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로의 어원은 고구려의 이라고 본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에서 온 말이다.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는 광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곳곳에 성을 짓는데 그것을 즉 이라고 한다. 현재 벽이나 울타리와 같은 이라는 뜻으로 단어가 남아있다. 따라서 백제 역시 고구려의 다물 정신과 마찬가지로 을 같이 사용했다. 백제의 역시 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기록과 지명에서 다물은 담울, 담우로, 담라, 담로, 담, 담수, 담물 등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인 도 담로에서 온 것이므로 백제의 담로국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대마도도 로 바뀐 백제의 담로국이다. 대마도 주민의 유전자는 오히려 한반도 사람들의 것과 같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류큐제도 오키나와에는 이 있다. 남송 때의 조여괄이 지은 [제번지]에는 류큐제도의 이시가키시마에 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는 의 음을 한자인 자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은 이라는 뜻이다. 즉 이다.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북제서]에 의하면 571년 북제의 후주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라는 직을 제수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570년(위덕왕 17년) 북제의 후주가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571년(위덕왕18년) 북제의 후주가 다시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로 삼았다. [독사방여기요]에 의하면 동청주의 치소는 불기성으로서 즉묵에서 서남쪽으로 5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동청주는 현재의 청도(칭다오)이다. 따라서 북제가 백제왕에게 동청주자사직을 준것은 백제의 청도(칭다오)에 대한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광동성 혜주 혜양현에 담수항, 담물터가 있으며, 광동성 서쪽 뇌주에 담수채, 담물울이 있으며 해암도 바로 앞이다. 광동성 흠주, 광주만은 과거 담수만, 담물만으로 불리웠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고대 백제는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대만은 원래 담모라국 혹은 탐모라국이다. [수서] [백제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대만은 남북 386km(965리), 동서 144km(360여리)이며 사슴항구라고 불리는 이란 항구가 있다. 그리고 명나라 때부터 대만 토착민들이 사슴 가죽을 복건성에 내다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대만에는 여전히 라는 지명이 있다. 역시 담로계 지명이다. [동서양고]에 필리핀 밀안항 남쪽에 이 있다고 적혀 있으며 현재 이곳은 필리핀 루론섬 서북쪽의 유감항의 남쪽으로 추정한다. 는 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므로 은 라는 뜻이다. 즉 담로항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중부 아로국에도 담수항이 있었다. 원나라 [도이지락]에는 으로, 명나라 마환의 [영애승람]과 공진의 [서양 번국지]에는 으로 기록되어 있다. 담수항과 담양, 담안은 모두 같다. [순풍상송]에는 라고 적혀있다. 이곳은 카리만탄으로 추정된다. 은 으로 읽을 수 있는 담로계 땅 이름이다. 베트남의 은 과 발음이 유사한 전형적인 담로계 지명이다. [명사]에서는 태국을 섬라(siam)라고 지칭한다. [순풍상송]에는 부터 까지의 항로에 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Siam과 섬라 역시 나 에서 변한 것이다. [동서양고]에 주석을 붙인 [풍토기]에 근거하여 을 캄보디아의 로 본다. [일본서기]에는 라고 적혀있다. 말레이시아 은 과거 으로 불리었다. 남송 때 조여괄의 [제번지]에 이 처음 기록되며, 원나라 때 왕대연의 [도이지락]에도 이라는 지명이 있다. 정광유와 서성모의 [중국역사지도]에는 이 말레이 반도 동남쪽의 큰 섬 이라고 언급한다. 은 마을을 의미한다. 단마령의 는 한자 이다. 또한 는 또는 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가 되므로 담로계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티모르’라는 지명은 를 뜻하는 와 발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백제인들이 와서 담로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백제 항해술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까지 갈 수 있다면 당연히 티모르도 충분히 갈 수 있다. [순풍상송]에는 석관산(실론, 스리랑카) 북쪽에 석성초라는 곳을 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물 수)와 마(말 마)는 모두 을 훈독한 것이니 , 즉 이다. [도이지락]에는 싱가포르를 과거에 이라고 불렀다고 적혀있고, 명나라 모원의의 [무비지], [동서양고], [순풍상송]은 모두 을 이라 기록하고 있다. 은 영어로 Tamasek이나 Tumusik이라고 적는데, 당나라 중엽부터 싱가포르를 왕래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그곳을 타누마(Tanuma) 또는 티유마(Tiyuma)라고 부른 것을 볼 때 당나라 이전부터 이미 이 존재한 것이 분명하다. 백제는 대만 너머 동남아시아에 여러 개의 담로를 설치하고 예상보다 막강한 교역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횡포에 가까운 전권을 종종 행사했다. [일본서기]에는 라고 적혀 있다.
고조선의 강역은 중국의 동부 지역, 내몽골 지역, 발해만 지역, 만주 지역, 한반도를 포괄했다. 고조선의 유물인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의 분포 범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만주 지역과 내몽골, 발해만 지역을, 백제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남부지역, 한반도의 서쪽 지역, 일본을 장악했다. [삼국사기] [고구려 모본왕 본기] 2년(49) [후한서] [광무제 본기] 25년(49) [후한서] [동이열전]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 본기] 3년(55) 고구려 1대 태왕 추모왕(주몽)의 연호는 ‘다물’이다. 다물은 옛 땅을 되찾는것을 뜻하는 ‘다시 무르다, 되물리다’이다. 즉 고구려는 고조선의 땅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을 공략했다. 모본왕때 고구려가 후한을 공격한 지역은 북경을 포함한 화북 지역이다. 그런데 요동태수가 화친을 청했다는 것은 후한이 전쟁에서 지고 항복한 것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동태수이다. 고구려가 후한의 화북 지역을 공격했을때 고구려의 맞상대가 요동태수였다는 것은 그 지역이 요동지역이라는 것을 뜻한다. 즉 고대의 요동은 북경 인근 지역이었던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요동은 요나라때부터 굳어진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는 모본왕때 후한의 요동을 공격해서 요서 지역까지 차지했고, 태조왕때 요서에 10개의 성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고구려는 요동 지역을 두고 중국과 1진 1퇴를 반복하다가 광개토태왕때 요동을 완전히 장악한다. 수나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때 수당군이 집결한 지역은 북경 근처의 탁군이다. 그런데 왜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한국 군대가 북한으로 처들어간다면 어디서 군대가 집결할까? 당연히 휴전선 근처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간다. 하지만 목포나 부산에서 집결해서 북한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그 당시 고구려와 수당과의 국경이 북경 근처였기 때문에 수당군이 탁군에서 집결했던 것이다. 그러면 고대 요동의 위치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지역과 달라진다.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가 고대의 요하였고 난하의 동쪽이 요동, 서쪽이 요서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 [삼국사기] [백제 동성왕 본기] 10년(488) [자치통감] 영명 6년(488) [남제서] 현재 한국의 강단 식민사학자들은 북위가 배를 타고 충청도 지역에 와서 전쟁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남제서]에는 북위가 기병 수십만을 이끌고 백제와 전쟁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군선 1척에 말 10마리를 싣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병 수십만이 배를 타려면 배를 수만척이나 만들어야 하는데 이게 가능한 일인가? 백제의 영토가 대륙에도 있었기 때문에 북위의 기병 수십만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백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하는데 그 지역이 다 중국 땅이다. 이것만 봐도 전쟁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는 자명한 것이다. 그리고 동성왕이 장군들을 왕이나 후로 봉했다는 것은 백제 왕이 황제라는 것을 뜻한다. [남제서] [백제전] 동성왕이 위나라 군사를 물리치는데 공을 세운 백제 장수들에게 관직을 수여하고 이를 남제에 통보한 국서가 나온다. 그 중 한 구절은 라는 것이다. 면중왕에서 도한왕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으로 백제 황제 수하에 서열에 따른 여러 왕이 있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로 승진시켰다고 [남제서]는 말하고 있다. [송서] [백제전] [송서]에는 백제 개로왕 여경이 송나라에 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요청했다는 것은 윤색이고, 사실은 통보한 것이다. 흉노는 황제인 대칸이 중앙을 다스리고, 우현왕과 좌현왕이 좌우 강역을 다스렸는데, 대륙과 반도와 해양에 걸친 대제국 백제도 넓은 강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서 백제 임금 아래 우현왕과 좌현왕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중국에도 알려져 있어서 [양서] [백제 열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구당서] [백제전]에는 라고 해서 백제왕이 거주하는 왕성이 둘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동왕성은 한반도, 서왕성은 대륙에 있었을 것이다. 백제는 요서와 일본은 물론 각지에 담로(후국)를 갖고 있던 황제국이었다. [통전] [백제전] 요서군과 진평군이 오늘날의 유성, 북평(북경) 사이라고 위치까지 표시해 놓음 [양서] [백제전] 여기에서 백제가 도읍을 대륙에서 반도로 옮긴 것인지는 연구가 필요해 보임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백제는 고조선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고구려에는 다물(담울=담으로 친 울타리, 즉 고구려 성을 뜻함)정신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담로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 역사서들이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고 하고, 현지 중국 교수, 현지인들까지 요서가 우리가 아는 요서보다 서쪽이라고 하는데, 그놈의 강단사학계는 요서백제를 부정하고 있다. 심지어 공무원 되려는 아이들 가르치는 서울대출신 강사라는 사람은 요서백제를 부정하던데 그 이유가 그걸 주장하던 사학자가 한 명이라고 해서 그렇단다. 우기는 사람이 많으면 진실인가? 논리에 기가 찼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역사학계도 청산해야 합니다. 아래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이병도 신석호 계보와 국내 역사 단체들. 이 단체들 중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동북아 역사재단에 국민 세금으로 300억씩 지원됩니다. ******************** 주류 사학(식민 사학 추종) 계보 / 매국 역사 학술 단체 1. 일제의 식민사관을 만들어낸 조선 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일본인 학자들 : 요시다 도고, 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우키치, 이케우치 히로시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쓰에마스 야스카즈 2. 조선사 편수회 고문 명단 : 이완용, 권중헌, 박영효, 이진호, 유맹, 어윤적, 이능화, 최남선 3. 수사관 및 수사관 보 : 신석호, 홍희(수사관), 이병도(수사관보) 4. 식민 사학 1세대 : 이병도, 손진태(서울대), 신석호(고려대) 대표적인 친일파(이병도, 신석호) 5. 식민 사학 2세대 :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한림대),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룡, 유원동, 김정배, 변태섭, 이선근, 김용덕 6. 식민사학 3세대 : 노태돈(서울대, 송호정 지도교수), 주보돈(경북대), 이기동(동국대), 조인성, 서영수(단국대), 이광린, 배기동, 안휘준, 이선복, 조유전, 손병헌, 이종욱 7. 식민사학 4세대 : 송호정(교원대), 임기환(서울교대), 김태식(홍익대), 정재정, 정요근(덕성여대), 김현구(고려대), 하일식(고대사학회, 연세대), 오강원(한국학 중앙연구원, 고고학), 공석구(한밭대) 8. 식민사학 5세대 : 심재훈(단국대), 박준형(연세대), 이진한(한국역사연구회,고려대), 이근우(부경대) 백경식(한국역사문제연구소), 한상권(덕성여대), 오수창(서울대), 홍종욱(한국역사연구회,서울대), 이후석(숭실대), 배성준, 박선미, 연민수(동북아역사재단), 이영식(인제대, 와세다대 박사학위), 기경량(가톨릭대), 이문영('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 운영자, '유사역사학 비판 저자), 안정준(서울시립대) 등 9. 주요 역사 학회 단체 : 동북아 역사재단, 한국학 중앙 연구원, 한국 고대사 학회, 한국 고고학회, 한국사 연구회, 한국상고사 학회, 한국 서양사 학회, 한국 서양 중세사 학회, 한국 역사 연구회, 한국 교육 학회, 한국 중세사 학회, 역사교육학회, 일본사 학회, 아시아 평화 역사 연구회 등…
그게 바로 식민사학이죠.. 정말 모르시나요? 아실 듯 한데..ㅋ 지금 현재 중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일제 때 왜놈들이 확정해놓은 반도사관을 이병도 같은 식민사학자에 의해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가르치는 것으로 해방 이후에 한 번도 그 내용이 정말 맞는건지 제대로 된 검증과 연구가 없었죠..
역사는 짓밟히고 혼은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고 매국 사학에서는 감추기 급급한 진실의 역사 그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라할 대륙 백제를 다룬 방송을 보았습니다 역사의 진실을 찾고 조상들의 기개를 조명하려는 시도는 높이 살만하지만 시청하는 내내 답답한 심정입니다 식민 사대 매국 사관이 온 나라에 뿌리 깊히 박혀있습니다 스스로 자기 눈으로 자기 역사를 보는 자주 주체 역사관을 너무 잃어버린 듯 합니다 중화사대 일본 식민 역사관에 중독되어 습관적으로 자꾸 남의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보고 있으니 대륙 백제의 실체를 정확히 보지 못 하고 있는 점 안타깝습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입니까? 삼한으로 강역을 나누어 다스리던 역대 단군의 조선이 막을 내리는 와중에 중국과 접한 번한은 위만정권이 들어섰고 진한은 북부여가 국통맥을 이었습니다 마한 땅인 한반도로 분열의 충돌의 혼란에 빠진 시기에 북부부여 7대 단군이며 고구려의 시조가 된 고주몽 동명성왕으로부터 대륙 백제의 뿌리를 찾아야 옳습니다 고두막한이 한무제를 격퇴하고 혁명으로 북부여 5대 단군에 즉위하니 북부여 시조 해모수의 후손인 주몽의 가계는 동부여로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왕위 계승의 경쟁자가 될 주몽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눈치채고 주몽이 다시 북부여로 돌아가니 6대 단군이 후사가 없어 공주 소서노와 고주몽을 결혼시켜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습니다 주몽은 소서노와의 사이에 비류와 온조를 두었으나 동부여에서 낳은 유리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소서노는 골육상잔의 비극을 피하고자 두 아들과 지지 기반을 이끌고 새로운 영토 개척을 떠나는 대국적 결단을 내린 것이 바로 대륙 진출의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나라 이연수의 북사와 위징의 수서에도 기록이 남아있고 삼국사기에도 소서노와 두 아들의 여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실의 역사를 바로 보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고이왕 이전은 국가가 성립되지 않았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 역사학계라고 합니다 고구려는 6대 태조왕부터 신라는 17대 내물왕이 되야 국가 단계에 이르렀다며 삼국사기 초기 역사를 부정하며 멀쩡한 상고사를 통째로 지워버리고 있는 사학자라는 반역자들은 일본제국주의와 중화팽창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주몽은 천자로서 자신의 연호를 다물이라 하였으니 이는 고토를 회복하자는 말입니다 18대 환웅들의 나라 배달국과 47대에 걸친 역대 단군들의 조선이 다스리던 강역과 동북아의 지배자로서의 민족 정기을 되찾아 문명의 선도국으로서 주도권과 세계 질서를 다시 세우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던 것입니다 주몽이 회복하자는 고토는 북부여가 계승한 단군조선과 배달국의 강토를 말합니다 만주 내몽고 요동 요서 산동 그리고 돈황에 이르는 황하 일대의 광활한 영역일 것입니다 고구려의 역사 계승의식은 영락대제 광개토태왕 비문에도 나타납니다 출자북부여라 하여 북부여 계승을 천명하고 있는데 부여는 초대 단군왕검의 4째 아들 부여의 이름입니다 소서노가 이동한 지역은 옛 조선의 중국 접경 즉 예전의 요하인 지금의 난하 유역인 것입니다 오늘날 요하가 당시의 요하는 아니라는 것이 지리서나 역사서에서 이미 드러났습니다 현재의 북경인근에 정착한 소서노의 무리는 소서노의 사후 비류를 중심으로 중국에 잔류하는 무리와 온조를 따라 한강으로 진출한 무리로 나누어졌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역사임에도 우리 역사에는 그런 진실이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라는 것은 사마천이 사기에서 왜곡한 사기극과 일본제국주의가 말살한 거짓의 연대기입니다 상나라의 후예이면서도 주나라의 예와 악으로서 새로운 이상국가의 질서를 세우던 공자는 중화의 뿌리인 배달과의 인연을 부정하고 하화 중심의 독자적 세계관을 펼치고자 춘추를 편찬했습니다 중원 지역주의에 기반한 자주 독립의식이 만들어낸 새로운 민족주의 역사관이 공자가 뿌린 악의 씨앗 이른바 춘추필법이며 사마천이 사기에서 배달의 중원 지배 역사를 왜곡하여 주종관계를 바꿔치기한 역사 사기극이 완전범죄로서 우리 배달을 반도 사관에 철저히 가두어 노예로 길들여 왔던 것입니다 측소 왜곡된 거짓 역사를 팔아 일신의 영달을 쫓는 역사 매국노들을 하루 빨리 처단하고 우리 눈으로 주체적인 진실의 역사를 하루 빨리 바로 세워야 합니다 대륙의 지배자는 우리 배달이었으며 중화는 우리 선조들의 종놈들이었던 것입니다 18대에 이른 환웅들께서는 신시에서 개천한 이래 청구로 도읍을 옮기며 동북아 문명의 뿌리가 되었고 중원까지 태호복희씨 염제신농씨 등을파견하여 식민 경영하였으며 상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단군조선이 중원을 지배하에 두었다는 것이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진실입니다 양직공도에서 백제가 진출한 요서를 낙랑군이라하고 합니다 중국 한족이 스스로 낙랑을 난하 서쪽이라고 증언하는 하고있습니다 더 나가서 남사와 송서에서는 대륙 백제 뿐만 아니라 22담로를 개척한 해양제국 백제의 찬란한 역사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백제부흥군으로 활동하다 당의 장수가 된 달솔 흑치상지는 동남아에 위치한 담로 출신이라 합니다 중국의 각종 사서들이 압록이나 살수 등이 모두 요하 일대에 있고 평양은 오늘날 요양임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국 사학은 단군과 그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고 존재하지 않은 한사군 낙랑을 평양에 두며 우리의 역사를 반도에 가두니 우리의 조상과 뿌리와 얼을 팔아먹고있습니다 배달국도 단군조선도 대부여도 북부여도 동부여 갈사부여 졸본부여 연나부여 남부여 등등 우리는 모두 조선과 부여에서 나왔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의 뿌리는 대륙에 있습니다 자기 조상의 자취 그 영욕의 역사를 온전히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더이상 굴욕의 사대를 이어가서는 안됩니다 이런 거짓 역사를 아무 생각없이 배우고 종놈들의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부끄러운 역사의식을 하루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역사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처럼 유동적이며 달처럼 차고 기우는 것이 이치입니다 과거의 중원과 동북아가 요동치며 역사가 굽이쳐왔듯 지금의 중국이 영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중화가 우리 한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주나라에 이르러서였으며 동북아의 맹주로 활약한 시기는 기껏해야 한 당 명 세 왕조 정도입니다 반면 우리 한민족은 반만년 이상 중원과 동북아의 맹주로서 인류 문명을 선도해왔으니 온 겨레가 대배달의 혼을 가슴 깊이 간직한다면 영광의 역사는 다시 차오를 것입니다
진출이 아니라 원래부터 터를잡고 살았던곳입니다. 처음 이내용을 접하시는 분들은 다소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겠죠?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교과서에서 접할수 없기 때문이고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가진적이 없다고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역사가 진리로 다가올때 우리는 현재의 역사교육에 분노해야 합니다. 정보화시대에 쓰레기 정보도 넘쳐나지만 수많은 실사료와 검증으로 유익하고 놀라운 정보들이 가득합니다. 우리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역사역자들이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참역사 밝히기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남아있던 고구려 백제지명이 동부공정에 의해 사라지고 있습니다. 요동, 요서, 산동이남 해안지역은 본디부터 동이족이 살던곳임은 현재중국조차 인정하는 바입니다. 최근 그지역에 동이박물관마저 지어진것을 우리들은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동안 동이는 우리와 상관없는 관계가 되고 결국 역사를 빼앗기게 되는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칭하는데 앞서 동이족 앞에 붙는 단어는 바로 천산 동이족 입니다. 천산에서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하여 한반도 땅에 이르는 과정에서 과연 그 당시 드 넓고 비옥한 공지를 놔두고 굳이 한반도 땅 이어야 할 이유가 없지요 다만 한반도와 동북권역을 차지했을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혜택 즉 치수(治水)의 문제 때문 입니다. 지금 중국이 끊임없이 티벳과 우리나라를 압박하여 개소리를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양쪽에서 발원지를 끊게 되면 중국은 전쟁이 아닌 굶주리고 목이 말라 죽을 형편이기 때문이지요 중국 동부지역은 한반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옥토가 비옥합니다. 물론 이런 치수사업이 문제가 없을때 가능한 이야기 이지요 과연 이런 땅을 우리 선조들이 그냥 놔두고 굳이 한반도 라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 큰 메리트가 없는 땅에 하등 목숨을 걸 이유가 없지요
난하→요수(요하),난하 동쪽→요동,난하 서쪽→요서,압록강→현 요하,태백산(백두산은 가로로 일천리 라고 조선후기 김정호가 만든 목판인 대동여지도 발문에 나온다)→길림합달령 ,토문강→휘발하,이다,현재의 갈석산과 창려는 진시황의 만리장성 동쪽 끝인 낙랑군 수성현,즉 지금의 하북성 창주시 일대에 있었는데,명나라가 명만리장성을 만들면서 이동시켜 현재의 난하동쪽에 갖다 붙인 허구의 지명 이다.백제가 부여와 싸웠다면 당연히 난하의 요동과 요서의 북쪽이자 고구려 서북쪽인 요북이며 해모수가 세운 (북)부여를 말한다.요동은 넓기 때문에 요동벌 이라고 하지만 요서벌 이란 말은 없다.따라서,한반도 보다 큰 땅은 요서가 아닌 요동 이 된다.현 요동은 현 요하동쪽 일대 빼고는 장백산맥이 지나가는 산악지대 이다.또한,원래 요동에는 반도가 없는데 현 요동에는 현 요동반도가 있으므로 진짜 요동이 아님을 알 수 있다.백제가 지배한 요서가 현 요서 이면 백제가 고구려 영토와 맞먹을 정도로 크거나 고구려 보다 클 수도 있는데 백제건국 이래 백제 멸망 시 까지 백제 영토가 반도백제와 대륙백제 합쳐 고구려 보다 컸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요서문명 이라는 홍산문화도 요동문명 으로 명칭 바꿔 줘야 한다.신라의 최치원이 남긴 기록에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때 병력은 백만 이었고,영토는 오월 지방 까지 였다" 라고 하였고 삼국사기 에는 " 백제가 (선비족의) 위나라(인 북위나 동위)와 전쟁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중국을 통일한 서진 이 흉노계 국가에 멸망한후 양자강 이남에 동진→송→제→양→진,이 차례대로 들어섰다가 망하는데 이들 나라에 백제가 중국땅에 있었다 하므로 대륙백제는 사실로 봐야 한다.현 시대의 사람들이 오래전 부터 잘못되고 왜곡된 지명과 역사를 바로 잡는건 옳지만,반대로 선대에 올바르게 기록한걸 후세 사람들이 왜곡한걸 인용 해서는 안된다.예를 들어 현 요하는 거란의 요나라 가 붙인 강 이름으로 한국인 이나 한민족은 압록강(압록수) 으로 원래대로 돌려놔야 옛 기록들 하고 일치 하게 된다.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 뗏목을 타고 바다 건너 동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 라고 했는데,산동반도 에서 현 요동반도 사이가 바다로 가까우므로 뗏목을 타고 건너는게 가능했고 당시 요동반도에는 (단군)조선이나 그 제후국(지방정부국)이 존재 하고 있어서 그렇게 표현 했던 것이다.고려시대에 송나라의 서긍이 사신으로 다녀간후,선화봉사 고려도경 이라는 책을 썼는데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 바다 건너 고려땅이 보인다" 라고 서술 하였다.산동반도 에서 바다건너 육안 으로 현 요동반도가 맑을 날에 보이며 그 건너편이 왕건이 세운 고려가 현 요동과 현 요동반도를 지배한 나라임,을 증명하는 기록이다.따라서,문헌과 과학적증거가 일치하는건 사실로 봐야 한다.
@@kb-nd5mf 조선총독부가 만든 역사학계도 청산해야 합니다. 아래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수회, 이병도 신석호 계보와 국내 역사 단체들. 이 단체들 중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동북아 역사재단에 국민 세금으로 300억씩 지원됩니다. ******************** 주류 사학(식민 사학 추종) 계보 / 매국 역사 학술 단체 1. 일제의 식민사관을 만들어낸 조선 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일본인 학자들 : 요시다 도고, 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우키치, 이케우치 히로시 이마니시 류, 이나바 이와키치, 쓰에마스 야스카즈 2. 조선사 편수회 고문 명단 : 이완용, 권중헌, 박영효, 이진호, 유맹, 어윤적, 이능화, 최남선 3. 수사관 및 수사관 보 : 신석호, 홍희(수사관), 이병도(수사관보) 4. 식민 사학 1세대 : 이병도, 손진태(서울대), 신석호(고려대) 대표적인 친일파(이병도, 신석호) 5. 식민 사학 2세대 : 고병익, 천관우, 이기백(한림대), 차하순, 한우근, 김철준, 김원룡, 유원동, 김정배, 변태섭, 이선근, 김용덕 6. 식민사학 3세대 : 노태돈(서울대, 송호정 지도교수), 주보돈(경북대), 이기동(동국대), 조인성, 서영수(단국대), 이광린, 배기동, 안휘준, 이선복, 조유전, 손병헌, 이종욱 7. 식민사학 4세대 : 송호정(교원대), 임기환(서울교대), 김태식(홍익대), 정재정, 정요근(덕성여대), 김현구(고려대), 하일식(고대사학회, 연세대), 오강원(한국학 중앙연구원, 고고학), 공석구(한밭대) 8. 식민사학 5세대 : 심재훈(단국대), 박준형(연세대), 이진한(한국역사연구회,고려대), 이근우(부경대) 백경식(한국역사문제연구소), 한상권(덕성여대), 오수창(서울대), 홍종욱(한국역사연구회,서울대), 이후석(숭실대), 배성준, 박선미, 연민수(동북아역사재단), 이영식(인제대, 와세다대 박사학위), 기경량(가톨릭대), 이문영('초록불의 잡학다식' 블로그 운영자, '유사역사학 비판 저자), 안정준(서울시립대) 등 9. 주요 역사 학회 단체 : 동북아 역사재단, 한국학 중앙 연구원, 한국 고대사 학회, 한국 고고학회, 한국사 연구회, 한국상고사 학회, 한국 서양사 학회, 한국 서양 중세사 학회, 한국 역사 연구회, 한국 교육 학회, 한국 중세사 학회, 역사교육학회, 일본사 학회, 아시아 평화 역사 연구회 등…
중국사서에서도 인정하고 있는데 중국, 일본 눈치보지 말고 우리 교과서에 삽입하라. 백제가 중국, 일본의 상당한 광역을 지배 했었다고 지금 영토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 한민족의 기상을 세계에 알릴수 있다. 지금은 분단까지되어 영토에 있어 이모양 이꼴 이지만 언젠가 과거처럼 치고 나갈수 있음을 우리 후세에 알려야 한다
구한말에도 압록강 두만강 이북 700리가 조선영토란 기록이 있다. 일제가 만주철도권과 우리영토를 우리 허락없이 중국에게 넘긴 것이다. 조선 시대 세종대왕의 북벌정책을 제외하고는 조선 건국후 명나라 제후국임을 자청했고 만주일대 영토를 관리한 관심도 능력도 없었던것이다. 이성계가 반란일으키고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 받기위해 주권을 넘긴것이 오늘날 미국에 전작권을 넘긴것과 흡사하다. 오는날 까지 친일매국 잔재들이 지들의 극악무도한 반민족 중죄를 숨기고 미화하고 정당화 하기위해 (예:박정희 쿠테타로 정권탈취, 등) 민족의 기상과 찬란한 역사를 조작-왜 -절딘 하며 죽자 살자 발악하는 것이다. 애국 민족주의 깨시민도 적페세력 척결 하는날 까지 독립투사 처럼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
고대 중국이 있었던가요 대부분 북방계 동이족 왕조와 여타 종족들이 난립하던 땅이 중원이엇음 중국은 화하족 이라고 하지만 뿌리가 불분명하고 사실상 한나라 유씨정체성 숭배한 자들이라고 봐야함 한 송 명 이외 나머지는 북방계 종족들이 남하해 정복한 나라들임 수당은 고구리 계승한 모구리 즉 몽골이 점령 지배하고 금나라는 스스로 밝히듯 신라후손임
대륙백제는 한반도 땅 크기가 넘는 강성한 국가를 이룩하고 있었다. 고구려와 중국 대륙에서 영토 싸움을 했었지 그리고 식민사관을 가진 역사학자에 의해서 고구려의 영토가 많이 왜곡 되었다. 고구려는 베이징을 지배 했었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살수는 청천강이 아니라 황허강이다.
담로의 어원은 고구려의 이라고 본다. 고구려가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에서 온 말이다. 동북아 최강국 고구려는 광대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곳곳에 성을 짓는데 그것을 즉 이라고 한다. 현재 벽이나 울타리와 같은 이라는 뜻으로 단어가 남아있다. 따라서 백제 역시 고구려의 다물 정신과 마찬가지로 을 같이 사용했다. 백제의 역시 에서 비롯된 것이다. 동아시아의 기록과 지명에서 다물은 담울, 담우로, 담라, 담로, 담, 담수, 담물 등 여러 가지로 존재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인 도 담로에서 온 것이므로 백제의 담로국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대마도도 로 바뀐 백제의 담로국이다. 대마도 주민의 유전자는 오히려 한반도 사람들의 것과 같다는 것은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 류큐제도 오키나와에는 이 있다. 남송 때의 조여괄이 지은 [제번지]에는 류큐제도의 이시가키시마에 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는 의 음을 한자인 자로 적은 것이다. 따라서 은 이라는 뜻이다. 즉 이다. [북사] [백제전]에는 라고 되어있고, [주서] [백제전]에는 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 백제 본국이 중국의 왼쪽에 있을 수 없으므로 중국 내부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남제서]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 장군들이 북위와 싸워 승리한 후 남제가 광양, 조선, 대방, 광릉, 청하, 성양의 태수직을 백제 장군들에게 제수했다. 물론 실제로는 동성왕이 제수한 후 남제에 통보한 것이다. 광양은 현재의 하북성 융화로서 난하 상류 유역이고, 광릉은 현재의 강소성 양주 지역이며, 청하는 현재 산동성 익도이다. 그리고 하남성에는 아직도 백제라는 지명이 여러 곳에 존재한다. [북제서]에 의하면 571년 북제의 후주가 백제 위덕왕에게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라는 직을 제수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570년(위덕왕 17년) 북제의 후주가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시중거기대장군대방군공백제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571년(위덕왕18년) 북제의 후주가 다시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제군사동청주자사’로 삼았다. [독사방여기요]에 의하면 동청주의 치소는 불기성으로서 즉묵에서 서남쪽으로 50리에 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동청주는 현재의 청도(칭다오)이다. 따라서 북제가 백제왕에게 동청주자사직을 준것은 백제의 청도(칭다오)에 대한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광동성 혜주 혜양현에 담수항, 담물터가 있으며, 광동성 서쪽 뇌주에 담수채, 담물울이 있으며 해암도 바로 앞이다. 광동성 흠주, 광주만은 과거 담수만, 담물만으로 불리웠다. [수서]에는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백제가 동아시아 국제 해상 교역의 중심으로 성장한 것이 분명하다. 또한 중국 북부 요서 지방과 남부 광서성 장족 자치구에는 라는 지명과 한반도 관련 유물들이 존재한다. 베트남 인접 지역 광서성 장족 자치주 옹영현에는 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다. 그리고 전라도에서만 보이는 맷돌, 외다리 방아, 서낭당 등이 있다. 안에는 가 있다. 라는 지명은 과거 군사적 목적의 성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곳에 백제성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광서성 장족 자치주 남령으로부터 3시간이나 걸리는 산촌에는 라는 지명이 아직도 사용된다. 그런데 그 곳 주민들은 를 가 아니라 로 발음한다. 즉 고대 백제는 중국 대륙의 북부 요서부터 동부와 남부 광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담로국을 설치한 것이다. 대만은 원래 담모라국 혹은 탐모라국이다. [수서] [백제전]에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 대만은 남북 386km(965리), 동서 144km(360여리)이며 사슴항구라고 불리는 이란 항구가 있다. 그리고 명나라 때부터 대만 토착민들이 사슴 가죽을 복건성에 내다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대만에는 여전히 라는 지명이 있다. 역시 담로계 지명이다. [동서양고]에 필리핀 밀안항 남쪽에 이 있다고 적혀 있으며 현재 이곳은 필리핀 루론섬 서북쪽의 유감항의 남쪽으로 추정한다. 는 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므로 은 라는 뜻이다. 즉 담로항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중부 아로국에도 담수항이 있었다. 원나라 [도이지락]에는 으로, 명나라 마환의 [영애승람]과 공진의 [서양 번국지]에는 으로 기록되어 있다. 담수항과 담양, 담안은 모두 같다. [순풍상송]에는 라고 적혀있다. 이곳은 카리만탄으로 추정된다. 은 으로 읽을 수 있는 담로계 땅 이름이다. 베트남의 은 과 발음이 유사한 전형적인 담로계 지명이다. [명사]에서는 태국을 섬라(siam)라고 지칭한다. [순풍상송]에는 부터 까지의 항로에 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Siam과 섬라 역시 나 에서 변한 것이다. [동서양고]에 주석을 붙인 [풍토기]에 근거하여 을 캄보디아의 로 본다. [일본서기]에는 라고 적혀있다. 말레이시아 은 과거 으로 불리었다. 남송 때 조여괄의 [제번지]에 이 처음 기록되며, 원나라 때 왕대연의 [도이지락]에도 이라는 지명이 있다. 정광유와 서성모의 [중국역사지도]에는 이 말레이 반도 동남쪽의 큰 섬 이라고 언급한다. 은 마을을 의미한다. 단마령의 는 한자 이다. 또한 는 또는 로 읽을 수 있다. 따라서 가 되므로 담로계 지명임을 알 수 있다. ‘티모르’라는 지명은 를 뜻하는 와 발음이 같을 뿐만 아니라 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와 백제인들이 와서 담로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백제 항해술로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까지 갈 수 있다면 당연히 티모르도 충분히 갈 수 있다. [순풍상송]에는 석관산(실론, 스리랑카) 북쪽에 석성초라는 곳을 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물 수)와 마(말 마)는 모두 을 훈독한 것이니 , 즉 이다. [도이지락]에는 싱가포르를 과거에 이라고 불렀다고 적혀있고, 명나라 모원의의 [무비지], [동서양고], [순풍상송]은 모두 을 이라 기록하고 있다. 은 영어로 Tamasek이나 Tumusik이라고 적는데, 당나라 중엽부터 싱가포르를 왕래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그곳을 타누마(Tanuma) 또는 티유마(Tiyuma)라고 부른 것을 볼 때 당나라 이전부터 이미 이 존재한 것이 분명하다. 백제는 대만 너머 동남아시아에 여러 개의 담로를 설치하고 예상보다 막강한 교역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심지어 횡포에 가까운 전권을 종종 행사했다. [일본서기]에는 라고 적혀 있다.
한국은 해방이후 전쟁후 쿠테타로 .... 쿠테타 세력의 정당성을 위해 그들에게 유리한 교육을 했지요. 그래서 백제에 대해선 별로 없습니다. 신라가 통일하고 나선 백제 역사르 지운듯이. 백제의 밥이 신라였던것이고 해방후 쿠테타 세력들은 정당한 정통성이 없던것이라 과거 신라 엄청띄우면서 백제는 계백빼고 몹쓸나라로 주입식 교육했답니다. 과거 당시 이스라엘 추앙시키는 교육하고 그들이 세계의 중심이다라고 교육한 ....그래서 전교조가 생기고 데모주의가 생겼죠. 지금보면 진짜 엿같이 주입식 교육시킨게 웃기는 것입니다. 객관적인게 아니라 편향된 것. 박정희는 일본장교, 남로당원(공산당원), 한국국군하다가 쿠테타로 정권잡은 것. 전두환이 박정희 암살되자 장인 믿고 바로 쿠테타........미국에서도 박정희라고 전두환 쿠테타 인정안했는데. ...... 둘다 미국가서 아부하고 아양떨고 미국 식민지 수준.......
그럴꺼라 봅니다. 1.백제의 시작이 저쪽이었고 2.좌현왕같은 부여계풍습을 그대로 갖고 있는점 3.진나라이후 수나라 통일전까지 중국의 이민족에 의한 대혼란기 4. 원나라대에 태평양섬에서도 백제를 자칭한 나라가 중국에 조공왔다던가 5.백제의 담로제 란게 진출해서 소국연합 새끼치는 방식이라.... /// 그밖에 위나라의 사신 기록등...... 아마 점과선?쯤으로 해안위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놀라운일인지는 잘모르겠슴.... 또 현재 발해만 다렌.항구... 거기가 아마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여기선 잔국... 백잔과 잔국을 엄연히 구분하고 있슴.. 연합왕국이란 의미)를 수군을 동원 기습공격하기전 사전정지작업으로 점령한 백제항구가 아닐지..(지금까지는 강화도로 보는데 말도 않되는소리)
중국 역사를 보면 한의 한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윗부분을 먹었는데 그럼 그짝이 중국땅이 됩니까? 신라가 통일되었을 때의 영토도 지금의 한반도 영토에 못미치고요 그때 당의 영토였던 한반도 윗부분도 지금 중국땅이라는 것과 같은 논리입니다. 삼국시대 이후에도 정말 많은 문명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를 반복했습니다. 지도도 계속 바뀌어왔지요. 지금와서 우리꺼야라고 하는 것은 억지고요. 중국도 역사왜곡 그만 해야하지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때...
그 요하와 요동, 요서는 요나라 이후부터 였다.. 고구려, 백제 당시에는 북경 서쪽의 조백신하가 요하였고 백제가 차지한 요서는 북경 지역이다..그 외에도 최치원의 기록에도 나타나듯이 산동반도와 오, 월 지역같은 해안 지방도 다 백제의 판도였다.. 그 후 요서는 고구려에 빼앗기고 나머지는 수, 당 시대에 중국쪽 영토를 상실하고 한반도와 일본만 남았다가 결국 한반도 백제가 망하고 일본만 남은 것이다..
이미 고조선 이전부터 하북 요동 요서 산동은 동이족 땅이였고 고조선이 망하고 일부는 이동하여 북부여로 귀화했겠지만 북부여가 망하고 그 유민들이 고향인 요서 산동으로 대거 이주하는건 너무 당연했고 고구려 또한 북부여를 계승하여 그 유민을 포섭하여 졸본 부여를 세웠고 백제 또한 남하하여 요서 진평에 부여 유민을 모아 남부여를 세우고 점차 요서 하북 산동 일대를 장악해 나갔다 고조선 이전부터 동이족은 비교적 외적인 침입이 적고 기후가 온난하여 농사가 잘돼지만 대부분 산지이고 평야가 협소하며 토테미즘 종교 지배자가 다스리는 소박한 한반도( 진) 산동 반도(제)란 땅을 신성시했는데 큰 전쟁으로 대륙 영토를 상실하거나 존재 위협을 받으면 지배층들이 반도로 빈번하게 이주하였다
2004년 당시는 획기적인 영상이었겠죠. 하지만 현재 재 분석해보면 한사군 설명도 유치하죠. 313년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 대방을 정복했다 하는데 이곳이 지금의 평안도/황해도 지역이라 설명하는데. 고구려나 백제가 강력한 대륙국가라 말하면서 한반도내 한사군을 정복한 내역을 가지고 왜 중국 전연과 동진에 허락을 받으려고 했다고 설명해야 할 까요? 이해가 안되는 부분입니다. 결국 한사군은 현 북경근처에 있었고 이곳을 고구려가 멸망시키자 백제가 자기내 고토를 회복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