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과 기획 그러니까 정치를 잘하기만 하면 대한민국으 세계최고가 된다. 양궁협회가 잘하니까 그냥 양궁은 대한민국의 종목이 되었다. 모든 영역에서 양궁협회를 본받아야 한다. 금메달 3관왕인 김우진이라고 하더라도 다음 국대선발에 맨땅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못하면 금메달3관왕도 탈락이다. 이런 냉엄한 실력위주 공정경쟁이야말로 한국 양궁의 힘이다.
한국에 온 인도인과 석 달 같이 지내본 적이 있었습니다. 타향이라 힘들겠거니 배려해줬는데 왠걸? 하인이 알아서 상전 대접해주는 걸로 알더군요. 맨체스터 대학 박사라는데, 식탁과 방바닥을 같은 헝겊으로 닦더군요. 정신문화가 심오할 거라는 환상으로 시작했었는데, 인간의 정신세계는 내 상상 너머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고대 인도에선 유부녀의 남편이 잠들도록 하는 주문도 있었다고 하니. 선량한 인도인도 있겠지만 모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가 난폭하지 않은 것은, 본성이 평화로울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난폭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차별이 심한 사회의 생존자들이 심성이 뒤틀려 있기 쉽겠죠. 20여년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뛰쳐나와 길게 썼습니다. 차라리 길가에 똥싸는 사람이 양반입니다. 가스라이팅은 하지 않으니까요.
@@rainbow-vv5bp동명왕 고두막한 동명왕은 고주몽이 아니라 후기북부여(BCE 86~BCE 58)를 세운 고두막한을 말한 다. 고두막한은 한무제가 북부여를 침략했을 때, 북부여의 4대 단군인 고우루(또는 해 우루, BCE 121~BCE 87)가 이를 막아내지 못하자, 의병을 일으켜 한나라군을 물리치고 졸본(卒本)에서 즉위하여 동명국(東明國)을 세운 인물이다. 동명은 고두막한의 자호(自 號)로서 이 때문에 후기북부여를 졸본부여 또는 동명부여라고 부른다. BCE 86년 고 두막한은 고우루(해우루)의 뒤를 이은 해부루(재위 BCE 87~BCE 48)를 제후로 강봉(降 封: 작위의 등급을 낮추어 봉해줌)하여 차릉(岔陵)으로 옮겨가게 하니, 이곳이 지금의 흑 룡강성 통하현(通河縣)으로 이를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迦葉原夫餘)라고 부른다. 동명왕 고두막한과 고주몽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연산군 때 문신인 김천령(金天 齡, 1469~1503)은 자신이 지은 부(賦)에서 “동명왕이 왕업을 개창하시고, 주몽이 그 뒤 를 계승하였다.(東明 創其緖業, 朱蒙 承其餘波)”라고 밝힌 적이 있다. 1922년에 발견된 연 남산(淵男産,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 639~701) 묘지명에서는 “옛날 동명왕이 기운에 감응 하여 사천을 건너 나라를 여시고, 주몽이 태양빛으로 잉태되어 패수가에 도읍을 열었 다.(昔者 東明感氣 踰㴲川而啓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고 하여 동명왕과 주몽이 서로 다름 을 새겨놓았다. 고주몽의 출생 『삼국사기』는 고주몽이 기원전 58년생이라 했는데, 『환단고기』에서는 기원전 79년 임인(壬寅)년에 탄생하였다고 하였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주몽은 기원전 59년 동부여의 통하를 떠나 졸본에 이르러 고무서 단군 (재위 BCE 60~BCE 58)의 딸인 소서노(召西弩)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고, 기 원전 58년 졸본에서 북부여 7대 단군으로 등극하며 다물이라는 연호를 쓴다. 『삼국사기』에서 고주몽이 태어난 해는 『환단고기』에서는 단군으로 등극한 해다
여기서 여진. 말갈의 고구려 만주족 주몽이 왜 튀어나오나. 신라, 백제, 가야도 있는데. 삼국사기는 고려중심으로 역사를 쓰려는 엄연한 역사왜곡이다. 신라에 의해서 패망한 만주족 고구려가 왜 역사의 중심에 서나. 차라리 만주를 통일하고 송(중국)을 넘보던 거란을 우리민족이라고 해라. 거란은 고유한 문자도 가지고 있던 민족 아닌가.
진짜경기에서의 감독의 중요성이 있는데 멍청하게 그걸 간과했고 지금 현 감독을 하고 있는 사람과 양궁단체장의 돌이돌이짝짝꿍합작으로 한국인 인도팀감독에게 갈 상금을 지들끼리 꿀꺽할려고 한듯 합니다 인도는 정말 착한고 좋은 사람도 많은데 드 반대의 사람들도 심각하게 많씁니다 동남아 국가들은 믿으면 안됩니다 날 먼저 지켜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