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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거란의 운명을 바꿔놓은 귀주대첩! - 고려 거란 3차 전쟁 속 숨겨진 모든 이야기와 종전 이후 고려 거란의 관계까지! 

이익주는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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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сен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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Комментарии : 112   
@benefit_history
@benefit_history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익주는 역사 고려거란전쟁 라이브방송 공지사항📌 일시 : 3월 4일 (월) 밤 10시🌙 이익주 교수님과 함께하는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평소 궁금하셨던 것들을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많은 참여 부탁드리겠습니다!! 😊
@user-ph1uk1nf3s
@user-ph1uk1nf3s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주 훌륭한 작품인거같아요
@skj4409
@skj4409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대첩의 백미는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소가죽둑도 만들고 거란군진입예상로에 병력을 매복하고 거란군대항 기병도 준비한 강감찬의 전략과 그걸 예상하고 회피전략으로 개경까지 남하한 소배압의 전술이 묘미
@yttst7110
@yttst7110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건 귀주대첩이아닌데요..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수도 직공 전략은 나중에 몽골의 1차침입이나 병자호란때같이 대단한 전략이고 발해멸망때 유효했죠. 소배압은 대 송나라전 상대로 정말 명장이었고, 다만 상대가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강감찬과 현종이었다는 것이 불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user-nv7kp3hc2y
@user-nv7kp3hc2y 7 месяцев назад
😅😅😊😅
@kimjh_mathedu
@kimjh_mathedu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늦은 시간에도 교수님의 영상을 보고 싶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시청 전 댓글이지만 끝까지 영상 시청하고 오늘도 유익한 역사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user-es2fd5wh5n
@user-es2fd5wh5n 7 месяцев назад
😊😊😊😊😊😊😊😊😊😊😊😊😊😊😊😊😊😊😊😊😊😊😊😊😊😊😊😊😊😊😊😊😊😊😊😊😊😊😊😊😊😊😊😊😊😊😊😊😊😊😊😊😊😊😊😊😊😊😊😊😊😊😊😊😊😊😊😊😊😊😊😊😊😊😊😊😊😊😊😊😊😊😊😊😊😊😊😊😊😊😊😊😊😊😊😊😊😊😊😊😊😊😊😊😊😊😊😊😊😊😊😊😊😊😊😊😊😊😊😊😊😊😊😊😊😊😊😊😊😊😊😊😊😊😊😊😊😊😊😊😊😊😊😊😊😊😊😊😊😊😊😊😊😊😊😊😊😊😊😊😊😊😊😊😊😊😊😊😊😊😊😊😊😊😊😊😊😊😊😊😊😊😊😊😊😊😊😊😊😊😊😊😊😊😊😊😊😊😊😊😊😊😊😊😊😊😊😊😊😊😊😊😊😊😊😊😊😊😊😊😊😊😊😊😊😊😊😊😊😊😊😊😊😊😊😊😊😊😊😊😊😊😊😊😊😊😊😊😊😊😊😊😊😊😊😊😊😊😊😊😊😊😊😊😊😊😊😊😊😊😊😊😊😊😊😊😊😊😊😊😊😊😊😊😊😊😊😊😊😊😊😊😊😊😊😊😊😊😊😊😊😊😊😊😊😊😊😊
@user-es2fd5wh5n
@user-es2fd5wh5n 7 месяцев назад
😊😊😊😊😊😊😊😊😊😊😊😊😊😊😊😊😊😊😊😊😊😊😊😊😊😊😊😊😊😊😊😊😊😊😊😊😊😊😊😊😊😊😊😊😊😊😊😊😊😊😊😊😊😊😊😊😊😊😊😊😊😊😊😊😊😊😊😊😊😊😊😊😊😊😊😊😊😊😊😊😊😊😊😊😊😊
@kanfvorns
@kanfvorns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캬 역시 깊이가 달라요.너무 다릅니다.여타 역사방송 보다 디테일이 최곱니다.
@user-gi1we2ez3t
@user-gi1we2ez3t 7 месяцев назад
3차 전쟁 이후 고려는 거란에 책봉을 청하고 조공을 바치는 관계가 거란이 멸망하기 전까지 100여년 동안 계속되었다.
@user-lg9vo7zl4u
@user-lg9vo7zl4u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잘모르는 전쟁이후의 고랴가 행한 송.거란과의 관계..방송이 재밋네요..
@user-ql4qx5vn6w
@user-ql4qx5vn6w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고려사를 전공하신 교수님은 흥화진, 귀주, 통주 그리고 개성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직접 가보고 싶으실까 생각을 했었는데 오늘 영상에서 말씀하시네요. 직접 가서 보고 싶다고... 제가 언급한 곳 외에도 사학자로서 북한지역에 남아있는 유적, 유물, 사적지를 가보고 직접 발굴해 보시고 싶은 생각이 많으실 거 같습니다. 제가 어찌 그걸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남북한 간에 사학자들의 교류와 방문, 공동발굴과 연구가 하루 빨리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정치도 아니고 안보도 아니고 그냥 학술연구잔아요. 그렇게 되면 교수님이 직접 찍으신 흥화진 사진을 보여주고, 귀주 사진을 보여주시면 영상을 만드실 텐데... 그점이 아쉬움으로 남네요.
@hg5033
@hg5033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익주교수님 넘재미있고 공부되네요!
@user-yc4oj5gg5c
@user-yc4oj5gg5c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재미있어요 감사드립니다
@user-qt8hs3du7n
@user-qt8hs3du7n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너무 재밌어요
@user-zq5lt6rc7u
@user-zq5lt6rc7u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감사합니다 교수님
@user-es5px3go8k
@user-es5px3go8k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 전쟁에서 승리 했으니 외교가 되는것이지 패했다면 속국이 되는 것이요 나라가 강해야 어느누가 넘보지 못하는것
@brandonann9283
@brandonann9283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외교가 이후 100년간의 평화를 유지하게 했다.. 지극하십니다
@David48279.
@David48279.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잘 보고 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jerics8000
@jerics8000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새벽에 올려도 보고 자야지이
@user-kd4el5nu2w
@user-kd4el5nu2w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시❤🎉😊 고려사 최고학자 이익주 교수님 영상 정말 재미있고 유익합니다^^ 유트브 영상중 최고입니다^^ 나중에 고려사 인간쓰레기 10명 열전 같은 특집 프로그램도 부탁합니다^^🎉❤😊
@user-wp2yj3bp2t
@user-wp2yj3bp2t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상부는 얼어도 하부는 물이 흐르니 모을 수 있고, 소가죽을 터면 어름 위로 물이 흐르니 양이 많지 않아도 속도도 빠르고 깊은 물 아니어도 거란군이 차가운 물 피할려다 물에 의해 미끄러워 미끄러지고 서로 얽혀 넘어지고 해서 사망했을 거라 생각요.
@user-eh2yh1jg6t
@user-eh2yh1jg6t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보고 잘 려구요~^^
@user-ch1mb5ge9g
@user-ch1mb5ge9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항상교수님 강의 잘듣고있습니다.다음에는 부원수 강민첨 장군의 업적과 전과도 자세히 강의 해 주세요..♡
@user-om3nt3pq3r
@user-om3nt3pq3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쉬 차원이 다른 강의, 정통 고려 전공자 다우시네요
@user-gj1vp1lo8k
@user-gj1vp1lo8k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가르침 감사 합니다. 교수님.
@user-bn4og8dh7u
@user-bn4og8dh7u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침략을 물리쳐 얻은 과실이 제일 큰 전쟁이였음 막아내지만 국력이 꺾여서 빌빌거린 역사가 대다수인데 귀주만은 달랐다
@to_the_blue-sky
@to_the_blue-sky 7 месяцев назад
흥화진 수공은 강감찬이 12000기마병을 이끌고 흥화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착공에 들어가서 미리 준비해뒀던 게 아닐까요? 겨울 이전부터 물을 조금씩 모아왔을 것 같고, 특기할만한 재료가 소가죽과 동아줄인거지, 그 두 가지로만 보를 만들진 않았을 것 같고.. 흔한 돌과 흙, 나무는 기록에서 누락시킨 게 아닐지.. 그리고 말이 놀랄 정도(무릎높이)만 물살이 거세져도 타고 있던 병사들은 낙마하기 쉽고.. 근데, 거란 본진의 꼼수 우회전략으로(이런 토목공사의 움직임을 어느정도 눈치 깠을 수도) 계획만큼 그렇게 큰 전과는 못 세웠던 거고..
@user-pq3hz5wz7c
@user-pq3hz5wz7c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믿음이 없는 시대가 많지만 믿어야 한다
@user-kq8io9tf2c
@user-kq8io9tf2c 7 месяцев назад
흥화진 전투는 2차 거란전쟁에서 있었고.. 4찬 군사로 40만을 막아내고 거란이 퇴진할때 양규가 싸우다 죽은 것으로 압니다 3차 전쟁때 거란은 10만으로 서북쪽 성을 그냥 두고 곧 바로 개경으로 향한 것으로 알고 있음
@user-nj5pq4rp1l
@user-nj5pq4rp1l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의 의지, 1차 서희장군,2차양규장군,3차는강감찬장군, 그러나 함께 싸운 장군들도 기억하자. 우리는 그의 저력을 기억하자.
@peterkang4484
@peterkang4484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사적인 명장 강감찬 장군을 존경 합니다.
@jacaljo4972
@jacaljo4972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국뽕만의 역사가 아닌, 사료를 ㅌ통한 역사읽기 좋네요 !
@maury2216
@maury2216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기록에 귀주대첩에서 검차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배수진을 두고 슈퍼 대회전 (기병과 기병과의 충돌)을 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co-musician640
@co-musician640 7 месяцев назад
합리적으로 추측하면 장마때 물이 상류부터 넘친 기록을 바탕으로 상류의 작은 물길을 막아두었다가 같은 때에 터뜨리면 합류하여 수량을 일시적으로 원할 때 늘릴 수 있을 듯 합니다 소가죽 둑을 이용하여 건기의 저수지를 조성해왔을 기술력도 추측해 봅니다 쓰나미처럼 사람을 덮치진 않았더라도 허벅지정도 물이 늘어나기만 했어도 충분히 발목을 붙들어서 마치 해자의 적군을 요격하는 형세였을 듯 합니다. 아군은 화살세례만 펼치면 충분했겠지요
@user-fl2bh2se1q
@user-fl2bh2se1q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설명을 너무 잘 해주시네요. 서울대 23학번 역사학부 이현우(?)군이 생각나네요. 암을 극복하고 서울대 입학했다는데 나중에 이익주교수님같은 훌륭한 인재가 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Kim-vv3bu
@Kim-vv3bu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익 주시는 이익주 교수님! 이익 받을께요~~~~~. 감사합니다.😊
@user-wz3gq7mj8s
@user-wz3gq7mj8s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사는 반드시 반복한다
@rabbit4962
@rabbit4962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교수님 12월에 흥화진 이라면 엄청춥고 물은 다 얼었을텐데 ? 여름도 아니고 어찌 수공을 ~~~~
@kkuljjun-brothers
@kkuljjun-brothers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마지막에 교수님의 메시지가 있네요. 초창기에도 비슷한 얘기를 하신적이 있죠.
@stevenrhee8398
@stevenrhee8398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는 귀주대첩후 승전기념 행사를 송나라에서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건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리고 송과의 교류는 문종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요. 문종의 아들 의천이 불법을 배우기 위해 송에 유학하기까지 했습니다. 송나라 황제가 스승이될 고승을 소개해주기도 했습니다. 당시 송은 문물이 번성한 부자 나라여서 고려도 많은 이익을 챙긴것으로 압니다.
@j.svaraba9193
@j.svaraba9193 7 месяцев назад
👍
@swj8742
@swj8742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너무 재밌게 잘 들었어요
@k-hair9807
@k-hair9807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대첩 때 비가 내렸다면 전쟁 시작 했을때 날씨가 춥지 않았으니 강물이 있었겠죠
@SukWon_Jang
@SukWon_Jan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대첩에 대한 사료 중심의 대단히 흥미로운 강의, 잘 들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특히 인상 깊게 들은 것은, 요사의 소위 '다하 타하 전투'에 대한 해석인데요. (5:39부터.) 그 기록은 흔히 귀주대첩에서 거란군이 대패한 것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곤 합니다만, 교수님께서는 귀주대첩 보다 앞서 있었던 흥화진 전투(삼교천 전투)로 해석하시는군요. 일단 요사에서는 그 전투가 1018년 12월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 날짜가 맞다면 당연히 1019년 2월에 일어난 귀주대첩 보다 앞선 시기의 전투이고, 그렇다면 시기상 흥화진 전투가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이 충분히 일리가 있을 겁니다. 다만, 혹시 요사도 사실은 귀주대첩에 대한 언급을 하려고 했던 건데, 기록 과정에서 날짜를 헷갈렸거나 여러 차례의 전투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얼버무렸을 가능성 같은 건 없을까요? 고려사는 물론 그렇게 큰 승전에 대한 날짜를 헷갈렸을리 없을 테고요. 교수님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아참, 그리고 아주 사소한 겁니다만, 설명하실 때 '천운군 상온 매리'라고 하신 부분은, 고려시대 사료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요사의 원문에서는 '天雲軍詳穩海里'라고 되어 있네요. 그러면 '매리'가 아니라 '해리' 아닐까요? (Mary가 아니라 Harry... 죄송합니다.)
@user-hj4ui2jw7v
@user-hj4ui2jw7v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교수님 수공이 가능합니까 ? 물의 압력때문에 강물을 쇠가죽으로 막았다는것은 왠지 후대의 상상력 ~현대의 토목 공사도
@hokyunryu6289
@hokyunryu6289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지랄리'라는 거란 사신 이름 나올 떄 웃었습니다.
@rladuddlr2
@rladuddlr2 7 месяцев назад
2차와 3차 사이에 있던 세번의 침략에 대해서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user-lq9ho4tp5l
@user-lq9ho4tp5l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아 교수님 넘 잼있습니다 ㅎ
@submariney
@submariney 6 месяцев назад
8:00 한겨울에 소가죽으로 물을 막았다가 터트리는거 가능합니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작은 하천에 소가죽을 치면 소가죽 사이로 흐르는 물은 있을것이고 소가죽이 물을 완벽하게 막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소가죽에 막힌 물이 날이 추워져서 얼어버리면 소가죽에 붙어서 얼어버린 강물로 물을 가두는게 가능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추운 날씨에 얼은 강물도 얼음속 물은 얼지 않습니다. 소가죽과 얼음에 갇혀 있는 물을 터트리면 그 찬물에 휩쓸려서 물에 빠지기도 전에 심장마비로 죽을수도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얼은강물을 소가죽으로 막는 생각을 하니까 그게 불가능한 겁니다. 겨울이 오기전에 물이 얼기전에 미리막으면 가능합니다.
@benevolent_tiger
@benevolent_tige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 시대 소가죽으로 물을 막을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있었다 믿습니다
@boyaknam
@boyaknam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저도 실제 어떤 요세인지 꼭 가보고 싶네요
@bbokdoong
@bbokdoon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여기서 우리가 배울건 외교도 힘이 뒷받침 되어야 된다는거죠. 거란과의 100년 평화는 거란도 고려와 계속 싸우다가는 이겨도 상처뿐인 영광이 되겠다는걸 깨달았기에 가능했던거고 거기에 고려가 외교로 체면을 세워주니 헛기침하면서 물러난거죠. 그후 다시 칠 생각을 쉽게 못한거고.
@user-tf4ev7im1x
@user-tf4ev7im1x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안녕하세요~~ 수공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소가죽으로 물을 막을 수 있냐 없냐 하는 것은 요즘의 건축 방법으로 한군데에 크다란 구조물을 만들어서 막을 생각하시기 때문인데 이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전시 상태에서 대규모 공사를 하게되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인력이 많이 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간편하고 빠르게 물을 가두기 위해 소가죽과 동아줄을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천 상류에 20~30여군데(저셍각에는 한군데 병사9~10명, 소가죽 50~60장 정도, 강상류폭 40~50m로 가정) 물을 가두어 두었다가 시간차를 두어 터뜨려 목적하는 하류에 동시에 물을 닿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물론 이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훈련을 충분히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이디어를 현장에 적용을 해보지도 않고 전시에 사용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요. 재료가 소각죽과 밧줄이라면 몇번이고 훈련을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된 동기는 울진 불영계곡 놀러갔을 때 계곡 상류에 돌로 군데군데 물을 막아서 웅덩이를 만들어 물놀이 하는 것을 보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축성기술을 가진 당시 사람들이니 수공이 충분이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후 우리역사에서 수공이 안보이는 것은 적들이 수공에 대비하여 정찰활동을 철저히 해서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이것은 단순히 저의 생각입니다^^).
@espritdecorps3613
@espritdecorps3613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초원 사람들의 역사를 알아야 우리 역사도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 같음. 정황을 보니 3차 전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흔히 있는 약탈 원정인 것 같고 1 2차 떄 큰 재미를 본 기억에 쉽게 약탈하러 왔다가 생각보다 대비가 잘 되어 있어 손해를 보게 된 것에 불과한 것 같네요.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사료에 근거한 교수님의 설명 감사합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참고하기에 좋은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귀주가 중국 사천성, 귀주성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의 주장이 궁금합니다. 귀주가 사천성이면 요 상경은 어디이고 송 변경은 어디일까요? 사천성의 어디가 귀주 전장인가요? 나중에 1차 몽골 침입때 귀주성 전투가 있는데 사천성이 귀주 지역이라면 / 아직 금나라가 망하기 전인데 어떻게 사천까지 몽골군이 진격할 수 있는지.... 사천성은 조어성 전투라고 해서 금 멸망이후 몽골의 몽케칸이 점령에 실패한 곳인데 이것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dochu8835
@dochu8835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요사에 다하 타하라 기록한 강은 대하 태하로 대요하 태자하를 말하는 듯합니다. 두강은 당연히 맞붙어 있고 서로 만나는 지점에 몇만에서 십만이라도 전쟁을 하기 좋은 터가 있죠. 하는 마치 바다와 같이 큰강을 말하는 것으로 본류는 강인데 지류나 하천을 결코 하라 부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현재 판진시에서 중국 해주로 오는 길목쯤인듯 한데, 일대 모모진으로 불리는 지명이 많이 있습니다. 흥화진이란 것도 별 근거없이 그냥 지도에 점 찍은 것이니 요사가 잘못되었다기엔... 당시 요 수도 현 츠펑시와 개경과의 딱 중간지점이기도 하고, 이전 여러 국지전으로 인해 많은 군대가 이미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을 것을 감안하면 진격에 그다지 오랜 시간이 안걸렸을 것...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글을 읽어보았는데 궁금함을 여쭤봅니다. 요하랑 태자하 사이면 요동성이 있는 곳입니다. 요동성은 거란의 동경이 있던 곳입니다. 여기가 귀주라면 나중에 1372년 이성계의 요양 점령과 배치됩니다. 귀주 북쪽에 흥화진이랑 통주가 있으니까요. 그럼 흥화진이랑 통주는 요하의 지류에 있던 거란의 수도와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925년에 발해와의 전쟁에서 요동을 점령하고 동경을 설치하는데 그러면 서희의 담판으로 본인들이 점령한 동경일대까지 할양하나요? 거란은 내원성이 평안북도 의주-당시엔 보주 를 통해서 고려를 침공해 들어오는데 위치가 엇갈리지 않을까요? 한국사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위치비정에 대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세계사의 기록과 연계해서 생각을 해보면 어느정도 비교해서 추정이 가능합니다.
@user-xd6vy3eu1v
@user-xd6vy3eu1v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양규장군 존경합니다
@user-tv4li3pg4h
@user-tv4li3pg4h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물이 겉만얼지속은 안얼어요 그래서 소공가능 하고 소가죽과 흙으로 임시댐을 만들어겠죠
@user-zu5hz6uq5d
@user-zu5hz6uq5d 7 месяцев назад
❤❤❤
@user-lx5sy1wx2k
@user-lx5sy1wx2k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응수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였던걸까요???
@user-ps9lr8it3m
@user-ps9lr8it3m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책봉이라는 말은 거란이 왕을 정한다는 뜻인가요 전쟁에서 이기고도 거란이 고려를 지배 했다는거네요
@yongtaekim6711
@yongtaekim671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책봉이란 말은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mou 같은 겁니다. 외교적인 수사일 뿐이죠. 고대 중국과 주변 국가의 관계는 대부분 조공책봉 관계입니다. 고구려도 남북조 시대 국가와 수당제국 과의 관계는 조공책봉 관계 였어요. 조공도 조공 바치는 쪽이 훨씬 이득이었어요. 조공보다 더 많은 하사품을 주니까요. 이것도 따지고 보면 국가간의 무역 입니다.
@user-gu4kv7zl3o
@user-gu4kv7zl3o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뽕이 없는 해석!! 감사합니다.
@user-ue8ug9wc7r
@user-ue8ug9wc7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교수님 선생님 귀주대접 3차 때 겨울때 그때당시 강이 얼음 동동 😂😂😂그리고 소가죽등 강을 막아서 그리고 기병 보급부대 1만명 과 그리고 날씨가 비가오고 바람 방향에서하늘에서 태조왕건님 하늘에서 도와준것같아용 교수님 그리고 거란은 종말은 조랑말 vs 고려말 경주용말 교수님 선생님😊😊😊 ❤❤❤❤❤
@user-qy8yj1rr1g
@user-qy8yj1rr1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직접 가보지 않아도 구글 어스 3D 또는 구글 지도의 위성이나 지형도를 보면 귀주성 아래에 넓은 들판이 있지만 거란군이 압록강으로 가려면 귀주성이 자리하고 있는 산 귀퉁이 우측 좁은 평지를 지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감찬 장군 입장에서는 거란 기병에 유리한 넓은 평야보다는 좌우에 험한 산이 있어 거란 기병에 포위당할 위험이 적은 이 좁은 길목을 지키면서 거란군을 대적하는 것이 유리했을 것입니다.
@edwardwonghaupepelutivrusk6666
@edwardwonghaupepelutivrusk6666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영상 재밌게 봤습니다. 그런데 갈등을 외교로 풀고 싶다고 어느 한쪽의 뜻만 있어서 될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상대국도 역시 외교로 해결하고픈 뜻이 있어야 가능한거지. 거란측에서 고려를 전쟁으로 굴복시킬수 있으리란 기대에 회의감을 갖게 만들고 외교를 통해 해결하기로 노선을 바꾸게 하건 어쨌거나 귀주대첩이었으니 이걸로 인해 고려가 평화를 얻어낸 것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게리 올드먼이 윈스턴 처칠로 분한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이 이런 말로 노호를 내지르더라구요. 호랑이 아가리 속에 머리를 처박고 어떻게 호랑이와 대화를 하느냐구요.
@user-ej8mn8xs9x
@user-ej8mn8xs9x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여기도 조선왕조실록은 900권이 넘는 역사서가 존재하는데 고려왕조실록은 왜 없을까라는 생각을 왜 안할까요 그나마 고려사가 2021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왜 그렇게 귀한 고서를 이제사 지정했을까 궁금하고요
@sjk468
@sjk468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천녕절 아닌가요? 천령절보다는 천녕절이 좀더 정확한게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아닐까요?
@kjd4025
@kjd4025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게 정석 이라면? 그놈의 인조(병자호란)때는? 그리고, 이때는 병력의수 도 우월 합니다. 그만큼 대비를 했다는 것인데 ???
@espritdecorps3613
@espritdecorps3613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리고 고려 후기도 몽골 울루스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해야 진짜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칭기스칸의 후계자 칸들이 칭기스칸의 숙적이었던 부족과의 혼혈으로 탄생한 것을 보고 알 수 있듯 몽골 제국은 칭기스칸 가족이 피정복 부족 지배층과 혼혈하는 방식으로 확장을 했어요. 한국사에서는 "원간섭기"라고 하는데 사실은 고려 왕족이 몽골 황족과 혼혈로 동화되는 게 핵심이고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는 위구르처럼 부마국이자 울루스로 편입이 되는 것이지요. 어차피 몽골은 인구가 적으니 어느 곳마다 피지배층과는 다른 족속일 수 밖에 없고 고려도 비슷하게 된 것이죠.
@user-uy4eh1nr7p
@user-uy4eh1nr7p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교수님 지금의 교과서에 나온 강동6주위치는 잘못된거라고 사료에 나오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식민사관에 영향으로 통일신라 고려 영토가 너무 말도안돼게 잘못 표시돼어있는데 안타깝네요ㅠ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글쓴이님께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강동 6주 위치가 잘못된 거라는 사료가 뭔지 궁금하고 그럼 고려 영토가 어디까지인지 여쭙니다. 사료를 근거로 답변 부탁드립니다.
@byungyoon8550
@byungyoon8550 7 месяцев назад
​​@@YangWenli01, 예리한 질문을 하시는것 같은데, 사료라고 인정을 하는측과, 안하는 측과, 사료가 있어야 사실로 인정하고, 사료가 없으면 사실이 아니라는 단정과, 인정하는 사료가 없어도 정황상 사실로 인정하는 측과, 내가 제시하는 것만 진짜 사료이고, 니가 제시하는 사료는 허구이다 라는 주장, 등등 생각해 볼 점이 많은바, 그부분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이 토론하여, 결론을 추출해야 하는데, 종사 전문가들은 이미 자신들이 구축해놓은 이익이 걸려 있어, 알면서도 쌩까는 수가 많지요...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byungyoon8550글쓴이님의 글에 반박하는 글은 아닙니다. 글쓴이님의 말씀은 소위 사료의 내외비판이라는 과정인데 이 과정에서 논쟁이 발생할 수 있고 잘못된 부분이 수정이 되기도 하죠.(ex. 1차침입때 소손녕의 80만 대군-거짓, 실제는 5~6만, 고려사에는 3차침입 총대장이 소손녕이지만 요사의 기록과 대조하여 소배압이라는 것) 제가 답글은 단것은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근거도 없이,식민사관의 영향으로 영토 비정이 잘못되었다는 근거없는 낭설을 말하길래 물어본 것입니다.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이전에 귀주 등 강동 6주가 중국 사천성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봤는데 참 재미있는 분이시더라구요 ㅋㅋㅋ 거란에서 개경근처까지 진격했다 서해바다 건너 사천성까지 가서 고려군에게 몰살을 당했다...참...수도를 비우고 그 먼 사천성에 고려의 전병력을 배치한다는 참신한 주장을 ㅋㅋㅋ
@byungyoon8550
@byungyoon8550 7 месяцев назад
@@YangWenli01 , 사천성건은 저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user-yy2ht8zv3d
@user-yy2ht8zv3d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고려가 있고 조선이 있지요.고려가 없으면 조선도 없으니 고려가 으뜸이고 선도이고 조선은 후발대 입니다
@user-by3sv4id3e
@user-by3sv4id3e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가짜 드라마 때문에 진실이 헷갈리네
@lyongduc9361
@lyongduc936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가 어디인지아시는분
@user-tk5hj8gh1g
@user-tk5hj8gh1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구주대첩 등 려요전쟁터는 지금의 하북성 북부평원이었어요!! 한반도 북부가 아니었쥬!!
@user-tk5hj8gh1g
@user-tk5hj8gh1g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가 아닌 구주로 해야 옳을 것인디... 거북 귀가 아닌 땅이름 구...
@Son_ssi
@Son_ssi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어떻게 사람 이름이 지랄리 ㅋㅋㅋㅋㅋㅋㅋㅋ
@to_the_blue-sky
@to_the_blue-sky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왕자지도 있는데요 뭘...ㅎㅎㅎ
@whynot11132
@whynot11132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왜 항상 최수종은 kbs 사극에서 ㅋㅋㅋㅋㅋ
@user-vp1ot8iz7i
@user-vp1ot8iz7i 7 месяцев назад
"960".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되었을까? 실은 '한국이 외국에 침략된 횟수'다. 한민족, 몽골족, 여진족, 계단족, 만주족… 한국의 왕조는 지배자가 대신할 때마다 침략을 받아 굴욕적인 복속을 강요받아 온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한 번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영웅적 인물, 화약, 대포 등의 활약이 보도되고 있다. 왜 뭐야?
@whylive3471
@whylive347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그런대 왜 계단족(선비족) 말갈족(숙신 읍루 물길 여진 만주)은 산이 칠십프로 인 한반도를 못잡아 먹어 수 당 계단이 쳐들어 온 이유가 뭐임 농경사회에서 먹을게 많은 것도 아니고 또 침략하다 망하고 이해가 안됨 참고로 음력 구월구일 중양절은 광개토 대왕이 요동(압록강,호타하 위쪽)에 살든 계단족을 쳐 승리하여 기념한 날
@user-xd6vy3eu1v
@user-xd6vy3eu1v 7 месяцев назад
흥화진이 그리대단합니까?
@user-vl8fr7vx2n
@user-vl8fr7vx2n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요 기록에 다하, 타하 '하' / 우리 기록에 대하 '하' ( 황하 '하') 그러면 엄청 큰 강입니다 우리 역사가 엉터리로 가르치니 온통 엉터리 추정만 난무한 것 같습니다
@ChinaziSlayer
@ChinaziSlayer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국사말고 다른거 할 수 있는게 있나요 선생님?
@longguocao9442
@longguocao9442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수공 ?물폭탄?
@user-bd5lm6xm2j
@user-bd5lm6xm2j 6 месяцев назад
강감찬같으신분이윤대통령님곁에있었으면좋겠어요현종이복있네요 그런신의한수 강감찬 같으신분 나라에꼭필요하지요
@user-rh1sp2cv2z
@user-rh1sp2cv2z 7 месяцев назад
말도안되는소리 비굴한조선왕이성계가 그렇게써놨겟지
@parkkeunsu8643
@parkkeunsu8643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거란군은 10만이라 했지만 주장일 뿐이고 고려 기록엔 20만8천명 이라 했는데 절대 맞음? 전쟁에 병사수 부풀리는건 병법에 있거늘 고려기록 맹신론자 네.. 교외에서 싸웠다는 기록에 검차는 기록에 없었으니 검차는 없는게 분명하다? 고려 기록에 살을 붙여 소설을 잘 쓰시네요 교수 때려치고 소설가로 전향 하시길..
@user-lunchconeckted
@user-lunchconeckted 7 месяцев назад
역사는 상상력에 기반하는건데, 너는 무식해서 그런것도 모르겠지
@user-hg5oz8cf2s
@user-hg5oz8cf2s 6 месяцев назад
북쪽12월이면 물속에 무릅까지만 있어도 1분도 못견딘다 만약에 물이 허리까지만차도 순식간에 몸이얼어 할수있는게 아무것도 없다 죽은목숨과도 같은것 여름이라면 또다르다 강감찬은 오히려 차디찬 겨울물을 이용한것
@user-gf2jc4ke9y
@user-gf2jc4ke9y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영주??? 거기 아닌거 같은데......
@bruceoh748
@bruceoh748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귀주대첩에서 김종현과 강민첨의 전투만 나오고 강감찬의 전투는 없다 뭐냐? 강감찬은 성안에서 구경만 했다는것인가? 그리고 남북조 얘가 나오는데 남은 송이고 북은 거란인것인가? 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한다 역사를 잘아는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가 아닌가? 잘하는 강의가 아니다
@user-xc5dj5rn9m
@user-xc5dj5rn9m 6 месяцев назад
우리조상님들을네놈이평가하냐거짓으로
@user-cd4fp9ee7w
@user-cd4fp9ee7w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강단사학자들의 식민사관은 돈벌이 수단이지. 별수없는 사학자네. 위치비정을 잘하세요.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강단사학자들이 모두 식민사관을 갖고 있다는 편견이 문제가 아닐까요? 역사연구를 하면 제일 먼저 하는게 사료의 내적외적 비판입니다. 그럼 재야사학자들은 무엇을 가지고 역사 연구했으며 그들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입니까? 이익주 교수님의 강연과 수업을 보면 여러 자료를 비교 교차 검증하셔서 제대로 분석하시려고 노력하십니다. 그럼 글쓴이님이 생각하시는 위치비정은 어디이신가요? 고려가 만주 몽골초원까지 차지한 대제국인건가요?
@user-cd4fp9ee7w
@user-cd4fp9ee7w 7 месяцев назад
@@YangWenli01 지금 이 사람이 주장하는 내용이 식민 사관입니다.
@YangWenli01
@YangWenli01 7 месяцев назад
@@user-cd4fp9ee7w 그러니까 왜 식민사관이냐구요? 주장을 하셨으면 구체적인 근거를(뇌피셜아닌 역사서에 나온 구절로) 제시하셔야 많은 사람들이 납득하지 않을까요? 구체적으로 제시해 보십시오
Дале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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