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막순이를 잃어버린탓에 가족이 헤어졌고 아버지가 없는 탓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더 어렵게 살고 동생은 아버지 얼굴도 잘 모르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이 산다는 죄책감으로 더 저렇게 자길 희생하면서 산듯.. 아버지 마지막 말씀이 이제부터 니가 가장이고 가장은 가족을 최우선으로 하는거다.가족을 지켜라라고 했으니
12:46 여기서부터 다같이 춤추는 장면이 난 이 영화에서 제일 슬프게 다가왓음.. 다들 한창 놀고 싶을 꽃다운 나이에 가정을 책임지기 위해 먼 독일땅까지 와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들이 참 가슴 아팠음... 저렇게 노는 거 좋아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ㅜ
우리 아버지 책 신문 읽기 좋아하는데... 강력계 형사가 꿈이였는데 이루지도 못 함. 못배워서...그때는 장남이 동생들 챙겨줘야 한다고해서... 한 여름에도 파키스탄 사람처럼 무거운거 들며 일함. 지금도 고모 외동딸 은행취직했다고 보험 4개 들어주고, 고모 보험들어줌. 끝까지가족편 그래도아버지 고맙습니다
15년전 저 이등병때 주임원사님이 중학교 졸업후 해병대 하사관출신인데 그분이 말씀하시길 당시 병사형님들 중에 3년 내내 나무만 심다간 병사들도 있다고 했었습니다. 그때 심은 나무들로 인해 경남에서 가장 큰 벚꽃 축제인 진해 군항제가 열리죠. 물론 저 탄광시대보단 조금 후일인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이지만 힘들게 살던 50~70년대엔 저렇게 민관군이 나무를 심고 산을 깎는 일을 제대로 임금도 못받지만 나라를 살려보자며하던 시대죠 ㅠ
누군가 책임을 지지 않거나 못했고, 누군가는 그 책임을 한꺼번에 지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정 내 약자가 피해를 보게 되면서 가부장과 가정에 대한 신뢰가 깨져버렸죠. 흙탕물을 만드는데는 한마리의 미꾸라지면 끝나지만 흙탕물이 가라앉히는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걸리는 법입니다.
저희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공직생활 하셨는데 살아계실때 작은아버지라는 인간들 툭하면 돈빌려달라하고. 아버지는 집안일이라믄 발벗고 나서시는 분이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에는 연락한번 없습니다. 큰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아버지 한번도 안빠지시고 안동서 경기도까지 늦게라도 제사 참석하시고 새벽에 돌아오시고는 하셨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난 뒤 작은아버지라는 인간들이랑 사촌형 누나라는 인간들 제사 참석은 커녕 전화 한통도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