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백제는 환두대로 금동관모 .5층석탑. 문화로 정복. 알본. 경기파주. 경북서부.전남까지 .문화로 영역표시하죠. 신라는 순장문화 . 당연히 백제지역에서 순장샅은거 할일도 없고. 고려들어서고 5층석탑 문화가 번성하죠.비석은 일시적 과시용이라. 관심도 없죠. 그냥 자기 역사가 아니니 쑤래기통에 버리죠. 삼전도비나 고구려비 다 버련진거 최근에 문화재라고 세윤거에요. 당나라라 머리 좋았던게 버릴 수 없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정복비 새겨놨죠.
@@user-dc3tk6jh4w 고구리 3대왕 대무신태왕때, 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해서 취했다고 고구리본기에 나오죠. 북평은 북평양을 말하죠. 한반도는 그냥 안전한 후방지역으로 낭락국을 고구리가 차지한 이후 별다른 전쟁이 없었다고 봐야합니다. 치열하게 화하족과 영토 전쟁을 벌인곳은 산둥성, 양자강들의 동이의 강역이구요. 지금의 한반도는 조선시대 이전에는 이민족 침략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록이 별로 없죠. 천문학적 일식기록으로도, 기록상 방위상으로도, 기후적으로도 한반도하고 맞지 않습니다. 다 일제가 입맛에 맞게 조선상고사를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제작&유포되었죠.
매금은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잠령한 땅. 문젠 신라가 아니라 백제영토란 거죠. 근데 고구려는 백제영토 중원. 즉 남한강 원주,충주.청주 , 단양를 신라로 봤다는거죠. 고구려는 신라경주 속민으로 봤지 정복은 아니고.그래서 신라는 될 수없고. 남한강 정복땅.신라에있는 매금은 어서 돌아와 백제와 연끊고 고구려국민이 돼라는 뜻입니다.
그딴 것 없어요 일본이 숨겨서 뭐하고 역사적 흔적은 완벽하게 살아지지 않습니다. 예로 조선시대 수 많은 역사서가 편찬 되었고 역사를 다룬 문인들 사료가 엄청나게 많은데 이 모든 사료에서 흔적을 지울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뜬금없이 근세에 발견된 사료 같은 경우 서지 비판을 철저히 해야 하는 거죠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user-gk5lw1xn8y청국의 중국인한족 대학살 명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가정을유기사],[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 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천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인구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 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청조의 자료 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53페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고구려가 서울지역을 점령하고 그 강을 한나라한강이라 하고 한성이라 지은것만 봐도 고구려는 한나라의 후손이 분명하죠. 신라와 고구려는 서로 언어도 다르고 민족도 다르죠. 그래서 왜가 신라를 침략했을때 와서 도와주고 떠난거죠. 안그랬으면 고구려가 벌써 삼국통일 했겠죠. 같은 민족이었으면 떠날일이 뭐가 있겠슴? 관리만 두면 되는데.. 고려의 왕건이 고구려민 후손으로 피난와 신라로 귀화하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정권잡아 나라이름을 고려라 지음으로 정체성의 혼란이 온것도 한몫하고 있슴.
@@user-gk5lw1xn8y현 중국의 조상은 고조선 동이(東夷) 구족(九族) 중 사이 (四夷)이다 라고 중국인들 스스로가 쓴 후한서(後漢書)등 여러 기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중국인(中國人)의 祖上은 四夷에서 유래되었다했으므로 기록이 존재합니다. 중국의 북송(北宋) 때 사학자(史學者)인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193권(卷)에 있는 당기(唐紀) 9卷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여근본사이(中國如根本四夷)라고 적고 있죠. 이 말은 中國의 根本은 四夷와 같다고 했어요. 또 195卷 당기(唐紀) 11卷에 보면 중국근간야(中國根幹也) 사이지엽야(四夷枝葉也)라고 했다. 즉 中國의 근본적(根本的)인 뿌리는 四夷의 가지와 잎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中國이라고 하는 것은 동이구족중(東夷九族中) 사이(四夷)가 뿌리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四夷가 뿌리라면 中國의 조상(祖上)들은 四夷라는 것을 뜻하죠. 즉 中國人들의 祖上은 四夷이므로 中國祖上들은 四夷들의 가지와 잎에 해당함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四夷가 中國의 祖上인 셈입니다. 중국의 조상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사이四夷가 바로 백제百濟·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왜倭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이四夷의 뿌리는 조선(朝鮮)임을 기록한 통지(通志)와 통전(通典)에서는 놀라운 사실들을 적고 있습니다. 사이四夷인 백제(百濟)·신라(新羅)·고구려(高句麗)·왜(倭)에서 파생되어 나간 나라들은 무려 195개국이었습니다. "제왕(태호 복희)이 진(震)에서 나왔고, 만물이 진(震)에서 나왔고, 진(震)은 동방이다." 帝出乎震 萬物出乎震 震東方 也(제출호진 만물출호진 진동방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근본이다." 東方曰夷 夷者柢 也(동방왈이 이자저야) , "진(辰)은 진(震)이다." , "맹자가 말하기를 '순임금은 동이(東夷) 사람이다. 주나라의 문왕은 서이(西夷) 사람이 다'라 하였다." 舜...東夷之人也...文 王...西夷之人也 "하(夏) 나라를 개국한 우(禹)임금은 동이(東夷)에서 태어났다.' 大禹生於東夷 (대우생어동이) "태공망 여상(강태공)은 동이(東夷)의 선비이다." 太公望, 東夷之士也 (태공망, 동이지사야) "상서대전에 이르기를 바다 동쪽 모든 이(夷)는 구려·부여· 간·맥의 족속이다."
@@dream8220뿌리가 모호한 허구 종족 한족 중국인을 노예로 다룬 기록물 태생 자체가 다른 신라계 만주인 (만주어 만문노당) 만문노당은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기록한 만주어로 된 책자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죠 518부-한족을 해안가 60리 밖으로 강제 이주시켜라! 519부-금주~ 여순구의 모든 한족을 강제 이주시키다! 520부-반란민의 소를 부하들에게 포상으로 내리다. 521부-모문룡에 붙었던 한족들을 노예로 삼다! 558부-조선 정충신 후 금에 들어오다! 559부-조선의 조공은 원치 않는다! 대등한 관계를 원할 뿐이다 561부-한족들에게 팔기군이 쓸 식량과 마초를 징수하겠노라! 562부-겨울이니 한족 이 도망가지 못할 것이다! 고향으로 보내라! 563부-정충신 조선으로 돌아가다 545부-조선과 몽고 때문에 마음 놓고 명을 칠 수 없다! 546부-신요양성 축성 을 한족에게 전담시키다! 만문노당은 누르하치 의 일대기를 기록한 무권점 만문 사서 [만문원당/구만주당]을 건륭조에 권점을 넣고 일부 내용을 변경하여 편찬하였습니다. 기 연재했던 내국사원 당이 만주의 시조 부 쿠리용숀부터 1584년 9월까지만 기록되어 있는데 만문노당은 1607년부터 기록이 시작됩니다
@@user-gk5lw1xn8y일본은 대한민국 덕분에 일찍 선진국이 되었다 스즈키 가키치 박사鈴木佳吉博士 前 나라문화재연구소장 발언 당시 백제의 건축기술이 들어오면서 비로소 일본 에서도 불교사찰을 건립하게 됩니다. 그 이전에는 초가지붕밖에 없었는데 백제서 건너온 기와공들로부터 기와굽는 법을 배워 처음으로 기와집을 짓게 된 것이죠. 당시 백제의 건축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었고, 그 기술이 일본에 건너와 이런 사찰을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이 법릉사는 백제건축기술로 지어진 대표적인 사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 최고의 사찰 법륭사 35m 백제 장인 만든 탑 일본서기 숭준왕 원년 588년 백제는 승 혜총을 파견 부처의 사리를 보내 왔고 계속해 사공 노반 박사 와 박사 화공을 보내 왔다 소아마자는 백제승을 청해 계법 을들었다 能出 有加蘋我馬子宿褕請百濟 僧站間要戒 清江大良果太文贤古子鏸離博士普德自職 浮几博士麻茶交奴陽光支 聽貴文情麻帝陈 일본서기 숭준왕 원년 588년 백제는 승 혜총을 파견 부처의 사리를 보내 왔고 계속해 사공 노반 박사 와 박사 화공을 보내 왔다 소아마자는 백제승을 청해 계법 을들었다 일본은 고대 한국인의 문명 덕분에 법륭사 등... 많은 사찰을 세울수 있었다 일본은 고대 한국인 문명 덕분에 전쟁없이 일찍 선진국이 되었으며 역사적 뿌리 깊은 두려움과 열등감을 가지고 있기에 악의적인 허위 유포와 가면으로 그려놓은 역사의 위조를 내세울수밖에 없는 현실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
경기도는 역사적 이름부터 경기, 서울경이다. 반면 경주, 경상도의 경은 경사경. 서울이 아니다. 경사로울 경이 분명 손꼽히는 공의 소재지이긴 하지만. 한반도 전체를 경영하는 국가의 수도는 한강,서울 근방에 있었다. 서울을 베이징보다도 훨씬 지세가 우수한 수도의 자리다. 베이징은 평지에 못을파서 나온 흙으로 인공으로 산을 만들었지만 서울은 자연적인 북한산 줄기가 배산을 만들고 자연적인 한강이 임수를 형성한다.
고구려는 우리민족의 조상이 아닙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왕족에게서 떨어져 나온 지방정권이죠. 그래서 수당 고구려 전쟁은 통일전쟁이었죠. 이는 전쟁전 그들이 나눈 대화만 봐도 명백한 사실임. 신라에 왜가 침략해 나라가 멸망할때쯤 고구려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적이 있는데 같은 언어 같은 민족이었으면 돌아가지 않고 관리만 두었으면 삼국통일은 고구려가 해냈을꺼임. 하지만 서로 다른 민족이었기에 조선시대 때 명나라가 와서 구해주고 떠난것처럼 똑같이 구해주고 떠난거임. 후백제는 신라장군 견훤이 난을 일으켜 세웠고 후고구려는 태봉이란 이름으로 신랑왕족 궁예가 세운 나라임. 따라서 후삼국이라 하면 안되고 신라의 지방정권들이라 해야 맞는 얘기가 되는거임. 고려를 세운 왕건은 고구려가 멸망할때즘 일부 피난민이 신라로 온적이 있는데 그중 한명의 후손이었슴. 그래서 궁예를 몰아내고 신라의 왕권을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정할때 고려라 명명한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