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7 기린이 저 기린이 아니라 생각이 드는데요... 기린은 오색 찬란 화려한 빛깔의 털을 가지고 이마에는 기다란 뿔이 하나 있는 외뿔잡이 동물이다. 사슴의 몸에 소의 꼬리, 말과 비슷한 발굽과 갈기를 갖고 있다고 알려진 상상 속의 동물이다. 예로부터 용, 거북, 봉황과 함께 사영수(四靈獸)를 이루어, 신성한 동물로 인식되었다. 이걸 뜻하는 기린이 아닐까 싶네요. ^^;;;
창원시의 경우 현재 존재하는 구인 "의창"구의 창과 "마산회원구"의 원을 따왔습니다. 의창구의 경우 안에 대한 설명에서 나왔듯 의안군에서 유래하였고, 회원구의 경우 충렬왕이 합포지역의 이름을 회원으로 고치면서 등장했습니다. 창원시 성산구의 경우, 성산패총 자리 부근의 구릉이 성 내에 산이 있다고 해서 성산으로 부르던 것이 유래가 되었고, 합포구의 경우 마산포를 과거 합포로 부른데서 유래했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의 경우 산호동 지역을 우산이라고도 불렀던 것이 태종 때 전염병이 심하게 돌자 지명을 바꿔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우산의 牛와 馬는 뜻은 같으나 글자가 다르다하여 마산으로 개칭한것이 기원입니다. 진해의 경우 기존 웅천이라고 불리던 곳을 일제가 군항으로 만들면서 바다로 나아가는 곳이라며 진해로 이름붙인것입니다.
@@허남영-s4z 낙강,동강이 합류해서 낙동강이 되었습니다.그렇다고 그 명칭을 안동것이라고는 안해요.태백과 낙강상류 봉화와 동강상류 청송이 있기 때문에요.낙동강이 있어 낙동이라한다는 기록을 낙동강 발원지나 시발점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안동시내에서 2개 큰 하천과 길안천이 합류하고 미천까지 합류해서 비로소 큰강이 됩니다.
선생생님의 의견을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기록이나 주장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낙동면 지역이 낙동강의 발원지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낙동강이 있어 낙동면의 지명이 생긴것은 아닙니다. 낙동은 상주의 옛지명인 낙양의 동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붙여진 지명입니다. 낙동, 낙서, 낙상 등...
@@지현민주고구려, 그리고 후대의 대진(발해) 역시 여러 종족이 결합된 다민족 또는 제국의 성격이었습니다. 물론 나라를 세우고 지배계급을 이룬 이들은 한민족이었지만 주민들은 오늘날 중국처럼 여러 종족들이 있었죠. 당시엔 여진족들 역시 고구려, 발해를 구성한 주민들이었고요.
@@지현민주함경도 원주민은 동예 및 옥저인이였습니다 그러다 관구검 침입으로 거기가 초토화되고 고구려시대 중기 때 여진족이 남하 하기 시작하였고, 발해인들의 고려 내투 그리고 요의 발해멸망으로 발해인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 시켜 그 공백을 자연스레 여진족이 메꾸게 되었습니다 ㅎㅎㅎ 고로 원주민는 여진족이 아닙니다
대구에 안심은 왕건이 전투에서패해서 돌아가다가 안심지역에 이르러서 이제 안심해도되겠다고 말해서 안심이 되었고 대구 반야월도 왕건이 반달을 보며 처량한 신세를 한탄한 곳 이라서 반야월이되었고 무태 라는곳은 이제 더 이상 태만하지 말라해서 무태 라고 되었다고 합니다 대구에 지명 중 신라시대,고려시대 때붙여진 이름들이 많이 있습니다
잡설로 평택은 예전 경기도 수원군, 진위군과 충청남도 평택군이 합쳐서 만들어진 도시인데 이렇게 월경지나 지역이 세분화 된 이유는 수운으로만 다닐 수 있는 지역소통의 한계 때문에 나뉘어진 경우이고 그나마 국가하천 중에 강이라는 단위를 제외하고 가장 큰 안성천을 그 당시 바닷물이 평택시내 외곽까지 차오르던 상황에서 아산만 방조제의 준공으로 치수를 하면서 각 지역을 연결할 수 있는 다리를 놓게 되고 그렇게 되어 지금의 평택시가 형성이 된 겁니다 예컨데, 송탄시, 평택시, 평택군을 95년에 도농복합도시로 서로 다른지역이었던 곳을 통합하여 지금에야 이르고 있지만 지금 버스노선과 생활권역을 보면 오산과 화성 병점, 수원까지 버스가 통행하는 옛 송탄시 지역, 평택역 주변 시가지와 팽성을 아우르는 옛 평택시 지역, 평택 서부 5개읍면의 중심이며 평택 시내로 나가는 버스 보다 수원쪽으로 나가는 버스가 무려 1927년에 생겼다 할 정도로 어마무시한 평택군 지역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그래서 30대가 넘은 평택 토박이들은 사는 동네를 말할 때 송탄사냐 안중사냐 평택사냐..이렇게 얘기한답니다 송탄은 송장면+일탄면의 글자 하나씩을 따왔으며, 안중은 직산현의 상안중 지역의 장터에서 이름을 따왔고, 평택은 위에 영상에서 나와있다시피 산지나 구릉이 거의 없고 습지나 연못이 많아 평택이라고 지명을 붙인 경우죠
경남 산청군은 원래 조선 때까지만 해도 산음이었는데, 처녀가 아이를 밴 일이 발생한 후로 음기가 너무 세서 그랬다는 이유로 산청으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북 정읍시 이평면은 한자로 배 들판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여기 배밭은 없고, 원래 배가 들어오는 평야라 해서 배들평야라 불렀는데, 일제가 이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로 먹는 배로 알고 이평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아쉬운 우리의 옛 마을 이름들을 왜 한자명으로 바꿨는지 모르겠읍니다. 내 어렸을 때 만해도 경기도 동두천시내의 마을 이름들은 상당히 많았다. 내 고향마을 싸릿말,황마름 ,샛골,못골.방축골.생골 (산고리),송내리,지행리,안골,아차노리,턱거리,조산,거무내미,비냥말,쇠뚠치,걸메.세목 ,남산모루,독도골, 웃사야위,아랫사야위,머른이,동막골,장님,선회비,안흥리,으슷믈(어수물),원토,싸리울,모랫말,장고개. 등 모두 사라졌졌네요. 저의 고향외에 대한민국의 모든 지명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쉽습니다,아마 남한과 북한을 옛 지명을 우리고유의 이름으로 바꾼다면 똑 같은 이름이 많을 겁니다. 영어권 나라들을 보면 똑같은 지명을 가진 도시들이 미국에도 있고 영국에도 있고 카나다에도 있고 호주와 뉴질랜드도 있읍니다.라틴어 쓰는 국가들도 똑같읍니다.
주(州)에서 천(川)으로 바뀐 지역은 대략 인구 2만을 기준으로 했다고 하며 주(州)에서 가운데 점을 뺀 비슷한 글자인 천(川)으로 바꾼 것입니다. 즉 춘천은 통일신라 때 삭주, 고려시대 때 춘주로 불리다가 태종 때 춘천으로 개칭된 것이며 이런 지명은 해당 지역민들이 만든게 아니라 중앙 정부인 고려, 조선 조정에서 정했습니다.
영상 너무 유익하고 감사합니다 동네 어른 지나가는 말로, 백선엽 장군 회고록에 보면, “안” 자 들어가는 곳 중엔, 역사적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많았던 곳이 있어서, 이름이라도 그렇게 지었다는 곳이 있다더군요. 천안은 고려 태조 왕건이 그렇게 말했던 군사 요충 전쟁 핵심지역 / 북한 안주 는 청천강 흐르는 남쪽인데 , 고구려 살수대첩과 625당시 대 전투가 벌어졌던 군사 전쟁 핵심지 였습니다
참고로 나주는 폐주 궁예가 붙였습니다 이때 태조 황제께서는 폐주의 장수였죠 나주는 원래 금성이라 했는데 철원의 금성과 같다 하여 궁예가 새로이 붙였습니다 금성이 태조황제(왕건)께서 친히 수군을 이끌고 금성 을 함락 시키고 폐주는 이때에 이르러 금성을 나주라 붙여 부른 겁니다 그리고 이때에 얻은 부인이 나주 황후 오씨이죠 이분이 두번째 부인이신데 그전의 황후께서는 병을 얻으시어 황궁밖으로 요양을 나섰고 아마 추정컨데 나주 오씨가 황후에 올랐을 무렵엔 황후께서 사망하신걸로 봐야 할겁니다 사에서는 그 전 황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황후가 변고가 있지 않고서야 기존 황후가 있음에도 새황후를 책봉 할 수 없죠 그래서 금성 나주는 태조 황제의 황후 마마를 배출 한 집안입니다
@@배철현-g6l전혀달리 전주+나주=전라도인데 (주의: 여기서 가장 되세겨야 될 곳이 (부안)임 당시 전체 영향력 NO1영역으로 작용됨 부안의 역사를 모르면 역사가 개망나니 역사가 됨 무진장+전주가 가야의 핵심근거지와 가야위 가야의 머리지역들이며 그전에는 7만년이상 순수 삼신문화권이자/ 이후 순수 신시 배달국 문화 배달국 문화권이 였고 신시 배달국 미풍양속으로 작용되어온 곳이였음 그러하기에 이 당시 전북자체가 가야의 실세권이였으며 가야가 자발적으로 머리숙여서 어르신지역 대접을 해주며 지내옴 이후 고구려 핵심진들이 들어와서 유지하다 고구려전쟁때 대륰 북서쪽에 자발적으로 다시 참여하게 됨 그전에 사상과 기자와 기자세력들이 동쪽으로 이동해서 산둥 서쪽의 낙양 바로 서쪽에 있다가 이후 배타고 강건너 북경 바로 동쪽 있다가 이후 배타고 장도에갔다가 이후 산둥반도 아래 아래로 내려가 자리하다 여생을 마쳤는데 그중 일부 기자 핵심후손들이 들어와 한강쪽 이후 백제가 2차 터를 잡으려 했던 금강 근처에 자리하며 세력을 키웠으나 현제 (민주당+정의당+한나라당) 의원들 처럼(종미,종지나,종일)주의로 매국-매민 짖으로 역적질만 유지하려하자 모조리 숙청당하게 됨(모조리 죽임을 당함 씨를 말림 북방의 기황후만 남겨지게됨) 나주는 금성이 있었던 대륙에서 건너온 신라가 전북지역에 잠시 머물다 전남 나주에 가서 정착형태로 자리하게됨 지리산 일부 근처와 이후 마고동천 추진하더니 한반도 동쪽으로 옮겨서 다시 시작하게 됨 그러나 마고 동천은 신라전의 까마득한 고대에 시행되었음 (본래는 고대에 마고가 동천에서 서천으로 진행됨 / 어째거나 이것때문에 후대에 이것이 마치 서쪽에세 동쪽으로 꺼꾸로 시작 된것처럼 착각할 수 있음 그리고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늘 그렇게 세뇌시켜옴 서쪽에서 비롯되어 동쪽으로 왔다고 그러나 7만년 문명인 삼신문화권 원류는 한반도임 다른 곳에서는 원류을 아예 찾을 수 가 없음) 그러나 이러한 것은 이미 대륙에서도 이러하게 종종 진행했던 것임 문제는 이들은 늘 99,9%일본인들 습성들 처럼환부역조작용을 해온 것이 문제임 나주와 주변은 그전에 산둥반도와 동일종족이였으며 같은 마한권에속했음 마한이 전남또는 전북이 마한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가 기본적으로 마한이며 산둥반도 포함 서해 바다가 주변 대륙들 전체가 마한으로 작용되었음 만주도 마한권으로 작용 삼한을 다 같이 동이로 불러 줬으나 이중에 특히 마한의 다른 명칭이 동이임
본래 한반도안에 삼한이 존재 되어 본적이 한번도 없어왔음 그것은 삼한을 합치면 중공대륙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 내지 미국 전체 대륙보다 헐씬 넓기에 한반도 않에 삼한 성립은 본래 불가능한 것 삼한을 합친말을 이르러 (대한제국)이라불렀으음 대한제국이란 삼한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임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제가 아는거 몇개 추가 해 봅니다. (출처: 조선상고사, 열하일기 등) 구리: 고구려, 고구리>구리, 고리: 고려, 고리, Kori, Kuri, Korea 등이 다 같은 어원. 부여: 고주몽 고향. 불(fire)란 뜻. 백암골: 배암>뱀. 하얀 바위라는 뜻 아님. 양수리: 두울못, 북한강, 남한강이 만나는 곳이란 뜻. 윤중: 여의도 벚꽃축제 하는곳. 와주테이 (일본어)의 한자 표기. 제방을 쌓아 홍수를 막았다는 일본 역사에서 따옴. 이태원: 외국 씨앗이 있는 곳, 외국인 거주지란 뜻. 일산 (고양시): 원래 한산이었는데 일제시대에 이찌야마로 불려 일산이 됨.
구리는 고구려와 전혀 상관이 없어요. 구리는 일제 시대 만들어진 지명으로 양주군 구지면과 양주군 망우리면을 통합하면서 구지면의 구, 망우리면의 리를 따와서 구리면으로 바꾼 것 입니다. 그후 망우리 지역은 서울시 중랑구로 편입되어 구지면 지역만 남양주군 구리읍으로 남게 되지만, 구리라는 지명이 익숙하였기에 구지읍으로 바꾸지 않고 남양주군 구리읍 이라는 지명을 계속 쓰게 됩니다. 그후 구리읍이 시로 승격되어 현재의 구리시가 됐습니다. 또한 고리라는 지명은 한국에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고리 밖에 없으며, 고려라는 이름과 전혀 상관 없는 지명 입니다. 리 단위의 지명에 고려라는 명칭이 붙을 이유가 없죠.
지나가는 양평군민 입니다. 내용에 조금 오류가 있네요. 양평, 가평이 평지가 많아 '평'자가 들어간다는 내용은 정확하지 않은것 같습니다. 양평군은 전체면적의 70% 이상이 산지이고, 가평은 경기도에서 산지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입니다. 가평은 지명 유래를 잘 모르겠지만 양평군은 본래 양근군과 지평군이 합쳐지면서 만들어진 이름 입니다. 지평은 현재 양평군 지평면으로 이름이 남아 있는데, 지평면이 평지가 많은 지역이긴 합니다..만 온통 산 밖에 없는 양평에서나 그렇지 여주에 비하면 평야라고 할 수도 없는 면적입니다.
천안은 왕건이 후삼국당시 후백제를 치러갈때 당시 도솔(현 천안 태조산 일대)에서 이 지역을 편안하게 된다면 천하가 안정이 되겠다 라는 의미로 말한것으로 천안으로 지명이 생겨났다고도 보지만 옛 이름인 도솔 자체가 지금 쓰고 있는 천안 과 같은 의미라는걸 보면 불교에서 쓰던 도솔을 한자어로 바뀐 거라고 보는 경향이 많음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 경북 안동이 원래 고창이었는데 고려 왕건이 견훤으로 부터 안전하게 고창을 지킬수 있어서 동쪽이 편안하다고 하여 안동으로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安東이라고 한다네요.. 그리고 경북 경산에 옛날 압독국 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이후 왜 경산이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정보는 없고 오류가 너무 많네요... 견휜의 후백제는 통일신라말기 현 전북 전주 완산에 터잡고 단 36년간만 존속했던 나라였고... 백제의 수도는 한성 충남 공주 부여를 끝으로 지배계층이 일본으로 망명했음. 전라남도에는 단 한번도 국가의 수도가 존재하지 않았음. 조선시대에도 나주가 큰 도시였고... 전남광주는 해방후 성장한 도시임.
울산은 우시산국이라는 고대 국가명에서 유래. 같은 시기 부산엔 거칠산국이 있었는데, 현재는 황령산(거칠 황)에 이름이 남아있음. 삼산동 : 원래는 바다였고 섬이 세 개 있었는데 바다에 안개가 끼면 산봉우리 세 개 처럼 보인다고 삼산이 됨. 태화강의 퇴적작용으로 육지가 생겨서 조선 말엔 진짜 산이 되었는데 일제가 비행장 만든다고 밀어서 지금은 평지. 호계동 : 이름 그대로 호랑이 살던 계곡. 교동 : 조선시대 향교가 있어서. 병영동 : 조선시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이 있어서. 성남동 : 울산읍성 남쪽이라. 남목동 : 조선시대 남목마성이라는 말을 키우던 국영 목장이 있어서. 염포동 : 3포왜란의 그 염포. 문수산 : 문수보살이 산다는 전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문수보살에게 지혜를 얻으러 찾아왔는데 동자승이 나타나 '스승님은 지금 안계신다'하고 사라짐. 왕이 3번 부른 곳이 삼호동. 쫓아가니 사라지고 없던 곳이 무거동. 쫓아가다 주저앉은 곳이 허고개. '헐 수 없다'고 포기하고 물 떠마신 우물이 헐수정. 장생포 : 장승 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추정 반구대 : 거북이가 엎드린 모양의 바위라서. 원래 신라시대부터 경치 좋기로 유명했으며 암각화는 발견된지 몇십년밖에 안됨
도시의 한자 명칭을 같이 해석해야하는데 한글로 ~주, ~산, ~원 식으로 보니 고려~조선에 만들어진 지명에 대한 이해를 지리적 특성을 기반으로 이해하지 않고 행정적 특성으로 이해하면 오류가 발생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의 지명은 도시의 중심부를 강 또는 강과 같이 나룻배 등을 이용해야 건널 수 있는 물줄기가 있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농경사회에서 1년 내내 마르지 않는 물줄기는 그 지역의 소출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몰려 거주할 기본 장소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州)가 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대형 도시를 둘씩 묶어 '~도(道)'로 광영지역을 지칭하므로 '~~도시들로 가는 길'을 가리킨 것입니다. (도:道는 辵와 首의 형성자로 '머릿도시로 가다'는 의미로 쓰임) 그래서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로 가는 길', 경상도는 '경주와 상주로 가는 길' 등.. 여전히 한자어가 한국어의 70%이상을 차지하는 만큼 한자 어원의 이해가 없으면 문화적, 지리적, 행정 등의 이해가 제대로 되지 못합니다.
2:33 조사를 재대로 못하신건지... 그냥 영상 길이를 줄이려고 그냥 넘어가신건지 몰라도... 신라시대 도라는 행정단위는 없었습니다. 백재 복속 후 전국을 6개 도로 나누고 후에 고구려 영토 를 편입하면서 2개주, 1개주를 추가로 설치하여 총 9개 주로 관리하였죠. 5소경이 있긴 했지만 주마다 소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도청소재지라는 표현은 역사를 정확히 파악하는 단어선택은 아닙니다.
조선 태조와 무학대사의 기도터였던 인왕산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둘 지, 밖으로 둘 지를 두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설전을 벌였는데 이성계가 눈 내린 인왕산이 보고 싶어 이 곳을 찾았다가 선바위 안쪽에는 눈이 녹고, 선바위에는 녹지않아 선바위를 도성 밖에 두었다고 한다. 눈 울타리 '설울'이 변경되어 '서울'이 되었으며 정도전은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면 불교가 번성할 것이며,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 하였는데 결국 도성 밖에 두기로 결정되자 무학대사는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다닐 것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석모도에 매음리라는 곳이 있어요. 매음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이어서 기분이 좀 그랬는데 한자로 풀어보면 석탄에서 그을음 소리가 난다는 뜻이라 나중에 거기서 온천이 나올 거라는 걸 어찌 알았을까 싶어서 우리나라 지명은 조상의 지혜가 담긴 것이라 함부로 고쳐서는 안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원경이 현재의 남원시라는 것만 언급하셨는데... 중원경과 서원경도 현재의 지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북원경은 현재의 원주시라서 뭐라 하기 좀 애매함...) 중원경은 충청북도 중원군이고요... 현재는 충주시와 통합해서 도농복합도시인 통합 충주시가 되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학창시절에 중원 고구려비로 배우신 분들이 많으실 텐데, 중원군에 있는 고구려비라는 의미이고요, 중원군이 충주시와 통합하면서 현재 정식 명칭은 충주고구려비가 되었습니다. 서원경의 경우는... 청주시가 청원군과 통합해서 도농복합도시 통합 청주시가 되면서 설치한 일반구의 명칭으로 남아 있습니다. 통합 전 청주시는 일반구로 흥덕구와 상당구를 두고 있었고요, 통합 후에 일반구로 청원구와 서원구를 추가로 설치했는데요(구들의 경계는 조정한 듯 싶네요), 청원구는 청원군에서 유래한 명칭일 것이고, 서원구는 후기 신라의 5소경 중 하나인 서원경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추정됩니다. 통일신라 아닙니다. 고구려 땅 짱깨에게 다 뺏겼고, 나중에 그 땅에 발해가 들어서는데 통일은 개뿔...
경성은 일본이 그냥 서울을 한자어로 써놓은것 뿐이에요. 경성은 京(서울 경)에 城(재 성)을 합쳐서 만들어놓은 거라 "서울재"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써놓고 "케~죠~"라고 읽었다고 합니다. 그걸 광복된 후 "서울재"에서 "서울특별시"로 바꾼거고요. 일제가 왜 "서울재"라는 의미로 표현했나면 일본의 수도있던 東京(동경, 도쿄)에는 도성이 없거든요. 교토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한양에는 도성이 있으니 "도성이 있는 서울이다"라는 의미로 "서울재"라는 뜻을 가진 한자 京城으로 표기했던 거에요. 즉 느낌상 아시겠지만 그 당시에는 도성 안만 서울이었다고 합니다. 일제가 바꾼뒤 서울의 영역이 도성밖으로 점점 확대되다가 현재의 영토로 된거에요.
@@Ycmjg37143 잘못 알고 있습니다. 신라 천년동안 온나라 국민들은 경주를 서 라벌- 셔블 - 서을 (설)로 불렀습니다. 신라가 문 닫은지 또 1000년이 지낫지만 이땅의 사람들은 수도를 설 이라고 알았습니다 한양 또는 경성 기타등등 은 문서에 표기는 하고 일부는 그걸 썼지만 모두는 수도를 서을 또는 설로 불렀습니다 . 현재 나이로 120년 이상 된 분으로 부터 직접들은 아주 정확한 사실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