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전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은총... 은혜가 없으면 하루 하루 버티고 살아나갈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실제적 도우심이 없이는 살수없는 죄인임을 고백 합니다 그래서 전 예배에 매달려야하고 혼자 힘들때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합니다 주님의 도움없이 예수님의 인도없이는 단하루도 살수없는 사람입니다ㅠㅠ
@@지-g5q 최대한 도배 안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럼 여기에 올려볼게요.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사건이 나를 위해 나의 죄때문에 나를 살리려는 사건 이었음이 참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참된 신앙을 시작하려면. 먼저 십자가를 진정 믿어야합니다. 모든 인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 지셨음이 아니라. 나를 위해 죽으셨음이 감당이 안될 은혜로 다가와야 합니다. 객관적인 십자가가 아니라 주관적인 십자가로 다가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위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상상을 초월하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와야합니다. 혹시 이런 충격을 겪으셨나요? 주변에서 바뀐 자신을 다 알아볼 정도의 충격입니다. 십자가가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됩니다. 논란의 여지없이. 십자가의 도가 믿어지면 세 가지 증거가 명확히 이루어집니다. 첫번째 죄지은 여인처럼(눅7) 깊은 죄인 의식으로 바닥을 샅샅이 뒤지며 훓는 것 같은 회개를 하게됩니다. 그 분의 희생앞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었는지 처음으로 깨닳아지므로. 그렇게 평생 지어온 죄를 하나 하나 붙들고 통곡하게 됩니다. 두번째, 예수님 발에 향유 부은 마리아 처럼(마26) 자신을 온전히 쏟아 붓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쓰는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이 너무나 충격으로 다가오기에 은혜의 빚진 자 되어 자신을 위해, 가족을 위해 살지 않게 됩니다. 세번째, 율법이 남편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면 굉장히 두려워하게 됩니다.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은 율법이 남편이 아니고 세상이 남편이므로 어떤면에서 마음이 원하는대로 죄와 악을 담대히 행하게 되고 말씀의 구속에서 자유한 편입니다. 반면 율법이 남편인 사람은 경외심과 신앙의 양심이 확실해지고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있으므로(눅18:13) 말씀 안에 자원함으로 거합니다. 어느 정도 믿는 상태를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이 이후에는 대개는 엄청난 회개가 폭발이 되고, 전에 지은 죄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이었는지를 충분히 인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전과 후가 확 달라집니다. 어떻게 사람이 구원받는가? 철저한 회개를 통해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럼 철저한 회개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십자가가 깊이 이해되고 묵상되는 가운데 철저한 죄인의식이 생깁니다. 아무리 엄청난 죄인이라고 말해 준다 한들 철저한 죄인 의식이 생기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님의 죄를 위해 죽었다 라는 걸 받아들이면. 얼마나 그 죄의 문제가 대단하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는가라고 생각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정 믿는 것은 지옥에서 나오는 첫 관문입니다. 하루 종일 성령에 취했다 해서 꼭 십자가 믿음이 있다 할 순 없습니다. 살인자 사울왕도 성령에 취해서 예언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열심이 있다고 꼭 십자가의 믿음이 있다 할 수도 없습니다. 사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십자가 믿기 전에 엄청난 은혜를 받고 회개하고 열심을 내고 기도를 하였고 모든 것을 최상으로 흠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십자가와 스데반의 사건과 수많은 말씀들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하나님이며 나를 위해 죽었다니... 완전 다른 사람이 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믿는 게 호락호락 하진 않습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 500만명의 유대인들이 성안에 살았지만 초대교회에 들어온 이들은 5만여명에 불과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은 그들은 굉장한 열심이 있었고 은혜속에 살았지만. 합당한 믿음의 기반 이 없으니. 신앙인이 아니라 종교인이었던 것 입니다. 그들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오늘날 목사들보다 더 나은 자들이었습니다. 잘못된 바리새인 서기관들도 많았지만 유대교 안에서 진실하게 열심을 내는 사람들도 많았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렇게 동족들을 보며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뭔가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내는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내는 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구원을 못받았을 것 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정확히 이 말씀에 해당합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속에서 동기가 생겼다면. 계속 십자가를 묵상하며 믿어지게 해달라고 느껴지게 해달라고 부르짖어야합니다. 그러면 2천년 전에 그 사건이 내 사건이 됩니다. 사실 그 전에는 아무리 천지창조를 믿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생각해도 마치 위인 전기 속 이순신을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주님을 잘 믿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그 날에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다면.. 그 때 가서 누굴 원망 하겠냐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라고 하셨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3:24)"고 하셨듯이 값없고 차별없는 은혜로서 영혼 깊은 데에서부터 한번의 큰 빛비춤을 받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바울과 베드로처럼요(눅5:8). 뭔가 억지로 믿으려고 하거나 여기는 정도의 그런 흐지부지한 게 아니라 인생을 뒤 엎을만큼의 충격입니다. 대개는 이 경험 후에. 사랑에 매여 온통 주님 생각밖에 안들게 되어 채워도 채워도 갈급할 정도의 신앙의 추구를 하게 됩니다. 이 첫사랑이 몇년에서 오래는 십수년까지도 간다고 들었습니다. 온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희락을 넘어 극락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어느정도 은혜스러웠던 찬송가의 가사들이 이제 너무도 자신의 고백이 되어집니다. 그치만 가만히 입벌리고 있는다고 주어지는 은혜가 아니라 믿고자하는 사모함과 순수함 더불어 절박함. 은혜 받을 합당한 중심을 살피시기에 인간편에서 그 임계치에 맞추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