다니지만 세상을 이끌고 갈만한 신을 대신할 초인은 없음을 깨 닳지만 인간의 내면에 신이?...... 왜 초장부터 명제가 신은 죽었다 라는 단정때문에 내면에 살아있다라고 못함. 하지만 존재한다는 .... 실존 철학. 책의 제목이 짜라투스트 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니라 "신을 죽였다" 라는 의미와 상징성 누가, 왜, 무엇때문에? 그당시 신을 죽였다 라고 했으면 니이체는 파문 내지 죽임을 당했을것. "선과 악의 저편에"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니이체의 내면을 알게됨.
@@junginpark5479 칸트헤겔니체마르크스등등 이당시에 급속도로 과학문명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던때고, 철학자는 자연과학자들 보다 뭔가 심오하고 어려운 학문을 하는 사람이다란걸 과시하고 싶고 꿀리고 싶지않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책을 집필 했던 시대였던 것 같습니다. 사실 직역해놓으면 별거 없거나 쉬운 내용인데~ 그놈에 철학자들에 허영이 돌리고돌리고 비꼬고비꼬고 하는 수법들이 극도로 발달 했던 시대였던것 같습니다.
니체에게 묻고 싶네요. 인간 스스로가 자신이 진정 원하는게 무엇인지 알 수 있나요? 그 원함의 실체가 실존과 실현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당신의 철학에 따르면 규제나 도덕 종교가 강요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주인의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상황판단과 가치판단을 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본인 스스로 원함을 가지고 실행할 수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이 얼마나 가능할까요? 자발성이 충만하지 않거나 부재된 인간의 가치판단과 행위는 인간이 초인이 되는 것에 전혀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 매순간의 사색과 행위에 자발성이 늘 부여되는 삶을 살 수 있나요?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기에 남과의 비교가 아닌 자신과의 비교라 할찌라도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아짐을 척도할 수 있는 건가요? 아니면 자신 스스로가 그렇게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관념적인 것일까요? 스스로 노력하고 긍정적인 발전을 하는 것에 훌륭하다고 동의는 하나 그렇게 초인이 되는 삶을 살다가 넘어지게되면 초인에서 인간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인간은 늘 새로운 초인이 될 수 있는 존재인가요? 인간 스스로가 노력할 수는 있지만 영원히 유지 될 수 없는 존재인데 될 수 있다고 믿는 당신은 스스로가 초인이라는 교만과 위선의 가면을 쓴건 아닌가요? 영겁회귀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의 느낀 신의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닌 것 아닌가요?
6번째 보고 있어요.ㅎㅎ 권력의지를 듣다가 사피엔스의 인류통합 부분이랑 연결고리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영겁회귀를 듣다가 갑자기 닥터스트레인지의 동그라미 모양 주문을 외우는게 생각났어요. 그 동그라미가 영겁회귀를 의미하는건 아닌가.....갑자기 막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
저는 낙타가 은유하는것이 짐을 지고 맹목적으로 움직이는 노예의 삶을 표현했다고 생각했어요- 그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선 사자의 용기가. 결국은 아이와 같은 해탈의 경지로.. 이렇게 받아들였는데 오히러 낙타도 초인에 대한 하나의 긍정적 표현이었군요;; 잘못 이해했네요 그동안
초반에 차라투스투라가 진리를 깨닫고 내려오는곳은 산이죠. 녹음이 우거지고 샘이 솟고 온갖 대지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그에 비해 낙타는 뭡니까. 주인이 시키는대로 등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도덕, 선악관, 신의섭리 등) 시키는대로 생각없이 가는 존재죠. 배경은 생명력이라고는 없는 사막이고요. 낙타는 종교관, 초월적인 도덕관에 사로잡혀 자신의 생을 누리지 못하고 사막과 같은 곳에서 스스로 노예가 된 사람들을 지칭하는게 맞는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