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백제 유물들은 거의 지방군수급에 불과함 예컨데 공주,부여 무녕왕릉에서 고작 지석 하나발견 되었다고 흥분하는데...그것은 쪽팔린것임. 그러면 백제대륙설 주장하는 사람들 있던데 한번 생각해볼 가치가 잇음 지금의 백제유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고 신라를 아작내고 하는 이런 군사경제력을 고분유물에서는 전혀 찾아볼수 없음.
@@user-dd4km4ix2x 님두 흉노의 후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흉노란 민족이 단일민족인줄 아시나보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기마민족 특성상 씨족사회에서 파생된 부족사회로 대다수 운영 되었지만 그들 사이에서도 교류 및 혼혈이 많았습니다 그게 한반도에는 적용 안되었을꺼 같나요??
만주 한반도에 있었던 우리민족 국가들은 최소한 500년 600년 전통을 이었으니 당연히 뼈속까지 품성이 왕족이었지 중국처럼 길어야 200년 짧으면 몇십년 황제랍시고 산거랑 급이 다르지,,, 더구나나 소수민족과 한족이 번갈이 가면서 빼고 빼았아으니 그 왕실전통이란게 있었겠냐,,말이다,,,,, 백제 왕족들의 학문의 깊이와 품성을 보고 감탄했겠지,,,, , 같이 어울리고 싶기도 하고,,, 그 아우라가 안봐도 비디오다,,,,
I want to tell you that I am totally satisfied with this video. What an interesting story, trying to unravel the story, it is always difficult tired and late. At some points I am somewhat confused (as always) by the translations. But it is really worth it, to put a little to this type of Histories and Events, that mark the History of your Country. I definitely feel grateful for sharing this type of video Thank you very much and excellent Monday ♥
백제 태비 이야기에 찬란했던 그 백제, 그리고 그 옛날 백제 멸망의 옛 생각에 그때의 역사의 승강부침과 함께 느닷없이 가슴이 아려온다. 지금도 그 현장감속에 오버랩 되어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 백제 , 그 슬픈 역사! 그 부여 ! 그 낙화암! 그 삼천 궁녀! 그 계백 장군!!!!! < ♩ 따뜻한 봄날에 동무들과 백제의 옛서울 찾아 드니 무심한 구름은 오락 가락, 바람은 옛 대로 부는구나♪♪> 라는 옛 고성(古城), 부여에 대한 슬픈 노래와 함께! 아 ㅡ 그런데 의자왕의 증손녀가 당나라의 태비가 됐었다니 그 말에 가슴이 아리도록 가슴이 찡 ㅡ하고 지금 작금의 역사 스페셜 같아 만감이 교차함은 왜 그럴까? 내가 백제인 이어서 그럴까? 망국 한(恨)의 역사의 소용돌이를 보는듯 너무 가슴이 메어온다. 물론 삼국통일은 대단히 환영하고 있지만 고색 창연한 슬픈 역사는 역시 그대로 슬픈 역사이니까·· ·· · ·· ··
역사를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만 보아서는 안될 겁니다.특히 왜곡된 우리 역사를 기준으로 본다는 것은 어쩌면 남의 다리 긁는 격. 천문 연구가들에 의하면 백제는 중국동남 해안을 낀 양자, 황하강 중류 일원이다. 저희 시조가 공주강 사공으로 나오는데 그 분의 300년전 할아버지가 공주강 유역에 상단을 거느렸다고 나옵니다. 한반도 공주강에 상단이 뜰 수있는 기반이 역사상에 있었던가요. 저는 양자강 중류의 한 지류였을 것으로 봅니다. 황산벌도 지금 중국 황산(중국 사람들은 엣 고구려 금강산이었다고...) 앞의 툰시라고 하는 황산시가 있는 황산벌일 것으로 봅니다. 노고에 감사드리며 보다 열심히 잃어버린 역사찾기에 힘써 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지금의 전라도 사람들이 호남사람들이 아니란 것도 증명이 되어 늘 지방색으로 애꿎은 오해와 피해를 받는 일도 수정할 수 있을 겁니다. 춘천 mbc 에서 일했던 동지입니다. 지금은 캐나다에서 잃어버린 역사들을 찾고 ...
이순신 장군을 중원의 한수와 한성을 중심으로 파 보셨으면 합니다.개인적으로는 너무 힘들군요. 오래전에 중국 시골을 돌아 다닐때 한국 한양(서울)에서 왔다고 하니 한성이라고 주장을 하다가 슬며시 말을 피하는 것이 뭔가 아는데 말할 수 없다는 뉘앙스 였읍니다. 당시는 중국 시민과 대화도 함부로 못하게 공안들이 감시를 할때라...이순신 장군도 양호를 끼고 한수를 따라 북족으로 가서 임금을 배알했다고...충무에서 서을은 당시 배로는 며칠 걸려야 하는데 부지런히 다녀 온 정도로... 한강은 서해를 돌아 서에서 동쪽으로 가야 한양에... "사공의 노래' 작사자라는 황해도 분이 한양서 배를 타고 강릉으로 달맞이를 가서 썻다고 하는데 서울에서 배를 타고 강릉! 말도 안돼죠. 중원 한성에서 한수를 타고 오후에 남쪽으로 내려 가면 굴원으로 유명한 강릉에서 달맞이가 가능할 겁니다. 유네스코에 돈을 엄청주고 한국 태백산맥 대관령 산신령을 모시는 강릉 단오제를 빼앗아 가려다 못하니, 굴원을 기리는 중국 강릉 단오제라고 급조된 것을 유네스코에 올렸죠. 오래전에 강릉 단오제 특집하고, 나중에 자문을 할때 중국 관리들이 수십명씩 답사를 오더니 그들이 제가 캐나다로 떠난 뒤 그런 행패를 부렸다고. 좀더 자세 한 것은 전주 분인가 강상원 박사님이 더 자세히 아실 겁니다. 아리랑과 함께 빼앗아가려고 할떼 강박사님이 큰 수고를 하셨자고...
역사는 어떻게 변화를 시켜도 작은 불씨와도 같아서 흔적만 있다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게 돼있다. 지금으로부터 1000년이 지난 역사를 현재 알게된다는 사실이 새롭기도 하지만 무섭기도 하다는 것이다. 100년도 못살고 사라져 가는 삶을 살면서 온갖 행동으로 문제들이 많은 현실에서 역사는 되도록 인간답게 살라고 가르쳐 주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으니 이것또한 인간의 능력밖이 아닌가 싶다. 부.여.태.비 이사람은 1000년이 넘은 역사속의 인물이라지만 한인간을 후손이 표현하는데 있어서 현재까지 받은 표현중에 최고의 표현을 받은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한다. 가을의단풍.봄의 숲.남국의 얼굴이라니.....정녕 사람에게 이런 표현이 가능한 것인가...
의자왕이 해동증자 라 불리며 신라성 40개를 뺏기도 했지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돌려주게 되는등 당나라로 의해 망하고 당나라로 끌려가서 죽기까지 했는데 나라를 위해 아내를 죽인 남자랑 결혼을 결심했을 공주님 마음이 안쓰럽네요 마지막 백제 가 발해에 의해 멸망 하다니 씁쓸하네요
황하강 중류의 백제 동명도독부가 서안까지의 거리보다, 양자강 중류에 위치한 덕안도독부가 직선거리로는 비슷하지만, 훨씬 먼거리 입니다. 태산 왼쪽의 비성에서 보자면 모를까, 서안에서 보자면 동명도독부의 수장이 누가 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후 당나라는 신라와의 9년전쟁에서 백제계의 향방으로 인해 승패를 가르게 되고, 다시금 옥토에 대한 진입이 좌절되게 됩니다. 현재의 동명,덕안도독부는 그러한 노력의 흔적이며, 부여태비에 대한 기록은 그러한 노력의 여망이 되겠습니다. 이후, 옥토에 대한 진입이 좌절된 당나라는, 옥토의 입구를 지키다가 거란(요)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설명이 좀 부족한 듯해서 당나라 역사서를 찾아보니.. 위황후가 남편인 황제(중종)를 독살한 것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는데, 위황후의 여동생의 남편이었던 괵왕 이옹(李邕)도 같이 숙청될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스스로 처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조정에 바치고 살아남았다고 하네요. 당시대 사람들도 이옹의 이러한 행실을 더럽다면서 비웃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