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스트 The Scythians are generally believed to have been of Iranian origin. They spoke a language of the Scythian branch of the Iranian languages, and practiced a variant of ancient Iranian religion. 스키타이인은 보통 이란계통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들은 이란계의 스키타이 분파 언어를 썼고 고대 이란종교의 변이형을 실천했다. -영어 위키백과 그저 비슷한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같은 계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류나 무역으로 인해 들어온 것일 수도 있죠. 그렇게 따지면 한국은 중국계통이 되는 것입니까?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HmryKUkvi9Q.html 본영상을 보는데 이분이 최근 올릴 영상과 목차와 내용이 상당히 비슷합니다 혹시 영상을 제작하는데 참고한 서적이 있으셨나요? 그리고 영상의 전개와 내용이 겹치는데 표절을 당하셨다고 해야할까요 이런건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러던 중 2018년 5월, 코펜하겐 대학교의 에스케 빌러슬레프(Eske Willerslev) 교수는 헝가리에서 바이칼 호에 이르는 중앙아시아 지역 100여 개의 인골 유전자를 분석하여, 각 민족 집단 간 DNA 유사성의 편차를 확인했다. 그 결과, 스키타이 인과 흉노족의 혼혈[3]이 훈족이었음이 드러났다. # 해당 논문은 《네이처》 지에 실렸다.
스키타이족이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소수민족들과 이합집산해서 중국 북부에 홀현히 나타났을때 흉노족이 된것이고, 그 흉노족이 도로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여러 소수민족들과 또 이합집산 하면서 동로마제국 에 도착했을때 훈족이 된것이죠. 그러니 서로 상관이 있는 종족들이지만, 너무 많은 종족들이 뒤죽박죽 섞였으니 유전자 분석으로도 해깔릴수 밖에 없는것이죠.
신라인 유골에서 스키타이 유전자가 나왔고 서양의 학자들은 신라를 스키타이로 지칭합니다 한국인은 스키타이 흉노 훈족 신라의 자손들이에요 고려 조선시대 사대주의 사상과 일제시대 한국사 말살 작업으로 유목민족사(신라사)를 잃어버린 거에요 물론 고구려 백제도 우리 역사의 일부지만 신라는 고려 조선 한국 우리나라의 뜻입니다 고려시대 이전이 천년왕국 신라시대 전라도 어원도 신라의 뜻 전라도 사람들도 대부분 신라 족보에요
한국인이 신라인이요 ㅎ ㅎ 고려시대 이전이 신라시대고 한국인의 시조는 박혁거세입니다 고조선은 스키타이 제국을 일컷는 거에요 코리아는 겨레가 어원이고 신라랑 같은 뜻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이 역사왜곡한거에요 고려시대 이전이 천년 유라시아 유목민 제국 신라시대고 신라가 이스라얼이라고 주장하는분들도 있어요
@테스트 님은 재야사학자신지 아님 학계에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중국의 역사 기록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중국 사서 기록을 불신하게 됐어요 신채호 선생도 중국 사서 기록을 다 믿으면 안된다고 하더군요 KBS 초원의 제국 2부작 신라편을 보니 스키타이가 기원전 2세기 경에 멸망했다고 설명하길래 스키타이 제국의 멸망시기와 고조선 멸망시기가 비슷하여 고조선을 스키타이 제국으로 유추해본겁니다 미국의 학자들이 신라를 스키타이로 지칭하고 유라시아 초원길 전체가 황금의 이어달리기식 교역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또한 고대 신라인 유골에서 스키타이인 유전자가 나왔어요 경상도에서 백인 유전자도 많이 나왔답니다 또 전라도 사림 중에도 특히 김씨 박씨 최씨등이 서구적인 외모가 많고 본인도 부계 한씨 모계 박씨인데 코는 작은편이지만 거울을 볼때마다 혼혈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동생 형 누나는 완전히 서구적인 코가 큽니다 왜 한국인이 코리안은 되고 신라인은 안되나요? 코리안 고려인으로만 살아야 되나요? 고려인 이전에는 우리 조상들이 없었어요? KBS 멕시코에서 발견된 한문화 프로그램을(고구려 발해인들이 아메리카로 건너갔다는 내용) 보고 난후 한국인이 신라인 정체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고려시대 이전에 우리나라가 신라였다는 사실이 떠올랐어요 저도 전라도 태생이라 백제인 정체성으로 살아왔고 신라의 삼국통일을 비난하고 신라와 김춘추 김유신을 무척 비난했던 한 사람이었어요 고려시대 이전이 신라시대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한참동안 눈물이 흘렀어요 신라는 경상도의 뜻이 아닙니다 고려인의 선조가 신라인이고 한반도에 최초로 통일된 국가 이름이 신라입니다 청나라 만주원류고에는 신라가 만주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를 근거로 저는 광개토태왕 역시 신라인으로 생각합니다 경주 김씨 족보에 김알지가 태왕이고 신라 왕족의 무덤에서 광개토태왕께 제사지낸 제기도 발견 되었습니다 물론 고조선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과연 비파형 동검 하나 만으로 고조선이 한반도에 있었다고 증명이 안되는것 같습니다 한반도의 추운 겨울 날씨를 생각하지 않은 학자들의 오류로 생각됩니다 한반도의 추운 겨울에 사람이 생존하기 위해 고안해낸 온돌 문화와 김장 문화를 만들어낸 집단을 신라로 보고 있고 몽골 흉노(신라) 유적에서도 온돌 유적이 나왔답니다 한반도의 추운 겨울에 고조선 사람들이 과연 살아 남았을까요? 한씨 족보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씨들의 최초의 선조는 동이족 은나라(성씨 자씨) 였고 멸망후 기자조선 다시 멸망후 마한이 건국 되었고 마한이 신라 박혁거세와 고구려 주몽에게 멸망한 후 마지막 왕자 세명이 신라 한씨 백제 기씨 고구려 선우씨가 되었다 그래서 저는 마한 신라 삼한 역시 초기에는 중국 대륙에 존재했을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박창범 교수님의 현대 과학으로 분석한 삼국사기 일식 관측 기록 최적 위치라는 내용에는 신라는 중국 양자강 유역 고구려 몽골 백제 발해만으로 주장하더군요 신라는 만주 한반도에만 존재했던 나라가 아니라 중국 대륙도 한때 지배하였고 유라시아 초원제국 연방의 일원이었어요 헝가리에서 2년마다 개최하는 유라시아 유목민 축제인 쿠릴타이에 신라의 후예로서 한국도 참가하고 있답니다 신라의 후예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금나라 청나라 역시 신라사의 일부입니다 고대에 태양신을 숭배하던 시기에 한반도 경상도 지역이 전 인류의 성지였다고 생각됩니다 아리 라 앙의 라는 이집트 태양신 라와 일치하고 신은 우리가 매일 신는 신 신발 땅 지구를 뜻합니다
@테스트 한국인 천만명이 김씨고 450만명이 박씨에요 다음 위키 백과 검색 물론 가짜 성씨도 많겠지만 천민들에게는 역사라는게 무의미하겠죠 전라도 시골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김씨고 전라도 어원도 신라에요 전주 라주(나주)=금성 경주 상주 서라벌 서울 경기까지 다 같은 뜻입니다 한국 →조선→고려→신라 신라는 경상도의 뜻이 아니라 고려 조선 한국과 같은 뜻입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만주 부여 유적과 동일한 유물이 출토 되었어요 KBS 가야 4부작 가야가 남부여 백제에요 전라도 1위 성씨 김해 김씨 일본 천왕도 김해 김씨 기미가요는 김씨의 나라의 뜻 흑치상지 귀실복신 사마상여 부여사마 이런 고대 백제인 이름은 현대 일본인 이름 제 채널에 KBS 초원의 제국 영상 일부분 놀려놨어요 아시아 최초로 경상도에서 개마무사의 갑옷이 마갑까지 출토되었습니다 전라도 태생이라 저도 한때 좌파였었는데 근현대사는 보수적 영상으로 올려놨습니다 와서 구경하세요
인더스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 사이엔 오늘날 못지않게 교역이 활발했다 하데요. 초원의 길을 통해 동서간에 인적ㆍ물적 교류가 상상 이상으로 활발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서기 551년경 전후 동로마제국에 만연한 페스트가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할 수 밖에 없게 했던 것 같고(한반도의 경제 파탄), 622년 전후 마호메트의 등장과 이슬람교 등장이 동서교역에 장애물로 작용해 그후 인도에선 불교가 사라지게 되는 계기가 되고, 동아시아에선 고수ㆍ고당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경제파탄으로 이어지고, 마호메트 후계자들에게 망한 당대 세계 최대 국가 중 하나였던 사산조페르시아 유민들을 포섭ㆍ임시정부를 차리게 해준 김춘추의 혜안으로 사산조페르시아 해외지사의 자금과 인적자원을 통일자금 및 자원으로 활용한 신라가 나당연합을 이루어 3국통일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국통일은 당시 요동치던 국제정세와 팬데믹ㆍ경제파탄을 역이용한 외교와 정치력의 승리 즉 개방정책의 승리였다고 추정합니다. 대야성전투에서 죽은 고타소의 죽임 등은 김춘추의 의지를 강하게 해준 부분은 있었겠지요.
@@venecia9430 그렇군요. 그쪽이 원래 비잔틴제국이었다가 1차대전 직전까지 터키의 아나톨리아(터키어로는 아나톨루엔)였으니 그리스 발음일 수도 있겠네요. 비잔틴제국 때는 미노르 아시아 즉, 소아시아라고 불렸다가 대항해시대 이후에는 동쪽을 모두 아시아라고 했어요. 아랍이나 페르샤인들은 아시아대륙을 알고 있었지만 서유럽인들은 아시아를 몰랐었죠.
아득한 옛날 한국인 조상의 발원지는 카프카즈 산맥의 동북쪽 알타이산 부근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한반도의 유물 출토상황을 보면 그러하죠. Bronze dagger, Comb style pottery, 흑요석 유물이 그 지역과 겹치고 언어적으로 보아도 그렇죠. 고대문명의 발상시기 보다 2천여년 후에 부족국가가 태동하였다는 것은 가혹한 환경의 한반도에 사람의 거주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venecia9430 @짠과자 제가 알기로는, 지금의 터키 부근에서 이슬람 세력이 동방무역을 차단하여 독점했고 이들이 베네치아에 동방물산을 유통시켰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즈그 아버지가 로마교황의 사신으로 당나라에 갈 때 따라갔다가 귀향한 시기가 1292년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럽의 일반대중에게 중국이 소개된 것은 13세기말 이후가 되겠지만, 비잔틴제국 멸망(1453)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동방통로가 차단되니까 포루투갈 스페인이 아프리카를 돌아가는 항로를 찾은거죠.
1600년 이후가 아니고, 1410년의 독일계 중장기병의 튜튼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전투에서 튜튼기사단이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에게 대패한 이후 기병부대의 무적신화는 사라졌음. 이 전투를 제1차 탄넨베르크 전투라고 함. 워털루 전투라는 영화에서 보면 장창부대가 원형으로 스크럼을 짜서 방어를 하는데 기병부대가 뚫지를 못하였고, 고대전쟁에서 승전의 첩경은 적군의 보급부대를 찾아 솥단지를 깨버리는 작전이 성공해야 하는 것임.
등자가 나오기 전에는 스키타이처럼 태어날때부터 말을 타버릇한 종족들 아니면 전장에 내보낼만한 기병을 양성하기 힘들었습니다. 대신 병거를 운용했는데 그와중에 병거보다 기병의 장점이 큰걸 알고 아시리아에서 공식적으론 정주국가에서 처음 기병을 도입합니다. 아시리아 유적 부조에 등자도 없는데 중무장한 궁기병까지 보이는걸 보아 국가적으로 엄청 투자해서 기병을 육성했던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후 페르시아 계열의 국가들이 역사적으론 거의 처음 철갑으로 사람과 말을 다 무장시킨 카타플락트 병종을 선보입니다. 물론 가죽갑옷으로 말까지 무장시킨 최초의 중기병은 기원전 6세기경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 있던 사르마티아인들에게서 확인이 되지만 같은 이란계 유목민 후손이면서 정주국가를 이룬 페르시아 파르티아 등에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위 철기병을 선보입니다. 마케도니아나 북아프리카 갈리아 게르만 등에서도 좋은 기병들이 있었지만 철갑으로 중무장한 유럽기병은 로마 후기즈음에 등장합니다. 역시 돈과 인력 물자를 갈아 넣는 일이었습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를 방문하고 '히스토리아(역사)'를 썼을 땐 그리스ㅡ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였다니까, 헤로도투스는 한무제 때의 장건 마냥 페르시아 견제용으로 그 후방인 스키타이와의 동맹 가능성 등도 타진하려는 목적도 숨어있었던 추정됩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를 여행할 때 최소 7명의 통역관을 대동했었다는 기록도 있다는데 그럼 개인적인 여행이 아니라 군사. 외교적 목적으로 그리스 델로스 동맹의 (군)자금으로 '여행'을 했던 듯 추정됩니다. 헤로도투스가 "스키타이는 헤라클레스가 조상"이라 기록한 건, 일종의 '국뽕'으로 스키타이와의 외교로 군사동맹도 가능하다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칠 근거를 만든 듯 짐작되고요. 요즘도 외교나 해외방문시 출장경비 지출이 시비꺼리가 되기에 당시는 더했지 않았을까요? 히스토리아는 그 내용이 삼국지연의보다 더 허풍이 심하고, 특히 신화에 불과한 헤라클레스 신화를 마치 역사적 팩트인 양 "헤라클레스가 말을 잃어버렸다가 동굴 앞에서 뱀여인을 만나 혼인을 하고서 아들을 낳고~" 등 장황하게 써놓은 건, 장건이 대월지와의 군사동맹이 실패했듯이 본래의 '여행' 목적이었을 스키타이와의 군사동맹 타진이 실패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게 되면 막대한 델로스 동맹 군자금을 낭비했다는 책임추궁 문제가 따를 수 있기에 그에 대한 면피용으로 헤라클레스 이야기를 장황하게 창작 기술하는 허위출장복명서를 만들어 제출한 게 헤로도투스의 '역사'였던 듯 싶습니다. 헤로도투스는 한술 더떠서 페르시아의 태조라 할 키루스 대뫙이 스키타이 여왕에게 목이 잘렸다는, '치사량 국뽕' 소문을 역사적 팩트인 양 소개하여 자신의 출장복명서를 화려하게 꾸몄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지연의의 적벽대전 이야기 내용은 99% 허구+1% 팩트로 보는 게 요즘 정설로 굳어지는 추세라는데 그 맥락들이 똑같네요^^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죽음에 관한 소문을 강력히 부정하는 글을 남겨 키루스 관련 팩트가 논란 중이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당태종이 양만춘이 쏜 화살이 눈깔에 맞아 후퇴했다"는 식으로 전형적인 '치사량 국뽕'이란 생각을 금할 수 없네요^^ 저는 이를 '헤로도투스판 역사왜곡 방식'이라 이름 붙이고 싶습니다 ^^ 하긴 저라도 헤로도투스 입장이었다면 그리 했을 법 합니다마는 ~ 😱
선비족 이라는 이름 자체가 고조(선 비)왕 의 백성 이란 소립니다. 비왕 이란, 고조선에서 제후국왕 을 부르던 호칭 입니다. 다시말해, 선비족은, 고조선의 여러 제후국왕중 한사람이 다스리던 백성들 이었다는 소리죠. 그리고, 신라 김씨 들은 흉노왕자 김일제의 후손이 맞고. 김씨들이 한반도로 도망온 이유는, 왕망의 신나라의 흥망과 관계가 깊죠. 왕망의 외척이 김씨 였기 때문이죠.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부른 바로 그놈이고, 왕망의 고모 가 전국옥새를 집어 던진 바로 그 한나라 황후 입니다. 왕망의 고모가 한나라 황후 하기전에, 허씨가 황후 했고, 김수로의 왕비 보주태후 허왕옥이 바로 그 허씨 죠.
위치가 안맞네요. 광개토대왕이 서진하면서 부딪힌 나라가 유연인데, 광개토대왕때 영토가 동서로 일만리라고 했으니 지금의 위구르족 영역까지 영토가 확장되었다는 의미임. 그외의 선비족이 전연>후연>북연으로 이어졌는데, 북연이 장수왕때 속국화되었다고 했으니 선비족의 주영역은 서쪽으로 이동시켜야 이치에 맞습니다. 진시황제의 진나라 수도가 시안쪽인데, 흉노의 침입 경로는 시안 북쪽에서 쳐들어왔고, 진시황제가 시안 북쪽 흉노의 침투로를 막는 장성을 쌓은게 지금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는데 논리적으로 안맞음. 지금의 만리장성은 딸랑 몇십년을 쌓은 성이 아니거든. 지금의 만리장성은 최소 천년동안 만들어진 장성을 명나라가 이어붙인거라고 봐야 이치에 맞음.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쓰여진 만주족의 역사서 "만주원류고" 에 의하면, 자기들 조상들을 죽 나열 했는데, 그게 "삼한, 부여, 백제, 신라, 발해, 숙신, 말갈, 여진" 이라고 했죠. 그런데, 고조선, 고구려는 빼놨고, 또 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 도 자기 조상에 껴주지 않았죠.
최초의 동서양 혼혈로 탄생한 유라시아 유목민족 후에 흉노 투르크 훈족 등으로 표현되고 신라가 바로 스키타이인이고 우리의 조상들입니다 신라시대까지는 유라시아 북쪽과 만주 한반도까지 국경이 없이 유목민족들이 자유 왕래하던 시대였어요 추위를 피해 철새들처럼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거에요
선비족 이라는 이름 자체가 고조(선 비)왕 의 백성 이란 소립니다. 비왕 이란, 고조선에서 제후국왕 을 부르던 호칭 입니다. 다시말해, 선비족은, 고조선의 여러 제후국왕중 한사람이 다스리던 백성들 이었다는 소리죠. 고조선과 선비족이 둘다 흉노족에 복속되었다가 흉노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복속에서 벗어났죠.
시기적으로 보면 오환과 선비가 활동하던 지역에 부여가 있었으니 부여 또한 동호족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네요. 한서를 저작했던 중국 역사가 반고 또한 오환부여를 붙여서 칭하고 있었죠. 즉 오환부여에서 부여 = 선비로 같은 지역의 민족을 의미하는것 같습니다. 우리역사넷에 '부여의 영역과 지리적 특성'이라고 검색하면 자료가 있더군요. 부여에서 고주몽 세력이 랴오닝성 지역으로 내려와 연나라에게 밀려난 고조선인들과 결합해 기원전 37년에 고구려를 세웠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연나라와 싸우던 고조선의 활동무대 또한 시기적으로 보면 동호족이 활동하던 지역과 같으니 (고)조선 = 동호족/오환족이 세운 나라 이름이었을것 같습니다. 그런데 애초 동호라는 명칭 자체가 중국인들이 동쪽의 모든 오랑캐들을 (몽골, 만주, 한반도, 일본) 자주 싸잡아 일컫는 단어여서 하나의 민족이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기마민족들 특성상 문자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기에 편의상 동호라고 부를 수 밖에 없겠네요. 학계에 의하면 동호족은 기원전 2천년부터 활동했다고 나오는데, 고조선 건국이 기원전 2333년으로 알려진걸 보면 비슷한 시기이기도 하네요. 동호족 뿌리의 선비족, 그리고 같은 동호족 후예인 우환이 중국 연나라에게 밀려 다시 재결합하여 고구려가 생성. 그 고구려가 주변 같은 동호족 계열인 거란, 부여, 선비, 숙신, 예맥들을 통일시켜 만주족이 형성된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참고로 여진어로 숙신을 Jušen 주션이라고 발음하죠. 조선, 주션. 기원후 7세기 중국 역사서 수서에 의하면: "배구가 상소를 올려 말했다. "고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의 땅입니다. 주나라 시대에 기자를 봉했는데 한나라때 나뉘어 삼군이 되었으며, 진나라 때에 요동에 통합되었습니다. 지금은 신하가 아니게 되어 외부의 영역으로 구별되어 있는 고로, 선제께서 마음에 들지 않으셨기에 오랫동안 정벌하고자 하셨습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못난 탓에, 출격했으나 공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폐하의 시대가 되었사온데,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으시고 관과 요대의 지역을 야만스런 맥인들의 소굴로 두려 하시나이까." 수서 권67.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구)려, 고죽국, 맥인, 기자(조선)를 모두 하나의 민족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죽국은 기원전 664년에 멸망한 나라인데, 고죽국과 고려를 같은 민족으로 본다는 것은 중국인들 눈에는 기원전 664년에 베이징시, 톈진시, 탕산시 근처까지 진출했던 선비족이나 동호족들을 고려인들과 같은 민족으로 여겼던것 같습니다. 또한 408년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북연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푸니 고운도 북연의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이에 답례하였다 고 나오는데, 한마디로 중국 북부지역에 주둔하던 선비족 세력이 한때 고구려 속국에 편입했다는 기록입니다.
요나라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들도 있더군요. 참고로 요나라는 거란족의 나라, 요나라의 후예인 서요는 카라 키탄, 그 후예들이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과 위구르입니다. 요사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범금(八條犯禁)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遼史 卷49)] 요사의 지리지에는 (수도의 동쪽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遼史 地理志)] 여기서 동경요양부는 랴오닝강 지역이라 하기도 하고, 베이징 근처라고 하기도 하는데 랴오닝강 지역설이 대세입니다. 요나라 진국공주 묘에서 발굴된 묘지명 진국공주의 성(姓)은 야율(耶律)씨인데 본래 야율(耶律) 성(姓)이 고(高)씨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왕족이라 하였다. 고려사 정종 고려가 화살을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요 황제는 동이 풍속을 따라 거듭 고시를 바치던 의식을 올린다니 정성이 갸륵하여 진실로 애대하였다. 이쯤에서 환빠들이 신라가 흉노였네 환국이 러시아 땅을 지배했네 뭐네 이상한 헛소리를 할것 같아서 미리 어퍼컷 날립니다. 한반도 역사가 만주족 역사와 많은 것을 공유한다는 것은 큰 맥락에서는 사실이지만, 한나라 시대 공무원인 김일제 후예들이 몇백년 후에 나라를 차지할 정도의 세력을 중국 중앙에서 한반도까지 아무런 자취도 없이 뿅 하고 이동시켰다는 것은 판타지에 가깝습니다. 무엇보다도 김씨 이사금이 처음 등장했을때 투후 김일제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없었습니다. 7세기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를 한 이직 당나라와 회친의 의미를 담아 김일제의 자손을 자칭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한반도에서 흉노문화와 비슷한 북방민족 풍습이나 유물들이 나오는 것은 신라시대보다 이전인 삼한시대, 그리고 그 이전인 고조선 시대 무덤에서도 출토되었기에 흉노와 직접적 관계는 없습니다. 선비족 세력이 흉노제국에서 부터 분리를 했었고, 고구려와 고조선이 선비족들과 융합을 했기에 흉노의 기마민족 문화는 신라시대보다 훨씬 이전부터 한민족에 분포되어 있었습니다.
@테스트 환단고기 주장에 심취하신 분들이 나타날 줄 알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 드리지만, 한반도 역사와 만주 역사가 (흉노, 선비, 동이족, 동호족) 많은 연관성을 지닌것은 사실입니다. 환단고기에서 주장하는 전체적 내용, 그러니까 한반도 역사가 만주 역사와 상당히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는 주장 또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허나 그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자료나 증거들은 8할이 엉터리로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기본 이론은 신빙성으 크나, 증거가 형편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환단고기에서 나오는 내용들은 역사적 증거자료로 쓰일 수가 없습니다. 환빠들은 중국 산서성에 김일제 후손들이 사는데, 그 도시 이름을 금성이라 지었다! 신라의 수도 이름 또한 금성이다! 고로 흉노왕족이 옮겨온 증거다! 라는 주장을 자주 합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 억지로 끼워 맞췄다는게 금방 드러납니다. 현재 중국 푸젠성 광저우시 남쪽에도 금성이라는 마을 이름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김일제나 흉노족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환빠들의 논리에 의하면 금성이라는 이름이 있으면 무조건 김일제 후손들이 만든 도시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푸젠성 광저우시 또한 흉노족의 후예라는 괴론이 형성됩니다. 옛 서라벌의 이름 중 동경이라는 이름 또한 존재합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시대에 동경은 일본의 도시 이름 Tokyo가 되었습니다. 베트남 하노이의 옛 이름 또한 동경(Tonkin)이었고, 중국의 낙양의 옛 이름 또한 동경이었습니다. 중국 북송시절 카이펑의 옛 이름 또한 동경이었습니다. 환빠들 논리에 의한다면 이 모든 도시들이 신라와 연관되어 있다는 소리가 됩니다. 신라인들이 일일히 베트남, 일본, 중국 도시들에 다 진출해야만 도시 이름을 동경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요? 그냥 우연히 한자 문화권에서 비슷한 도시 이름을 지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테스트 마지막으로, 김일제의 후손들은 신나라때 한나라 지역에서 쫓겨난게 아닙니다. 이 또한 환빠들이 퍼뜨린 가짜루머입니다. 김일제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후한에 머물며 관료들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김상, 김선, 김의가 그 대표적 인물들입니다. 김일제 이후 후손들이 신나라 15년에 모두 쫓겨났다면 그 후손들이 후한에서 관료로 활동을 했을 수가 없습니다. 신나라는 기원후 8년에서 23년까지 짧게 15년만 존재했던 나라고, 후한은 전한이 멸망한 후 17년 뒤인 기원후 25년에 재건하여 220년까지 훨씬 오래 존재한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후한 195년간 왕조 후반까지 도성후, 투후 같은 벼슬자리를 받으며 활동했던 김씨 후손들이 한나라 지역에서 사라졌다는 주장은 전혀 앞뒤가 안맞습니다. 대규모 세력 이동이 이루어지면 항상 역사 기록에 나타나게 되는 법입니다. 허황후의 세력 이동을 예로 드셨는데, 허황후 세력 이동은 삼국유사나 비석 같은 어려 유물들을 통해 확인이 됩니다. 그러나 김일제 세력의 이동에 대해선 문무왕때까지 아무런 기록도, 자취도 없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것과, 증거가 있는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허황후가 세력 이동을 했으니 김일제 후손들도 가능했을 거라는 주장은, 일본에서 미나모토 요시쓰네가 에조치의 도움으로 몽골에 가서 징기스칸이 되었다는 증거없는 멍멍소리를 '가능성' 있다고 지지해 주는것과 다를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신라 석씨 왕조와 김씨 왕조의 분쟁 관련 의혹이 있으니 이것이 흉노족 김일제 세력 이동의 증거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도 김일제 후손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애초 신라 왕조가 박씨에서 석씨로 이동했던 처음 이유가 김씨들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김씨는 이미 석씨왕조 세력의 일부였습니다. 그러다 석씨왕 벌휴 이사금때부터 장남 석골정과 차남 석이매 사이 파벌이 생기며 석씨가문 내부에서 갈등이 생기고, 이때 약해진 석씨가문 사이에 김씨들이 석골정 계보인 석첨해를 지지하면서 김씨들이 중앙세력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한마디로 석씨 vs 김씨가 아니라, 석씨 vs 석씨 + 김씨 구도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만약 중국에서 온 김일제 후손들이 신라 왕권싸움에 끼었더라면 오히려 다시 예전처럼 신라 석씨와 김씨들이 연합을 했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이서고국 전쟁편에서는 유례 이사금때 신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서라벌까지 위협을 받다가 정체 불명의 병사들이 나타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사라지길래, 뒤를 따라가보니 미추 이사금 (김씨)의 능인 죽장릉에 대나무들이 수두룩하게 놓여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도 석씨와 김씨의 동맹관계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첫 김씨왕조였던 미추 이사금의 왕후는 광명부인 석씨였고, 어머니는 술례부인 박씨였습니다. 그 뒤 제18대 신라왕 실성 마립간의 어머니는 이리부인 석씨였습니다. 김씨, 석씨, 박씨, 왕족들끼리 서로 동맹관계를 가지고 족내혼을 하며 왕권을 유지하는 기록이 명백히 있는데, 그냥 막무가내로 중국에서 나타난 김일제 후손들이 분쟁을 일으켰다 카더라!는 기록에 없는 내용들이 무작정 맞다고 하는건 정말 허무맹랑한 소리입니다.
@테스트 ? 저는 허황옥이 환단고기에 나온다는 말을 한적이 없습니다만...? 그건 오해인 것 같네요. "新(신)나라 15년 이후 쫓겨난 김일제의 후손들이..."라고 하셔놓고 뒤에 와서 "신나라 당시에 한나라 지역에서 쫓겨난 것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시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말을 계속 바꾸시는게 참 유감입니다. 자신이 했던 말을 바꾸면 더이상 제대로된 토론이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사람이 논쟁 중에 했던 말을 바꾸는건 자신의 자존심을 버렸다는 의미입니다. 아무튼 환단고기를 안보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환단고기랑은 상관 없이 자꾸 이상한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무릉과 연주는 양자강 일대 입니다." 라고 주장 하시는데 연주는 양자강 일대가 아닙니다. 무릉태수에서 무릉군 (Wuling County)은 형주와 연주를 함께 포함하는게 아니라 후한 13주 중에 형주라는 1개의 주에 속해있는 무릉이라는 중국대륙 중심부 1개의 군을 가르키는 것이지, 중국대륙 북동쪽 연주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아주 쉽게 위키피디아에 '무릉군' 이라고 검색해 보시면 전한, 후한 형주 무릉군 12개현 목록이 쫙 나오니 직접 참고해 보시길 바랍니다. '후한의 행정 구역' 이라고 검색하면 후한 13주 행정 구역에 대한 정보도 나옵니다. 김씨들이 도망가서 집성촌을 만들었다 주장하신 양자강 하류인 절강성 그리고 산동성, 강소성, 복건성 죄다 무릉태수 관리지역에서 벗어난 곳입니다. 마지막에 "어디... 입증해 보시지 그러세요? 님이라면 광무제가 신나라의 왕망 외가인 김일제 후손들을 그대로 방치했었고 오히려 중용했다는 증거물이 필요할 것입니다." 라고 하셨습니다. 절강성은 양주에 속한 회계군이니 김일제 후손들이 회계태수로 지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도성경후 김안상, 도성후 김흠, 도성대후 김탕, 도성이후 김상 같은 벼슬 이름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도성후(都成侯)는 도성(都成), 즉 수도를 의미합니다. 고로 김일제의 후손들이 쫓겨나기는 커녕 계속해서 후한 수도에서 벼슬생황을 하며 권세 활동을 했었다는 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입니다. 여태껏 잘못된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가 새로운걸 배우게 되었으면 그걸 무시하고 끝까지 잘못된 정보가 옳다고 우기지만은 말았으면 좋겠네요. 사람이 가끔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저도 늘 틀리고 그렇게 새로운 정보를 배우게 되니까요. 그래도 토론중에 교묘하게 말을 바꾸거나, 명백히 틀린걸 억지로 계속 맞다고 우기면서 찌질하게 굴지는 맙시다.
@테스트 신라 김씨왕조의 가계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에 대해 토론을 하고 있네요... 분명한건 한반도내에 김씨 세력이 나타난건 신나라 멸망후 김일제 후손중 일부가 후한 광무제의 탄압을 피해서 이동한 직후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명확한 정황관계가 있고 신라의 왕인 문무왕 스스로가 자신의 족보를 기록한 비문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실관계를 버리고 불필요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유목문화나 신라김씨왕조가 모용씨 세력의 영향으로 한반도에 나타났다고 하거나 신라 김씨 자체가 흉노와는 전혀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 사료를 지나치게 무시하는 발상입니다...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 당대의 사료를 최우선으로 따르는 것이 올바른 역사해석이라 볼수 있어요... 문무왕이 당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자신의 족보를 조작하였다는 것 또한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왕이 자신의 족보를 팔지는 않지요... 더군다다 당시 당나라는 신라의 적대세력이었고 문무왕은 당나라와 국운을 건 전쟁을 하였습니다 ... 왕 자신의 족보를 조작하여 당나라의 환심을 사려했다는 발상은 거의 미친 상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문무왕 비문에는 명확하게 신라 김씨왕조의 가계가 한반도내에서는 김알지까지 기록되어 있고 중국내에서는 김일제와 거슬러 올라가 소호금천까지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최초 망명자, 이민자의 위치에서 신라내에서 조용히 살다가 서서히 신라의 언어와 문화에 동화될 무렵부터 당시 왕족인 박씨, 석씨와 결혼을 통해서 신분상승을 시도하였고 결국 성공하였다고 봅니다... 신라는 고조선의 유민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지만 김씨왕조 이후부터 그러한 역사관이 무력해지고 천년의 신라 기간동안 이전 왕조였던 단군조선의 역사를 편찬하여 후세에 전하지 않았습니다... 초중기 편찬한 역사책마저 사라지고 남지 않았지요... 그것은 김씨왕조의 역사관에 단군조선의 역사적 정통성을 이으려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유민이 세운 나라가 조선의 역사를 편찬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김씨왕조는 스스로를 단군조선의 후예가 아닌 흉노족의 후예, 소호금천의 후예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입니다... 환빠든 환까든 중요한것은 사료와 유적, 유물에 바탕을 둔 역사해석이 필요한 것이고 남겨진 우리의 상고사의 사료가 단군세기, 태백일사, 북부여기, 삼성기, 규원사화, 조선상고사... 라면 무조건적인 배척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사실관계를 밝혀 나가는 것이 학자로서의 자세이고 역사를 배우려는 사람의 진실된 마음일 것입니다... 완벽하게 진실된 역사책은 없습니다... 일부는 조작된것도 있고 일부는 불명확한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속에 진실도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정권에서 편찬한것이 아닌 일개 개인이 작성한 사료인 사마천의 사기에 대해서는 수천년전 내용까지 믿음을 가지면서 왜 우리선조들이 힘들게 사대와 식민의 탄압속에 남긴 사료를 환빠니 환까니 하면서 부정하는 것인가요... 당신들이 그럴 자격이 있나요... 당신들이 우리의 상고사가 적힌 사료의 내용을 100% 부정할 어떤 자격과 지식이 있나요... 진실된 마음으로 역사를 바라봅시다
스키타이 ~~! 최초의 유목민족 이면서 광범위하게 유사한 삶의 방식은 도나우강에서 만주에 이르는 광활한 유라시아 스텝을 따라 있는 이질적인 민족 집단들 사이의 접촉을 촉진시켰고, 많은 문화적 유사점으로 이끌었다고 하네요~~ . 고대의 관찰자들인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스키타이인 이라고 ....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나오는내용도 있어요 . 특히 신라 북방민족에서 내려 왔다고 보더라구요. 여기서도 북방민족 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오늘 영상도 감사하게 잘 봤읍니다~~~~^^
미국등 서양 학자들은 신라를 스키타이로 지칭합니다 신라인 유골 또한 스키타이 유전자가 나왔어요 한국인은 스키타이 투르크 흉노 훈족으로 지칭하는 신라인과 몽골인 고구려인 혼혈로 탄생했어요 전라도 어원도 신라의 뜻이고 전라도 1위 성씨도 김씨에요 고려시대 이전이 신라시대 몽골이 고구려 일본이 백제(가야제국)
신라 김씨 들은 흉노왕자 김일제의 후손이 맞고. 김씨들이 한반도로 도망온 이유는, 왕망의 신나라의 흥망과 관계가 깊죠. 왕망의 외척이 김씨 였기 때문이죠. 왕망이 고구려를 하구려로 부른 바로 그놈이고, 왕망의 고모 가 전국옥새를 집어 던진 바로 그 한나라 황후 입니다. 왕망의 고모가 한나라 황후 하기전에, 허씨가 황후 했고, 김수로의 왕비 보주태후 허왕옥이 바로 그 허씨 죠.
스키타이~ 그들의 손으로 남긴 역사서는 없었나보네요. 그들의 생활상, 주변 국가에 대한 인식 등이 모두 타국의 시선으로 그려진거보니... 유목민족이라 그들이 남긴 역사가 없다는게 참 안타까울뿐... 스키타이와 흉노의 관계, 훗날 신라와의 관계성이 궁금했는데... 그래도 알고있던 스키타이보다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어 좋네요~ 그냥 말타고 이나라 저나라 휩쓸고 다닌 줄만 알았는데...ㅋ.ㅋ 다음편은! 누구! ㅋ.ㅋ
스키타이족과 쓸아브족 스키타이족은 철기시대 초기 기원전 10 세기 전후 현재 이란에서 출현했고, 쓸아브(동일 언어 사용자)족이라는 용어는 서기 6 세기에 등장했습니다. 슬아브족은 스키타이족이 소멸(?)한 후 약 1,000 년이 지난 후에 생긴 용어입니다. 스키타이족과 쓸아브족을 연결하는 것은 약 1,500 년 이상의 간격을 억지로 연결하려는 후대의 역사 짜깁기 즉, 족보 창작입니다. 고리(소위 고구려)인들을 현대 남한인하고 연결시키는 남한인들의 억지하고 같지요. 고리인과 남한인은 서로 다릅니다. 고리인하고 가장 가까운, 고리 (첫번째 고리든, 두번째 고리든 간에) 후계 족속은 남한인이 아니고 부칸의 김일성족입니다. 첫번째 고리의 마지막 수도는 현재 부칸 수도 평양(평평한 흙/땅)이고 두번째 고리의 수도는 송악 즉, 현재 부칸 개성이지 한양이나 경성, 한성부, 서울이 아닙니다.
뱀여인이 여와라는 말에 동의합니다만 왜 빵터지죠? 스키타이의 조상이 뭐 별건가요? 저는 헤라클래스와 여와의 세아들을 황백혼혈로봅니다. 그 사람들이 스키타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키타이는 백인만 지칭하는말이 아닐거예요. 유목민은 서쪽동쪽 이동을 많이 하면서 다민족다체제였을겁니다. 그래서 순수혈통도 있고 황백혼혈도 있었습니다. 저도 김정민박사님 방송에서 많이 보고 배웠지요^^
선비족 이라는 이름 자체가 고조(선 비)왕 의 백성 이란 소립니다. 비왕 이란, 고조선에서 제후국왕 을 부르던 호칭 입니다. 다시말해, 선비족은, 고조선의 여러 제후국왕중 한사람이 다스리던 백성들 이었다는 소리죠. 모용은 비석이 "조선건국 고죽위군 " 으로 시작하는건,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인거죠.
@@user-nasanato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쓰여진 만주족의 역사서 "만주원류고" 에 의하면, 자기들 조상들을 죽 나열 했는데, 그게 "삼한, 부여, 백제, 신라, 발해, 숙신, 말갈, 여진" 이라고 했죠. 그런데, 고조선, 고구려는 빼놨고, 또 흉노, 선비, 돌궐, 거란, 몽골 도 자기 조상에 껴주지 않았죠.
몽골족에 한민족 피가 많이 섞였죠. 원나라때 많은 공녀들이 고려에서 보내졌고, 그 여자들은 몽골 힘있는 집안에 몸종으로 보내졌으니, 그녀들이 거기서 몽골인들의 성적 노리개가 될 수 밖에 없었고, 그녀들이 임신해 낳은 아이들이 몽골인들에 일부가 자연스럽게 되었죠. 또 원나라 마지막 황후, 원나라를 말아먹은 기황후 가 고려여인이고, 원나라가 망한후 북쪽으로 도망가서 세운 북원의 황후도 고려여인 이죠. 그리고, 고려의 충짜 돌림 왕들은 쿠빌라칸의 직계 후손, 다시말해 징기스칸의 직계후손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