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한 편 본 듯 합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린 노회한 정치인이 소년시절 흠모하던 여선생님에 대한 회고를 보고 이미 세상을 떠나신 소식에 묵묵히 침묵하고 은사님을 닮으신 그 자녀분들을 만나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는 그 소년 또한 이미 몇 해 전 고인이 되었음을 생각할 때 마음이 먹먹해집니다. 은사님의 사진과 따님들을 보니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과 성품이셨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고 시골 소년이 그 선생님을 처음 뵀을때 얼마나 인상에 깊이 남았을 지도 공감이 됩니다. 그 시절 티비는 사랑을 싣고는 정말 짜임새가 좋았네요 앞차 추월하다 경찰에 단속되는 장면은 대본에 있는 이야기처럼 정말 재밌는 에피소드네요.
감동 그 자체 입니다. 단아한 선생님 따님들도 인물 교양미 지성이 넘치네요.김 전 총리께서는 2018년 타계하셨죠. 여야를 막론하고 문상을 했죠.그만큼 적이 없었다는 것은 저분의 덕망과 지성을 알수 있죠.저분의 마지막 말씀 죽을때 까지 책을 놓지 말라고 한 말씀 기억합니다.
원래 김종필 저 분이 문인 스타일이고 낭만을 즐기는 그런 모습이 많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분의 유일한 취미가 골프인데 나중에 총리 되시고도 휴일에 골프치는 것 가지고 언론에서 씹으니까 '나는 유일한 취미가 이거고 이것으로 운동을 한다. 내가 총리 업무를 팽개치고 매일 치는 것도 아니고 휴일에 치는 건데 니들이 뭐라고 간섭하냐!' 하고 일갈하니까 언론은 물론 이회창조차도 찍 소리 못했다고...... 정치 짬밥이 30년이나 넘으신 분이니......
우리아버지와 연세가 비슷한 작고하신 고 김종필 총리님! 음~~ 감회가 새롭고 참 아름답고 멋진 인생 사시다가셨네요.. 이종순 선생님 두 따님들 보니까 이종순 선생님이 얼마나 멋진 분인지 알 것 같았어요.. 우리나라 최고의 국무총리 김종필... 우리는 당신을 아름답게 기억합니다.
JP는 비상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고 여러 방면에서 재주가 많았던 사람이다. 35세에 5.16을 했고 5.16 이후 계획을 머릿 속에 다 그리고 있었다. 그림도 잘 그리고 악기도 잘 다루고, 문학, 영화, 음악, 미술 등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리고 배포가 있고 통이 큰 사람이었다. YS와 DJ는 서로 대립했지만, YS와 DJ 모두 JP와는 사이가 좋았다. 요즘 같이 정치인들의 저급한 표현, 막말이 난무하는 것과 달리, JP의 언어는 격조가 있었고 말들은 널리 회자되고 인용되었다. (몽니, 자의 반 타의 반, 서쪽 하늘이 황혼으로 벌겋게 물들이고 싶다 등)
김종필 전 총리께선 내가 고딩시절의 Bot scout시절에 총리를 역임하셨다. 한번은 충남 비인이라는 해변시골에서 행사가 있었다. 당시 내가 소속되어 활동했던 boy scourt는 대전의 88대였다. 각 학교에서 활동하던 학우들이 모여서 만든 활동을 하였는데 그 명성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당시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Boy scout한국총재이셨다. 한번은 우리 대의 야영장을 방문하셨는데 당시 내 친구인 취사반장이 김종필총리께 미지근한 쥬스를 한사발 따라주었는데 그때 시커먼 주전자에서 지프라기같은 이물질이 같이 튀어나온걸 그냥 총리께 드리밀며 잡숫길 강권하였는데 나는 이때 구질구질한 손가락으로 그 이물질을 제거한후 잡수시라고 내밀었다. 때는 한참 무더운 여름방학기간이었고 야영시설에 냉장고가 있을리가 만무한 시절이라서 드린 쥬스는 차거운 것이 아니라 맹맹한 상태였으나 김총리께선 그 한사발을 전부 드리키시더니 "야! 거팜 시원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그분은 모든 언행에 있어 인자한 분이셨다. 다만 정치판에 뛰어들어 풍운의 시절을 보내신것이 안타까운 먼 나의 추억이 있다.
이 양반이 제주도 사람들 먹고 살게 해줬다고 제주도 갔더니 인기 많더만 감귤을 일본에서 들여와 제주도에 감귤특산화를 하려고 했는데 처음에 일본에서 기술이전을 안해서 제주도에서 감귤이 자라질 못했다고합니다. 김종필 총리가 일본을 몇번이나 찾아가서 부탁을 해서 마지못해 일본에서 기술이전을 해주었다고하네요 그 이후 부터 감귤이 잘 자랐다고합니다. 어느지역이든 김종필 총리를 표현할때 어르신 어르신 하던데 좋은일 많이 하신분 인가봐요
저 당시 총리실 출입기자들 부부동반 송년회를 했는데, 박옥숙 여사와 함께 일일이 와인을 따라주면서 정담을 나눴던 따뜻한 분이셨다. JP는 판소리 명창 등과도 친분이 많았는데 그날 저녁 식사자리에서 안숙선님이 창을 불렀다. 그렇게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울림이 나오는지 신기했다. JP는 모사꾼 정치인들과는 격이 달랐다. 과격하지 않고 온화한 성품에 문화 예술을 즐길줄 아는 문무를 겸비한 지식인이었다. 유머러스했고, 1인자가 되기 위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재주가 많으셨던 분이죠.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하고 음악, 예술, 영화, 문학 등에도 조예가 깊었죠. 그 때문인지 요즘처럼 막말, 저급한 표현이 난무하는 정치와는 달리, JP의 말 한마디가 널리 회자인용되기도 하고 고상한 표현을 많이 쓰셨죠. 그리고 DJ와 YS는 서로 대립하고 끝끝내 화해 못했지만, YS와 DJ 모두 JP와는 사이가 좋았죠.
욕심은 부렸지..근데 2인자라는 그늘에 같혀서 자기만의 확고한 세력을 못가졌기에 캐스팅보드 역할에 머물러야만 했던 인물. 차라리 끝까지 버텨서 총리직을 유지했다면 박정희 사후 전대갈이 감히 쿠데타를 일으킬 생각도 못했을테고 그렇게 스무스하게 바라던 1인자가 됬을텐데. 근데 확실히 여야 모두가 윗어른으로 대우해준걸 보면 인격적으로 훌륭한건 맞은거 같음. 부정부패가 없는건 아니다만 그 시대엔 뭐..
어릴 적부터 개구쟁이였지 만,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진 큰 재목이었네요 ! 초등학교 3학년 시절 "홍도야 우지 마라 " OK악단이 왔을 때 구경은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입장할 수 없었던 친구 3명을 무료 입장 시키고, 본인은 '장한몽' 입장권으로 정식 입장 하셨네 // 또, 철부지 사랑이었던 선생님 성함을 마음껏 부르게 하고 들켰을 때는, "한쪽으로 도망치면 잡힐 것이니, 각자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라"는 군사 병법을 얘기하니 제갈공명의 환생인가 // 파란만장 했던 그 분의 일생을 더듬어 보며, 큰 그릇에 담을 기회를 잡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있기도 합니다 ~~ TV는 사랑을 싣고 재미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