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71년 생 53세의 남성 입니다. 경기도 평택의 김대성 입니다. 저는 찾고 싶은 은사님 두분이 계십니다. 저는 가정 형편이 몹시 어렵고, 가족 모두가 질병으로 우환이 잦아서 힘들게 자랐습니다. 학창 시절 점심 도시락을 못싸가서, 수돗물로 배를 채우곤 했습니다. 고졸이 최종 학력 인 저 입니다. 1남 3녀의 막내인 저 입니다. 학용품도 제대로 못살 정도로 너무 가난하고 힘들었습니다. 미술 준비물을 제대로 못 사가서, 초등, 중학교 시절에 미술 선생님께 많이 야단 맞고 매 맞고 기합을 받았고, 미술 실기 점수도 정말 많이 감점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정말 지옥 같았고, 미술은 도대체 누가 만들어서 어려운 형편의 학생을 힘들게 만들고, 미술 시간은 왜 있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저희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오두막집 이었고, 비가 오면 빗물이 많이 새서, 방에 대야와 걸레를 바쳐놔야 했습니다. 학교에 늘 남루하고, 헤진 옷을 기워 입고 낡은 신발을 할수 없이 신고 다녀야 해서, 친구 들에게, 늘 왕따 당하고 매도 맞고, 놀림을 받은 저 입니다. 힘도 약해서 대항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중학교 여자 미술 선생은 더 그런 저를 몹시 미워 하고, 수업 중에 미술 준비 안해왔다고 30대씩 때리고, 실기 점수 깎고, 복도로 내쫓거나, 뙤약 볕이나, 비 오는 날. 몹시 추운 눈 오는 겨울에도 운동장 오리 걸음을 20 바퀴씩 시킨 사람 입니다. 그런 악질 여자 미술 선생이 제가 중 3 이던 1986년 4월에 전보 발령을 가고, 새로운 여자 미술 선생님 께서 부임 해 오신 겁니다. 이 선생님이 바로 저에게 큰 도움을 주신 은사님으로, 선생님 성함은 '임종옥' 선생님 입니다. 임종옥 선생님은 처음 한달 여 제가 미술 준비 못해가자 점수 깎고 때리긴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그 해 1986년 5월 말 쯤, 제가 중 3 때, 어느 점심 시간에 임종옥 선생님 께서 상담실로 저를 부르셔서 갔습니다. 임종옥 선생님 께선, "내가 대성이 너를 한달간 지켜 보니까, 아무래도 네 사정이 어려운것 같아서 물어보려고 불렀어. 많이 야위고, 옷도 헤지고 더럽고,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할것 같아서 그래. 괜찮으니까, 겁 내지 말고, 네가 사는 처지를 솔직히 말해봐라" 하셔서, 부모님도, 누나들도, 저도 건강이 다 안좋고, 형편도 많이 어렵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임종옥 선생님 께선, "그랬구나, 아무래도 내가 네 담임 선생님께 이야기 해서 너희 사는 처지를 직접 봐야 될것 같구나. 힘내고, 내가 도와주는 걸 생각해 볼 께". 하고 등 두드려 주시고 보내셨습니다. 그 주 토요일 방과 후 비가 제법 굵게 내리는 날, 임종옥 선생님 께서, 저희 반 남자 담임 선생님 이신 과학, 수학을 가르치시던 박훈규 선생님께 말씀 드리시고 두 분 선생님 께서, 박훈규 선생님의 자가용 승용차로 저를 태우시고 저희 집을 방문 하신 겁니다. 저희 집에 오셔서 저희 부모님께 사정을 들으시고 저희 사는 모습을 보신 박훈규 선생님 께서 저를 꼭 안아 주시고 토닥이시고, "내가 그간 담임 교사로서 너에게 너무 무심했구나, 기운 내고 나도 많이 도와 줄께, 힘 내, 알았지?" 하시고 위로 해 주셨습니다. 임종옥 선생님 께선 눈물을 닦으시고 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힘든 처지일줄 미처 몰랐다 하시면서 내가 도와주고 싶다고 하신 겁니다. 두분 선생님께서 위로 해 주고 가신 겁니다. 다음 주 월요일 점심 시간에, 임종옥 선생님이 상담실로 부르셔서 갔더니, 임종옥 선생님 께서, 큰 비닐 가방 두개를 주시며, 너에게 주는 선물이니 열어 보라고 하셔서 열어 보니, 하나는 남방, 티셔츠, 바지 팬티등이 몇벌 씩 있었고, 양말 몇벌에 운동화 1켤레 였습니다. 저희 집에 오셔서 제 신발 사이즈와 옷 사이즈를 물어 보신 겁니다. 한 가방은 각종 미술 준비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물감, 스케치북, 파레트, 붓, 물통, 판화, 조각도, 먹, 벼루, 수묵화용 붓, 화선지도 있었습니다. 사군자를 잘 그리시고 지도하신 임종옥 선생님 입니다. 임종옥 선생님 께선 "대성아, 이거 내가 네 사정이 딱해서 주는 거야. 양말도 새 거 신고 신발 새 신 신고, 이 낡은 옷 벗어 버리고 새 옷 입고 학교 다녀, 그리고 이 미술 준비물 사준 걸로 미술 준비 해와, 알았지?" 저는 정말 너무나 감사 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다가, 감격에 젖어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목이 메어 감사 인사를 드리는 저를 임종옥 선생님 께서 꼭 끌어 안아 주시고, 등을 토닥거려 주시며, "내가 네 처지를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는데, 네 딱한 사정도 모르고 그간 야단 치고 때리기만 했구나. 이녀석 가엾어서 어떻게 해, 선생님이 앞으로 많이 도와줄께. 미안하다, 대성아, 정말 미안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기엾은 녀석". 하시며, 임종옥 선생님도 저를 안고 제 등을 토닥이시며 많이 우셨습니다. 저는 너무 감사하고 감동을 크게 받았고, 임종옥 선생님의 선물과 극진한 위로에 감격에 겨워서, 임종옥 선생님의 품에 안겨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간 서러웠던 걸 다 보상 받은 기분 이었습니다. 임종옥 선생님은 제가 점심을 굶는 걸 아시고 손수 제 몫의 도시락을 보온 도시락으로 싸 오셔서 상담실로 부르셔서 같이 먹자 하시며, 저에게 따뜻한 점심 밥을 먹이신 은사님 이십니다.영양 실조로 빈혈이 있고 야위었던 저는 임종옥 선생님의 크신 사랑으로 빈혈도 나았고, 살도 오르고 키도 컸습니다. 저는 임종옥 선생님이 사 주신 의복과 양말과 신발을 신고 학교 다니고, 사 주신 미술 준비물을 열심히 준비 해갔습니다. 제 형편 없는 솜씨의 졸작을 보시고도 웃으시며 후하게 실기 점수를 주시고, 그간 감점 된 실기 점수를 모두 지우시고 무감점 처리해 주신 겁니다. 그게 늘 감사 합니다. 그토록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는데, 미술 준비를 안해갈수 없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안해가면 나쁜 놈이 되기 때문입니다. 한편 박훈규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들으니, 제가 참고서와 문제집을 못사서, 각 과목 숙제를 엉터리로 해온다고 다들 말씀 하셨다며, 집에 가보니 참고서와 문제집이 없는 게 안타까웠다고, 하시며, 13 과목 모두 참고서와 문제집을 사주시며 안고 위로 해 주실 때, 또 감동 해서 많이 울었습니다. 제 사정이 어려운 걸 아시고, 박훈규 선생님 께서 제 수업료를 분기별로, 5만6천원 씩 다 내주신 겁니다. 박훈규 선생님 께선 부모님도 편찮으시고 누나도 아프고, 네 건강도 안좋으니 일찍 가서 집안 돌보라고 하시면서, 청소 당번,야간 자율 학습, 보충 수업도 빼 주시고, 정규 수업만 받게 하시고 일찍 가라고 하신 분 입니다. 임종옥 선생님은 겨울에 춥다고 손수 목도리와 스웨터를 떠주시고 점퍼도 사주시고 장갑에 모자에, 겨울 바지와 양말도 사주신 겁니다.박훈규 선생님은 제가 중학교 졸업 후 다른 학교로 전근 가셔서,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임종옥 선생님 께선 제가 고교 진학 후에도 가끔 편지를 보내 주시며 격려를 해주신 겁니다. 제 중학교 졸업식에 같이 서셔서 사진도 찍어 주시고 짜장면도 사주신 임종옥 선생님 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 지셨고 폐 결핵 으로 돌아가셔서 임종옥 선생님께 답장 편지도 자주 못보내드린 겁니다. 아버지 께서 돌아가시고 편지를 임종옥 선생님 댁으로 보냇으나 그 때마다 되돌아와서 중학교로 보냈으나 전근 가시고 안계시다는 답장 편지를 다른 분이 보내신 겁니다. 너무 서운하게도 두분의 소식이 끊어져서 전혀 33년 째 소식을 전혀 모르고 연락처도 전혀 모릅니다. 임종옥 선생님은 그 당시 40대 후반 이셨고, 박훈규 선생님은 30대 중반 이셨던 걸로 압니다. 두분 은사님의 도움이 너무 감사해서 지금도 두분의 은사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두분 은사님을 만나면 큰절 올리고 식사 대접 이라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때 두분이 계셔서 행복 했습니다. 1986년 중 3때 경기도 평택 청북 중학교 입니다. 그후 아버님과 두분 누나는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현재 직장에 다닙니다. 목공소 에서 일을 합니다
동정따윈 안합니다... 님 생각에는 나아닌 다른 가족들이 문제가 있어서 불화가 시작된 거라 생각하겠지만,,, 님도 문제였고 다른 가족들도 문제였었을거라 생각합니다.. 님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가족들끼리,,부모 ,,형제간에 불화 참 많이도 일어납디다... 다들 나아닌 남탓하면서,,, 이런 불화가 쌓인 가족들도 많고 오히려 살아가면서 친구들보다 그래도 부모,형제간이 결국에는 서로를 위한다는 걸 깨달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구요,,, 뭐 남들 가정사 왈가왈부할거는 아니지만 누구 탓도 하지 마세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끔 각자가 선택한 길이니깐요,,, 서로를 원망하면서 살아가는게 삶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답니다..
바이올린, 기타 담당하시는 분 리듬타는 동작들이 너무 매력적이네요. 얼굴도 진짜 예쁘시네요. 옛날 기억엔 양갈래 머리하신 분이 이미지가 강해서 이분만 기억에 남았었는데, 그리고 드럼치시는분이 노래를 많이하셨었네요 대단하네요. 목소리도 예쁘시구요. 정말 가끔 한번씩 생각나는 멜로디 입니다.
캬... 나의 회사 이름이 되어준 한스밴드!! 고딩때 진짜 너무 엄청나게 한스밴드 팬이었는데... 군대 갔다가 전공 살려서 회사 다니며 5년동안 기술/영업 익히고 창업 했는데 회사 이름을 뭘로 지을까 엄청 고민하다가 내가 정말 좋아했던 한스밴드 앞에를 따서 한스테크로 지었는데 ㅋㅋㅋㅋ 참... 회사이름을 좋아했던 가수 이름으로 짓다니 ㅎㅎ 그래도 지금까지 전혀 후회는 안됨.
I was teaching in Korea when this song came out. My students were wonderful. They were warm-hearted, pure and sincere. I miss them so much and I wonder how they are now. I hope life has been kind to them.
Mr.Pearson ! we are sharing same memories thanks to RU-vid Your charming message to those Korean students will be very appreciated Hope you are doing great too
00년생인데 페북에서 선생님 사랑해요가 짧게 있길래 봤는데 중학교 체육선생님 좋아했던 마음을 잘 다루셔서 유투브로 왔어요 고등학교때 우울증 불면증으로 힘들어서 고딩때 즐거운 추억이 없고 제 추억은 중학교때 추억이 마지막이었고 애들 수도 별로 안되서 쌤들이 잘 챙겨주셨지만 그중에서 아직까지 제일 기억에 남는 쌤이 중학교 체육선생님이세요 애둘 있으신 유부남이시지만 첫사랑이었어요 교원평가로 선생님한테 하고 싶은말 적는게 있었는데 거기다가 선생님 사랑해요 평생 제 첫사랑이세요 좋아해요라고 쓰는것도 꽤 괜찮았을텐데 그런 생각도 합니다 중학교 체육선생님이 한번도 제 담임쌤이 안된게 아쉽네요 1학년때 저희학교만 따로 전교생이 영어단어시험을 본적이 있는데 제 친구는 담임쌤이 체육선생님이셨고 전 아니었지만 체육선생님이 남아서 틀린거 깜지 쓰라고 친구가 싫어했었는데 사실 제가 써주고 싶었어요 남아서라도 체육선생님이랑 같이 있을수 있게요 1학년 2학기때 이후로 영어단어 시험보는건 안했지만요 지금 중학교가면 그때 쌤들 다 계실텐데 그중에서 제일먼저 체육선생님은 먼저 봅니다 그러고 다른 쌤들보죠 그리고 마지막 갈때 또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