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사홍/ 연이어 제사가 있는데 술을 전부 금할 수 있겠느냐며 "약간의 흙비가 내렸다고 그것을 천변이라 하여 무턱대고 삼가는 것은 지나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대간들이 강력하게 주청하니 어쩔수 없지 않은가"라는 성종의 대답에 "대간의 말이라고 무조건 들어주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는 사간원, 사헌부에게 공격의 빌미를 제공한다. 직언 서슴지 않는 관료나 황사비 이후 사림에 게 '소인(小人)'으로 퇴출 대상 그때 왕실 비서실장 격인 도승지 임사홍이 다른 말을 내놓 았다. "마음만 반성하면 되지 자연현상 때마다 금주(禁 酒)를 해대면 어찌 살라는 말인가. 금해봤자 벼슬아치들 은 무사하고 백성들만 적발될 뿐."(1478년 4월 21일 '성 종실록') 도승지 임사홍은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능하며 직언을 서 슴지 않는 관료였다. 그런 그가 왕도, 사림도 기대않던 말 을 하니 회의장은 난장판이 되었다. 임사홍은 그날로 사 림에게 '소인(小人)'으로 찍혀 퇴출 대상이 되었다. *. 사림의 처단 요구로, 임사홍 의주로 유배형 임사홍의 맏아들 광재는 선대 예종의 사위였다. 성종은 유능한 관리이자 왕실 사돈인 임사홍을 변호했지만, 삼사 (三司)를 장악한 사림은 처단을 요구했다. 결국 임사홍은 그 다음 달 의주로 유배형을 당했다. 서자 출신으로 세조 에게 눈에 띄어 출세한 유자광도 싸잡혀 동래로 유배당했 다. (1478년 5월 8일 '성종실록') 그의 글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의 으뜸이었다. 중국어에도 능통해 중국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사역원과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최용범에 의하면 그는 '유자광과는 비교도 안되는 명문 주류이자, 세조 시대의 한명회나 유자광처럼 박학다재(博學多才)하여 거친 데라고는 없는 우아한 선비였다.고 평하였다. 최용범은 "연산군도 임사홍도 시대의 모순이 낳은 사생아들이었다. 그들은 파격과 폭력으로 채워지지 않는 허무를 채웠다. 물론 그 허무를 극복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킬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인(聖人)에게나 가능했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지 보통의 인간에게 성인이 될 것을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라 하여 그 역시 혼란기에 권력의 암투로 미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시대의 희생자로 보기도 했다. 밝혀진 내용으로는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은 세조의 명을 충실히 따라 의약· 풍수·역술 등에 해박한 조예를 쌓았는데 훗날 사림파의 대부가 된 김종직은 당시 조선의 사대부가 잡학을 배우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반대해 세조의 노여움을 받아 파직된 사례가 있는 것을 보면 어느정도 여론의 왜곡을 파악할 수 있다. 김종직은 임원준의 태도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이고 임사홍 역시 그의 부친 못지않게 잡학에 해박하여 선입감으로 이어진 김종직과 임사홍의 부친 임원준과의 오랜 악연이 적잖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임사홍을 '간신은 겉으로 봐서는 모르는 법입니다. 임사홍 같은 경우 항상 점잖고 관대하여 인격자처럼 보였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사림파에 의하여 역사에서 철저히 버림받은 사람으로 임사홍에 대한 왜곡이 노출되고 있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사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연산군을 부추겨 일으킨 것이라는게 중종 이후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희생자들 중에서 임사홍이 원한품었을 법한 사람은 자신의 처조카이면서 자신을 나락으로 밀어넣었던 이심원과 그 아들 이유녕 뿐이었다. 이극균이나 어세겸, 홍귀달 등은 오히려 임사홍을 두둔해 온 편이었던 것이다. 연산군은 자신의 복수를 했을 수 있으나 임사홍의 복수를 해주지는 않았던 셈이다. 오히려 갑자사화 당시에 임사홍은 앞서 언급한 이극균과의 친분 때문에 참수당할 위기까지 처했기에 중종때 사림들이 말하는 임사홍의 갑자사화 배후설은 더더욱 설득력이 부족하다.
천재지변과 기상이변은 같은 말이다. 자연현상은 사람의 탓인가? 아닌가? 오늘날에 탄소저감 노력은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 하며 지난날에 천재지변의 까닭을 자신에게서 찾으려한 노력들은 무지몽매한 미신이라 비웃는다. 요지나 핵심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아야 하는것이다. 지난날에 제를 지내고 제물을 바치던 것은 폭정을 일삼은 것과 다를바 없이 별무신통이였다. 즉. 망나니 연산군 시절이나 성군 세종대왕 시절이나 자연재해는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인간들의 알량한 윤리의식으로 자연의 변화를 어찌해볼수 있다는 발상 부터가 잘못인것이다. 그러므로... 노자에는... 천지불인 성인불인 이라 하였다. 자연환경은 어질지 않아 사람들을 헌신짝처럼 여기고 성현들도 어질지 않아 백성들을 초개처럼 여긴다. 착하게 살면 복받고 잘살게 된다는 말들이 모두 개 뻥이라는 얘기다. 탄소저감 이라는 이슈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편파적이지 않은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때문에 삼부제니 오부제니 하는 정책들은 과연 합리적이고 공정하며 편파적이지 않은것인가? 혹... 태양광패널 팔아먹고 풍력발전소 지어먹고 전기차업체 뒷돈로비 받고 떠드는 수작은 아닌지 점검할 필요가있다. 매연 저감장치 사업에 들어간 세금이 무릇 기하이며 조기폐차 지원금이 또한 무릇 기하이뇨? 어줍잖은 명분을 코에걸고 소시민들 주머니를 털어내려는 정책들은 지양 되어야 하는것이다. 담배값을 백퍼센트 인상하여 얼마나 흡연인구가 감소되고 국민건강이 증진 되었는가? 만약 그 효과가 지지부진하고 미미한 것이라면 인상을 주장했던 주둥이 들이 썩어지기를 바란다. 예나 이제나 본질은 뒷전이고 편파적인 정치논리로 명분찾고 프레임씌우기에 혈안인것은 마찬가지다. 가뭄. 홍수. 역병등의 재앙에 원인은 무엇인가? 그러한 근본 원인은... 인구증가와 화전농법 때문이였다. 숲을 불살라 버림으로서 초래되는 재앙이다. 때문에 고대 사료들을 보면.... 농경을 배척하고 죄악시했던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수있다. 그러다 치수 기술의 발달로 강역에서의 번성이 가능해지자 인구의 폭팔적 증가와 문화문명의 번영을 불러 왔음으로... 농자 천하지대본 이라는 쪽으로 기울게 된것이다. 그러나 강역의 치수사업으로 만련되는 농토들은 모두 지배층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죽어라 농사지어도 다 뺏기고 먹을것이 없었고 가뭄이나 병충해등의 흉년이되면 하층민들은 굶어죽어갔다. 결국. 유리걸식하며 떠돌다가 산도적이 되거나 화전민이 될수밖에 없었던것이다. 화전민들은 숲을 불태워 경작하였고 나무를 베어 집을짓고 난방취사를 하였다. 갈퀴로 나뭇잎까지 박박 긁어다 아궁이로 집어넣었다. 자연 생태계라는게 묘한 것이여서 그렇게 민둥산이 된 곳에는 산나물들이 지천이였다. 산토끼도 된통 많아졌다. 그것으로 연명할수 있었던 것이다. 산이 헐벗었을때 산토끼 엄청 잡아먹었다. 그래도 그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었다. 석탄채굴로 장작이 연탄으로 대체되고 자연보호 산림보호가 이루어지며 곳곳에 댐이 조성되어 가뭄과 홍수가 예방되자. 자연재해는 줄어들었고 인구는 증가되었다. 그렇지만 산토끼는 멸종위기에 봉착했고 반면에 멧돼지는 많아졌다. 아뭏튼지간에..... 옛분들 너무 우습게 보고 비웃지는 말자. 자연재해가 인간탓이냐 아니냐는 현대 사회에서도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단. 알량한 인간들의 윤리의식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천지불인 만물위추구 성인불인 백성위추구. 천지가 어질지 않아 만물을 헌신짝 취급하며 성인이 어질지 않아 백성을 짚신짝 취급한다. 노자 도덕경 영국의 정책은 코로나 확진자 증가에도 불구하고 방역을 강제하던 정책을 포기 하였다. 코로나 막으려다 굶어죽는것 보다는 먹고죽은 귀신이 때깔이라도 좋다는 식의 정책이다. 사태추이가 어떻게 되어갈지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