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머지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나님을 위하여' 48년 짧은 생을 살다 간 조지훈 시인의 '사모'는 그의 어떠한 시집에도 실리지 않았다.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유작으로서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다. 20대 대한독립 시기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사모는 평소 반듯하고 비판적이던 그에겐 다소 부끄러운 글이었는지 사모님조차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런 시를 너무도 자연스레 읊는 바다 위의 시인을 존경한다.
저도 보면서 바다 위의 시인에게 감격했습니다. 이형기의 낙화도 제대로 외지 못하는 제가 굉장히 부끄럽네요. 국문과에 재학중인 내가 과연 저 나이가 되어서 저 분보다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 그러지 못할 것 같아서 참으로 두렵습니다. 역시 사람은 (평균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으나) 학벌로도 직업으로도, 함부로 그 깊이를 가늠해서는 안되네요.
수 많은 잘못과 실수, 사소한 어긋남의 반복으로 사람들이 돌아서 내 곁에 있던 소중한 이들이 떠나갔다. 그게 어떠하다는 것이냐? 과거에 얽매여 사는 삶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보내지 않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곁을 떠나가도 누구는 나를 사랑해준다.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몸을 일으켜 찾으러 움직이면 된다. 나는 나대로, 그대는 그대의 존재 그대로 아름답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울리는 것들은 어울리는 것들 대로,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맞물려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행복이란 바보같이 믿는 것이다. 그도 그럴게, 사랑과 믿음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찾아보니 원문과 아주 약간 다른 부분이 있네요. 전 오히려 어부시인 선생님의 버전이 훨씬 더 와닿는 것 같습니다. 떠나버린이 아닌 떠나간에서 아쉬움과 미련은 날아간채 추억으로 남아 털어버린 듯한 아련함이 남네요. 그리고 영원한이 아닌 영원했던에서 그걸 과거에 머무르게 해야했을 안타까운 마음과 체념이 느껴지는 듯 해서 마음이 아프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마력이 있네요. 기간을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잡았지만 그를 영원했다 말하며 그 얼마나 아름답고 강렬했던 기억인지를 느낄 수가 있네요. 어떻게 보면 부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영원했던 사랑'의 순간을 가지지 못해본 사람도 생각보다 많을거에요. 초라해진 이란 것은 이 전은 초라하지 않았었단 의미이기도 하죠. 초라하지 않아본 적이 없는 사람도 많을거에요. 그냥 첫 플리가 이 장면과 꽤 잘어울려서 주절주절 읊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