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총이 어떤 과정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왔고, 조선정부가 어떠한 이유에서 활을 포기하고 조총을 군의 제식무기로 사용하게 되었는지 설명해 보았습니다. 남한산성, 대립군, 명량, 최종병기 활, 역린, 세키가하라 대전투, 카게무샤, 몽골, 알라트리스테 등에서 영상 소스를 사용하였습니다. 영상 내용 중 삽화는 일러스트레이터 김원철 님의 것을 사용하였습니다. blog.naver.com...
그게 문제가 아니라 조선 기마병 숫자보다 여진족 기마병 숫자가 존나 많았죠 상대적으로 적었던 조선기마병들한테는 일본조총병들이 초반에는 먹혔는데 우리보다 몇배는 많은 여진족 기마병들은 확실히 수준이 달랐던거죠 그리고 조선북쪽과 여진족 주전장은 평지였습니다 험지가 많은 조선땅에서는 매복전술이 먹히지만 평지가 많은 북쪽에서는 기마병이 유리했죠
나선정벌 때 조선군이 러시아 탐험대 를 상대로 이기고 러시아 탐험대 의 머스켓총을 노획했는데 청나라 에게 상납하게되어 구식 심지식 화승총 으로 밖에 못 머무름 청나라 는 17세기 머스켓식 총을 사용하고 또 이후에 서양나라 들을 통해 들어온 개량형 소총들을 가지게 되었어요
조선은 그래서 결국엔 조선후기에 이르러 조총, 즉 아케부스를 전세계에서 가장 잘 다루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그 쯤 되어선 다른 나라들은 스프링이 결합된 방아쇠, 장전, 격발장치 와 탄알 그리고 머신건까지 실전에 쓰고있었지만 말이다. 나라가 발전이 없었단 거다. 기술이라는게 물건 하나 만든다고 땡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지 싶다.
@@jmsunny1437 전쟁 무기가 전쟁때문에 발전한다고 생각하냐? 전쟁 무기의 발전은 과학과 산업 기술의 발달이 촉진하는거다. 아프리카가 100만년 전쟁을 해도 거대 무기 제조사를 가질 수 없고 한국이 100만년 북한과 대립을 해도 보잉사를 가질 수는 없다. 너의 논리 대로면 전세계에서 가장 무기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국가는 스웨덴이고 전세계에서 가장 무기가 발달한 국가는 시리아야. 지난 70년 사이에 중동 전쟁 1차 2차 3차 4차 를 했고 시리아 내전과 ISIS있다. 하지만 실제는 스웨덴은 세계적인 방산국가고 시리아는 단지 전쟁터일 뿐이야.
활을 들고 총을 들엇스나 전력화에 실페 한 총이지요 너무 총에만 의지한 전략이니까요 저 총은 한번 쏘면 장전에 시간이 만이 걸림니다 또한 쏘아도 명중륭이 매우 낮습니다 총의 위력이 생ㄱ각보다 약하다는 것이지요 즉총성은 커서 조치만 명충륙 낮고 장정에 시간이 만이간다 적이 그것을 안다면 치명적인 약점에의해 아군의 전멸이겟지요~~~~당현 하게도 적은 그 약점을 이해 하고 있으며 조선군을 전멸 시켯구요
전쟁은 장난이 아님니다 죽이느냐 죽느냐 잡아 먹느냐 잡아 먹희느냐 임니다 튀어난 지휘관과 판단력은 적을 잡아 먹지만 어리석은 지휘관은 잡아 먹힘니다 아무리 무기가 조아도여 ~~총의 군대 만들고 총의 취약점을 약한 부분을 보강하지 안코 전쟁에 나아 같지요 ~~~그당시 지휘 체계와 ((지휘 체계라 함은 자신의 지인이라 하여 어리석은 자를 지휘관에 안치는 것 이지요))그리고 그 지휘관이 누구 인지 모르나 어리석은 자가 분명하다 하겟지요
조총이 물론 훈련 없이 쓸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활에 비하면 비교적 쉽게 징집된 병사들도 쓸수 있다는건 이후 전쟁양상도 바꿀 정도로 중요한 사실이죠. 활도 강력한 무기이지만 기본적인 숙련도가 나오려면 시간이 더 걸리고 잠깐 훈련으로는 만족할 성능이 나올순 없으니 ㅎㅎㅎ 잘봤습니다!
고려와 조선 초에 사용을 하건 단순히 활이 아니라 궁기병이야. 그래서 여진족 털었던거야. 조선은 활을 포기한게 아니라 궁기병을 포기한거야. 문제는 청의 중갑기병의 카운터가 궁기병이었다는거지. 그리고 화승총병의 카운터가 중갑기병이고 차라리 화승총병이 아니라 카라콜을 운용 했어야지. 하지만 카라콜을 운용하기에는 조선은 너무 가난했어. 청의 중갑기병이 카라콜 이기는건 진짜 ㅈㄴ 힘들지. 중갑기병은 느린대 경기병은 가벼워서 속도가 빨라 더구나 중갑기병은 창으로 찔러야해서 2m이내로 접근해야하지만 칼라콜은 권총이라 유효사거리가 아무리 개판이라도 5~10m야. 새 무기가 나오면 그에 맞는 전략과 전술을 가져야하는데 그러기엔 돈이 너무 없지. 카라콜을 하려고 해봐 일단 기병을 키워야하고 기병은 권총을 두자루를 가져야해. 그리고 다시 뛸 기병 1기당 말이 추가로 있어야하고 말위에서 장전을 못하니까 장전을 위한 장소와 인력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지 구축이 필요하고 진지 수호를 위한 보병이 필요하고 보병은 포병 장창병 총병으로 구성되어야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포병이 포를 쏘고 총병은 돌격하고 장창병은 그 앞에 서야해. 이런 완전히 편제된 부대가 있고 포가 동급이나 더 좋은 성능을 가졌다면 병사가 청의 절반밖에 안되도 이겼겠지.
@@마에-s5y 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각궁은 40J, 조총은 장약량에 따라서 700-2000J입니다. 인간 근력으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지닌 냉기(칼,활,창)이 화약 폭발력으로 만들어내는 위력을 이용하는 화기(총,대포)에 비교될 수 조차 없죠. 조총의 총구 속도가 음속이 넘어가죠. 즉, 초음속입니다. 활은 시속 200km 정도이고.. 그냥 비교가 안되죠.
조총이 비록 활보다 사거리가 짧고 재장전이 시간이 걸려도 활보다 훨씬 우월한 병기일 수 밖에 없는게, 전장터에서 쓸만한 습사수 한명 길러내는데 최소 2년 정도 시간이 소요됨. 아무리 단기간 속성으로 벼락치기 해도 6개월은 걸림. 반면에 조총은 빠르면 1~2주, 오래 걸려도 한달이면 조총수 한명이 탄생함. 병사들이 마구 죽어나가는 전쟁터에서 병력보충이라는 면에서 비교 불가. 또한 활은 활과 화살 일일히 장인들이 손으로 만들어야 해서 생산량도 적고 비용도 비쌈. 반면에 조총은 공정만 일단 갖춰지면 대량생산 가능. 역시 병기의 보충이라는 면에서 비교 불가. 상대보다 더 격렬하게 소모하면서도 더 오래 버텨야 승리하는 전쟁에 있어, 병력과 병기의 보충이라는 면에서 뒤 떨어지는 활은 도태 될 수 밖에 없었다.
추가로 활의 경우 조준 후 사격을 하는데있어 동작이 매우 컷고 은폐엄폐가 불가능했기에 적군에게 있어 노출될 위험이 매우 컸음. 즉 상대 궁사나 척후병으로부터 표적이 되기 쉽기에 생명유지도 힘들었겠지. 하지만 조총의 경우 동작이 작고 구조물에 은폐 엄폐를 한 상태에서도 조준 사격이 가능했기에 적군으로부터 몸이 노출되는게 궁사보다도 월등히 낮았음. 즉 사수의 생명유지에 있어서도 오래 버틸수 있었음.
조총 사거리가 짧다는 거는 잘못 알려진 거입니다. 조총은 무강선 활강총이라 조준이 가능한 직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거리가 50m이고 그후 무회전 특징인 어디로 날아갈지 몰라서 일뿐 실제 유효사거리(죽이든 상처를 입히든 위력이 보증되는 거리는) 250m 까지였습니다. 직진 거리 넘어가면 탄착점이 어딘 지 알수 없지만 맞으면 골로가는 거는 마찬가지입니다. 활도 또한 직접 조준해서 날릴 수 있는 거리는 40-50m이고 그후는 높이 들어서 아무나 맞고 죽어라는 식으로 여러 명이서 탄막을 형성해서 날리는 거는 조총이랑 같았습니다. 조총도 적이 멀리 떨어지면 포물선 사법을 구사해서 탄막을 형성해서 아무나 맞고 죽으라는 식으로 쏘았고 40보(50m)쯤에서는 목표물을 조준해서 쏘았어요. 그리고 정규군이 아닌 군대를 상대로 할 때 활은 위력을 발휘했지만 갑옷을 제대로 갖춘 정규군 상대로는 활은 상대가 진격을 늦추는 개념이었지 갑옷을 뚫을 수가 없었고 조총은 한방에 갑옷을 뚫어서 저지할 수 있어서 원거리 무기에 진심인 조선이 조총을 선택 안하는 거는 이상한 거죠. 우리나라 활도 전쟁용 활은 거의 100파운드급이며 90J의 운동에너지를 지녔습니다. 이걸로는 갑옷을 뚫지 못하죠. 참고로 사극에 보면 등장하는 개인용 휴대활은 40파운드급으로 전쟁용으로는 쓸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갑옷을 뚫을려면 최소 400J 이상의 운동에너지를 가져야하는 걸로 압니다. 조총은 화약 장약에 따라서 700~2000J 까지 나갔습니다. 위력 측면에서 활과는 다른 차원의 무기였습니다. 개인화기로 정규군 중장갑을 뚫는 획기적인 혁명이었죠. 중세 이후 유럽에서 활이나 석궁을 안쓴 이유가 괜히 있는 게 아닙니다. 무조건 화승총(아케버스와 머스킷)과 대포였죠. 17세기 이후 서양의 전쟁은 물론 창도 있고 칼도 있었겠지만 총과 대포의 전장이었습니다. 1700년대 중반이후는 거의 총과 대포로만 싸우죠. 접근전에서는 일반 보병들은 총앞에 대검을 꽂아서 싸웠지 칼은 써지 않았습니다. 장교나 기병대들은 말을 타고 칼을 휘둘러야해서 칼을 썼지만
@@안병욱-r6q 오래돼서 대충 기억을 더듬은건데 님덕분에 정확한 자료 찾아 봤습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 이고 박취문과 이시복의 쏘기 시합에서 박취문이 189발을 연속 명중시켰고 이시복이 200발을 연속 명중 시켰네요 화살은 가장 많이 쏜 날은 300발을 쏜 날이네요 그리고 당진 국궁장에서는 대부분 60대 이상 노인들이고 하루 100발 이상 쏘는데 무슨 혈관이 터져요 당진 국궁장도 100보가 족히 넘어보이더만
근데 아쉬운건 조선의 비격진척뢰나 대장군기같은 대형 화기들이 많앗는데 전방에서 조총부대와 적절히 사용햇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네요 기마부대를 비격진척뢰 + 대장군기 그러고 장전 그 뒤 보병 및 조총 사격후 장전씩으로 싸웟다면 홍익포가 잇엇어도 해볼만 햇을텐데 그리고 그 많던 수군은 어디로 말타고 오는 길목에 해안선만 가까우면 뻥뻥쏴줌 될텐데
그 화약이 굉장히 구하기 힘든 자원이였습니다. 조선 땅에서 염초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뒷간 흙, 부엌의 흙을 달달 긁어모아야 인공적으로 염초를 생산할 수 있었어요. 서유럽 역시 염초가 부족해서 인분을 일부러 삭혀서 염초 성분을 생산하는 대규모 시설을 만드는 등 화약은 중요한 전략 자원이였습니다. 그나마 자연적으로 염초가 나는 지역은 중국 인도 정도였는데 중국 명나라는 조선을 경계하여 염초 수출양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대형화기를 보편적으로 굴리기 힘들었던겁니다. 일본은 염초는 안나도 대신 유황이 풍부했기 때문에 염초만 잘 만들면 조총병을 대규모로 굴릴 수 있었지만 우리는 염초 유황 둘다 안나는 땅이였어요.
나도 처음에는 활에서 조총으로 바꾼건줄 알았었는데 화력조선을 보고 난후 활이 아니라 승자총통에서 조총으로 바꾼거 란걸 알게 됨 조선은 세종때 부터 화력에 목이 말라있었고 천.지.현.황 같은 각종화포에다 개인용 화포라고 볼수있는 총통을 사용함 총통이 등장하면서 활은 총통의 장전시간을 벌어주는 수단이 됐었다고 봄 이건 조총이 등장한뒤에도 마찬가지 였었구 글쿠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때는 조총으로 무장 했지만 역으로 후금팔기군기마부대에 개쳐발린걸 보면 신립이 기마부대로 닥돌 하려고 고집을 피운 이유를 알것도 같음 근데 탄금대전투와 사르후전투의 차이점은 지형이랑 날씨의 차이 때문이라고 봄 탄금대전투의 주전장은 충주달천평야 였었고 6월 초여름에 전투를 했었는데 이 6월달이면 논밭에다 물을 대는 시기로 자동차조차도 논에 들어가면 꼼짝을 못하는데 말은 머 말할것도 없다고 봄 논에서 움직일수는 있어도 속도는 떨어질수밖에 없다고 봄 반면 사르후전투는 벌판에서 그것도 한창 추운 3월달에 전투를 했었는데 바람이 하도 불어대서 총알을 장전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고 볼수있슴 화약이 바람에 휘익 하고 날아가 버리니까 신립의 기마부대도 그렇고 후금의 팔기군도 그렇고 둘다 창기병이 아닌 활을 쓰는 궁기병 들임 특히나 신립의 기마부대는 활외에 마상에서 쏠수있는 세총통도 가지고 있었을거라고 봄 창기병이었다면 왜군의 장창부대에 때문에 막히겠지만 궁기병이면 기마돌격을 안하고도 공략을 할수있었겠지만 지형을 무시하고 날씨를 무시한 결과는 끔직스러웠다고 봄
조선은 태생적으로 강한 군사력 소유가 불가능한 나라였습니다. 특히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 두차례의 왕자의 난 등으로 이미 자신들이 군대에 관한 깊은 트라우마 가 있어 강한 국방력을 가지는게 불가능 . 이렇게 회자되고 비판하는것 각개의 전투에 대한 분석은되나 무슨 국가라는게 한번전투에서 지면 국방력이 괴멸되는게 말이된다고 봅니까.
궁도장에서 활시위당겨본사람은 알듯 시위 당기는게 여간힘든게 아님 어지간한 숙련자가 아니고서야 과녁에 적중은 커녕 몇번쏘면 지치고 수십미터날리는것도 버겨움 그런 궁병을 저 시대에 양성하려면 훈련기간이 어마어마하게 걸렸을건데 총은 장전하는 방법이랑 조준법만 익히고 몇 발쏴보면 끝임 여담으로 신미양요나 병인양요 때 그 쏘기힘든 활을 들고 근대무기인 볼트액션을 상대했다는건 거의 말이 안될정도라는거임
기병 상대로는 교대 사격이 별 도움이 안되는데다 3단 사격의 전설이 나오는 나가시노 전투도 본래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다케다군보다 병력이 월등히 많았기에 이긴 전투였고 이마저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병력이 6천 명이나 전사할 정도로 치열한 육박전으로 전개될 정도로 조총병의 역할은 생각외로 크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인 화력과 제압능력에 있어서 냉병기는 열병기를 따라갈수가 없음. 중간에 습사용 활가지고 쏴대는 연습장의 사거리 같은게 나오는데 현실은 주력인 전투용 철전 마저 사거리는 80보 미만, 불안정한 마상 사격시엔 그의 절반으로 떨어졌음. 되려 조선은 수조규식 같은 수군 교본이나 장용영등의 훈련기록에서 조총의 사거리를 활보다 더 멀리 잡았음. 전장식 활강총도 사수에 따라 100 보이상으로 명중탄을 내기도 하는 무기인데 활과 조총을 비교하면 활은 항상 비전투시 활터 같은데서 정지된 표적을 두고 유엽전이나 목전같은 가벼운 비살상 연습용 화살을 쓴 사거리 240보 같은거나 언급하고 조총의 사거리는 50미터다 이런식으로 최대사거리와 유효사거리를 비교하는 뻘짓거리만 하는듯. 당장 이일의 상주전투에서도 왜군이 조총으로 사격을 하고 있었지만 활의 사거리가 닿지 않아 반격을 못하기도 했음. 세상 모든 활로 날고기는 민족들 결국 열병기를 주력으로 갈아탔고, 이는 조선을 관광태운 청군마저 마찬가지였음. 조선이 활 가지고 임진왜란때 성과를 냈다 하지만 정작 조선군은 1593년 부터 조총을 복제하고 있었고 정유재란땐 왜군 못지 않게 조총을 이미 운용하고 있었음 여진족이 활가지고 조총병 중심의 조선군을 이겼다고 우월하다 하는데 물론 이는 조총만 가지고 병종을 구성했을때 나타는 결점이자 조총의 시대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임은 분명하지만 이걸가지고 조총이 활보다 열등하다 하는건 어불성설임. 당시 조선군 구성에 총을 활로 바꾼다 한들 결과는 달라졌을까? 근접 병종이 지켜주지 못하면 당대의 모든 원거리 병기는 무력할 뿐이고 패배의 원인은 신무기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저열한 조선군의 병종 구성에 있지 이걸 근거로 당대인이 평가한 우월을 평가절하 하는건 옳지 않다고 본다 조선군은 서구의 경보병들이 산병전을 벌이듯 느슨한 대열에서 조준사격을 가하는걸 무려 근접병과의 호위 없이 벌였는데 이러면 당연히 돌격하는 적병이나 기병을 못막는다 이건 나폴레옹시대 전열보병들과 경보병들도 마찬가지였음. 전장식 강선라이플로 무장해 200m는 물론이고 600m 저격기록 까지 남겼던 당대 경보병들도 적기병이 돌격하면 전열을 짜고 산병시에 맞딱 드리면 '기도 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였고 전열보병이라는 병과가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했는데 당연히 전열보병으로 진화도 못하고 조합도 망가진 반푼이 조선식 테르시오에 화포도 중세식 그대로인 상태인 병종으로 기병 상대로 산병전을 벌이면 방포 한번 하고 밀려버리는건 당연하다. 당장 조선군이 병자년에 성과를 냈던 김화전투나 광교산 전투도 지세가 근접 병과 역할을 해주니 드디어 조총의 장기를 발휘 해 열병기의 힘을 보여줄수 있었다. 결국 요는 조총이 일부 한계가 있는 무기는 맞으나, 게임체인저로서 기능을 한 세계 최초의 '사수와 지휘관에 의해 사격통제가 가능한 휴대용 열병기'임은 분명하고 그 장점은 대체 불가했으며 조선이 전술을 잘 못짜 단점만 드러난거지 이걸 가지고 열병기 조총이 냉병기 활보다 뒤떨어진다 하는건 어불성설임 마치 제국주의 시절 후장식 탄피 소총가지고도 지휘관이 뻘짓하다가 열등한 무기를 가진 토착세력에게 패배했다고 원주민 고물 수석총이 후장식 소총보다 낫다 하는 사례로 쓰는것과 똑같은 꼴
역사 전공은 커녕, 취미로도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해본적 없는거 같네요. 신립에 대해서는 식민사관 그대로 씨부린다는게 정말 어이가 없고, 임진왜란에 있어서 조총은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농민이 베테랑 군인을 어떻게 이깁니까. 어디 역사소설에서 들은거 가지고 씨부리지 마십쇼 ~
일본은 조총도 대출로 사고 화약도 대출로 구입했지. 게임을 보면 도구점에서 무기를 사서 몬스터를 사냥해서 보석이 나오면 다시 무기를 사는거지. 화약 한자루도 상당히 비싼데 귀를 코로 바꾸니 수익률이 50%가 되는거지. 대출은 있는데 갚는건 불가능하지. 조총을 포기하고 칼과 활로만 싸우는거지. 돈받고 팔았다는 설도 있지. 화약유지비가 안나오는데 조선은 화약을 국가차원에서 지원했으니 원없이 쓴거지. 원래부터 조총은 그렇게 오래된 무기도 아닌데 주력무기는 칼과 창이지.
추가로, 시종일관 활 VS 조총 이렇게 비교하는데 조선이 조총으로 대처하려 한건 활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조선의 주력 화기로 사용하던 승자총통입니다. 조선은 건국초부터 핸드고네 형태의 소형 총통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왔습니다. 매체에서 이걸 제대로 묘사한 경우가 거의 없어서 조선 전기엔 대형 화포와 활만 쓴거처럼 오해할 수 있지만 조선은 대형 화포 보다는 오히려 핸드고네 형태의 다양한 개인화기를 더 많이 사용했고 이것은 전술적으로 조선군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습니다.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난 여진족을 상대하면서 이런 핸드고네들을 대량 운용한다는건 조선군이 가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점이였기 때문입니다. 니탕개의 난 때도 조선군의 승자총통이 인상적인 활약을 해서 신립은 승자총통의 위력을 극찬했고, 조정은 뒤늦게 승자총통을 개발한 김지 장군을 포상했습니다.(당시 김지는 이미 고인이 된 뒤였다고 합니다. 사후에 빛을 본 셈) 승자총통과 비교해선 조총이 모든면에서 우월했기에 승자총통을 대체할 차세대 화기로 조총을 도입했던 겁니다.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총은 활을 전장에서 퇴출 시킨 것이 아니라 궁수와 포수가 조합되는 삼수병 체제가 도입되어 오랜 기간 병용되었습니다. 활+승자총통 에서 활+화승총 으로 바뀐거죠. 그리고 조총은 조선으로선 가성비 좋은 무기가 결코 아닙니다. 화약의 재료인 유황과 염초는 조선 중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명나라로부터 수입해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국궁의 재료인 물소뿔 수입보다 나은 점이 없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대규모로 화약무기를 운용했지만 만성적인 화약 부족에 시달려왔습니다. 이걸 해결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염초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고 조선 내에서 유황 광산을 개발하기도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만성적 화약 부족 문제는 서구의 근대식 화약무기가 들어올때까지 해결되지 못했었습니다. 덧붙여 화승총만으론 기병 돌격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화기만으로 기병 돌격을 저지할 수 있게 된 것은 연발 사격이 가능한 총이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고대부터 임란 당시까지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는 수단은 기병의 돌격을 거부하는 대기병 장애물과 보병 방진이였습니다. 유럽에서도 테르시오라 불리는 창병과 포수가 조합된 진형으로 기병을 막아낸거지 오직 화승총 사격만으로 기병 돌격을 막아낸건 아니지요. 따라서 화승총의 보급을 여진족 기병 대책으로 보는 것은 오해입니다. 조선은 임란 이후에도 기병을 중시했고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단지 조선의 사정이 나빠져서 충분한 기병 양성을 할 수 없게 된거죠.
@@저는기어다닐거에요 총검 등장 이전에도 대기병장애물과 장창으로 제대로 방진 갖추고 있는데 기병 닥돌하면 갈려나가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기병 돌격 전에 중무장 보병들이 먼저 돌진해서 대기병장애물을 제거해버리거나, 궁기병, 총기병들이 활이나 총으로 방진을 공격해 방진에 구멍을 내는 전술이 사용되었습니다. 혹은 제대로 방진을 갖추기 전에 기습을 가하거나 방진이 허술한 부분을 찾아 집중 공격했지요. 영화에서 처럼 방진을 향해서 무지성으로 돌격하면 아무리 기병이라도 참패합니다.,
평야는 조총쏘기에 아주적합한곳 .. 그리고 신립의 조총을 너무과소평가했지 그리고 우리가 병자호란때 조총병이 기마병한테 반대로 졋던이유 당시도요토미는 조총 재장전의단점을보완하기위해 조총수를 여러줄을세워 조총을바로쏘고 빠지는전략을 썻으나 우리는 그러지못했지 그래서 우리는 병자호란때 조총병이 무참히 깨지지 근데 당시 조선은 화포가 더 쌨지 솔직히 화포는 하루만해도 다 배울듯
조상들이 바보도 아니고 조총이 여러모로 좋으니까 활대신 조총에 빠진거임. 발사속도는 숙련된 궁수보다 떨어지는건 확실하지만 궁수 숙련기간보다 조총병 훈련 기간이 훨씬 짧고 장전법만 알면 애들도 강한 화력을 투사 할수 있는게 조총임. 사거리 관통력 살상력 모두 활이 조총을 따라가지 못했음.
그 당시 내가 신립였다면 나는 이렇게 했다. 정히 기병으로 싸워야 했다면 우선은 지리적 위치와 환경요소를 살폈을 것이고(이건 누구나가 당연히 생각해야 할 문제) 구석기 시대라도 정보병은 필수다 이미 부산을 거쳐 쳐 올라오는데 왜군에 대한 정보는 얼마나 수집하고 있었나? 왜군수와 무기 등등 진로까지 파악하고 조선군이 어디에 위치해야 왜병과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를 참모진에서 협의를 거쳐야 하고 최종 결정은 신립의 몫이었어야 했다. 왜군이 조총이라면 우리가 조총도 있고 화살이 있었다면 이 무기로 어떠한 지형을 이용하여 싸워야 했는가를 생각했어야 했다. 아무리 군 숫자가 많아 이길 수 있을지라도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 하며 적을 이길 수 있는 리더가 진정한 장군이다. 이런점에서 신립은 그저 육체나 쓰는 무식쟁이에 지나지 않았다.
@@Tenma_Gabriel_White 조선이 돈이 없지 머리가 없진 않아서 여건이 되면 플린트락 했을거 같아서 아쉽긴 합니다. 다만 부싯돌같은 물자들을 당시 조선 재정 감안하면 무역으로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까, 파는 나라나 어쨋든 명분상 상국이었던 청나라가 그걸 가만히 용납할까 하는 요인들도 고려해야겠네요. 역사에서 선택이란게 완전히 자유로운 선택지, 각 선택지에 대한 완전한 지식이 있던 경우가 없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나왔던 문제점들도 보면 지정학적 위치나 주변국의 정치 사정같이, 우리나라가 어떻게 못해볼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나온 경우가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