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영상에서 강선을 다룬 적이 있으신데 탄창도 다뤄주세요. 최초로 막대형 탄창방식을 설계한건 누구인지 드럼탄창은 어떻게 탄생한건지 왜 예전 총들은 탄창결합 위치가 다양했었는지 원반탄창과 로터리 탄창을 채택한 총들은 왜 그렇게 설계했고 지금은 왜 그런방식의 총들이 나오지 않는 것인지..등등
플란트락 머스킷이 안쓰이는건 조선 뿐만 아니라 청이나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에선 양질의 부싯돌(플린트)이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머스킷 격발장치에 쓸만한 양질의 부싯돌은 전량 수입해야 하는데 이로 인해 생산단가가 높아졌지요. 거기다 부싯돌은 소모품이라 얼마간 쓰고 나면 수시로 갈아줘야하는 지라 유지비용도 만만찮았지요. 유럽의 경우 유럽 자체 생산도 있었지만 인도나 중동 등지에서 부싯돌을 다량 수입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부싯돌이 아닌 황철석을 이용한 차륜식 격발장치가 조선에서 개발되기도 했지만 플린트락 보다 더 복잡한 기계장치라 이것도 생산단가가 너무 높아져 계속 사용되지 못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역사와 총기를 좋아하는 청년이옵니다. 건들건들의 펜더님과 환장님 덕분에 저는 이 영상을 재미나게 보고 있습니다. 특히 순조실록의 기록은 아직 조선왕조실록을 다 보지 못한 저에게 굉장히 유익한 것이옵고 이렇게 영상으로 제작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에 대하여 다시금 감사를 드리옵니다. 그런데 플린트락(이후 수석식이라 칭하겠습니다.)소총이 나선 정벌 당시가 최초라는 점에는 이의가 있습니다. 사실 아직 잘 알려지지 아니한 것이지만 정사에 기록이 된 수석식 소총의 기록은 인조입니다. 조선왕조 인조실록 25권 인조 9년 7월 12일 기록을 보면 진주사 정두원이라는 자가 명나라 수도를 방문한 후에 돌아와서 천리경, 서포, 자명종, 염초화, 자목화들의 물품을 조정에 바쳤다라고 되어있는데 여기서 서포라고 하는 물건의 설명으로 '화승을 쓰지 아니하고 돌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난다.'라고 있으며 서양 사람 '육약한(서양식 이름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란 자가 두원에게 기증한 것으로 정사에 나와 있습니다. 이를 보아 이미 나선 정벌 당시에도 수석식 소총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것이 성립이 되고 나선 정벌에서 노획한 수석식 소총이 최초가 아니라는 것이 됩니다. 언제나 건들건들의 영상으로 재미를 느끼고 유익함도 함께 느낍니다. 이런 제 글을 봐주신 점에 대하여 다시금 감사를 드리며 부디 건들건들 채널에 좋은 일만 생기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저 당시 플린트락은 매치락보다 불발률이 높았어요. 부싯돌의 품질이 좋지 못하면 종종 발생했던 일인데 안타깝게도 당시 조선에서 부싯돌은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도 이니고 머스킷에 쓰기엔 품질도 좋지 않은 편이라 조선 조정도 효율성이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오히려 플린트락의 도입보다 미니에 탄 비스무리한 물건을 만들거나 강선을 파는게 더 효율적이었을거린 봅니다.
이동연 AK소총이 흔하다는 것은 군물수품 관리가 안되고 아프리카 정부가 군인들을 포함한 공무원들에게 월급을 제대로 못준다고 봐야죠. 아프리카 독재자들은 과거 소련이나 중국, 유고슬라비아 같은 국가에서 대량의 무기를 지원받고 독립했는데, 문제는 독재자들이 착복을 하면서 군인들의 임금체불로 이어지고 군인들을 먹고 살기위해 군수품을 팔아서 겨우겨우 버티는게 아프리카입니다.
이동연 그리고 소련이나 중국이 무기를 지원해주는데 필요 이상의 무기들을 지원해 주었는데 대표적으로 모잠비크 경우 군인 수는 5만명인데 AK소총만 자그마치 10만이 넘어가다보니 군에선 돈을 벌기위해서 이웃나라 테러조직에 파는 막장 상황을 보여주었죠. 그리고 전세계에 생산된 AK소총들 중 50%이상이 중국에서 생산된 56식 소총이고, 그다음이 유고슬라비아 자스타바 M70소총이 20%입니다 오히려 러시아제 정품은 1억정중 고작 200만 정에 불과한 2%란게 함정이죠...
일제가 1910년인가 1차 인구조사를 했는데 그때 1100만, 9년 뒤에 2차 했는데 1900만 나왔거든요? 9년만에 8백만이 늘어날리는 만무하고, 1919년때의 인구조사가 정확한거죠. 신고 및 조사 미비로 다시 10~15% 정도는 충분히 더 해야한다고 봅니다. 그러면 2100~2300만 정도. 조선 후기 전염병, 대기근, 2차- 3차 만주 이주 등 인구감소요인을 감안하더라도, 조선 후기의 인구는 2천만 정도는 봐야한다고 봅니다. 조선시대 인구조사는 정말 인정(?)넘치는 조사기법을 사용했기에 신뢰불가입니다.
일제가 3차 조사를 2년 뒤에 하고 2천만이 넘었던걸로 기억하는데, 고맘때 인구가 2천만이다 . 라는건 대충 신뢰가능한거죠. 그러나, 영유아 10% , 도서지역, 독립군, 그에 준하는 저항자들, 범죄자 및 유랑자들 등등 이것만 해도 15% ~20%훌쩍 넘고 간도 이주 100년간 1-3차에 걸쳐서 ... 개인적으로 200만 추정(?) 그러면 약 2500만 정도로, 당시 시대 사람들이 3천만 겨레라고 외치던게 얼추 맞는거죠. 1900년도 기준으로 2300~2500만이면 글로벌하게 봐도 top20에 들어갑니다. 당시 일본이 4500만이었는데... 우리가 3천만 가까이 안될 이유가 없죠.
Eugene Kim 15퍼센트는 개인적으로는 좀 아닌거같지만(사실 독립군 대부분이 수십수백명정도의 단체였기에) 외국에 나가있는 인구가 많은게 사실이고 현재만큼 정확하게 파악이 안될수도 있다는 점에서 2000만정도는 된다고 저도 생각하고 인구가 나름 순위권인건 맞는데...... 솔직히 당시 국가자체가 3,40개도 안된다는 함정이....
머스킷 부터 시작해서 목제 개머리판을 주류로하는 총기들은 하나같이 외관이 수려함 괜히 판타지장르의 게임이나 영화에도 화기를 넣어야한다면 머스킷 박아넣는게 아닌것같음 현대의 소총이 병기의 느낌이 확실하다면 당시의 머스킷이나 근대까지의 목제 개머리판을 쓴 소총들은 그 자체로 장식품으로의 가치가 높아보임
@@luka7058인원 있던 사람들만 호구 조사 한거 아니고 지금 현대에 와서야 인구수 조사가 나름 명확하게 가능한거지 인구 조사를 명확하게 하게 된건 인류역사에서 얼마 안됩니다. 그리고 조선식의 인구조사는 현대의 방식과는 다릅니다. 각 지역마다 정해진 최적?의 인구수가 있는데 그 인수구만 맞추는거죠. 초과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많이 줄어들어도 안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구 조사 할 때마다 관에서 한 마을의 인구수를 돌아가면서 조사서?에 이름을 올리는거죠. 이번에는 김뭐뭐를 올리고 그 사람이 세금을 내고 다름엔 박뭐뭐를 올리고 세금을 내고 이런식으로 조율해가면서 하던게 조선식의 인구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