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어릴적 공장에서 일했어요 무척 힘들었죠 한달을 15일 야근했답니다 ㅠ 야근 끝나고 청소하면서 이시그널을 들을때면 그 힘든게 사라졌어요 그렇게 힘든 암울한 나날이었지만 그때는 청춘이니 .. 아름답지 않았겠어요? 아.. 불쌍한 내청춘 그렇지만 또 아름다운 내청춘 먼 미래에 이방송을 다시 듣게 되어서 너무 감격합니다
지금은 2021년 11월 4일 23시 52분이에요. 왜 눈물이 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꾸 눈물이나네요. 지금도 사람들은 아저씨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주시던 음악들을 아주 좋아해요. 역시 명곡들이죠~ 이날의 방송을 공감하며 추억할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난것도 참 행운인것 같아요. 그치만, 우리 아이들은 이 감성을 모르고 사는게 참 안타깝기만하죠~ 늦은밤 감사해요 주책맞게 자고있는 남편옆에서 소리죽여 우는 나~ 아~~~~~ 돌아가고싶어 아빠도 보고싶고 외할머니도 보고싶고 그리고 나도 다시 보고싶어
62년생입니다. 사업 잘못해서 사랑하는 집사람과 얼마라도 벌고자 각자 떨어져 돈벌이 한지 몇년째 홀애비입니다. 일요일 새벽녁 유튜버 팝송 들어며 밀어뒀던 설거지와 원룸 방청소 끝내고 내일 출근 위해 한숨 자려하다 이채널 발견하고 아~ 터지는 감성에 듣게 되었습니다. 81년 이종환선생님의 음성은 저의 기억을 무조건 그시절로 회귀시켜 울컥하게 만드네요. 인생 무상합니다.
2023년 9월에 아주 머나먼 추억으로 되돌아 가게 해 주네요. 선곡들도 어쩜 이리도 가슴 저리게 하는지.... 중학교 시절엔 별밤과 번갈아 들으며, 공개방송을 기다리던 설레임이 되살아 나네요. 종환 아저씨의 말투와 독특한 발음.... 어릴적 라디오 끌어안고 눈물 흘리던 그시절.... 참 그립던 음성입니다. 추억을 만나게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의 일면을 제대로 드러낸 흑역사 중 대표적인 사건은 바로 '박성원 자살 사건'이다. 이종환이 프로듀서 겸 DJ로 일하던 1974년 11월, 당시 귀여운 뚱보 컨셉[11]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그 때 연예계에선 상당히 드물었던 현역 대학생(경희대학교 사학과)이었던 개그맨 박성원이 이종환 자신을 뒷담화했다는 이유로 이종환 본인이 운영하던 음악감상실에 감금하고 집단 폭행한 혐의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일이다. 피해자인 박성원은 그 때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인 1975년 3월, 자택에서 자살했다.
1967년 1월생입니다. 뉴욕에 살고 있습니다 밤의 디스크쇼 시그널에 가슴설레던 중3시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후로는 한평생 이종환 선생님의 제 가슴의 빛나는 별로 남아계십니다 그시절 돌아갈 수는 없지만 가슴속으로 되새길수 있어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하루 하루 행복한 시간 기원합니다
저는 1967년 5월생입니다. 세월은 어찌 그리 빨리가는지... 요즘 사회에서 제 동갑내기들 보기힘드네요ㅜ 동시대를 살아왔다는거 자체로 넘 반갑더라구요 저도 친척들이 모두 미국에 계셔서 명절때마다 항상 외로웠는데... 오늘 크리스마스도 예외가 아니네요 코로나때문인지 몰라도 우리 어렸을때의 그느낌을 찿을 수가 없네요ㅜ 해외에 계시지만 마음만은 이종환 선생님 방송 듣던 그때로 가셨네요 이제 60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나이지만 항상 그때를 생각하며 순수한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네요 67년생 화이팅!
89년생 어느덧 3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입니다. 64년생인 저희 어머니께서 소천하신지 벌써 4년이 되었네요.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던 팝송 찾아오다가 우연히 이 방송을 봤는데 좋은 팝송이 많아 구독하게되었습니다. 그 당시 라디오는 이랬었군요. 저희 어머니 아버지 동년배이신 선배님들. 한국을 이렇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2023년 1월 8일 아침에 듣고 있습니다~ 지적인 우월감에 빠진 예민한 여고생이었던 우울한 시절 기숙사 냉골방에서 혼자 듣던 이종환님의 밤의 디스크쇼 시그널이 흘러 나오면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는 했습니다 매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힘겨웠던 고딩 시절을 견딜 수 있는 힘이었는데 그 시간들이 참 멀게 느껴지네요 이젠 오십대 중년 아픈데는 늘어가고 열정은 식고 그래도 힘을 내야겠지요 모두들 행복하고 건강한 한 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3때였네요~단칸방이라 맘놓고 라디오를 듣기도 힘든 시절이었네요. 가난하고 편안치 않던 가정이라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데, 시그널 음악이 나오는 순간 눈물과 함께 그 시절로 훌쩍 돌아가네요. 가족을 위해 고생하시고, 그 고생으로 얻은 병환으로 돌아가신 사랑하는 어머니가 이 늦가을 사무치도록 그립습니다.
이종환 선생님. 그립습니다. 그 목소리와 인간미를 ----- 제가 여의도 MBC를 십고 초려를 해서 처음으로 CF에 출연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만해도 프리랜서가 아니셔서 광고에 출연이 안된다고 하셨는데 젊었던 저의 성의와 열정에 그만 CF출연 하게 되었습니다. TV방영한 다음날 방송국에서 안된다고 해서 CF를 TV에서 내리게 되었습니다. 많은 돈을 들여 만든 광고여서 저희 대행사 뿐만 아니라 광고주에게 피해가 날 것에 많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가져 주셨습니다. 하지만 대신 밤의 디스크쇼에서 광고주 제품 PPL과 간접 멘트를 통해 엄청난 노력을 해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렇게 해주신 덕분에 광고주 제품과 브랜드 인지도와 판매율이 급격히 상승 하여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감사 사례도 받지 않으시고 묵묵히 수년 동안 광고주 브랜드를 많이 알려 주셨습니다. CF 출연료도 크게 요청도 하지 않으시고 주시는 데로 받으시겠다고 하여 젊었던 저에게 많은 감동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큰 사람으로 늘 경외의 대상이셨던 분이 그렇게 겸손 하시며 쑥스러움을 보이시는 게 너무 나도 놀라웠었습니다. 매일 밤 이종환의 디스크 쇼를 들으며 일하던 그때와 그분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되살아나네요. windbird님에게 감사 드립니다.
이때 제가 중3이었고 그즈음엔 거의 매일 밤의 디스크쇼를 들었습니다. 확실히 기억할 순 없지만 지금 듣고 있는 81년 9월 1일 방송도 아마 본방송을 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42년이 지난 지금 미국 뉴저지에서 다시 듣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하네요. 42년의 세월이 눈앞에 빠른 속도로 지나갑니다. 잘 산 것도 같고 잘못 산 것도 같고, 의미있는 시간들이었던 것도 같고 무의미한 발버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이 밤 저를 중3 시절로 돌아가게 해준 유튜브 알고리듬에 감사드립니다.
예쁜 엽서전. 저희집 근처 뉴코아 6층인가에서 해서 줄서서 예쁜 엽서 구경했던 기억이 있네요. 정말 많은 정성과 상상을 초월하는 엽서들이 정말 많아서 진짜 감탄했었죠. 저 초등6년때였나 중1때였나. 참 너무너무 좋았던 시절입니다. 과학이 발전된 지금보다 훨씬 좋았고 정많고 낭만있던 시절이었죠.
@@DJ내깔 같은 심정입니다 1년 선배시네요 건강하시죠. 음악이나 노래처럼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또 있을까요 청춘은 지나고보니 찬란했고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만으로도 멋졌던... 우리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ㅎㅎ 하고픈 일들 다 하셨습니까 혹여 이루지 못한 꿈이 남았더래도 천천히 가자구요 마음비워 가벼워지는 연습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비우면 채워진다지요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모두 힘내시고 행복하게 잘 살아갑시다.
정말 딱 1시간이라도 돌아가고 싶으네요. 한겨울이었고 나이차 많은 언니 오빠 밑에서 막둥이짓하며 이불밑에서 함께 듣고있던 어느날이 생각납니다. 이제 그분은 하늘로 가시고 저는 중년이 되었는데 오리엔트 아날로그 ...그 한마디로 그 막둥이로 돌아갑니다. 아무걱정없던 그시설, 추우면 그저 이불밑으로 들어가면 끝이었던 그시절...
@@jung4741 님 빨리 불 끄고 자라던ᆢ 저두 올빼미과 인지라 낙서와 시를 ᆢ 뭐하냐ᆢ 내일 밝은 날 하지 ㅡ 살짝 목소리를 내시며 딸 방문을 여시던 아부지 전기 불 아까운께 혹여 불 키고 자면 끌려고 문 여시고는 밝을 때하고 언능 자거라 어제 일처럼 생생한 아버지 음성
오늘은 2023년 5월 14일 어머니날 뉴욕 퀸즈에서 21년째 살고있는 63년생 남자입니다. 우연히 발견한 이종환님의 저 고3 9월 3일 방송을 듣네요. 시험준비로 들을 수 없었던 방송이었겠죠. 좋네요. 엄청난 댓글 읽느라 일요일 오전부터 오후 1시 현재까지 점심도 거르고 있습니다. 설렘과 추억, 그리고 회상, 동질감, 애정, 걱정, 등등 다양한 감정이 선후배님들의 댓글에 정성껏 묻어있네요. 저는 어제 오랜 교회친구의 죽음을 전해들었습니다, 췌장암으로 5년넘게 강한 의지로 싸워왔고 지난 1월 저의 어머님 장례후 친구들 모임에도 나와주었던 친구입니다. 삶의 의지가 무었인지 보여주었던 친구의 죽음으로 깊은 생각에 잠겨 친구의 모습을 추억하고 애도하고 나는 얼마나 살 수 았나..하고 짦은 방황하던 내게 찿아와 위로해주고 있는 이영상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선후배님들 어디에 어떻게 사시던지 힘내시고 건강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저도 63 년생입니다 ;) 국민학교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지금도 내가 살던 동네 그리고 다니던 국민학교 를 visit 하려고 합니다 또 내 성적을 check 도 하고 그리고 국민 학교 동창생도 만나려고 합니다 아무튼 반가워요 언제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이곳 Boston Massachusetts 에서 응원합니다. 이--------만-------큼 행복하세요 ~~~
40년이란 세월이 이리도 빨리 흐를줄은 미쳐 몰랐네요 81년이면 대학새내기때, 이 시그널송을 들으니 아직도 그때 기억(대구빅토리아 음악감상실에서본 사이먼가펑클의 센트럴파크공연등)들이 생생하게떠오르는데..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절이라 그런지 오늘따라 그때가 사무치게 그리워지네요
티임머쉰을 타고 가고 싶네요 아버지도 젊은 엄마와 이종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ㅡ들으며 ᆢᆢᆢ 81학번 새내기 이시며 저랑 같았군요 광주는 지방 방송으로 정오의 희망곡 디제이 오창규님이 하실 때, 저는 인쇄소의 도안사 였습니다 무료한 가운데 엽서를 거의 방송국에 보내어 여러번의 상품도 받은 적이 있는데 ,하루는 네 다섯가지의 선물 교환권을 받았는데 썬글라스, 그리고 협찬 레코드가게에서 사이먼과 가펑클의 저 음반을 받은 일이 있네요 추억은 아름다움으로 지금 이 시간 제 주위를 머뭅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리워 지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