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오나라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안타까운 것이 군주, 도독, 충신 할 것 없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 요절을 했다는 얄궃은 사실입니다. 손등과 태자사우의 면면을 보자면 더더욱 오나라의 마지막이 너무 아쉽습니다만... 그래서 삼국시대의 종말을 다 지켜보고 난 뒤에 몰려오는 회한이 자꾸 다시 삼국지를 꺼내 읽게 만드는 매력일지도 모르겠어요. 역사 아래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게 되니까요. 그런데 이번 영상을 보면서, 새삼 느끼게 된 것은 손씨가문의 수장이자 오나라의 황제에 올랐던 손권이라는 인물에 대한 공감입니다. 그 자리에 있으면서 젋은 시절에 그 수많은 호족세력들과 그들의 이해관계에 얽힌 온갖 상소와 기싸움과 살벌했던 신경전과 협잡과 줄서기의 아수라장을 그나마 일축해가며 위촉과 다퉜었다는 게 경이롭게 보일 지경입니다. 위촉오 세 나라는 정말이지 절묘하게 균형이 맞는, 너무 다른 세 세력들이었군요. 삼국지라는 콘텐츠가 마르지 않는 우물인 이유가 그 다채로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준 이번 영상도 감사합니다~
결국 지리적 한계가 크죠 오나라땅은 수당시기는 돼야 주요지역으로 급부상하고 송나라때 되면 핵심 경제중심지가 되지만, 삼국시기엔 변방 중 변방이였습니다. 왜냐면 지금 강남지방은 논과 호수로 수리시설이 정리되었지만 저당시 강남지방은 대부분이 늪지대였거든요. 그래서 흡혈촌충, 모기 등 각종 병충해가 많고, 전염병도 많아서 요절을 할 가능성이 중원지역에 비해 엄청 높았습니다. 그래서 페니실린 등 각종 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열대지방은 인구성장률이 매우 낮았고, 아열대지방 역시 지금에 비해 크게 낮아 오나라 역시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었습니다.
둘이 경쟁을 시키고 그 경쟁을 이용해서 호족들을 대거 숙청하고 왕권을 안정화 시킨다하는 계획이 있었을 수도 있겠으며 아예 엄청 어린 아들을 내세운 뒤에 자신이 아들이 어리다는 핑계로 상왕이 되거나 한 뒤에 다시 어린 왕을 조종해서 왕을 능멸한다는 핑계로 2차 숙청을 해버린다 하는...조선 태종이 심온을 숙청했던 방식이죠...더 큰 계획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 모두 손권이 오래 살아야 가능한 것이죠...아니면 손권이 차기 후계자가 성년이 될때까지 오래 못 산다 쳐도 믿을 만한 탁고대신(제갈공명 같은...)에게 맡긴 후에 숙청 작업을 이어가면 된다 하는 뭐 그런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실상은 손권 본인만 알겠죠.
개인적으로는 손등이 요절할걸 계산 못한게 아닌가 생각이 들때가 있음. 그러니까 순수하게 저 2명의 태자에게 같은 대우를 해주고 파벌경쟁을 지켜보지 않았을까 싶을때가 있음. 어차피 진짜 태자가 죽었으니 진짜 유능한 녀석을 찾고 싶으니까.. 하지만 손권의 예상과 다르게 모든게 너무 크게 흘러갔음... 가끔보면 숙종의 환국으로 인한 후기 조선의 정치적 불균형을 그대로 본 느낌이 든달까..
이궁의 변이 황권강화를 위한 간사한 계략이었다면, 숙청을 해도 너무 많이 해버렸고, 손화 손패 둘다 버리고 7살 난 어린애를 태자로 세우는게 정말 뻘짓이었죠. 손권이 10년이라도 더 살 수 있었다면 모를까, 이미 지금 현대 시점에서도 손권은 엄청나게 장수를 한 상황인데...
손권의 노망설이 나오는 이유도 갑작스럽게 죽은 형의 자리를 어린 나이에 물려 받아 불안한 동오를 정치적으로 안정화 시키며 삼국지내에서는 물론 중국 역사에 따져도 손꼽을 만한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보여준 것에 비해 이궁의 변은 이 모습과 정반대되는 모습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궁의 변에서 손권이 보여준 모습은 기존의 손권의 행동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의도했다기에는 아무리 왕권강화가 목적이라지만 도가 지나쳐 오나라 멸망의 단초를 마련했고, 두 왕자 간의 경쟁이 목적이었다면 핑계거리야 많았기에 태자의 지목을 늦췄어도 됐을 요량이죠. 그래서 손권이 의도했다기에는 이전까지 손권이 보여준 정치적 역량에 비해 너무나도 허술한 점이 많기에 저는 노망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손권이 나이가 들면서 더이상 예전처럼 총명하고 현명한 판단을 할 능력이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세종대왕께서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전까지의 정치적 행보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시곤 하셨는데 손권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생각합니다. 거기다 자수성가하여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유의 남의 말을 잘 안듣고 자기 고집이 강해지는 모습이 나이가 들면서 더 강해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병제가 있을정도로 3국중 호족들의 입김이 가장 강했던게 손오의 사정을 생각하면 손권의 판단은 매우 멍청한 판단이였죠. 특히 호족들의 대표격인 육손은 공신에다 영향력도 컸지만 그렇다고 권세를 휘두르는 타입도 아니였기에 역으로 그에게 위임하는 선택이 정답이였음. 역으로 육손이 필요했던거죠. 명문호족+압도적인 명성으로 대호족들을 컨트롤 할 수 있던건 육손 뿐이였죠. 육손을 고명대신으로 해서 혼란을 잠재우고 정국을 안정시켰다면 조위의 정세를 보아가면서 촉한과 손잡고 공세를 필 수도 있었다 봅니다. 특히 사마사, 사마소형제가 지속적인 반란에 시달렸던 점, 손권의 예상대로 제갈각은 함량미달이였던 점, 또 그래서 손휴 이전까지 손오의 정치가 막장으로 갔던 점 고려하면 이궁의 변은 손권 스스로 손오의 관짝에 못질 시작한것과 다름없다 봅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지도자의 입장에서 자식들이 너무 어리거나 후계구도가 불안하게 보이면 본인이 죽기 전에 정말 미친 척하면서 조금이라도 힘이 있는 신하들이나 제후들을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제거하는 경우가 종종 있더군요. 손권 본인이 죽은 이후의 시대를 매우 염려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최근에 태조왕건 보니까 비슷한 상황이 있네요 왕건은 첫아들이 어릴때 태자 책봉을 했는데 견훤은 아들들을 경쟁시키고 첫째가 마흔이 넘을때도 태자책봉을 미루다가 결국 신검파가 경쟁자인 막내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켜버림 신하들도 태자 후보 따라 갈라져서 싸움 왕권제에다 호족문화인데 태자 경쟁시키건 최악의 수인듯
지역 호족들 미는 왕자가 달라서 너무 밀면 갈라질 가능성이 있죠. 후백제 북쪽 호족들이랑 남쪽 호족들 각각 미는게 달랐는데 나주뺏기면서 힘이 더 빠져서 그거 균형맞춘다고 금강을 더 밀어준 것도 있을 꺼라는 영상을 본거같습니다. 왕건도 통일전에 죽었으면 쪼개질 가능성이 컷죠
아무래도 아버지 형 자신 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후계자 계승을 겪으며 후계 문제로 장난질 치는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체득하지 못한게 문제인거 같네요. 원소 일가의 일도 말로만 들었지 조조처럼 실제로 겪어본 일이 아니고... 아버지와 헝의 신하들이 자연스레 자신에게 승계된 것만 보고 경각심이 없었던거 같음...
제가 보기엔 전형적인 치매 증세로 보입니다 2:00 처럼 노망이 나더라도 내릴수 있습니다 늘 상태가 나쁜것만은 아닙니다 그 증세가 점차 심각해 지는거죠 아마 특유의 불같은 성격과 술을 즐거하는거랑 첫째아들 손등의 사망에 의한 충격등이 발병 원인이 된것 같습니다 또 치매의 대표적인 증상이 의심이 심해진다는 점에서 대량 숙청이 이루어 진것로도 보여집니다 저는 정치적 측면 보다는 의학적 측면을 무게를 두고싶네요
사실 한국 역사였으면 K 사극 한편감이죠. 손권이 손화, 손패를 동일 대우한거까지는 손권의 태자 교육 철학으로 봐줄 순 있습니다. 근데 이걸 가지고 육손이 손권의 역린을 건드렸다고 보는데, 손권이 적통이 아닌데 적통 타령을 해버린거죠. 그것도 딱딱하게 상소로 해버렸지. 하필 육손은 손책의 사위인데, 손책의 사위가 적통을 중시하라고 얘기한다고? 더구나 손책의 아들 손소가 살아있는데? 형주 탈환의 공훈, 호족 명문가의 육손이 해버렸으니 그 무게감이 너무 크게 손권의 역린을 건드려 버린거죠. 1등 호족이 태자를 지지해준다는 고마움 보다는 방계왕인 자신의 위치가 더 크게 보였는지 모릅니다. 물론 손권이 잘 했다는건 아니지만, 조직 문화의 생리를 고려할 때, 손권 입장에서는 육손의 이 상소 한 방은 너무 자존심 터지는 문제가 아니였을까? 옳곧은 선비가 많이 타는 귀향 테크죠. 육손의 몰락이 트리거가 되서 명문 호족들과 신진 사대부의 세력 싸움, 손노반-왕부인의 궁중 암투까지 더해지면서 카오스가 펼쳐지죠. 여기서 손패도 그럴수록 몸가짐을 조심했어야 하는데, 본인도 제위의 욕심을 내다가 자결당해버리고, 그러니까 손패에게 베팅했던 손노반도 가만히 있을수가 없지요. 이러다간 왕부인한테 평생 물어뜯히게 생겼거든요. 결국 결과적으로는 어이없게 손량에게 제위가 갔는데, 그나마 손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런 혼란을 겪은 손패가 왕위를 이으면 어디 가만히 있겠는가? 현재 이해관계가 형성된 적이 없는 손량에게 넘기는게 가장 평화로운 선택이 아닐까? 그런 고민이 있었을지도요. 근데 임종 직전에 생각해보니까, 왕실 내부만 고려하면 손량인데, 오나라의 대외 관계를 생각해보면 오나라의 왕권은 역시 명문 호족들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걸 느끼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죽기 직전에 폐위된 손화를 다시 언급하면서 후세에 손가락질 받는 오락가락한 모습을 보인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궁의 변, 오빠들이 두고두고 아쉬워하는 사건이죠. 손권 분명히 그 능력이 의심할 바 없지만 후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한 부분에서 한계가 분명하죠. 후계자를 잘 선택하는 것도 능력이니까요. 인격적으로나 능력으로나 출중했던 장남 손등의 죽음이 나머지 아들들의 능력에 대한 손권의 불신을 키웠다고 봅니다. 조앙의 위나라와 손등의 오나라 유선의 촉나라가 2세경쟁을 하는 삼국지도 재밌을것 같은데 참 아쉽네요.
당시 상황이 사마씨가 조씨 일가를 멸족 시키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손권 입장에선 다른 나라 한테 지면 왕이나 호족이라도 인정해 주지만 내부반란 일어나면 멸족이니까요. 게다가 오나라에 비해 위나라의 왕권이 훨씬 강했는데 조씨 일가가 멸족 당한 겁니다. 손권 입장에선 다른 나라 잔쟁 보단 내부반란 막는 것이 훨씬 중요하죠
아마 젊엇을때는 태사자랑 싸우고 잇엇을 거임. 대충 기록을 보면 젊을땐 유표의 조카인 유반 밑에서 일햇는데 이 인간이 장사에서 예장으로 확장하던 입장이엿다고 함. 유표의 승인은 받앗을거란 걸 고려한다면 이미자랑 다르게 유표도 야심이 잇어서 나름 세력 확장 욕심이 잇엇는데 이때 손책이 이놈들 막을려고 예장에다가 보낸 게 태사자임. 즉 젊을 적에는 둘이 거기서 쌈질하고 잇엇다고...
손권은 능력은 있는 인물은 맞는데 항상보면 의욕적이게 일을 추진하기는 하는데 그 벌여놓은일들이 자기선에서 수습이 안되는 일들뿐이었다는게 문제. 의욕적으로 형주를 먹겠다고 달려들어서 전체까진 아니어도 먹은건 좋았으나 관우가 죽음으로써 진짜 이릉에서 못막았으면 오나라는 끝이었을 상황까지오고 그나마 먹은 형주땅은 두고두고 문제거리로 작용함. 이궁의 변도 비슷하다고 생각한게 첨에는 충성경쟁+택현자를 할려고 했었던듯하나 자기 술버릇처럼 기분파적인 면이 강해서 잘 조율하지 못했고 결국에는 이리저리 인물들 쳐내다보니 정작 오나라를 이끌고 후주를 받쳐줄 인물들이 사라지고 손노반같은 능력은 없는데 권력을 탐하는이들만 남게되다보니 결국에는 후계도 망...그냥 일만 열심히 벌여놓고 수습은 어떻게 할줄 모르는 전형적인 스타일이었음.
손등이 죽은건 죽은거고 그냥 손화를 밀어주면 되지 손패랑 경쟁을 왜 시키냐 라고들 많이 생각하시지만 이들의 출생년도를 보면 다른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손등 209년생, 손화 224년생.. 여기서부터 좀 쎄하죠? 손권이 182년생이니 손등도 당시로는 꽤나 늦게 본 아들이고 손화면 이미 늦둥이입니다. 먼저 간 조조, 유비도 60대에 사망했는데 손등이 사망할 241년, 손권은 환갑을 눈앞에 두고 있었고 손화는 17살이죠. 그래도 17살이면 손권도 권력을 잡은 나이인데 뭐가 문제냐고 하실수 있겠지만 문제는 224년생 동갑내기 아들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게 손패죠. 모든 조건이 완벽한 태자가 죽은 마당에 비슷한 나이의 아들 둘이 있으면 한번쯤 경쟁시켜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근데 신기한게 삼국 모두 군주가 죽기전에 신하들에게 태자들을 부탁한거 보면 이궁의 변이 괜히 나온게 아닌거 같네요 난세를 거치면서 수 당 시대때까지 계속된 혼란들을보면 시대 자체에 황권이 약해졌다고 볼수있습니다 뭐 손권이 애초에 명분 없는 이유로 칭제를 하였고 호족들의 추대를 받고 황제가 되었으니 호족들의 입김이 클수밖에요 그래서 매번 호족들중에 손권을 아주 치켜세워주는 호족들을 총애하는 한편 육손이나 우번을 한편으로는 심기 불편해하는게 있었을겁니다. 특히 외부인사와 사병집단으로 차별하는 근거의 기록이 보입니다. 제갈각이 단양을 산월족을 잡고 안정화 하자 손권은 나중에 후계자 보좌시킬려할때 망설였다는걸 보았을때... 흠..
흔히들 놓치는 부분이 손권은 정복군주가 아닙니다. 정복군주의 최대 베네핏은 압도적인 힘입니다. 이부분은 형인 손책이 해당되죠. 손권은 기존 개척지를 상속받은 입장인겁니다. 이는 오나라와 같이 호족이 득세하는 곳에서는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단순히 조조의 형주정벌때도 생각해보면 우리가 알고있는 군주제의 의견과는 전혀 다른 '항복'일 주장하고 있죠. 항복은 곧 본인이 모시는 군주의 몰락인데 그것을 언급했다는 것은 손오는 조조가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과 더불어 호족의 자기보신의 성격이 짙었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손권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기를 땅이 필요했고 그것이 형주였다는 것이지요. 여러가지 사건으로 형주를 손에 넣었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최대 수훈자 중 하나였던 여몽이 급사해버리고 말죠. 여몽은 대호족이 아니였습니다. 그런데 그 뒷일을 맡은 사람은 대호족 육손입니다. 호족에 대해 탐탁치않아했지만 능력과 결과로 중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추가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능력있고 덕망있던 후계였던 손등이 사망합니다. 아마 여기서 곪았던부분이 터졌을꺼라 생각됩니다. 과연 내가 죽고난 이후 다음 황제는 대호족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손권이 기획한게 이궁의 변의 시작 3남 태자와 4남 여지 였을 듯합니다. 그런데 손권의 생각과는 달리 3남의 능력이 굉장히 모자랐고, 4남도 딱히 능력이 있지는 않았죠. 그리고 웃기게도 3,4남도 본인들의 능력이 아닌 호족들의 핸들링 대상이 되어버린 것을 깨달아버린 손권은 '에이 C8! 어디까지 개판치나 보자' 하는 마음으로 보고있다가 실망해서 싸그리다 쓸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생각을 주저리주지리 썼는데 결론적으로는 손권은 오랫동안 호족의 등쌀에 싸워왔고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기회를 노려왔으나 마지막에 결국 반쯤 실패했다. 정도로 생각하는 사건이 이궁의 변입니다.
단순한 호족정리를 위한 쇼였다고 보기에는 그것 때문에 아들 2명이 죽어나감. 심지어 호족정리의 가장 큰 이유는 권력 집중에 의한 중앙집권화인데 그걸 행했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음. 결국 이건 자동차를 달리기 위헤서도 구경하기 위해서도 아닌 밴치프레스 용도로 쓰기 위해 사는 것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인거임. 차라리 막내아들을 총애했다고 보는게 맞는 거 같음. 이성계도 그랬고 이런경우는 많음. 공이 있는 거랑 누굴 좋아하는게 꼭 동일하진 않음.
노망은 절대 아니었다고 봄. 분명 자기 뒷생각까지 하면서 계산 해서 벌인 후계자 정리작업임. 성공하면 태종각도 볼 수 있었고 근데 대충 공신세력 완벽히 정리하기 전에 죽어버렸고 그나마 손량이 곱게 즉위했으면 절반의 성공이었는데 손침이라는 변수가 터져버리고 그러다 우야무야 손호가 즉위해버려서 진짜 망가져버린거. 아 손호를 손패랑 헷갈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