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해칠 마음을 갖지 말고 원한을 품지 말고 성내는 마음을 두지 마라 화가 나더라도 함부로 말하지 말고 남의 흠을 애써 찾지도 말고 약점이나 단점을 들추지도 말고 항상 자기 자신을 잘 단속하여 정의로써 자신을 살펴 나가라 악은 스스로 망하고 용서해도 자신이 지은 업보는 받는다 사필귀정 인과응보 자업자득 만고불변의 진리다 부메랑이다 자신에게 돌아간다 피할수 없다
종교라는 뜻도 제대로 모르고 불교를 '종교라기보다는...' 이런식의 말을 하는 이들이 많은데 불교야 말로 진정한 종교이자 종교라는 단어에 가장 적확한 말이지요. 기타종교들은 신교라고 봐야지요.종은 마루종 글자그대로 다시말해 가장 높은 가르침이란 말입니다.종교란 단어도 잘 모르고 종교가 아니니 철학이니? 하는 말을 그냥 내뱉습니다만 불교야말로 가장 종교적이고 깊은 철학이지요.
써니즈님 #3 빨리보고싶어요 예전엔 2009년에 에크하르테툴리님의 도덕경 강연을 우연한기회에 들었는데 너무 감동깊었는데 그당시도 이런 공부하시는분들중에 에크하르테툴레님을 거의 모르셨는데 지금은 아주 유명하신분이시죠 그 당시엔 더 알고싶고 공부하고싶어도 알방법이 없었고 요즘은 이런 통신체계가 있어서 마음이 일어나면 이렇게 공부할수있어서 변천하는세상과 이런시스템속에서 ㅆ니즈님과같은 분께서 스승의 연결 다리가 되어주심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저는 지금 법화경을 공부중입니다,,,,그전에는 정말 1초도 쉬지 않고 파노라마처럼 늘 잠자리에서도 망상과 헛된 생각속에 머리가 쉴 틈이 없었다,,,,그러나 지금은 머리가 늘 백지처럼 비워져 있어 늘 마음이 편하다,,,,어쩌다 번뇌가 생기면 그 생각을 멈추고 알아차리고 그 망상을 멈추고 다시 고요함 속에 들어간다,,,,지금은 늘 머리가 투명하다,,,,법화경은 최상 법문
불교에 대한 깊은 경험이야기 참좋네요^^ 불교~어렵죠~ 역사적으로 부처님이 살았을때를 잘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흰두교(?)를 필두로 참나가 있다는 브라만이 지배한 철저한 계급사회 였었죠~~ 그당시에 왕의 아들로 우리가 아는 부처님이 처음 나타났습니다. 그분은 어릴때부터 모든 좋은 교육과 경험을 쌓고 살았죠~ 그러다 사문유관이라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늙은자 병든자 죽는자 승려들을 보고~ 출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여 고행을 하시다 고행을 포기하니~ 결국엔 더없는 깨달음을 얻었다. 뭐 간단하지만 이정도가 ‘부처님’이 생긴 기술적 역사의 사실입니다. 저는 그부분도 중요하지만~ 부처님의 이야기는 불교가 아닌 부분에서 들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그리 순탄한 삶을 살지 못하셨어요~ 왕가를 포함한 부처님 일가 민족이 살해를 당했으며 아끼던 제자들도 먼저 죽어가는 괴로움을 겪었죠~~ 그런 상황에서 괴로워도 괴로워하지 않았던 부처님의 경지~ 우리는 불교에서 그부분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부처님은 돌아가실때 “자등명 법등명 하라”셨고 숫타니파타 경전에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하셨 습니다. 참나 무아 깨달음 부처 신 모든 것 그저 믿으십시요. 자기자신의 믿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않습니다. 어떠한 것이라도 사랑이라도 좋은 것이라도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강요로 다가갈수 있으며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저 믿으시고~ 그렇게 살아가시며 삶을~그 믿음과 원칙을 가지고 묵묵히 사는게 좋습니다.^^ 전현수 박사님의 말씀 모든게 다 좋았습니다.^^ 하지만 삶의 답은 불교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에도 있고~ 탈무드에도 있고 도덕경에도 있고~ 에크하르트 톨레에게도 있습니다~ 불교는 또하나의 방편(방법)일 뿐입니다.^^ 그런 경전이나 좋은 글을 쓸때 쓰시고~살때 사십시요~ 모든 것에서 자유자재할때 진짜 자유가 먼지 알게 됩니다^^ 자유를 알았다~~해도 자유롭지 못하는 구나~~가 또있습니다.ㅋ 끝없는 윤회(?)입니다.ㅋ 한예로 인디안들은 자유롭게 자연과 함께 살았어요~ 하지만 영국인들이 넘어와 땅을 나누고 주장하자~ 그 주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영국인들의 눈에는 아편같은 식물을 마구마구하며 이상한 의식을 하는게 또 안좋아 보였던거죠~ 역사는 이리보면 저렇고 저리보면 또 이렇습니다. 또역사는 승리자의 관점의 서술이기 때문에 이면을 또 알아야합니다. 우리에겐 윤봉길 의사께선 독립투사 이지만 일본인에겐 테러범인것 처럼요. 이부분도 나열하면 끝이없죠? 문제 삼으니 문제가 되어 다툼이 일어나죠~ 문제를 삼지않는 용기가 필요하며 문제를 고치려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용기 있게 박차고 일어나 겸손히 사는겁니다. 왜냐 역사적으로 지금 만큼 인간에게만 편리하고 좋은 세상이 없었거든요. 깨달음을 유튜브에서? 이 얼마나 대단한 세상입니까?ㄷㄷ
무아ㆍ선정이라는것에 너무 집착하는 우리 불교문화가 일반대중에게 갈길을 잘못안내하는거 같습니다 그것이 학습된 불교문화만 안내하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무아ㆍ선정을 강조하고 무아ㆍ참나에 집착하는 문화 그래서 본질은 모르고 특정수행만 끝도없이 막연한 수행만 강조하니 그보다는 자신의 에고의 특성과 중생상의 특성을 바르게 인식하고 개선하는 노력을 먼저해야된다고 봅니다 정작 무아인걸 아는 사람은 무아라고 말안합니다 허구헌날 많은 사람들이 불자나 스님이나 뭘까 이게뭘까 생각하고 이게 무아다라고 군더더기을 말하고 아주 잘못됐습니다
사람은 그릇입니다 마음을 조복받는다는 표현하는데 대자연의 생명에너지을 흡수하고 발산하고 그때가 몸도 정화되서 몸이 형태만 있는것 처럼 에너지소통이 원활합니다 걷지도못하면 걸음마을 먼저 배워야되는데 뛰는걸 배울수 없듯이 부처의 깨달음을 아무리 배우고 익힌들 일체가 안되있습니다 자신의 성품을 보고 자신의 부정적인 모습 에고의 특성을 하나하나 고쳐서 스피커로 내보내야합니다 이런과정들을 통해 자신의 허물을 고쳐나가다가 보면 고치필요가 없을때가 옵니다 그때가 무아의 상태입니다 그때가 만물에너지와 자신의 마음과 육체가 다 통하게됩니다 말로 아무리 말해밨자 소용이없는겁니다
일불성 --->>> 일불승. 자막 오자 수정바랍니다. 법화사상은 일불승으로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을 뛰어 넘었다는 사상입니다. 구원불성, 즉 우리 모두가 이미 성불하였다는 엄청난 선언이지요. 고익진 교수님은 수행과 이론을 겸수한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전현수 박사님은 니까야 아함에 머물고 계시지만 보살도로 결국 전향하실 겁니다.
거의 온 마음과 몸이 절대온도로 얼어붙은 상태에서 원장님의 깨달음의 과정 한마디 한마디를 들었습니다. 등에 소름이 돋았고, 깨달음이 단순한 이해가 아닌 궁극적인 본질을 들여다 보는 뭔가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행해야 겠습니다. 죽음의 순간 내몸을 편안히 관찰하며 가는 스님들의 경지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큰스님의 노을이 해인사 뒷산에 걸린 의미를 알았습니다.
써니즈님 각자들과의 인터뷰 너무 마음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저는 2017년에 깨달음을 하고 지금은 보림중인 사람입니다 깨달음의 핵심은 부처님의 불이법입니다 불이법이란 물속에 물고기가 들어있어 물과 물고기가 분리될수 없는 하나라는 뜻입니다 불이법은 하나님과 인간이 하나입니다 즉 하나님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하나님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인간이 분리될수 없기에 불이법은 시간이 없고 공간이 없고 거리가 없고 노력이 없고 조작이 없고 수행이 없고 명상이 없는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을 따로 찾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이 없다는 망상만 내려 놓으면 바로 물을 찾을수 있는겁니다 불이법은 시골농부 김영식님도 이야기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써니즈님 저도 써니즈님 채널에 출연해 부처님의 불이법에 대해 다루었으면 영광이겠습니다 유튜브 김용철tv
신라는 골품제라는 폐쇄적인 계급제를 채택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업설은 원래 불교의 개념인데,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생전의 업이 다음 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잘 산다는 것은 이전 생에서 잘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논리를 왕과 (진골) 귀족들이 가져와서 계급제를 합리화시키는 데 이용하였습니다. 즉, 본인들이 높은 계급을 가지고 온갖 특권을 누리는 것은 과거에 잘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다음 생에 왕족, 귀족으로 태어나려면 지금 잘 해야 한다는 것으로, 쉽게 말하면 "시키는 대로 잘 해라."는 논리로 이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게 업설의 본질 아닌가요?ㅋㅋ 더 높은 깨달음이 있는가?
무아(無我)란 엄밀한 의미에서 '제법무아' 이며, 생각, 감정, 오감 즉, 오온이 늘 변화하기에 나라고 할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으로 현상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하나의 개념이지만, (feat.무상,고,무아) 참나(實我)란 내 안에 신성(성령)을 의미하며, 한 생각이 일어나기전, 선험적 자아 '순수 의식'인 텅빈 알아차림, 신령한 알아차림의 초의식으로서 절대계의 본질을 설명하는 하나의 실체입니다. "무아와 참나는 다른건가요?" =>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
이 분이 쓰신 책 소개와 인터뷰 1,2,3편 모두 잘 보았습니다. 국내에서 유명(?)한 분들을 직접 찾아가셔서 인터뷰 하시는 써니즈님의 노력에 감탄하고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런 인터뷰를 보면서 소위 깨우쳤다고 하시는 분들의 한계점 또한 여실하게 드러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이런 인터뷰 영상을 통해 걸러낼 수 있기에 또한 감사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하 저의 경험+의견으로 쓰는 글입니다) 일단 전현수 선생님께서는 좋은 정신과 선생님이시라고 생각이 되지만 말씀하신 내용만 가지고 미루어 보건데 결코 불교의 깨달음-돈오-를 하신 분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1) 이번 인터뷰에서 (무아)를 깨쳤다..라고 하시면서 체험담을 이야기 해 주셨는데... 그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공-무아 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일단 말씀 하시는 내용을 보면 약간 애매하긴 한데.. 제가 이해하기로는 말씀하시는 내내 (분명한 앎)이라는 것이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분명한 앎이라는 것이 (있다)라고 느껴진다? 분명한 앎이라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분명한 앎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궁극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눈이 눈 자체를 볼 수 없죠? 혀가 혀 자체를 맛볼 수 없죠? 마치 이와 같이... 궁극적인 앎은 모든 것을 알지만 자기 자신을 대상화 해서 자기 자신을 느끼거나 알 수는 없습니다. 궁극적인 앎이 (있다) 혹은 (느껴진다) 라고 표현하면 그 순간 이미 대상화가 되어서 보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보여지는, 있다라고 느껴지는 대상은 궁극적인 앎이 아닙니다. 만일 진짜 돈오를 하셨다면.. 궁극적인 앎에 나 자체가 계합이 되어서 (사실은 본래 나라고 느껴지는 느낌-에고-는 실제 내가 아니고 궁극적인 앎이 진실된 나? 라서 원래부터 분리된 적이 없음.. 그러나 우리는 분리된 것처럼 착각하고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평생의 착각이 깨어지는 순간 편의상 내가 궁극의 앎에 계합되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 뿐이지 실제로 계합되고 말고 하는 과정 같은 것은 없음) 궁극적인 앎을 대상화 시켜서 보거나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냥..물리적으로 불가능 합니다. 그런 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2) 1번과 마찬가지로 (무아)를 (거대한 세계)라고 표현하셨죠.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세계라고....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의식에서 잠시 벗어난 일종의 신비체험 같은 것이라고 할수는 있겠지만 무아하고는 전혀, 일체의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거대한 세계라고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거대한 어떤 세계...공간 이라는 것이 (존재) 하고 있습니다. 단지 거기에 (나)라는 느낌이 없을 뿐이지...... 무엇인가를 대상화 해서 느끼고 있는 거죠.. 따라서 표현하신 것은 진정한 (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이라는 느낌이 드는 무엇, (내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 어떤 상태를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진정한 (무아) 라면....... (거대한 세계)를 느끼고 있는 나도 없어야 하죠? 하지만 분명히 거대한 세계를 느끼고 있는 내가 있잖아요? 그리고 (거대한 세계)라는 느낌-상태-세계 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잖아요? 따라서 그것은 무아도 아니고 공도 아닌 신비체험의 한 종류에 불과합니다. 굳이.... 제 멋대로 판단하자면 그리 높은 경지의 체험도 아닌 낮은 차원의 체험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욕계-색계-무색계 단계 중에서 욕계 상층부 혹은 색계 차원의 체험 정도가 아닐까 합니다. 무색계 차원의 체험만 되도 (xxx한 세계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생생하게 느껴진다) 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비상 비비상 정도의 체험을 했다면 (xx한 세계가 있다) 라는 느낌도 들지 않고 그 경험에 대해서 뭐라고 말로 묘사하는 것도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차원의 체험을 한 경우 돈오와 상당히 헷갈리기 쉽습니다. 다만 돈오의 경우는 의식 레벨이 다운이 되고 희로애락에 휘둘리더라도 분명히 과거 상태로 100%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절대 변하지 않는 어떤 분명한 변화가 있는 반면 단순히 비상 비비상의 체험을 한거라면... 이 세상의 사람들과 뒤섞여 뒹굴다 보면 의식 수준이 곧바로 다운이 되서 100% 옛날 상태로 돌아간다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서 구분할 수 있지요.. ㅋㅋㅋㅋ 인터뷰 3에 나오는 돈오하지 못하셨다고 판단한 몇가지 부분들은... 인터뷰 3번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전혀 전통불교를 모르시는군요. 언어는 사상적 맥락에 따라 뜻이 다른 겁니다. 조사선 한다고 주장하는 재가자들 주장을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건 그네들 사유체계 안에서만 긍정되는 언표입니다. 위빠사나의 진실은 그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것과 같ㅅㅂ니다. 비교 불가한 영역을 억지 춘향식으로 비교하고 비판해 보아봤자 번짓수 잘못 짚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