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ososososo4148 임난 직전에도 상비군은 님이 말한 고려 중기 보다 더 많이 굴리고 있었음. 거기다 이괄의 난 당시는 정유 재란이 끝나고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라 아직 임난이 발생하기 전의 화약과 화포 등의 무기 재고를 다 채우지도 못한 상황이었음에도 최소 후금과 동등한 수준이었던 거임.
사르후에서 조명 연합군이 패배한 핵심 이유는 지휘부의 작전 실패입니다. 후금의 수도를 포위 공격 한답시고 부대를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분산 진격 시켰습니다. 분산된 각 부대들이 상호 협력이 잘 되어야 하는데 지형에도 어둡고 지휘관 간의 알력까지 생겨서 협력이 전혀 되지 않고 따로 놀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누르하치는 분산된 연합군 부대를 기병의 빠른 기동성을 이용해 하나 하나 각개격파해버렸습니다. 강홍립의 부대는 후금군의 조선군에 대한 공격이 임박한 무렵에서야 다른 연합군 부대들이 모두 전멸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후금 부대가 몽골과 같은 기병 부대와 결정적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진족은 유목민이 아닙니다. 정주민입니다. 말의 산지가 만주에 있어서 후금군은 기병이 주력이지만 사실 적잖은 비중이 '보병'입니다. 후금군은 무예에 뛰어난 이들을 철갑옷으로 무장시켜 공격의 선봉에 두었고, 이들은 기병보다 먼저 돌격해 적군의 대기병 장애물을 제거하고 방진을 흔들어 기병이 돌격해 들어갈 길을 열어주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보병들이 길을 뚫으면 뒤 이어 기병이 돌격해 들어와 결정타를 가했습니다.
결과를 아는 우리는 이렇게 분석하죠 당시에 후금군이 이렇게 쌔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을거고 본인들 정예병보다 좀더 쌔겠지 했겠죠 근데 병력 나눠서 보내는건 당시에 정석이에요 옛날에는 요즘 시대랑 달라서 길이 상당히 좁아요 그러면 수만이 갈수가 없어서 아마 여러갈래길로 갔을거고 그리고 앞에 이야기했듯 후금군이 이렇게 까지 쌜줄 예상 못했죠 역사에 남을 기동이에요 이건 ...
@@inhukj7875 정보가 과연 부족했을까요 ? 후금과 대치하고 직접적으로 싸움도해본 조선군이나 요동쪽 군대나 야전에서 싸우면 진다는건 알았어요 조선이 파병전에 후금군과 싸우면 진다고 진단도 했으니깐요 명나라 황실만 몰랐죠 당시 유정이 싸우나마나 진다고 엄청 투덜됐다는 기록된거보면 황제가 싸우라니깐 가는데 이미 가망없는 전쟁이라고 생각했을거에요
※영상 내용에 오류가 있어서 정정합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와 남한산성에 함께 있었고 둘째 아들이자 훗날 효종이 되는 봉림대군이 강화도에 왕실 식솔들과 함께 피신해 있었습니다. 이런 오류를 잡아주신 zzang mathis님께 크게 감사드립니다. 또, 병자호란 발발일이 음력으로 1636년 12월28일이고, 양력으로 1637년 1월 3일인데 후금의 국호변경에서 9년으로 맞추다보니까 이렇게 됐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해가 장기집권했다면, 또는 유능한 장군들이 배신하지 않거나 처형하지 않았으면 비극을 어느정도 완화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 조선이 사회개혁을 하지 않는 이상, 전쟁에서 이길 수가 없어요. 신라와 고려가 그토록 전쟁하면서 교훈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죠. 고구려가 요동을 잃은 이후 이후 한반도의 왕조들은 야전 기동훈련을 해보지도 못합니다. 전통적으로 수성은 잘 하고 야전을 못한다는 애기도 이 때문이죠. 야전기동훈련을 하려면 막대한 재정이 필요한데, 그러면 물자가 풍요롭거나 무역을 해야하는데 둘다 안되니깐 전쟁나면 대규모 병력지휘가 안됩니다. 조선은 일본과 싸우면서 왜군의 원동력이 뭔지 직접 느꼈죠. 많이들 조총에 졌다하지만 조선의 고관대작쯤 되면 왜군의 저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다들 알게 되죠. 전국시대 동안 축적된 전투기술과 이를 받쳐주는 무역, 또 그 무역의 원동력이 되는 지역특산물 개발 등.. 하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가 왜 졌는가를 다음 세대에 정확히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 전해줘야 하는데, 유교국가이다 보니 기록에서 유교적 특성이 많이 들어갈 수 밖에 없고 또 그런 경향으로 전투와 전쟁에 대한 평가나 피드백이 마비하죠.. 이 시기 직후의 서양의 경우를 들면 유럽은 전투과정을 시 간단위로 기록하는데다가 각국에서 참관하러 다니기까지 합니다. 어찌됬든 조선이 망국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임진왜란과 2차례의 호란이 적나라 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물자도 없고 군제도 엉망이고 그렇다고 해서 기술개발이라도 하냐 그것도 아니고..더 어이없는건 '직업군인이 필요하다, 신무기가 필요하다' 등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그걸 위해서는 사회전반이 변화하게 되니 안하고 '우리는 도의 나라다' 식의 정신승리로 가버리죠. 어쩌면 조선이 후손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남긴거죠. 할 수 있는 걸 했다고 해서 대비를 했다고 하는게 아니라 때론 근간부터 변화하는 노력을 해야하고 그 고통을 이겨내야만 진정한 승리자가 된다는 것.. 중세를 거치면서 생긴 많은 변화를 수용할 용기가 있는 유럽과 그런 용기가 없는 조선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전체적으로 다 찬사가 나오는 통찰력.. 한가지 아쉬운점은 카더라죠. 역사적 교훈의 가장큰부분은 모든게 순리대로 흐르진 않는다는거죠. 순리대로 흐른다면 예언이란 단어도 없을거고 예측이란말도 필요없죠. 순리를 읽기란 너무 쉽거든요.순리를 읽을수 있느자또한 넘쳐나구요. 역사는 절대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죠. 그게 지금의 우리 세상을 만든거구요. 강한자가 강하고 약한자가 강한건 상상속에서만 이루어지는거고 현실은 뒤범벅이죠. 무엇이 어떤 약점이 되고 무엇이 어떤강점이 될줄은 오로지 결과만이 말해주죠.
결국 국가가 발전하려면 물류와 공업이 발달해야하는데 이 미친나라는 왜적 침입이 수월해진다고 도로 정비도 안하고 다리도 안놓는 덕에 적시에 군대기동도 못하고 물류도 못돌고 기술개발을 통해 소출늘릴 생각 대신 상농공상 프레임으로 공업과 상업 진출 틀어막고 무지성 농사만 짓게함 정말 보면 볼수록 첨부터 끝까지 병크에 연속 일례로 온실을 만들어 한겨울 채소 재배하니까 오양을 거스르는 짓이라고 못하게 하는 등 조선이 반도국가가 아니라 유럽에 던져졌으면 애진작에 대가리 박살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개허접국가임
영상에 오류가 하나 있어서 써봅니다. 조총병에게 강한 바람은 매우 치명적인데 그 이유를 3:25에 시야를 가리고 심지에 불이 꺼졌다고 말합니다. 말이 안됩니다. 바림이 웬만치 강해도 조총의 사거리 내 시야를 흐리기 힘들고 심지의 불이 꺼지긴 더더욱 힘듭니다. (오죽하면 일본군은 심지의 불을 유지하기 위해 행군 간에는 이를 빙빙돌리며 이동했습니다. 태풍 수준이 아니라면 이런 심지는 오히려 불이 더 살아납니다. 작은 불씨 상태에선 우리도 불을 키우기 위해 입으로 바람을 부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조총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나오는 말입니다. 당시 조총은 총열 내부에 탄과 화약을 넣고 심지로 불을 붙이는데 당연하게도 내부의 화약에 직접 불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후방에 작은 접시 모양 공간이 있고 이 접시 위에 화약을 뿌립니다. 그리고 그 화약에 불을 붙입니다. 그럼 그 접시 위의 불이 통로를 통해 총열 내부의 화약을 점화 시킵니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이 접시 위에 화약은 그냥 단순히 올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강하게 불면 접시 위의 화약이 날려 점화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후에 유럽에서 개발된 플린트락 방식의 머스켓 총을 보면 이 접시 위에 덮게를 만들어 바람에 화약이 날리는 것을 방지하고 점화는 심지가 아닌 부싯돌로 하게 됩니다. 부싯돌이 내려 치면서 이 덮개를 밀고 화약을 점화 시키는 방식입니다. 요약, 바람은 시야나 심지의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화약 접시 위 화약을 날려 점화를 방해 했다.
@@남자장기영-o7w 세종에 대해서 제대로 아세요..세조가 단종을 거시기 하기전에 세종 때 신하들을 전부다 처단하고 세종 때 제도들을 전부다 폐지하여 왕족들과 백성들로 부터 엄청난 지지를 받은게 다 이유가 있죠..최대의 실수는 단종이고 아무런 죄도 없는 단종을 거시기 해버리는 바람에 지지를 많이 잃고 말았습니다만..선조도 임진왜란과 광해군을 싫어했던 것만 빼면 암군은 아닙니다..좀 이것도 저것도 아닌게 흠이죠..선조가 이순신을 처벌하려 했고 권율과 류성룡을 처벌하고 나중에 원균을 그렇게 챙기려고 했던게 다 이유가 있고 고종은 민비와 결혼한게 죄고 당시 조선의 상황은 그 누가 왕이 되어도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왕조로서의 수명은 다하고 국가를 이끌어갈 엘리트는 절대 부족했기 때문이죠..
임진왜란때 다급해진 조선은 노비들도 임란에 참여하면 면천시켜주겠다고 해서 전국에서 노비중심의 의병들이 들고일어났는데 전쟁이 끝나자 면천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래서 그후 청나라가 침입해왔을때는 전혀 의병활동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때도 만약 의병활동이 일어나서 남한산성에 주력해있는 청나라진영의 후방을 치고 괴롭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안타까운 생각이 드네요
아닙니다. 지휘관의 차이라고 봐야죠. 신립은 기마대를 진창에 밀어넣은 실패한 지휘관이고, 호란때도 전라도에서 올라온 1500명은 청의 1티어 부대를 전멸 시켰습니다. 기본적으로 조총을 기마병으로 이기긴 힘듭니다. 경상도 충청도 연합이 애초 몰살 당한 것도 개인당 3발씩 밖에 안줘서 였고, 조총의 이해도가 떨어져 멀리서 부터쏴서 못맞추고 탄을 다 소비해서 알아챈 청 기병의 돌격에 어이없게 다당한 케이스죠. 위대가리가 멍청하면 좋은 무기를 쥐어줘도 짐니다. 고대불변의 진리죠. 이때 심지어 1500명의 전라도 병사가 청의 홍타이지 매제까지 잡고 재정비할때 이를보고 지들도 할수 있다고 경상도 병사들이 전라도 보급품까지 받아가서 털어먹는 바람에 인조를 구출할 방법 자체가 없어졌죠.
@@nethappy6418 아닙니다. 인조가 ㅂㅅ인거죠. 호란 간격을 보면 여진족도 조선전쟁이 결코 쉽지 않았고 재네들도 올인한 상태였습니다. 쉽게 말해 전마 즉 전쟁에 쓸말을 인당 죄소 7,88마리 많게는 15마리 끌고 가야하며 작은말은 전쟁전 3개월전에. 사람이 먹는 곡식 기준으로 작은말은 2,3배 좀 급이 되는 전마는 7,8배 장군급이 타는 큰말은 13배이상 먹습니다. 그렇게 먹여서 개성까지만 가도 끌고온 말의 60프로에서 70프로는 죽고 애네도 보급품이 30프로 이하로 떨어집니다. 즉 인조가 강화도로 잘 튀었음. 그차리가 홍타이지 묫자리가 될 상황이었음. 저런걸 모르는 인조와 그 주변의 반란으로 정권잡은 바보들이 헛짓거리하다가 그 치욕을 겪은거죠. 조선군이 그렇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냥 인조가 고집 부리다가 그꼴 당한거죠. 지가 그런 컴블렉스를 가지고 있으니 후대에서도 소현세자 독살 의심 하는거고. ㅁ
사르후 전투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된 이중환의 책중일록에는 조선군의 패배 원인이 부실한 조선군의 무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조총과 대포 품질이 좋지 않아 한번 내지 두 번 쏘면 총렬이 파열 망가지고 활과 칼 창 갑옷 어느 하나 제기능 못하고 무겁기만 하고 무디다고 기록했는데 광해군 당시에도 조총의 품질은 형편 없었습니다. 월과조총법이라 하여 지방에서 일정한 수량의 조총을 만들어서 바치면 그만이라 총렬이 정교하지 못해 납 탄환을 장전 못하고 쓸만한 조총은 백에 한두 자루에 불과하니 조총은 그냥 쇠 막대기에 불과했습니다. 일본제 조총이 가장 우수했는데 일본도를 만드는 기술로 철판을 수백 수천번 단조하여 총렬을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는데 총렬이 고르니 명중율도 좋아서 임진왜란때 정발 장군, 정운 장군. 김시민 장군, 황진 장군 이순신 장군등이 모두 조총 사격에 의한 사망이었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서인 정권은 조선에서 만든 조총의 품질을 알고 있어서 후금과의 전운이 감돌자 일본제 조총을 구매했는데 그 수량이 기록에는 30자루에 불과했고, 병자호란 당시에도 화약의 품질이 좋지 못해 겨울 냉기를 먹어 화약이 불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강화도가 쉽게 함락된 원인도 부실한 화약과 화포 때문인데 청나라 군대가 땜목을 타고 강화도로 접근하자 포수들이 화약을 장전하고 조총과 대포를 쐈지만, 대부분 화약이 냉기를 먹어 불발하고, 화약 품질이 안좋아 발사가 되어도 전혀 살상력이 없으니 당황한 병사들이 도망쳤습니다. 제대로 기능하는 조총은 효종대가 되어서야 명중율이 향상된 조총을 만들 수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조총을 모방 제작한지 50년이 지나서야 제기능하는 조총을 만들 수 있었으니 사루후 전투에서 후금군 기병에게 조선 포수들은 추풍납엽 처럽 대학살을 당했고 제대로 된 전투조차 못했던 겁니다.
@@libertybellliberty6096 그기록은 국조보감이나 속잡록에 있는 내용으로 당시 인조반정세력의 견해가 들어간 기록으로 박엽을 아주 나쁘게 기록하였으나 민담이나 야사에는 가난하고 청백리적인 모습과 영웅적 기개가 충만한모습으로 나오며 실지로 박엽이 있던 시기에 여진족의 친입이 한번도 없었던것은 사실이기에 단순히 한쪽기록만 보고 판단할 인물이 아님
@@박장호-h8p 그건 야사일 뿐이고 김홍립군 식량 보급 끝까지 안해서 누르하치가 북서로군 털러 나간 사이 조선 강홍립군과 유정 동로군이 누르하치 본거지 허투알라 빈집 털이 들어갔으면 제압 할 상황였습니다 조선군에 식량 보급 담당 박엽이 끝까지 지원 안해서 지치고 사기 떨어진 조선군이 사르후전투때 몰살 했죠 이후 박엽은 인조때 그 책임으로 처형 됩니다
@@김봉두-x8d 김홍립이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사르후전투면 광해군때 일인데 이때는 광해가 중립외교를 할때임. 명의 출병요구를 거절하고 싶었으나 임진왜란때 도움을 준게 있어서 어쪌수 없이 1만여명의 군을 보내지만 전투중 강홍립장군이 청에 항복하며 우리의 사정을 청에 전달함. 이런 상황인데 박엽이 지원하는 얘기가 왜 나옵니까? 인조반정후 사대주의자들이 친명배금해서 얻은 결과로 삼전도의 굴욕. 정묘.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이 죽어난 결과를 모르싶니까? 그사대주의자들이 쓴 기록만 보고 그시대상을 보지 못함은 좀 편협한 시각으로 보입니다
그냥 조선은 농경국가인데 산업화가 어느정도 진행된 1960 70 년대에도 한반도는 전국토의 70프로가 산지였다고 하는데 저때는 80프로 이상일듯 즉 돈이 없음 돈이 조선은 항상 재정부족으로 시달렸음 국가 시스템은 전보다 커졌는데 농경국가인데 농경지는 너무 부족해서 돈이 없었음 돈이 없으면 군대는 힘이 없음 사실 지방군들은 대부분 군대 소속의 토지 가는데 쓰이고 노동력으로 쓰였지 군사훈련은 제대로 하지도 않음 군사훈련을 해도 돈이 없으니 훈련도 안되고 횟수도 부족하고 오히려 기록들 보면 조선은 전쟁 발발시 처참하게 발리고 전쟁중에 훈련과 경험이 되서 강군이 됨 전쟁 중에 군대가 강해짐 그러다 전쟁 끝나고 다시 다 농민이 되는거임
고려는 항상 자주적 이고, 북벌 의지가 강한 군대였는데, 도대체 조선군만 생각하면 이게 군대일까 싶을 정도로 참담합니다 제생각엔 이씨 왕조가 오로지 중 국숭배와 자신의 시조인 이성계가 반역의 역사로 시작했기에, 강한 군대를 절대 양성 안 할걸로 생각 되어 집니다. 전주 이씨의 오백년 통치로 우리 국민들의 위대한 창 의성과 용맹을 펼치지 못하고 살 아온 것이 그저 슬풀 뿐입니다
청에서 볼모를 마치고 돌아온 효종은 팔기군의 군체제와 청군의 강력한 훈련체계를 보고 많은것을 배워기록해 두었다가 왕이 되자 북벌을 계획하고 훈련을 시작했다. 높은언덕에 앉아 지휘했는데 산밑의 군사를 양쪽으로 나눠 중앙에 세운 깃발을 언덕워의 나팔과 북소리 가 울리는 동시에 달려나가 쟁취하는 쪽이 이기는 단순 경기 였다. 북소리가 울리고 붉은 신호기가 울리기 전에 서로 먼저 뛰어나가 자 효중은 훈련을 중단시키고 개시신호보다 먼저 뛰어나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두번째 개시 신호가 울리고 붉은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또다시 군사들이 뛰어 나가자 중단시키고 신호보다 먼저 뛰어 나가는자는 참수하겠다고 엄명을 내렸고 또다시 먼저 뛰 어 나가자 참수했다. 그리고 다시 훈련 신호를 하자 이번엔 아무도 달려나가지 않았다. 효종은 북벌계획을 철회 하였다라고 기록 되어 있음.
우린 매번. 전쟁에서 져왔다. 그렇게 당하고 지고 또 지고 또 지고 다들 아시져 왜 지는지. 명나라 멸망뒤 진린 가문 후손이 해남으로 피신하고 덕수 이씨 후손과 지금과 우애를 쌓는다는데. 여기서 만주족이 땜에.. 안그랬다면. 두 가문이 지금 현대에서 만나지 못했죠. 뭐 그렇다는거에요.
좋은 영상 감사드려요~!! 어릴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는데.. 항상 그동안임란 이후에 조총부대가 있었음에도 그렇게 쉽게 치욕의 역사를 겪은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전술적인 한계가 뚜렷했군요... 조총부대가 근대 서양의 머스켓 총 전열보병과 다르지 않은데... 그부분을 생각을 못했었네요 ㅎㅎ
조선은 성리학을 이율곡 이황이 유교로 종교화한 후 사농공상의 계급사회로 공정이 없어졌고, 상업, 공업, 무역을 천민 시하여 쇄국의 길로 들어서 한민족 최약체 왕조가 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조정이 능력에 따른 장수 등용을 했어야 하는데 당파에 치우쳐 등용하다보니 전략과 전술이 부재하여 연전 연패를 한겁니다. 임진왜란에서 수성전이 아닌 야전에서 승리한 황진 장군의 이치 웅치 전투와 정문부 장군의 함경도 전투는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도 전술에 따라 승리할 수 있다 예가 되었고, 함경도를 점령한 왜군이 여진족 잡으려 만주에 들어갔다가 기마병에ㅔ 개털렸습니다. 이 여진족이 조선의 장수에게 털린 장수들이었는데 조선의 장수는 패전한 겁니다
조선의 조총병은 강했음. 나선정벌때 조선조총병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 했음. 이괄의 난으로 정예병력 갉아먹고 정치를 위해 지방 근왕병의 전력을 견제해서 개발린것이고 병자호란 때에도 남한산성에서 잘 싸웠음. 당신의 사고방식이야말로 폐쇄적이고 낡아빠진 조선 말기의 성리학적 사고의 전형임 객관적 현실보단 감정과 자기권위, 도덕적 선악감정을 가지고 판단해버리니깐.
기마병을 제대로 견제할 수 있는게 있어야 하는데 저 당시 조선군은 그런게 없었다는게 딱 보이더군요. 조총이 무슨 만능 무기도 아닌데. 일본군이 조선 침략했을때도 저렇게 조총병만 엄청 양성해서 싸운건 아니잖아요. 그럼 그걸 제대로 카피하기라도 했으면 중간 이상은 갔을겁니다. ㅎㅎ
난 조금 생각이 다른게 광해군이 그렇다고 정치를 잘한것도 아니고 이괄의 난이 아니더라고 1627년까지 삽질만 했던지라 싸우긴 힘들었을꺼라 생각함. 명나라가 청이랑 전쟁에서 건재했으면 몰라도 결국 명이 망했으면 적대국가로 청이랑 계속 대치해야하는데 조선이 뭐 과거 고구려같은 전투민족도아니고 그냥 농업국가인 상황에서는 힘들지 않았을까 싶음.
왕밑에 관리들의 문제 ᆢ 역사의 흐름은 항상 세치혓바닥의 왕을 좌지우지하는 혓바닥과 귀가 얇은 왕의 문제 ᆢ 무기가 신진화되었다면 좀 나아졌겠지 ᆢ 저때나 지금이나 왕밑에 관료 ᆢ지금의 국회의원 같은 것들을 전투의 전쟁의 선방으로 세웠어야 그 나라의 평화가 온다는 것에 동참한다 ᆢ
아 어쩐지 영화나 게임속 장면 영상들이나 그리 멀지 않는 실거리에서 쏴도 맞추지 못했던 이유가 저런 이유들이 있엇구나... 사람 실력에 문제가 아님 총에 문제가 있엇네...ㅋㅋㅋ 저렇게 엄청 명중률 좋지 않는 총기에 더해서 장전까지 비효율적인 그야말로 꾸진 무기... 조총같은것을 화기로 사용할빠에 활을 쓰는게 더 오히려 좋다고 생각될 정도임 전방에 궁병들 새워두고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로 일제 사격후에 빠르게 아군 진영 뒤쪽으로 빠지고 근접 보병들을 전진 배치 시켜서 방어에 집중 시키고 아군 진영이 열세이면 기마병들을 보내어 전선을 유지시키고 아군 진영 측면을 노리고 오는 적 기병들을 상대로 측면 방어 전선을 1전열 창병 2열 장창병들을 배치하고 이렇게만해도 평지 전투에서는 방어는 어느정도 가능함 상대 적이 페르시아급이나 삼국지급 물량 병력 아닌이상은 쉽게 방어와 전진 공격을 할수있는데 성에서 싸우면 성벽 전열을 궁병들을 배치해두고 궁병들 바로 뒤에 근접 보병들을 배치해두면서 방어해야됨 성문쪽이 뚫리는것을 대비해 장창병을 배치해두고 성문 좌우로 하여금 성벽 끝쪽으로 기마병들을 배치해두고 성문이 뚫렸을시 기마병들이 돌격해서 방어를 유지시키는 전략...
조선이 잘못했지 청나라 욕할게 아니다. 인조반정때 공을 쌓은 이괄부자가 추가로 공을 요구하자 거절하니 후금으로 넘어가 조선 인조가 광해군을 폐위시켰고 ,친명배금이라 꼰지르니…후금은 광해군 폐위 명목으로 정묘호란때 쳐들어와 형제국으로서 기회를 줬는데도 오랑캐라 하며 그마저 약조를 어기니 병자호란때 삼배는 업보다..
한국은 예로부터 정치가 혼란..서로 갈라서 싸우기 바쁘고 그로 인해 나라의 혼란으로 외세의 침략을 수없이 당해온 빌미를 제공했었죠. 특히 민족적 특성으로 욕심이 많아 사촌이 땅을 사면 배아프다는 게 우스겟소리가 아닌 유전적 성격이었죠. 남이 잘되는 거 절대 못보고, 욕심으로 그렇게 남을 제끼고 보다 더 잘 살거나 얻으려 했던 역사가 끊이지 않은 국가 내부적 혼란을 일으켰죠. 지금의 정치 상황이 정말 쓰레기인게...사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죠. 어떻게 보면 내부적으로 싸우고 혼란이 없었던 시기가 아마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재밌게도 한국인은 외지에 나가 혼자 있으면 강한데, 같이 있으면 서로 싸우고 난리가 나는 민족이었죠. 이에 반헤 우리가 그렇게 욕하는 중국인들은 하나하나는 오합지졸인데, 모이면 자기네 끼리 뭉쳐서 아주 굳건한 힘을 발휘하죠. 세계 각국의 차이나타운이 그 국가의 엄청난 세력으로 커나아가는데는 이러한 민족적 특성이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시간으 흐로고 민주주의 및 첨단의 시대로 왔어도 이러한 한국의 민족적 특성은 아직도 현실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고 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대단한 것처럼, 항일무장 투쟁이 꽤 의미가 있었던 것처럼 사학자들이 왜곡하고 미화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항상 내분으로 서로 싸우고 결집도 안되었으며 무장투쟁의 군대 및 전과도 정말 현실적으로는 초라한 수준이었다는 것을...절대 역사가들은 알리고 싶지 않았기에 아직도 우리는 왜곡된 역사를 바라보며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렇게 내분과 균열로 결집이 안되는 이 민족이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급속도로 단결하는 정말 원래의 모습과는 다른 신기한 장점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여기에 정말 중요한 것은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이 나라에는 역사로 증명이 되었었죠. 정말 나라가 망할 정도로 어려울 때, 혹은 완전 기울었을 때,......정말 영웅적 인물이 나타나 나라를 강제로 멱살잡아 일으키고 캐리하는 기적이 계속 일어났고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발전해 올 수 있었던 정말 버라이어티한 나라이자 민족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서로 분열되고 싸우는 모습은 계속되고 있고 안타깝지만 이는 아마도 절대로 해결되지 않을 듯 합니다.
@ 임진왜란 직후의 정치적 혼란, 국토 황폐화와 인구 유실로 인한 백성들의 전방위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무려 궁궐 5개를 건설하고, 심지어 그중 가장 큰 인경궁에는 거의 모든 전각에 청기와를 올려 커지는 북방민족의 위협에 대비할 화약..의 원료인 연초를 남용했습니다. 무분별한 행정으로 대북파를 자신의 정치깡패로 이용하고(심지어 이들 중 강경파가 득세하여 내치는 더더욱 안드로메다로..), 신하들이 계속해서 건의한 대동법 확대 시행을 '반대'하고 오히려 폐지하려 했고, 매관매직을 성행시키고, 왕실 재산 축적에 빠졌습니다. 광해군 시대의 군사력 증강이요? 광해군 시대의 군사력은 임진왜란 때 베테랑들이 남아있는 시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병력들을 제대로 이용해 종합 국방 시스템을 완성하기는커녕, 군사의 수를 줄이고 자금을 빼돌려 궁궐 공사에 썼습니다. 애초에 광해군이 농업에 관심을 보이지도 않았고, 세종처럼 농업 시스템을 정비해야 군사력이 확보되는 법인데, 그게 안되니 군대가 정비되겠습니까?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들 중 인진왜란 시절 베테랑들이 껴 있는 건 괜한 일이 아닙니다. 뭐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탄핵 사유입니다. 세자 시절의 광해군은 훌륭하게 지도자적인 면모를 보였고, 왕일 땐 인조 치세보다야 나은 외교정책을 폈지만.... 글쌔요. 그것 빼곤 암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거 하나로 정리가 가능합니다: 광해 15년. 3월 13일 계모 9번째기사. 도성의 남녀들이 왕이 가는 것을 보고 모두 담장과 지붕에 올라가 바라보았고, 어떤 사람은 욕하기를 "돈애비야, 돈애비야, 거두어 들인 금은은 어느 곳에 두고 이 길을 가는가." 하니 왕이 머리를 숙이고 눈물만 흘렸다.
@@겨울산-n5m "전문가"라는게 중요하죠. 그들이 은퇴하기 전까지 키울 2세대, 3세대의 훈련을 해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데요. 수많은 실전 경험이 있는 부대에게 훈련 받는 것과 어느정도 실전경험이 있는 부대에게 훈련 받는것의 차이는 아주 큽니다. 백제가 멸망한게 660년 고구려가 멸망한게 668년 즉 8년이라는 시기가 있었으나 백제멸망전에 싸운 신라군이 당의 전술을 흡수 해 고구려 멸망전에서 어느정도의 활략을 할수 있었고 670년에 나당전쟁에서도 싸워 나갈수 있었던 것이죠.(토번과 당의 전쟁도 있지만) 경험있는 부대의 유무는 굉장히 큰 차이가 납니다. (물론 이괄의 난도 그렇지만 사르후 전투도 너무 아쉬운듯)
www.google.com/url?sa=t&source=web&rct=j&url=namu.wiki/w/%25EA%25B9%2580%25ED%2599%2594%2520%25EC%25A0%2584%25ED%2588%25AC&ved=2ahUKEwir1-Pc_tP0AhVPslYBHYuXDC8QFnoECD4QAQ&usg=AOvVaw21PbkcgDryBUQYlTPJgc8M 김화전투 참고
정말 재미있네요. 하지만 제 생각에 병자호란의 진짜 문제는 인조였습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면 좀 능력있는 모습을 보이든지... 아휴, 이건 어떻게... 자신을 왕위로 앉힌 1등 공신 이괄을 어떻게 그렇게 내칠 수 있었던 걸까요? 이괄 탓을 할게 아니라 인조 그 자 탓을 해야합니다. 아무튼 조총,,, 정말 잘 봤고요. 구독 눌렀습니다.
@@화담-o7u 숨겨진 역사를 제대로 아세요..원균은 이순신을 적극적으로 밀고 있었던 권율과 류성룡의 계략에 희생이 된거요..부하들 보는 앞에서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모욕을 당하자 그토록 피할려던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전투를 치른거고 당시에 선조는 류성룡과 권율 말만 믿었다가 자기 때문에 원균이 희생 당한걸 알고 나중에 류성룡과 권율을 처벌하고 원균을 그토록 챙길려고 한겁니다..당시 부산포에 왜군이 무려 20만 가까이 되었는데 수군 2만으로 어떻게 이깁니까?
@@느그쵸 총이 전통무기에 비해서 대량으로 병력을 뽑을수 있는건 사실입니다. 전통무기는 몇년을 수련시켜도 전장에서 칼창활로 부딪힐때 제대로 싸우게 만들기 어렵습니다. 총기류는 발사과정만 숙달시키면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여포 관우도 맞추기만 하면 반드시 죽일수 있기 때문에 대규모 총력전이 가능해 진겁니다. 총보급 초기에 조선의 상황은 그렇게 대규모의 총기를 만들수 없는 국가적 한계때문에 그렇게 인식이 되는거지 세계적으로는 총의 등장으로 드디어 국민이 총동원되는 전쟁의 양상이 만들어집니다.
1. 이괄의 난을 단순히 논공행상의 불만으로 표현한 거 자체가 오류임. 이괄이 논공행상에서 제 1공을 받아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건 맞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능하다는 이유로 최전선에 간것도 맞음. 그러나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인조가 아무런 죄가 없는 이괄을 체포해서 죽이기 일보 직전이었음. 이괄의 난 자체는 정당방위에 가까운 형태임. 2. 화승총이 최신무기? 광해군 시절에 이미 기마병을 상대로는 화승총은 크게 효력이 떨어진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포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음. 그냥 준비를 덜한 거임. 또한 조선 자체가 화약 생산 자체가 힘든 국가이기 때문에 더더욱 조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음. 그냥 준비 안한거임. 3. 중앙군을 제외한 지방군의 훈련도 차이? 그냥 장수가 무능한 것이 대부분의 병권을 인조반정파에서 가지고 있으니 진짜 실력이 아닌 인맥으로 되어 있는 군대가 잘 돌아 갈리가 없음.
더욱이 왜병은 수십년에서 백년이상 전쟁으로 단련되고 사무라이들 전투력도 장난 아니었는데,거기에 조총까지있었으니 더 기세가어마했죠 조선은 그에비해 전쟁준비 안되있던 상태에서 왜란으로 엄청 국력이 상했고 보급도 원활하지도 않았으며, 조총이라는 신무기도 만들었지만 전체적인 군사력이 상해버린 상태에서 싸우자니 꽤나 문제였던듯 합니다.
일본이 더 힘든 상대였습니다. 임진왜란때의 조선은 준비는 열악했지만, 곳곳에서 어느정도의 방비가 되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임란시기 일본군은 홍타이지의 청제국군보다 강했습니다. 전력에서 홍타이지의 청제국군은 규모나 전력에서 밀립니다. 거기다 일본군은 근접전용 창검병부터시작해서 4미터의 장창부대와 대포부대까지 갖춰진 정예부대입니다. 명나라지원군은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용병대와 명제국 정예부대가 직접 왔습니다. 청나라의 기마전술이 통했던 것도 조총 제식체계가 덜잡혔던 시기라서 그렇지. 이괄의 난이나 인조반정만 없었다면 3만의 조총과 총검 및 기병대로 후금병들을 떡바릅니다. 조선대포가 사거리와 정밀도가 좋기때문인데, 서구군대들이 괜히 선기병전술을 안쓰는 이유는 대포전술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100문의 대포만으로 8만의 적군을 분열시켜서 상황에 맞는 보병전술과 기병으로 적을 쓸어버렸죠. 조선도 이런 전술의 전환시기에 인조와 사대부들의 반란이 일어나서 조선은 폭망합니다. 맨날 충성과 의리가 어쩌구하는 사대부들만큼 배신의 연속인 역사를 가졌죠. 만약 광해군이 이시기만 잘넘겨다면 조선은 망해가는 명과 대립하는 청사이에서 조총부대와 대포 및 보조부대의 육성으로 사대부들의 성리학이 아닌 실학의 전환이 더 빨라졌을것이고 서구처럼 대양항해를 시작했을겁니다. 서구보다 늦었기는 했지만 대양함대만 있다면 명이든 청이든 가지고 노는 것은 시간문제죠. 이는 서구열강들이 전세계를 상대로 이미 증명한 결과입니다. 뭐 시기가 안좋았습니다. 전환시기를 놓쳤고 결국 사대부들은 살아남아서 일제강점기로 이끌게되죠.
@@overman7 ㅇㅈ...;; 그나마 조선초가 최전성기 겸 중기의 성웅 이순신장군이 잘했긴했으나 그때조차 10만내외에 그게모자라서 전국적으로 쌩난리 ㄱ= (최대 20만이었다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추정에 훈련받은 군대도 아니었음... 암만 전쟁과 국방이 숫자로 하는것이 아니지만 최소한의 병력이 없어서 그난리를 쳤으니 개판1초전이지)
예송논쟁은 생각보다 훨신 건전한 형태의 정치알력 다툼입니다. 자신들의 사상을 가지고 한 정치 논쟁이였으며 이로인해 숙청작업 조차 없어 무의미한 희생자도 없이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이후 대동법을 비롯한 사회, 경제체제의 개혁에 밑바탕이 된 사건입니다. 이후 환국을 통해 개판난 조선을 생각해보면 "합리성"을 가진 싸움이었습니다. 총칼을 들고 내말이 맞다 니말이 맞다 하며 무논리 초딩 싸움하면서 내전을 치르고 피의 대숙청을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낫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