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 나라 쳐들어가려고 병력 갈아 넣는 거랑 자기 나라 지키려는 것과는 다르지. 그리고 조선 지도층이 븅신인거지 지금 북한처럼ㅋㅋ 북한이나 조선이나 자기체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이고 정권이었으니깐 백성들은 자기 나라 자기 가족 지키려고 싸운건데 숭고하고 감사한 것 맞잖아. 니가 더 역겨운걸? 니가 저 당시 태어났으면 청국에 사대 오지게 박았을거야.
신미양요 당시의 무관들과 휘하 군졸들의 기개와 정신을 높이는게 민족적 측면에서 본다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세계대전기의 일본처럼 선제 공격만 안했을 뿐 사이판과 이오지마 전투 또는 전 국민의 옥쇄 처럼 군과 국민 개개인의 희생을 통한 기득권의 체제 유지 목적 이외에 일반 시민에게 무슨 득이 있나 싶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정부의 세계정세에 대한 무지함과 상하를 구분치 않고 국민 모두가 서구에 대한 두려움이 있긴 했겠지만, 일본의 사례와 같이 개항 후 학살이나 큰약탈을 당하기라도 했는가? 라며 생각하면 개개인의 희생이 아쉽기만 합니다. 군생활 성실히 마치고, 예비군 가는 입장에서는 내가 지킬 유무형의 가치보다 아직 제 목숨이 더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영국이 누구편들어줬을까가 핵심이었겠죠. 그들에게 러시아 남하를 막기위해 조선과 일본 중 힘을 한쪽으로 밀어줘야하는데 일본이 아무래도 인구가 많고 메이지유신에 의한 체제개혁이 된 반면 조선은 이씨왕조를 뒤엎는 혁명도 없었을거고 그러니 더 신선한 일본에게 좋은 군함선 주고 조선에는 어쩔수없이 상선 정도 파는 선에서 끝났을 겁니다.
개항이 다가 아님 결국 우리도 일본에의해서 개항했음 1876년에..그리고 나라 팔리는 1910년까지 그 텀이 무려 34년임. 일본은? 개항 그리고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강화도조약까지 기준으로하면 텀이 25년이라는거임. 결국 조선과 일본의 차이는 기득권이든 누구든 스스로 나라를 개혁할 의지가 있냐 없냐의 차이가 제일 큼. 물론 일본의 개혁은 조슈와 사쓰마 기득권이 주가되어 이룬거지만 아무튼 그들은 싹 다 바꿨음 근데 조선은? 양반하고 왕 왕비가 대체 개항이후 나라 공식적으로 망할때까지 34년동안 뭐했음?
이 사건과 비견되는 일이 바로 1863년에 있었던 영국과 사츠마의 전투가 있져... 이건 일본이 전쟁한게 아니라 일개번인 사츠마가 전쟁을 일으킨건데? 영국의 최신식 철갑증기선 7천이 쳐들어왔는데 오히려 일본은 5명 사상 영국군은 13명 사망 증기선 1척 대파 2척 중파 당했던 사츠마가 이긴 전투였습니다. 걍 일본과 조선의 차이는 임진왜란 이후 꾸준히 벌어졌다고 봐야져
사람의 목숨이 오가고 생명의 위협에서 오는 공포심은 말로 글로 표현 못 합니다. 저 당시 처음 보는 커다란 배에서 그 엄청난 포격과 내 총 보다 두 배는 더 긴 상대방 총의 사거리를 뻔히 보면서 당시 싸우셨던 분들이 과연 '아 쟤들과 싸우면 난 죽겠구나' 이 정도 인지도 못 하셨을까요? 솔직히 저였다면 배에서 포 몇 방 쏘고 주변에 동료가 몇 명 죽어나가는 거 봤으면 바로 튀었을 겁니다. 그런데 저 분들은 그 공포에 맞서 싸웠죠.. 저는 이 점을 정말 대단히 높게 평가하고 존경합니다.
근데 병인양요에 대해서는 조금 아쉬웠던 역사가 있는데 바로 흥선대원군이 병인양요의 윈인인 병인박해를 벌이기 전에 프랑스와 교섭해서 서양과 손을 잡기 직전까지 갔었는데 당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위해 프랑스 신부들과 교섭해서 프랑스에게 기독교(천주교) 포교를 승인을 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와 연결을 주선해서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죠. 그러나 당시 여흥민씨를 왕비로 간택한것에 불만을 품은 안동김씨 & 풍양조씨 세력이 태평천국난을 빌미로 대원군을 압박했고 거기다 러시아의 남진도 끝났고 대왕대비도 합세하여 그를 압박하니 결국 대원군도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지키려고 결국 병인박해를 벌이고 말았죠. 만약 러시아가 조선까지 남진을 벌이거나 흥선대원군이 불만을 가진 안동김씨나 풍안조씨를 회유를 위해 두 가문 중 한 사람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겁니다. 참 아쉽네요.ㅜㅜ ㅠㅠ
운요호 사건이 젤 어이없음 운요호는 신미양요때 미국의 철갑선같은것도 아니였고 배수량도 240톤짜리 증기목선에다 병력도 60명이였는데 이런 허접한 놈들한테 강화도가 개털림... 조선이란 나라가 이렇게 허접한 나라였는지 걍 한심함 저때 개털리지 않고 오히려 역관광 했으면 일본한테 시간 벌수 있엇을텐데
@@user-xm5by1pu9k 논점 이탈하시는데 일제 반자이 돌격 안했다는데 일본군 지휘를 받았으니 문제다? 이런말을 하고 싶은건가요 국가 시스템이 늙어버렸고 일본에 휘둘리던것도 맞으나 일종의 조일 연합군인데 어느쪽이던 통합지휘는 당연해 보입니다. 지금의 한미연합사 처럼요 또한 당시에는 요즘처럼 동학에 대한 평이 후하지 않았습니다.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의 관군의 패전을 말하는것이라면 신식무기를 과신하여 숫적열세와 저지대의 불리함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비슷한 사례가 '이산들와나', '디엔비엔푸' 라고 있죠 그리고 위에선 관군을 낮추고 동학군을 낮추더니 다시 관군을 낮추내요 그냥 조선인은 열등인종이라고 그냥 쓰세요 왜 그랬는지를 봐야지 그 당시를 살던사람도 우리와 같은 희노애락의 인간이며 열악한 환경에서 고민하고 낸 결과입니다 무슨 이게 조선인은 어쩔수 없어라고 말하던 일본인들도 아니고 조선놈은 패야 말을 들어랑 뭐가 다릅니까?
물론 외적의 침공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쳐 맞서싸운 그 정신 자체를 폄하하거나 하면 안되겠죠. 하지만 문제는 더이상 한중일 뿐만 아니라 약육강식의 세계화의 문이 열리는 시기 우리가 양이를 이기고 계속 이겨낼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 결과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생존을 위한 선택을 해야 할 때 잘못된 외교를 하게 되는 시발점이 됬다는 거죠. 한중일 세나라가 다 처음엔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세력과 충돌을 일으켰지만 서구열강과 한바탕 부딪힌 뒤 세나라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선택과 그에 따른 결과가 달랐다는걸 우린 알고 있죠. 조선은 병인년과 신미년에 프랑스와 미국이란 두 대표적인 서구열강의 충돌을 겪고 일시적인 것이 아닌 근본적으로 양이들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 정신승리에 빠져 척화비를 세우며 쇄국정책을 밀고나갔다는게 문제죠.
흠...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청의 양무운동이 바로 그런 컨셉이지요. 사회와 문화와 가치관은 그대로 두고 기술만. 그러나 그런 건 불가능해요. 산업화와 기술축적은 사회변혁이 전제로 깔려있는 거니까요. 동도서기니 양무운동이니 우리나라 조선에서도 똑같은 흐름이 있었지만 다 헛소리에 불과했지요. 조선이란 나라는 사회변혁을 받아들일 생각 전혀 없었자나요. 거기서 이미 끝.
@@user-vf7df3bk2g 싸울만 했으면 미군이 개화도 시켜주고 영어도 가르쳐주고 했겠네요? 일본 흑선 개항의 특이 사례가 답이라고 생각하시는데 애초에 왜 서구인들이 개항을 시키고 포교하는지 생각좀 하셨으면 합니다 개항후 서구인들의 식민지가 되지않은곳은 태국과 일본이 유일합니다 태국은 영프의 세력의 휴전선 이었고 일본은 개항 후 미국 남북전쟁이 터집니다 개항에 답이었다고 생각하는건 남아시아의 수많은 피식민국을 욕보이는 것입니다
정신승리 맞는데 ㅎ 목적 달성은 못 하게 했으나 조선의 약점을 여실하게 보여줘서 서양이 조선을 만만하게 생각하게 해주고 수교를 포기함으로서 일본에 뒤쳐지게 된 결정적 사건인데 희생당한 조선군은 안타깝게 생각해야 되는건 맞지만 딱 청나라가 아편전쟁때 했었던 정신승리 국뽕 사관 아쉽네
그건 니들이 일본역사에대해서 표면적으로만 아는거야 멍청이들아 ㅋㅋㅋㅋㅋㅋㅋ 일본이 미국말들어서 개화했다? 웃기는소리 아무리 강제로 개화했어도 일본은 여전히 보수적인 봉건적 막부체제 유지하다 죠슈 사쓰마가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서양과 싸우다가 자신들이 개처발리는거 반성하고 거기서 스스로 깨달았기때문에 적극적으로 근대화 한거다 그리고 일본도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막부애들하고 동란으로 오지게 싸워서 피로 근대화 이룬거야 결국 자기들이 피로 갈아엎은거지 근데 조선은 그게 안됐고 끝까지 조선왕조하고 기존 유교체제 고집하고 개화파 세력들 찍어 눌렀잖아 그래서 결국 망했지? 제발 역사를 표면적으로만 보지좀마라 ㅉ 니들말만 들으면 미국이 1부터 10까지 하나하나 다 개입해서 일본 근대화시켜준줄 알겠다 ㅋㅋㅋㅋㅋㅋㅋ
당시 조선군에게 사병들도 만약 항복하면 강력한 페널티가 주어졌나요? 뭐 사회주의 국가들처럼은 아니래도 뭐랄까 정신적인 비난같은 부담뿐 아닌 실질적인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친지들까지도 일상생활이 힘들정도의 큰 불이익이 주어진다거나 여하튼 자살을 하게끔하는 엄중한 사회분위기가 있었던건지?? 장수들은 몰라도 일반병들이 진짜 충성심만으로 집단 자살을 한다거나 하진 않았을것 같은데.. 아님 자신들이 상상도못한 너무 엄청난 화력세례 및 공격을 당해 혼이 나가거나 서양군인들에게 만일 잡히면 상상할수없는 비참한 꼴을 당한다는 어마무시한 공포감이 있었던건지.. 미군 3명 사망자중 진짜 전사자는 딱 1명이죠? 1명은 오발사, 1명은 실족사였으니 참..
@@dennythedavinchi3832 광성보 전투 당시 조선군은 500명중 243명 가량이 전사, 100명 가량이 익사, 24명이 부상을 입은 반면 미국은 800명중 3명 사망과 10명 부상으로 끝났습니다 출처는 조선쪽은 소성진중일지에 최소 100명 이상이 사망했으나 미국이 화장 등 시신을 훼손한다는 기록과 미국측은 미국의 공식 보고서, 사진가인 펠리체 베아토의 사진들과 참전군인인 윌리엄 그리피스가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가 자료입니다
@@dennythedavinchi3832 아편전쟁은 확실히 치욕이 맞는데 일본의 흑선사건은 오히려 일본인들에게 영광이자 자랑인데? 그 개항을 통해 미개했던 전근대 무사정권 갈아엎고 선진화 된 근대국가로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 9대 서구열강 반열에 끼고 이후에는 2~3 위 하다가 2차대전 패망 후에도 선진국으로 전세계 2~3 위 달리니까
역사를 연구한다는 사람들이 TV에 좀 나오더니 드라마를 쓰고 있군요.. 역사를 미화, 윤색하는 건 역사왜곡이나 마찬가지죠..쳐들어오는 적군이 무서워 진지를 이탈해 도망갔는데 이걸 퇴각이라 하고, 있지도 않은 변명같지도 않은 변명까지 만들어 주는군요.. 28:07 초지진 화약더미가 폭발하는 바람에 대피, 퇴각했다고요? 이런 기록이 어디에 있나요? 미해병대 중대장 틸튼대위의 조선원정 보고문에 보면 초지진의 조선군 수비병은 함포사격을 피해 숲으로 들판으로 달아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륙군이 편안하게 상륙한 후 미해병대가 들판과 마을을 누비며 도망간 조선군을추격했으며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미군상륙 방어전에서 초지진은 핵심 요충지였습니다. 초지진 바로 옆 400미터 갯벌로 상륙할 때 미군이 가장 취약할 때였고 침공을 막고자 했다면 이때가 최적기였는데 초지진 첨사 이렴을 비롯한 조선 수비군은 국토수호의 사명을 저버리고 진지를 이탈해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했습니다. 이런 걸 어떻게 미화합니까? 신미양요 징비록을 써야지.. 31:45 미해병대가 주력이라고 언급했는데 잘못 알고 있거나 대충 때려보는 뇌피셜입니다. 당시 쳐들어 온 군대는 미해군 아시아함대입니다. 당시 열강들의 해군 함대에는 해군보병(Naval infantry)이 있었습니다. 강화도에 상륙한 미군 651명 중 109명의 해병대를 제외한 나머지가 해군보병이었습니다. 이들은 제복이나 개인화기로도 구분이 됩니다. 해병대는 지금도 그렇지만 해군기지 경비나 함내 경비를 서고 전투에서는 척후활동을 하거나 특공대 역할, 측면 지원 등을 수행했습니다. 주력부대는 해군보병이고 소수의 해병대는지원부대였습니다. 29:45 덕진진 수비병들이 화기의 유효사거리가 짧아서 모두 퇴각했다는 얘기는 한 편의 코메디군요.. 무슨 사후 검토보고서에 그런 얘기가 나오나요? 개콘 대본에나 나올 법한 얘기입니다.. 이게 사실이라면 세상에 이런 오합지졸이 없지요..진지를 방어하는 수비병이 소총의 유효사거리가 짧다고 다 도망을 갑니까?..ㅎㅎ 미해병대 중대장 틸튼대위는 보고서에 덕진진의 대부분의 포(불랑기포)가 장전된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이게 퇴각,철수한 모습인가요? 32:55 조선군의 전사자 수가 350명이라고요.. 몇가지 설이 있는데 가장 많은 숫자를 택했군요 숫자가 클수록 드라마틱하겠죠.. 253명이라는 설도 있구요 조선왕조실록 공식 기록의 전사자 수는 53명입니다. 틸튼 대위도 253명을 언급하긴 했지만 자기가 직접 본 조선군 시체는 50여 구라고 했습니다.
@@user-ll7yg4kp3x 정조때문에 일본 식민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왜 해군함정에 정조 이름을 달겠다는 것이지 이해가 안됨. 노무현 정조 드립을 하지 않나. 도대체 북학 서적 출판 96년간 막은 것이랑 성리학 주자서적 재출판하고 명말청초 서적까지 전부 금지 시킨 것이 무슨 개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