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도 어디까지나 고려의 군사력이 받쳐주니까 가능했던 것을 알아야 함. 꼭 우리나라 역사 프로 보면 소손녕이 우둔해서 거들먹거리고 만만히 보고 있다가 당당한 서희한테 말빨로 밀리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애당초 거란은 송나라가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고려는 걍 겁줘서 송나라와의 관계를 차단하는게 의도였지 아얘 박살내겠다고 전면전을 작정하고 힘빼러 온 상황이 아니었음. 또 소손녕도 막상 와보니 고려가 그리 호락호락한 군사력이 아니라 여유부릴 상황은 아니었을거임. 그런 와중에 서희가 이런 상황을 간파하고 아 굳이 서로 할 일 많고 바쁜 처지에 힘뺄거 있소? 끝장봐도 딱히 그쪽이 좋을게 없는디? 하면서 먼저 다가와서 적당히 거란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으니, 소손녕으로선 힘안들이고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 것이고 따라서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뿐임. 주목적은 송나라이므로 고려에서 괜히 힘빼기 싫은데 고려가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 상황임. 그런데 때마침 고려가 먼저 적당히 납득가능한 협상조건만 수용해주면 거란의 목적을 달성시켜준다 하는데 소손녕은 땡큐지. 그러나 만약 고려가 말기 때처럼 개판 상태였으면 서희가 무슨 말을 해봤자 무시당했을 것임을 알아야 함. 물론 다 화친 타령하는 와중에도 당시 정세를 잘 읽어낸 서희가 대단한 감각을 지녔던 것은 맞지만, 서희의 사례를 보고 외교 협상이 오로지 명분과 말빨로만 되는 것으로 왜곡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음.
@@user-tb5qv1lz7k 소손녕 입장에선 고려가 요와 화친약속을 유지해야 자기나라 임금에게 할 말이 있으니 선물을 줄 수 밖에요 화친의 조건으로 강동6주의 소유권을 넘겨주고 전쟁을 마무리했으니 고려가 약속을 어긴다면 요나라 임금에게 문책을 당할 수 있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거란 입장에서도 서희의 제안은 달콤했음 거란은 강동6주쯤이야 작은나라 고려 정도는 언제고 정복할수 있다고 생각 했던거고 당시 거란은 거란대로 이익을 얻어 갔음 근데 서희가 대단한게 이건 시간과 장소를 버는 계책이였고 강동6주를 요새화 함 하지만 그 과정에 과로사로 돌아가심... 거란입장에서 그렇게 튼튼한 요새가 생길줄은 몰랐던거지.. 서희는 정보력과그 정보력을 활용하는 지략과 실행력까지 갖춘
그리고 당시 고려가 동아시아에서 상당한 강국이었음. 송나라도 고려 침략을 무서워할 정도로 우습게볼 국력이 아니었음 거란이 고려랑 싸우면 이기더라도 분명히 타격입고 휘청할정도의 전력이었기 때문에 서희 전략이 먹힌거지 단순히 말빨로 소손녕이 호구짓 한게 아님 서희가 위대한건 저런걸 다 간파한 통찰력이지
@@doosanbearsya 송나라가 언제 고려침략을 무서워함..? 고려에서 무서운건 고려의 국력과 군대가 아니라 활동하기 ㅈ같은 한반도지형이었음 실제로도 고려는 이후 전쟁들에서 산성끼고 싸우는건 작살나게 잘하는데 야전만나가면 말 그대로 갈려나가는 수성의민족을 제대로 보여줍니다. 귀주대첩 피1남은 거란군 뒤에서 킬딸치는걸로 제발 야전전투력 운운하지 말고;; 그건 고려의 전쟁전략이 빛을발한거지 고려군의 야전전투능력이 돋보인게 아니니까
@@arreeatr4084 그 타당한 이유를 위한 영화 대사를 만들기가 어렵죠. 적 장수와의 심리 압박전에서 우위에 있는 자를 단번에 끌어내릴 단판의 외교술 문장들... 관객들이 와 저정도의 언변은 되어야 적장수도 물러가지 할 만한 대사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겠다는 거임
고려시대때 서희가 되찾은 강동6주는 압록강 북쪽입니다 ‘강동’의 뜻은 강의 동쪽을 뜻합니다 즉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는 영토를 되찾아서 강동6주를 설치한 것입니다 만약 강동6주가 평안도라면 강남6주가 되어야 합니다 압록강 남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북서쪽 영토가 지금의 요하 동쪽 철령까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북동쪽 영토가 두만강 북쪽 688리 지점인 공험진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어있는 고려의 영토는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사]에 기록되어있는 것을 그대로 베낀것입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병도, 신석호입니다 이들은 친일파 역사학자들인데 해방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기 때문에 다 제거되거나 납북되어서 남한의 역사학계는 이들 식민사학자들만 남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계승해서 왜곡된 우리 역사를 가르쳤고 그들의 제자들도 식민사학을 배워서 또다시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의 제자들은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식민사학을 가르치고.... 그 결과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배워온 것입니다 원나라가 무너진 후 명나라가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땅으로 편입시키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자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에는 철령이 함경도 안변이라고 기술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고려는 그 땅을 지키려면 어디로 군대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함경도이겠죠? 그런데 왜 요동정벌군을 보냈겠습니까? 철령이 요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자 당시 고려 북쪽 지방의 수령들이었던 조휘와 탁청 등이 그 지역을 갖다 바치고 투항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는 고려의 북쪽 영토를 직속령으로 편입시키고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공민왕이 그 땅을 수복하기 위해 인당과 유인우로 하여금 군사를 몰아 쌍성총관부를 점령케 합니다 이때 인당은 압록강을 건넜고, 유인우는 두만강을 건넜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쌍성총관부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 교과서에는 쌍성총관부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완전히 왜곡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민왕이 북방 영토를 회복한 후 원나라가 북쪽으로 물러나자 명나라가 고려의 북방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이성계와 조민수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토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태종때 명나라와 국경을 합의했는데 고려시대때의 우리 영토였던 철령과 공험진까지를 조선의 북방 영토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이 김종서와 최윤덕을 북방으로 보내 4군 6진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 지역이 현재 우리가 간도라고 부르는 지역입니다 즉 4군 6진이 간도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대학의 역사학 교수들, 역사를 다루는 국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일제의 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곡된 우리 역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땅에 한사군(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사마정은 [사기] [하본기]의 주석서인 [사기색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위,촉,오의 분열을 끝낸 나라는 사마염이 건국한 진나라 입니다 [태강]은 진나라 무제였던 사마염의 연호입니다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의 지방행정조직을 점검하기 위해 [태강지리지]라는 지리서를 편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태강지리지]는 낙랑군이 현존했을때의 책이기 때문에 정확한 자료입니다 그리고 [태강지리지]가 당나라때에는 존재했기 때문에 사마정이 그 책을 인용해서 [사기색은]에 기록한 것입니다 갈석산은 하북성에 있는데 아주 유명한 산입니다 고조선의 영토가 거기까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주류 역사학자들은 한사군이 북한 땅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갈석산이 평양에 있습니까? 만리장성이 평양까지 내려왔나요? 평양에 있었던 것은 낙랑군이 아니라 고조선의 유민들이 건국한 낙랑국입니다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낙랑공주는 낙랑국 왕의 딸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라가 고조선을 식민 통치하기 위해 세운 낙랑군은 독립된 나라가 아니라 지방 행정 기관입니다 따라서 지방 행정 기관인 낙랑군의 수령은 낙랑왕이 아니라 낙랑태수입니다 따라서 낙랑태수의 딸은 낙랑공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북성에 있었던 낙랑군과 평양에 있었던 낙랑국은 서로 다릅니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입니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하겠습니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겠죠?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입니다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이 고조선의 땅이였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때 고구려가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거기까지 진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집니다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가 고대의 요하였고 난하의 동쪽이 요동, 서쪽이 요서였던 것입니다 우리 역사를 공부하면 애국심이 생기지도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내가 어떤 의무나 희생을 치를 가치도 전혀 못느끼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검찰처럼 자신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혈안인 것입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영달만 좇는 것입니다 이게 다 우리 역사의 뿌리가 잘려나갔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의도대로 민족정신이 말살된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 잡아서 제대로된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현재의 코로나 방역, 한류열풍, G8국가로의 진입 가능성이 타진 되는 상황등 우리의 자부심을 높이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이유도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면 우리의 원래 모습을 알 수 있고, 우리의 원래 모습이 발현되는 현상이 바로 K방역, 한류열풍, G8국가로의 진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도 제대로 설계할 수 있습니다
소손녕은 싸울 생각도 없으면서 눌러앉아서는 고려를 협박한거에요. 겁을 줘야하니까 고려에게는 자기들 수가 80만이라고 뻥을 쳤습니다. 그러나 사실 소손녕의 걱정거리는 여진족이었습니다. 서희는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너네도 바쁠텐테 고려에서 시간 낭비 그만하고 돌아가라. 여진 걱정은 하지마라. 고려와 거란이 함께 여진을 처리하자' 라고 해서 소손녕을 돌려보냈습니다. 이후 고려는 약속대로 여진을 공격해 강동6주를 확보했고 이를 대거란 방어의 거점으로 삼습니다. 거란은 눈뜨고 코베인 격이죠. 이후 거란의 대규모 침공이 2번 더 있었으나, 미리 강동6주를 확보한 덕에 고려가 유리하게 전쟁을 이끌어 갈 수 있었고 강감찬이 귀주에서 정예 거란군을 작살내면서 고려가 승리를 거머쥡니다.
@@user-rt3pi9nq1o 거란은 여진을 매우 중요하게 신경썼습니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켰으나 아직 만주를 다 장악한건 아니었고 특히 생여진의 저항이 거셌거든요. 여러 황제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여진을 완전히 복속시키지는 못했고, 훗날 완안부 여진에 의해 거란이 멸망당하게 됩니다. 여진 문제는 언제나 거란에게 중요했기에, 거란이 여진을 걱정하지 않았다는 얘기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고려가 강동 6주의 여진을 쫒아내고 영토확장을 하는걸 묵인했을 정도니까요. 참고로 강동6주는 거란과 고려가 함께 수복한 것이 아닙니다. 고려가 책임지고 그 지역의 여진을 정벌한다는 약속으로 소손녕을 돌려보낸거였으니까요. 실제로 고려의 무신 하공진은 이 약속 때문에 여진부락을 습격했다가 패배하여 유배를 가기도 하였습니다. 즉 강동6주는 공짜로 얻은 땅도 아니었고, 거란이 준 것도 아닌, 고려의 힘으로 얻은 땅이었죠. 이러한 사실관계들을 고려하지 않고, 마치 거란이 호구였다거나, 서희의 말한마디로 영토확장을 했다는 등의 시각으로는 역사에서 올바른 교훈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당시 송나라를 상대해야하는 거란이 80만 대군을 동원할리가 만무했으며 그리고 원래 유목민족은 숫자만 채운 대군보다는 기병 위주의 병력을 동원하기 때문에 한족 국가들처럼 대군을 동원하는 경우가 거의 없음. 그리고 결정적으로 안융진에서 거란군이 고려군에 깨져 판세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를 간파한 서희가 담판을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던 거임
이 영상도 그렇고 우리 역사 교과서에서도 그렇고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얻은 것만 가르쳐줌 서희로서도 저런 담판을 할 수 있으려면 그 이상의 것을 내어줘야하는데 그게 송나라였음 거란은 송을 공격하자니 연합을 맺고있는 고려가 걸렸고 고려를 치자니 송나라가 밀고오는 형상이었음 이 담판으로 거란은 고려라는 뒷배의 걱정 없이 송을 쳐 내려서 황하까지 밀어내렸고 남송의 시대가 열리게됐음 마치 히틀러가 서유럽을 치기 전에 러시아하고 불가침협정을 맺어 서부전선에만 집중했던 것과 비슷한 것임 거대한 땅덩이의 거란이나 중원의 국가들이 무슨 반도의 고려를 두려워하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인구와 식량생산등을 따져보면 고려 신라 백제등은 큰 나라였음 왜 고구려가 백제 신라를 정복하지 못했는지를 따져보면 만주와 중원의 국가들이 고려를 함부러 하지 못 했던 것을 알 수 있음
유추해볼 수가 있는 2가지가 있는데요. 첫째는 고려시대 당시 무관이라는 과거시험이 없어서 문관들이 직접 장군이 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물론 무관들 중에 공을 세워 애당초 군인인 인물들도 존재) 둘째는 설민석 쌤 강의들어보면 외세의 무언가를 격퇴하거나 물러서게 만든 인물이 있으면 그냥 장군 아니냐면서 말하는 경우가 종종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