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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리 장성은 만주에 있다 

역사 읽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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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 천리장성은 만주에 있고, 만주 천리장성 동쪽 끝 부분인 개원(開元) 남쪽, 무순(撫順) 북쪽에 철령[鉄嶺, 철령 이북을 관북(關北)이라 한다.]이 있다.
의주는 압록강 이남과 요녕성 소릉하 북쪽에 각기 2곳이 있었다.
중둔은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남쪽과 요녕성 광녕 북쪽 각기 2곳이 있었다.
요서는 산서성 대동시,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요녕성 대릉하 동쪽 3곳이 있었다.
『삼국사』 권20 「고구리본기」제8 【영양왕】 《수양제 하소문》조에서 한(무제 유철)·위(관구검)가 동이(東夷)를 쳐죽였으나 고구리의 무리가 뿌리를 내려 수풀이 우거지게 되었는데 그 위치가 "발(발해군:하북성 창주시 인접 서쪽 또는 서남쪽, 위치확인 『서한군국도』, 『서진군국도』, 『대청광여도』)·갈(갈석산: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동남, 무녕현 서남, 창리현 북쪽, 위치확인:『우적도(A.D.1136년)』,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A.D.1209년)』, 『거란지리지도(A.D.1344년)』)사이"라고 했다.
그런데 『삼국사』 권제37 「잡지」 제6 【지리】 4 《고구리》조에서 "평원왕 3년에 수도를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고지도를 대차대조하면 발갈사이 즉 하북성 당산시 난남현(滦南县)에 동황성(東黃城)현과 함께 서황성(西黃城)촌과 동황성(東黃城)촌이 같이 존재한다.
『사기』, 『한서』, 『염철론』, 『자치통감』 등 여러기록들은 연·제사이에 예맥조선이 위치했으며 예맥조선의 왕 남려가 28만구를 거느리고 귀속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을 쫓으면 예맥조선은 옛 연[燕, 현 하북성]과 제[濟, 현 산동성]의 경계지역인 현재의 하북성 창주(創州)시 및 동쪽에 해당한다.
그런데 25사는 예맥조선의 남쪽에 진한(辰韓)이 위치한다고 기록했다. 또 그 진한(辰韓)의 서쪽에 마한(馬韓)이 위치한다고 기록했다.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하면 마한(馬韓)의 현재 위치는 산동성 제남(濟南)시에 해당한다.
또 6종 고지도들(『서한군국도』, 『서진군국도』, 『우적도』『화이도』, 『대명여지도』, 『대청광여도』)을 대차대조하면 산서성 장가구시 선화현에 상곡군이 위치했으며 구리(九黎)국 천자 치우가 살던 곳이라고 기록한다. 장가구시 남쪽 탁록 (涿鹿)지역에서 황제 공손헌원의 군대와 싸웠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명도전출토지도』에 의할 때 [동호, 치우, 오환, 부여, 읍루, 위만조선, 구리, 옥저, 남려예맥, 마한, 진한, 변한] 등 '강역들의 총합'과 '명도전(明刀錢)'이 발견된 지역 즉 '단군조선의 강역'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진실은 북한엔 1000리 장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록들과 남아 있는 유물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세운 표지석 등을 종합하면 서쪽 경계는 요녕성 심양진상둔진 봉집보 유지 서남쪽인 옛 봉집현[현재의 혼하]이며 북쪽 경계는 두만강 북쪽 700리 공험진이 고리시대 국경이다.
『명사』 「태조고황제실록」 권189 【홍무】21년 3월 27일 2번째기사 A.D.1388년
置鐵嶺衛指揮使司先是元將拔金完哥率其部屬金千吉等來附至是遣指揮僉事李文高顒鎮撫社錫置衛於奉集縣以撫安其眾
『明史』「太祖高皇帝實錄」 卷一百八十九 【洪武】二十一年 三月 二十七日
철령의 위치는 미 의회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으며 미의회도서관 사이트가 공개하고 있는 『대명여지도』제5 「산동여도2」 요녕성 장성 안쪽에 그 위치가 표시돼 있다.
다음 지도들은 공험진의 위치가
『북관유적도(北關遺蹟圖)』,『조선국회도(朝鮮國繪圖)』 및
청, 『불출호전도(不出戶全圖)』 "경원 동북 700여리에 있는데 선춘령 즉 고리시중 윤관이 비석을 세워 경계를 정했다. 慶源東北七百餘里有先春嶺卽高麗侍中尹瓘立碑定界"
『동국여지지도(東國輿地之圖)』, 삼수(三水) 동북 쪽인 [무산, 회령, 종성] 들의 북쪽 700리에 공험진과 선춘령의 위치 각기 표시
『고리사』 권제12 「세가」 【예종】 3년 2월 [규장각 소장본] "갑오(1108년 02월 13일 (음)) 상서 유택을 함주대도독부사로, 영·복·웅·길 4주를 설치하고 공험진 방어사에 닿도록 했다. 甲午 以尙書柳澤爲咸州大都督府使, 置英·福·雄·吉四州及公嶮鎭防禦使." 중략中略, 무신(1108년 02월 27일 (음)) 윤관이 평정한 여진, 새로 6성을 쌓고, 표를 받들어 부르며 하례했다. 비석을 공험진에 세우고, 이로 경계에 이르도록 했다. 戊申 尹瓘以平定女眞, 新築六城, 奉表稱賀. 立碑于公嶮鎭, 以爲界至."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 7권, 【태종】 4년 5월 19일 기미 4번째기사 A.D.1404년 명 영락(永樂) 2년
계품사(計稟使)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김첨(金瞻)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는데, 첨(瞻)이 왕가인(王可仁)과 함께 갔다. 주본(奏本)은 이러하였다.
"조사해 보건대, 본국의 동북 지방(東北地方)은 공험진(公嶮鎭)으로부터 공주(孔州)·길주(吉州)·단주(端州)·영주(英州)·웅주(雄州)·함주(咸州) 등 고을이 모두 본국의 땅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요(遼)나라 건통(乾統) 7년(1107년)에 동여진(東女眞)이 난(亂)을 일으켜서 함주(咸州) 이북의 땅을 빼앗아 웅거하고 있었는데, 고려(高麗)의 예왕(睿王) 왕우(王俁)가 요(遼)에 고(告)하여 토벌할 것을 청하고 군사를 보내어 회복하였고, 원(元)나라 초년(初年) 무오년(戊午年)에 이르러 몽고(蒙古)의 산길보지(散吉普只) 등 관원이 여진(女眞)을 거두어 부속시킬 때에, 본국(本國)의 반민(叛民) 조휘(趙暉)와 탁청(卓靑) 등이 그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으므로, 조휘로 총관(摠管)을 삼고, 탁청으로 천호(千戶)를 삼아 군민(軍民)을 관할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여진(女眞)의 인민(人民)이 그 사이에 섞여 살아서, 각각 방언(方言)으로 그들이 사는 곳을 이름지어 길주(吉州)를 ‘해양(海陽)’이라 칭하고, 단주(端州)를 ‘독로올(禿魯兀)’이라 칭하고, 영주(英州)를 ‘삼산(參散)’이라 칭하고, 웅주(雄州)를 ‘홍긍(洪肯)’이라 칭하고, 함주(咸州)를 ‘합란(哈蘭)’이라 칭하였습니다. 지정(至正) 16년(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 왕전(王顓)이 원나라 조정에 신달(申達)하여 모두 혁파(革罷)하고, 인하여 공험진(公嶮鎭) 이남을 본국(本國)에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습니다.
遣計稟使藝文館提學金瞻如京師。 瞻與可仁偕行。 奏本云:
照得, 本國東北地方, 自公嶮鎭歷孔州、吉州、端州、英州、雄州、咸州等州, 俱係本國之地。 至遼 乾統七年, 東女眞作亂, 奪據咸州迤北之地。 高麗 睿王 王俁告遼請討, 遣兵克復。 及至元初戊午年間, 蒙古 散吉普只等官, 收付女眞之時, 本國叛民趙暉、卓靑等, 以其地迎降, 以趙暉爲摠管, 卓靑爲千戶, 管轄軍民。 由是女眞人民, 雜處其間, 各以方言, 名其所居, 吉州稱海陽, 端州稱禿魯兀, 英州稱三散, 雄州稱洪肯, 咸州稱哈蘭。 至至正十六年間, 恭愍王 王顓, 申達元朝, 竝行革罷, 仍以公嶮鎭迤南, 還屬本國, 委定官吏管治。 聖朝洪武二十一年二月, 承準戶部咨, 該侍郞楊靖等官, 欽奉太祖高皇帝聖旨節該: "鐵嶺迤北迤東迤西, 原屬開原, 所管軍民, 仍屬遼東所管。欽此。 "本國卽將上項事, 因差陪臣密直提學朴宜中, 齎擎表文, 前赴朝廷控訴, 乞將公嶮鎭迤北, 還屬遼東; 公嶮鎭迤南至鐵嶺, 還屬本國。 至當年六月十二日, 朴宜中回自京師, 承準禮部咨, 該本部尙書李原明等官, 於當年四月十八日, 欽奉聖旨節該: "鐵嶺之故, 王國有辭。" 欽此, 仍舊委定官吏管治。 今奉欽差東寧衛千戶王脩齎來勑諭內: "招諭參散、禿魯兀等處女眞地面官民人等。" 欽此切詳, 參散千戶李亦里不花等一十處人員, 雖係女眞人民, 來居本國地面, 年代已久, 累經胡人 納哈出等兵及倭寇侵掠, 凋瘁殆盡, 其遺種存者無幾。 且與本國人民交相婚嫁, 生長子孫, 以供賦役。 又臣祖上曾居東北地面, 玄祖先臣安社墳墓, 見在孔州; 高祖先臣行里、祖先臣子春墳墓, 皆在咸州。 竊念小邦遭遇聖朝以來, 累蒙高皇帝詔旨, 不分化外, 一視同仁。 又欽準聖朝戶律內一款: "其在洪武七年十月以前, 流移他郡, 曾經附籍當差者勿論。" 欽此, 小邦旣在同仁之內, 公嶮鎭迤南, 又蒙高皇帝王國有辭之旨, 所據女眞遺種人民, 乞令本國管轄如舊, 一國幸甚。 爲此, 今差陪臣藝文館提學金瞻, 齎擎奏本及地形圖本, 赴京奏達。
한심하게도 이성계가 군사반란으로 고리 왕위를 찬탈해 조선을 건국하고 세종 이도 대에 이르면 고리 국경이 어딘지도 모른다.
『세종장헌대왕실록 』 86권, 【세종】 21년 8월 7일 임오 2번째기사, 1439년 명 정통(正統) 4년
함길도 도절제사 김종서(金宗瑞)에게 전지하기를, "동북 지경은 공험진(公嶮鎭)으로 경계를 삼았다는 것은 말을 전하여 온 지가 오래다. 그러나 정확하게 어느 곳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본국(本國)의 땅을 상고하여 보면 본진(本鎭)이 장백산(長白山) 북록(北麓)에 있다 하나, 역시 허실(虛實)을 알지 못한다. 《고려사(高麗史)》에 이르기를, ‘윤관(尹瓘)이 공험진(公嶮鎭)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삼았다. ’고 하였다. 지금 듣건대 선춘점(先春岾)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다 하는데, 본진(本鎭)이 선춘점의 어느쪽에 있는가. 그 비문을 사람을 시켜 찾아볼 수 있겠는가. 그 비가 지금은 어떠한지. 만일 길이 막히어 사람을 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면, 폐단없이 탐지할 방법을 경이 익히 생각하여 아뢰라. 또 듣건대 강밖[江外]에 옛 성(城)이 많이 있다는데, 그 고성(古城)에 비갈(碑碣)이 있지 않을까. 만일 비문이 있다면 또한 사람을 시켜 등서(謄書)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울러 아뢰라. 또 윤관이 여진(女眞)을 쫓고 구성(九城)을 설치하였는데, 그 성(城)이 지금 어느 성이며, 공험진의 어느쪽에 있는가. 상거(相距)는 얼마나 되는가. 듣고 본 것을 아울러 써서 아뢰라."하였다.
傳旨咸吉道都節制使金宗瑞曰: 東北之境, 以公嶮鎭爲界, 傳言久矣。 然未知的在何處, 考之本國之地, 本鎭在長白山北麓, 亦未知虛實。 《高麗史》云: "尹瓘立碑于公嶮鎭以爲界。" 至今聞先春岾有尹瓘所立之碑, 本鎭在先春岾之何面乎? 其碑文, 可以使人探見乎? 其碑今何如也? 如曰路阻未易使人, 則無弊探知之策, 卿當熟慮以聞。 且聞江外多有古城, 其古城無奈有碑碣歟? 如有碑文, 則亦可使人謄書與否幷啓。 又尹瓘逐女眞置九城, 其城今何城乎? 在公嶮鎭之何面乎? 相距幾何? 幷聞見開寫以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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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окт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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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gojang7811
@bogojang7811 15 дней назад
북한지역엔 1000리 장성이 없다. #고리(고려) #고구리 #천리장성 #식민사관 🇯🇵 #동북공정 🇨🇳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POBFGg6dhlc.htmlsi=_cYCI81JwtuUwpk0 - @RU-vid
@sm-tech
@sm-tech 14 дней назад
찾았다 자장가 목소리 감사합니다
@historyreadman
@historyreadman 14 дней назад
댓글 감사합니다. ^-^
@bogojang7811
@bogojang7811 15 дней назад
식민사관 폐기! 민족사관 정립!
@historyreadman
@historyreadman 15 дней назад
@@bogojang7811 댓글 감사합니다!
@bogojang7811
@bogojang7811 15 дней наза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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