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명의 읍참마속에 대해 여러 문헌의 글을 당시 상황과 문맥에 맞춰 개인적 추측으로 한번 쓰 봅니다 - 마속은 왜 산의 고지로 갔을까? 중국의 고대병법은 - 천문 지리를 통달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제갈량은 마속의 병법 능력을 인정하여 --- 둘은 밤낮으로 병법에 대해 토론했고 천문 - 지리를 달달 외우고 제갈량에게 인정받은 마속도 당연히 물이 있는 곳에서 군진을 쳐야 한다는 것은 상식인데 --- 마속은 왜 물이 없는 산의 고지로 향했을까? 인물 백과사전이나 삼국지 사료 번역본 등 번역해 놓은 여러 옛 문헌 등 구절에 일률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멀쩡한 길목 대신 산 위에 진채를 꾸리는 바보짓을 한다 산 위의 마속군은 포위되어 물줄기와 보급로가 끊겼고 --- 등등이 해서 참패하고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한 명령불복종으로 참형당한다 이런식으로 서술된 글을 많이 보게 되는데 병법에 통달해서 제갈량에게 인정받은 마속이 --- 병서 병법 --- 지리의 가장 기본인 산의 고지에 식수가 없는것을 뻔히 아는 마속이 굶어서 탈수로 죽을려고 --- 세살배기 애도 안 할 -- 산의 고지로 가는 죽을짓을 한 마속이 정말 바보일까? 만일 산 정상 고지에 물만 충분했으면 충분히 장합군을 버티고도 남을것 같은데? - 고지가 험난해서 올라오지도 못하는 장합군 그럼 제갈량 명령을 불복종해서 까지 위군을 충분히 방어해낸 -- 마속은 죽여야 하나? -- 상을 줘야 하나? 중국은 춘추전국시대 부터 수백년 동안 손자 오자 기타 온갖 병서 병법이 군대의 정식 지휘이론으로 확립되고 말하길 최전선의 군지휘관 (사령관)은 최일선에선 황제의 명령도 무시하고 오직 가장 상황에 적합한 ( 선조치후보고 )로서 지휘관이 군대를 이끈다는게 춘추전국시대 수 백년 전부터 확립된 군사사상 이론으로 정립되고 황제도 인정한 군지휘의 핵심사상인데 최일선의 군지휘관의 행동을 - 현장에 가 보지도 않은 제갈량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명령불복종으로 처형? - 제갈량이 현장이 어떤 상황인줄 알고?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 말 아닐까요? 1차 북벌시 기산 방면으로 나아가면서 위나라의 (후방)양주와 농서 방면 병력과 - (전방) 장안 주변의 병력으로 부터 앞뒤 협공 당하지 않기 위해 - 촉군은 지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정 방면에 방어 병력을 주둔시켜 위의 양주와 옹주 지역을 촉의 영토로 먼저 안정화 시키려 하였다 (가정이 양주 옹주의 거의 중심에 해당하는 지역에 위치함 ) 이 중요한 임무를 제갈량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력이 전무한 초짜 지휘관 마속에게 주어서 가정으로 가게한다 이에 위는 당황하지 않고 명장 장합에게 5만 병력을 주어 급히 막게 했고 - 장합은 당연히 양주와 옹주의 중심적인 위치인 가정 방면으로 병력을 먼저 진군하게 되고 마속도 이 소식을 듣게 된다 위의 5만 정예병을 마속의 수 천 병력으로는 도저히 싸워서 버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당연히 촉의 본대가 와야 된다 옛 문헌이나 사료등에 제갈량이 마속에게 여러 부대를 감독하여 선봉에 서도록 하면서 장합과 가정(감숙 장랑)에서 싸우게 하였다. 이런 구절이 많은데 이런 구절은 말이 안됨 장합군이 기병 보명 총 5만의 최정예 병력인데 --- 촉의 마속군 5천여 병력으로 선봉에서 맞서 싸워 격퇴하라고? - 거기다 초짜 지휘관 마속에게? 거의 위군이 촉군의 10배의 병력인데? 맞서 싸워 격퇴해? 이런 명령이 가능하기나 한가? 읍참마속 당한 마속이 그렇게 위대한 군략가인가? 그렇다면 제갈량보다 5배 곱은 나은것 같은데? 마속군은 제갈량 본진이 옹주 양주 지역을 공략 안정화 시켜 확실한 촉군의 영토로 편입할 기간 동안 위나라 군의 후방 전방의 불시에 침입할 수 있는 길목 거점을 가장 중간에서 --- ( 점거해서 방어해주는 성격의 군 ) 이라고 봐야 됨 공격해서 격퇴하는 임무가 아니고 촉 본대의 --- 제갈량 조자룡 위연 오의 등 촉의 최고위급 장수들이 ---- 촉의 영토 최접경 지역인 양주 옹주 2주를 공격 탈환 해서 -- 각 지역의 촉의 영토 - 촉의 주민들로 개조 안정화 시키는 기간동안 마속군은 이 촉의 본대가 위나라 군으로 부터 앞뒤 협공 당하지 않도록 방어거점이 되어주는 역활 그렇기에 본대의 최고위급 장수들이 병력을 각자 2-3만명씩 가지고 옹주 양주 사방으로 공략하러 나갈 동안 -- 성이나 거점에서 방어만 할 --- 방어거점 지역에 파견 나갈 마속군은 겨우 수천명의 병력만 줘서 보낸 거임 ( 그래도 중요한 임무 임에도 불구하고 ---- 거기다 제갈량이 병법적으로 꾀 신임하는 검증되지 않은 쪼차 지휘관 마속에게 ) 마속은 생각한다 - 촉 병력 10배의 위군 장합 정예군을 촉의 본대가 올 동안 어떤 수단으로 또 어떤 진형으로 버티어 내야 되느냐? -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산 아래 평지나 작은성에 쳐박혀서 맞상대 해서 버틸수 있기나 한건가? - 불가능 험준한 산의 고지 8부 - 9부 능선 즈음에 진형을 유지하면 병력수가 꾀 차이가 나도 얼마든지 버틸수 있다 몇 배의 병력으로도 튼튼한 성을 공략하기 힘들 듯 - 산의 고지 또한 진형을 잘 쌓으면 마찬가지다 그럼 산의 고지에서 촉의 본대가 올 때 까지 버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마속이 생각하기에 물과 군량미만 충분하면 촉군 본대가 올 때 까지 충분히 버틸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8부 - 9부 능선 고지 즈음에 웅덩이나 식수가 될 흐르는 물이 있느냐? 마속은 부하를 불러 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어느 지점까지 물이 흐르는지 알아보게 했다 마속으로 부터 이 임무의 절대절명의 중대함을 ( 심각하게 - 고지 받지 못한 ) 부하는 온갖 잡풀과 험악한 계곡을 -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벌레 물리고 이런 저런 상처를 입으면서 - 3부 - 4부 능선 즈음까지 계곡을 타고 올라가다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서 내려와 놓고는 마속에게 8부- 9부 능선 고지 즈음에 까지 물길이 ( 이어지는것 같다고 추측성 ) 보고를 하게 되고 마속은 부하의 이 말을 듣고 산의 고지로 가기로 한다 이런 부하를 추론 하게 된 이유 -- 아래에 서술했듯 후에 마속군이 퇴각 탈출 과정에 군대의 진법이 아닌 최고지휘관 마속 부터 1인 개인으로 각자도생 출행랑치다 장합군에 거의 전부 몰살당하는 행태를 보아 ----- 산의 험난한 계속 고지로 물 찾으러 간 부하도 대충대충 했다고 추론함 이때 부하가 허위 보고를 했느냐 하면 이것도 좀 애매하다 3부 - 4부 능선까지 겨우겨우 올라와서 계속 올라가기는 너무 힘든데 -- 가기도 싫고 -- 눈대중으로 대충 보니까 물이 흐르는 계곡이 어느 정도 고지까지 길이 나 있는것 처럼 보인다 그래서 부하 또한 산 어느 정도 쯤 갔더니 - ( 마속에게 자기 몸에 상처나고 고생한 것 이리저리 보여주면서 ) 흐르는 계곡이 고지 쪽으로 쭉 나 있는것 같다고 성심성의껏 대답한다. 지형이 행동하기에 번잡하고 - 기동조차 번거로웠기에 --- (왕평이) ---- 거듭 말렸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서 산의 고지에 이르는 길이 엄청 험난한 것 같음 - 험난하면 대신에 고지를 점하고 적의 대군을 막기에는 훨씬 쉬울 것임 마속이 생각하기에 이런 지형의 고지에 물만 있다면 위의 장합군 별것 아냐? 그런데 막상 고지 쯤에 도달해서 보니까 정상 부근의 물은 말랐거나 거의 100여 명도 충족할 수 없는 적은 수량의 물이라서 수천명의 병사가 마시고 밥짓고 먹을 정도의 양이 되지는 않음 그렇다고 이제와서 내려가자니 이미 위의 장합군이 물길이 갈라져 흐르는 주요 요충지에 병력을 배치해서 진형을 짜고 점거하고 있는 중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상황
이때 왕평은 결단을 내려 마속에게 지금이라도 급히 산 아래로 내려가서 불리하더 라도 아직 정비되지 않은 장합군과 대척할 수 있는 방어거점을 마련할 것을 재촉하지만 겁먹은 마속이 듣지 않고 산의 고지에서 버티자 어쩔수 없는 왕평도 마속을 재촉하여 독자적으로 1천여명의 병사를 따로 할양 받아서 산의 아래 부족해도 어느 정도 식수가 해결되는 곳에 거점을 마련했다고 봐야 됨 결국 마속군은 언제 올지 모르는 촉군을 기다리다 앉아서 굶어 죽을순 없어서 위군을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함 마속은 왕평에게는 천 여명의 적은 병력을 주고 - 마속 자신은 5 천여 대부분의 병력을 갖고 2 갈래의 방향으로 탈출하기로 함 - 왕평군과 마속군 각자도생 - 어떻게 보면 마속은 왕평에게 위군이 몰리기를 기대하면서 이용해 먹은 측면이 있음 어떤 기록에는 마속이 병력을 놔두고 혼자 도망을 가다 잡혀서 참형을 당했다 이런 기록도 나오는데 혼자 도망을 갔다기 보다는 - 지휘관과 병사들이 서로 각자도생 살려고 탈출하다 보니 군대의 진법이나 진형에 따른 탈출이 아니고 이른바 각자 1인 출행랑이 되어 버려서 그런 기록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됨 결과적으로 군대의 진법에 따른 군진없이 탈출하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장합군에게 몰살하게 됨 여기에서 유비가 제갈량에게 충고했던 --- 마속의 허장성세 - 행동보다 말이 앞서고 실속이 없음 --- 위험에 처해서 군 지휘관 으로서가 아닌 ---- 공포심에 도망가는 책상물림 백면서생의 전형적인 표본을 보여줌 - 제갈량은 뭘 보고 마속의 군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을 파악했는지 의문이 드는 부분 반면 왕평의 1천 군사들은 왕평의 엄정한 군기에 의한 - 군대의 진법과 진형에 따라 - 위군에 대항하면서 탈출했기에 별다른 병력의 손실없이 퇴각할 수 있었음 퇴각 도중에도 마속군의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던 병력도 같이 수습해서 퇴각함 한편으론 대부분의 병력을 소지한 마속군에게 장합군 대부분이 몰려가서 왕평군이 수월하게 퇴각할 수 있었는지 모름 (이것은 나의 추측임) 왕평을 이용하려다 마속 자신이 당한 꼴 이랄까? 삼국지 번역본 -- 인물 백과사전이나 중국 역사서 번역본 같은데에서 --- 장합군이 수로를 끊어서 마속군을 탈진시켜 대파했다 이런 구절이 나오는데 물이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흐를수는 없음 ( 고지대에 있는 수 천 명이 한꺼번에 흐르는 물을 퍼서 주변에 계속 뿌려버리거나 물량을 막대하게 써 버림으로써 ) (물이 저지대로 흐르지 않게 ) - 고지에서 흐르는 물을 끊을 수는 있지만 - 저지대의 위군이 고지대의 촉군을 향해 수로를 끊는다는 말은 적절하지 않은것 같음 아마 산 아래 2부 능선이나 - 3부 능선 쯤에 많은 물이 흐르는 시초가 되는 지점을 장합군이 점거하고 있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음 - 마속이 읍참마속을 당한 이유? 선제 유비의 유언으로 직접적인 충고까지 들었는데도 귀담아 듣지 않은 제갈량 자신의 사람보는 - 인재를 보는 눈이 없는 그러므로써 가정에서 헛된 수천명의 병사들의 생목숨을 잃어버린 자책의 눈물 - ( 읍참 ) 마속을 죽이기 싫어 아까워서가 아니고 여기서 ---- ( 마속의 죄명 ) 제갈량의 명령불복종이 아니고 - 1. 마속의 최일선 지휘관의 재량으로서 (선조치후보고 )로서 산의 고지에 ( 식수가 ) 충분한지 두번 세번 확인해서 검증하지 않고 불성실한 부하의 말을 덜컥 믿어버린 직무태만 - 직무유기죄 ---- 2. 퇴각함에 있어 군진에 따른 퇴각이 아니고 각자도생 1인 출행랑 해 버리면서 군의 지휘권을 와해 해산시켜 버린 군통수권자로서의 직무유기죄로 목베이는 참형을 당했다고 봐야 됨 마속과 같이 탈출하던 장휴, 황습, 이성장, 이맹 등 부장들도 같이 처벌받거나 강등 당함 여기에 정사삼국지의 저자 -- 마속의 참군이었던 -- 진수의 아버지도 머리가 빢빢 깎이는 처벌을 당함? - 당시는 머리 깎이는게 무서운 벌 - 사회적 낙인 인가 봄? 그에 비해 병력 손실 없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던 마속군의 병력도 같이 수습하면서 군대의 진법에 따라 퇴각한 왕평은 상을 받고 진급도 함 장합군도 왕평군의 진법을 가벼이 보지 못해서 추격까지 하지는 않음 그렇다면 이렇듯 ------- 마속의 죄명은 ----- 또렷한데 장완 이막 상랑 등 ---- 촉의 중추가 되는 고위간부들은 ------ 왜 마속을 죽이지 말자고 ------ 구명운동을 했단 말인가? 촉군의 10배나 되는 위 장합군의 기병 보명 5만의 최정예병에 맞서고 있는 마속군에 당시 촉의 본진인 제갈량 조운 위연 오의 등 촉의 최고위급 장수들이 위나라군에 각개격파 당하고 누구도 마속군을 구원하러 가지 않음 이것이 당시 1차 북벌의 모든 패전의 책임이 꼭 마속에게 있다고 할 수 없는 이유임 모두의 연대책임 그런 이유로 제갈량도 회군후 전공평가에서 3계급 내린 우장군으로 황제 유선에게 스스로 강등 청원하고 모든 참전 고위 관료들도 강등당함 마속이 산의 고지에 식수가 정확히 충분한지 확인하지 않은 직무태만은 감형으로 용서해 줄 수 있을지 몰라도 병사들이 군인이 아닌 1인 개인으로서 각자도생하여 최전선에서 뿔뿔이 흩어져 도망간 행위 즉 군 최고지휘관이 군의 통수권을 팽개치고 스스로 각생하여 군을 와해한 행위는 군법에 의한 참형밖에 없음 아마 이때 마속을 참형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2차 북벌 부터는 없었을 것임 어느 나라 군대에서 조금 위험하다고 -- 최고지휘관 부터 도망가 버리고도 --- 처벌받지 않는다면 이미 군대라고 할 수 없는 유명무실한 상태일 것임 마속이 가정 패배후 오나라 망명 실패설 탈영설 촉 배반설등 여러 이설이 난무하는데 마속이 정말 저런 반역 행위들을 했다면 마속의 다른 여러 형제들과 마속의 아들들이 마속의 참수 후에도 형제들은 여전히 나라의 신임을 받고 인정받는 간부직에 계속적으로 기용되고 아들들은 여전히 제갈량이 후한 보호속에 있지 못했을 것임 이상으로 마속의 읍참마속에 대한 여러 문헌의 자료들에 나와 있는 문맥과 상황등에서 개인적으로 추론해 본 글입니다
이런 ( 마속의 사례 ) 는 이후 제갈량이 사람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일국의 재상 정도 되면 신경 쓰지도 말아야 되고 ---- 알아야 될 필요도 없는 부분까지 --- 일일이 직접 본인이 챙기고 확인하고 잘못은 또 직접 손수 처벌하고 -- 제갈량 본인이 직접 사소한 처벌의 죄에 해당하는 --- 태형 4대 - 5대라도 아랫사람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때렸다고 함 태형 100대를 때리는 중형 같은 경우 -- 아마 제갈량은 이를 본인이 직접 시행한 이후 한 며칠 팔다리 온 몸에 경련이 와서 앓아 누웠을 것임 이런 타인을 (조정의 중신 - 동료들을 ) --- 믿지 못해 본인이 직접 확인하고 행하는 --- 이런 무리한 육체적 정신적 업무의 과중량은 --- 간간히 피를 토하게 하는 등 제갈량 본인의 목숨을 단축하게 되고 54세에 오장원에서 과로사 하게 됨
@@hgl2938 오래전 댓글이지만 다른의견의 답글달아봅니다 장안 즉 동쪽에서 가정으로 들어오는 길목은 넓고 산세가 완만했습니다 조조가 마등과 한수를 제압한 후에 관동에는 전쟁이없는 평안한 지역이였습니다 그후 침략하게 된것은 위나라가 아니고 촉이 였구요 이는 당연히 지역민에게 촉은 침략자, 정복군대였으므로 지역민과 충돌 및 지지를 얻기에는 무리가 있었을것이고 적은 군사로 이런 넓은 길목의 지역 성에서 수비를 하기에 무리가 있었으리라는 사실도 마속은 느꼈을것입니다. 이때 마속은 남산으로 올라가 수비를 준비합니다. 가정에는 북산과 남산사이로 평탄한 길이 놓여져 있으나 물은 북산 앞으로만 흐르고 형주에서 자란 마속은 물에 대한 큰 걱정이 없었던것으로 추측이 됩니다. 형주는 비만 오면 홍수가 나고 물이 풍부한지역에서 이주해온 마속의 실수아니였나 추측이됩니다. 능선끝까지 조사를 하지않은 부하의 실수라기보다 형주에서 이주해온 마속의 생에서 답을 찾는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동쪽에서 장합과 군사들이 타고 들어온 길이 완만한 북산과 평탄한 길목일거라 예상한 마속이 남산으로 올라간것은 마속으로서도 어쩔수없는 선택이였나 싶기도합니다.(남산도 북산과 마찬가지로 완만한 산입니다) 지역민의 민심도 얻지못한채 적은수로 몇배의 적을 넓은 길목과 수성으로 막기에는 무리가있을것이라 생각한 마속은 남산으로 올라갔으나 형주가 아닌 다른지역에서의 물의 중요성을 깨닫지못한것이 패배의 요인이라 생각이 듭니다. 마속의 퇴각이나 후의 처벌에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참신하고 그럴듯한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지역의 특색이나 지형을 모르시고 억측하신 것들이 많이 있지않았나 하는 생각에 답글남깁니다. 역사는 서로보는 관점이 다르기에 재미있는것 같습니다.선생님의 댓글 한자한자 읽어보며 다른 시선에 대한 역사공부를 많이 하고갑니다.
뇌피셜이긴 하지만 병법을 조금 알면 마속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가정에 지킬수 있는 좋은 성이 있었으면 거기 틀어박히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성이 없었거나 부실했으면 밖에다 진을 쳐야됩니다. 그럼 평지냐 산지냐 두 가지인데 당연히 촉의 주력군이 아닌 마속군이 5만 기병+5만 보병의 장합군을 평지에서 맞는다는건 미친짓이니 산을 선택하는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닙니다. 마속이 산에 진을 칠때 장합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1. 지나쳐서 촉의 본진을 치러 간다. 2. 대치해서 기다린다. 3. 대치하돼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4. 후퇴한다. 여기서 1번은 장합이 배후가 노출되니 선택할 수 없는 옵션입니다. 앞에서 공명군과 대치할때 마속이 후방으로 오면 포위당한 군은 전멸될 수 도 있는 상황입니다. 당연히 백전노장의 장합이 1번을 선택할 가능성은 없습니다. 4번을 선택하면 마속입장에선 땡큐지만 가능성은 없고 남은건 2,3번입니다. 2번은 마속 입장에서는 좋은 결과입니다. 시간은 촉의 편이지 장합의 편이 아닙니다. 공명군이 서복쪽을 평정하고 가정으로 들이닥칠거니까 그때는 장합이 양쪽에서 협공당하니 퇴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마속은 3번, 장합이 산을 포위해서 적극적으로 공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고 자신의 군사로 장합을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공명군이 북서쪽을 평정하고 올때까지 버틸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병법에도 위에서 아래를 치는게 휠씬 용이하고 산지 전투에서 기병은 무용지물이고 위에서 쏘는 화살이 위력을 발휘하니 목책 같은 것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방어를 하는 일종의 산성 방어전을 생각했겠죠. 마속의 생각이 옳았다는건 장합이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어느정도 알수 있습니다. 시간이 장합편이 아닌데도 장합은 적극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보급을 끊고 포위만 하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물과 식량 등의 보급 문제는 장수의 기본중의 기본으로 마속이 그것을 몰랐다는 건 말이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분석해보면 결론은 하나입니다. 괜찮은 성이 없으면 절대 마속군으로 장합군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마속은 공명이 서북쪽을 평정하고 가정으로 올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것이고 보급이 원활하지 않은 산에다 진을 친것은 그때까지만 버티면 공명군이 구원하러 온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도 사전에 공명과 얘기가 된것이겠지요. 실수가 있었다면 물길이 끊어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생각보다 버틸수 있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을 놓친 것, 그리고 정보 전달의 실패가 원인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공명군의 구원이 생각보다 늦어졌다는 것입니다. 장합은 백전노장의 장수 답게 물길을 끊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고 공명군과의 정보 전달을 차단하고 공명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정보 전달을 받아 포위를 지속할 수 있는 시간과 마속군이 무너지는 시간을 정확히 계산한 것이겠지요. 전쟁사를 보면 물길을 막아 모아놨다 갑자기 터트려 공격했다는 것이나 물길을 막아 상대를 식수 부족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결과만보면 굉장히 쉬워보이나 쉽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아니고 시도한다고 모두 성공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인 중에 가장 자극적이고 누구나 쉽게 납득되는 방법이니 후대에 그것이 주요한 원인으로 회자되는 것이지요. 살수대첩 등... 결국 1차 북벌이 실패한 원인은 첫째로 가정을 지키는 것이 전략의 가장 핵심이었는데 공명은 서북쪽을 평정하는데 집중했고 중요한 장수와 병력을 가정에 배치하는 것에 소홀히 했다. 물론 제가 모르는 서북쪽 평정의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요. 두번째는 공명군이 서북쪽 평정이 늦어져서인지 마속이 장합과 대치하고 있을때 공명군의 본진 또는 별동부대로 마속을 신속히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정보 전달이 지금처럼 신속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첩보와 신속한 정보 파악에 실패했을 수 도 있습니다. 가정이지만 이런 방법이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당시 정황을 알 수 없으니 결과론적인 얘기입니다. 1. 위연군을 진창을 공격하는 위장군( B루트)으로 활용한다. 2. 조운군을 서북 지역을 평정하는 역할을 맡긴다. 3. 공명군의 본대가 가정을 지키며 위의 본대(장합군)을 상대한다.
재미있게 다양한 해석 잘 들었습니다. 마속에게는 세가지 시나리오가 있었네요.1. 나를 지나치고 가면 앞뒤로 협공, 2.나를 치러 오면 유리한 지형을 바탕으로 섬멸, 3.그리고 상대가 나를 치지도 않고 지나치지도 않고 말려죽인다. 3번 최악의 시나리오가 본인에게 닥쳤네요. 심리적으로 요즘 저도 주식같은 것을 하면 마속과 같이 나에게 유리한 정보와 시나리오로 생각하고 판단/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마냥 마속을 어리석다고 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사람은 극한의 상황, 판돈이 커질수록 판단력이 흐려지는데 그러한 심리를 깊게 꿰뚫어 본 좋은 주석 같습니다.
2천년 전 지형임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2천년이면 강산이 변해요. 그리고 장합전, 왕평전, 제갈량전을 봐도 성을 점거하지 않은 것을 지탄하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성의 민심이 어땠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성에 들어가는 것이 제갈승상의 명령이었고 또 점령지의 성은 강제로 점거하는 것이죠.
틀린 말자체는 아닌데 쳐들어온 쪽에 좋았던 민심은 당시에 어디에도 없었음 사실상 강제적이었고 백성의 곡식을 수탈도 했었으니 당연한건데 그래도 성을 점거하는게 맞았다고 보고 무엇보다 제갈량의 명령이었는데 군대라는 체계에서 상급자 지시를 무시하고 자기 맘대로 했는데 그로 인해 말아먹었단건 커다란 책임임
@user-pb4ff4ij2n 거기다 원래 선봉장으로 위연 같이 유능한 장수들이 천거 되었지만 제갈량은 어째서인지 독단으로 마속을 택했습니다. (자기라인으로 젊은 인재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함이였을까요?) 저 당시 조운도 참패는 면했다지만 패배를 했를 했음에도 마속과는 다른 처벌을 받습니다. 조운은 사실상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되는 정도였는데 이유는 마속은 성을 지키라는 명을 어겼던 것이죠. 명을 어기고 패한 장수는 목숨을 부지 할 수 없던 게 당시의 일반적인 상황이였으며 무엇보다 마속은 제갈량이 직접 뽑은 선봉장이였음으로 마속의 처형은 어쩌면 제갈량 자신에게 내리는 벌이였다고도 볼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속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면 휘하 장수들의 불만을 잠재우기도 쉽지 않았겠죠.
관련 유튜브 영상중에 현지에 사시는 분이랑 인터뷰 한 것을 본 게 있는데 그 중 기억이 나는게... 촉의 군대가 넘어온지 얼마 안 되었고 가정의 민심은 촉나라 편이 아니였기에, (왜나면 전쟁이 일어나면 일반 백성들은 고생하잖아요). 그리고 촉은 농서지방의 민심을 자기편으로 끌어 안아야 했고 그것을 잘 아는 마속이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길목에 군대를 배치 하면, 가정에 거주하는 친 위나라 세력들이 장합의 군대에 호응해서 안 밖으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험, 그렇다고 길목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쫒아내고 장합의 군대를 맞이하자니, 농서의 민심을 잃는 다는 것, 그래서 마속은 장합을 격퇴 한 후에 농서지방의 민심까지 아우르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살지 않았던 산으로 올라가지 않았나... 이런 이야기도 있더라구요.
저당시 선봉부대란 의미를 잘모르는군요.선봉부대는 소수의 날센 기병과 활과창같은 무기로 치고빠지며 적을 유인 혼란에 빠뜨려 사기를 꺽는데 있습니다.본대는 보병 공성전이나 성채나 진을치고 대규모 전투를하는데 특화되었구요.가정의 마속은 선봉부대로 본진은 주요거점 성들을 공략중이었죠.왕평이 적은 군사로 주작대로에 질서있고 위엄있게 배치하자 대군을 이끌고온 지원군 장합이 유인책이나 매복이 두려워 피했으나 산에 진을친 마속을보고는 어리석은자라 했다네요
오따 제갈량의 첫 북벌의 실패의 이유는 마속의 참패가 명백한데 북벌의 실패가 제갈량의 전략의 안좋아서였다하고, 반대로 위연의 전략은 좋은 전략이고 성공했을 전략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죠. 대군을 거느린 지휘관이 가장 조심해야할것은 눈앞에 쉽게 취할 수 있는 열매가 보는 기책인거죠. 때로는 기책이 엄청난 효과를 보기는 하지만 그런것들은 소수의 병력일때나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것이죠.
@@개망함-t1p 위나라는 전쟁에서 한번 패한다고 나라가 망하지 않지만 촉나라, 즉 제갈량은 한번의 승패가 나라에 사활이 직결되는 상황이라 입장이 다르죠. 또 위나라가 험한 촉나라를 정발하기 위한 방법이 그게 유일하다고 생각해서 그런것이고, 반대로 촉이 위를 공격하는 방법은 엄청나게 많았죠. 그 중에 가장 안정적인 방법을 선택한것이구요. 단순한 사령관이 아닌 제갈량이 사실상 촉나라 그 자체였으니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속의 보좌관 참모...왕평이 있었죠...왕평은 산위에 진을 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반대이유와 결행이유가 나올텐데요..그 내용은 저도 잘 모릅니다만..그 내용안에 마속의 의도를 간파할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요? 왕평이 반대했다면, 반대이유가 있을 것이고요. 그 반대를 무릅쓰는, 마속의 의도도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실제 가정 답사 영상을 보고 다시 생각했는데요. 가정을 보니 산 자체가 너무 완만한 뒷산느낌입니다. 애초에 검각처럼 길목이 좁은 지형도 아니라 길을 막는 것이 힘든것처럼 보여지더군요. 또한 그 분 영상에서 나온 분석을 보니, 가정 지역의 주민들은 촉군에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가정에 남산과 북산이 있는데 수자원이 있는 곳의 산이 아닌 없는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친 것은 마속의 실수일것이라고 추측을 하더군요. 마속의 경우 형주 출신으로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의 출신으로 , 당시 중국은 날씨가 계속 건조한 시대이며 가정지역의 경우 엄청나게 건조한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 부분을 몰랐기 때문에 수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으로 추측하더군요
다른 지도와 사서의 기록을 교차검증해보면 지키기 좋은 길목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길이 넓어도 성을 활용하고 물 마실 수 있고, 불편한 산에서 대비하는것보단 낫습니다 가정 주민이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북산에서도 장합이 포위한다면 물을 구하기는 어렵습니다 마속의 출신 관련 이야기는 재미있긴 합니다
@@권하랑-b3z 주민이 호의적이지않건말건 성을 끼고 싸우는게 유리하다는건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데도 그렇게 안했다는건 분명 이유가 있을거에요. 그리고 성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면 왕평전이나 마속전에 그 내용이 실렸겠죠. 왕평은 산에 가지말자고 했지 성에서 싸우자고 한게 아니니까요.
이 전체적인 판은 마속이 낸 것이고 그래서 그 중요한 자리를 마속에게 맞기고 가장 큰 공을 그에게 주려고 햇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말씀하신 것 처럼 이 이후 제갈량이 뭔가 군사 참모로서의 기발한 능력을 단 한번도 내지 못하는 것을 봣을 때 꽤 가능할 만한 추론이 아닐까.. 제갈량의 잘못된 판단으로 마속과 위연이라는 촉의 마지막 등불이 꺼진거라고 생각.
젊은 마속이 백전노장 장합을 맞아 산으로 들어가 농성하는 전략이 그렇게 나쁜선택은 아닌것 같습니다. 위군이 산으로 흘러가는 물을 끊으려고 할때 산에서 내려오면서 공격을해도 격파하지 못하고 다시 쫓겨올라갈 정도면 평지에서 적을 맞이했다면 더 빨리 무너지지 않았을까요? 마속 나름대로 강력한 위군 상대로 최대한 시간을 끌어보려고 하지않았나 생각됩니다. 급한 장합이 가정을 내버려두고 농서땅을 구원하러가면 뒤를 칠수도있고 반대로 가정을 공격한다면 높은 지형을 이용해 구원군이 올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려는 상식적인 대응이라고 봅니다. 하후연도 한중방어전때 정군산에서 버티다가 전사하지 않았습니까.. 다만 마속과 제갈량의 예상이상으로 장합군이 강력했고 생각보다 빨리 가정이 무너진게 패착이라면 패착이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선봉부대란 적은 병력과 기병으로 상대 본진을 활이나 창으로 쏘거나 유인 매복 기습 혼란을 유도 사기를 떨어뜨리거나 정보를 캐는 게릴라전술부대나 정찰병이라 생각함.가정의 마속은 선봉부대로 얕은 산에다 진을친건 초보적인실수고 왕평부대는 적은 숫자로 주작대로에 질서정연하게 위엄을 펼치자 대군을 끌고온 장합이 유인책이나 기습 매복이 두려워 피했으나 산에진을친 마속을보고 어리석은자라 했다네요
산에 올라가지않는다면,, 오히려 더 빨리 뚫려서 당초 목표(시간끌기)에 더 안좋은결과를 나는것아닐까요,? 어쩌면 애초에 소병력으로 가정방어 자체가 하나의 도박성 계략이었던 것이 아닌지,, 역으로 마속이 말라죽으며 버텼지만, 본대가 오는것이 계획한 일보다 늦어졌다고 볼수있지않을까,, 일부러 반대로 생각해봤네요, ㅎ
물착각은 말이 안됩니다.마속이라고 저 혼자 군대끌고 다닌게 아니죠.물생각을 못한다는건 있을수가 없는 문제입니다.또,제갈량이 천수쪽을 공략했다는건 장기전이라는 뜻입니다.위가 예상하지 못했다면 못했던건 선공이였다는거겠지만.사실상 촉이 천수까지 나오게된 이상 위도 사실 편해진겁니다.그래서 꾸준히 위의 정치상황에 반응하며 위장선공을 하며 뒷심을 키우려한거죠.조조는 항상 위의 정치상황이 가장 불안하다고 엄살을 부렸지만 ,촉이야말로 정치상황이 최악인 나라죠.(제갈량이 위의 사계급세력순씨와 사마씨 등등이 조위 다음의 왕조를 생각하고 있다는걸 알았는지 모르겠지만.제갈량은 위의 정치상황을 알고는 있었던 거 같습니다.마속은 제갈량이 희생시킨거일지도 모르죠.물문제를 인식못해 고사했는게 아니라 애시당초에 그거먹고 떨어져라가 아니였나 싶기도 합니다.사석이죠.)위연의 공략은 건곤일척입니다.모아니면 도지요.진다해도 위연하나와 군의 희생으로 끝날테고,위가 굳이 험한 길가서 먹고 지켜낼지도 불분명한 원정하기도 버겁죠.제갈량은 큰 그림을 그렸지만,위는 무너질 내구력이 아니였고,무너지는 촉의 운명과 함께 끝까지 난세의 마지막을 붙들고 늘어지며 최후의 최후까지 자신의 혼을 불태웠던 것이 내가 삼국지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물 강유랍니다.
@@jydasdfg3688주위에 산이랑 평지밖에 없는데 먼 가정 지형 보긴함? 북산은 물이 있는 대신 지형과 고도가 매우 낮아서 기병이 충분히 돌파할수 있는 위치였고 남산이 그나마 형세가 수비하기에 좋아서 기병 상대로 최선의 방법이었음 식수가 없다는걸 파악하지 못한건 물론 실수긴 하지만 촉군이 그 당시 가정지역 지리를 모르는 상태로 원정을 떠난걸 고려하면 이해 가능한 판단임
제갈량의 1차북벌 전술은 매우 뛰어났을수는 있으나 전략적으로는 제갈량의 실패이다 마속을 가정에 보냈을때 그 가정이러는 곳의 지형은 매우 낮은 산이었으며 엄청나게 믾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길목을 지키도록 했어야했다 또한 마속과 전투한 위니라군사는 백전노장 장합이었다 필시 마속이 길목을 지켰다 할지라도 가정의 남산은 너무 산이 낮아서 장합이 오히려 신위에 올라가 공격하면 더 위험할수 있는 지형이었다 또한 길목이라 하지만 험준한 길목도 아니고 주위가 거의 평평한 길목이었기에 마속이 길목을 지킨다 할지라도 장합과 거의 평지에서 전투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곳 가정의 지형을 살펴본다면 백번 이해할 것이다 적은 수의 병사를 거느리고 장합같은 백전노장을 상대할 마속으로는 역부족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필시 제갈량의 전략실패로 봐야한다
가정 길목에 성이 하나 있는데 이 지역이 농서와 관중을 연결하는 곳으로 요충지며 성이 다소 견고하다고 하던데, 소수가 다수를 막기 위해선 성을 끼거나 험한 지형을 끼고 있어야 잘 막을 수 있음, 원래는 길목의 성을 우선 점령하고 성을 끼고 길목을 지켜 다수의 지원군을 차단한다는 계획이었던거 같음. 그런데 여기서 2가지의 변수가 생김. 첫째는 성의 수비가 예상보다 견고해 초단타로 점령이 어려웠고 둘째는 장합의 지원군이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거란 소식이 들려옴. 즉 시간에 쫒기는 상황이 되어 버림. 이 지경이 되면 3가지 선택사항이 나오는데 첫째는 본 계획대로 지원군 오기전까지 어떻게든 성을 먹는다 즉 계속 공성한다. 둘째는 성은 못 껴도 길목에 진을 치고 막을 준비를 한다(목책, 함정및 야전) 셋째, 확률적인 가능성인 공성보다 성의 효과를 볼수 있는 험지에 자리를 잡고 다수의 지원군을 막는다. 다음은 위 각 안건에 대한 위험성입니다. 첫째는, 지원군 오기전까지 공성실패시 다수의 적을 막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에 바로 후퇴해야 하는데 길목을 빼앗기거나 성과 밖에서 적에게 역공을 받음(기병이 강해 추격도 빠름) 둘째는 공성안하고 그 시간에 적을 맞을 준비를 하고 평지에 진을 친다는 건데 실제로 길목이 넓어(북산도 평지수준) 병력을 산개해서 배치해야 하는데 다수의 적을 상대로 병력을 산개할 수는 없고 뭉친다 하더라도 평지라 포위를 당함, 그리고 위군은 다수에 북방군은 기병이 강하고 야전에 능숙함, 시간은 조금 벌 수 있겠으나 언젠가는 밀릴 확률이 높음 셋째는 험지에 진을 치면 지키기도 좋고 섣불리 공격을 못하기에 적의 발을 묶을 수 있음 설사 들이대더라도 (위에서 아래로)파죽지세로 때릴 수 있음 근데 보급이 어렵다는 문재가 있음 즉 식량과 물의 조달이 관건이 되는 것임 여러가지 사정을 고려해본 결과 식량은 넉넉하게 챙겨온거 같은데 물의 확보가 승패의 관건이 됨, 북산은 평지수준이라 지형적 이점이 없고 남산이 험준하니 좋은데 물이 없음, 그럼 계절이 중요한데 계절이 겨울은 아니고 형주와 익주지방에 비가 자주오는 우기가 시작되는 계절임(피셜), 즉 비 한번만 오면 최대한 저장해서 쓰면 되는 것임, 습하고 비가 잘 오는 형주나 익주에서 크고 자란 마속은 여름에 북방처럼 더럽게 비가 안오는 이세계가 있다는 건 상상을 못 함(북방출신 우금도 남쪽 기후를 몰라서 관우에게 사로잡힌 사례가 있음) 그래서 당연히 한번이상은 무조건 비가 온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최선책을 선택함, 왕평이 반대하자 비가 올 수 밖에 없는 계절이고 기후와 계절은 나보다 모른다고 했을 거임. 결론, 비만 왔으면 최선책이 맞음 비가 안 와서 최악의 수가 됐음
가장 현실적이고 올바른 해석임 실제로 고산성이 있었음 물론 고산성 하나 먹는다고 길목 막을수 있는건 아니었기에 산을 올라간거, 우장군 고간이 고산성을 먹고 기산근처이 위연이 5천군사로 진병중에 지원 가능하게끔 해놔서 충분히 수비가 가능했을거라고 생각한듯 실제로도 비가 왔다면 당연한 촉의 승리였을거임, 식수 해결 + 산 포위와 함께 근처에 불을 질러서 퇴로 차단도 당하지 않았을것 그치만 비가 안 온다는 가정에서 본다면 식수공급 가능하게 평지에 진 치는게 맞았을거라고 생각함
청화수님이 이미 마속에 대한 미스테리와 의구심 추측 사료들 많이 던져주셔서 시청하면서 당시 마속이 왜? 라는 의구심도 나만의 해법으로 생각하게 되네요~ 청화수님만의 탁월한 오픈형 가이드 덕인듯합니다 마속의 죽음은.. 공명이 군 사기를 위해 죽이겠다 호언했고, 결국 마속은 죽었다 라는 그림이죠 저는 직접 베기에는 너무 슬픈 공명에 한 표를 입니다 .. 소심한 공명이 플랜 c 발상도 색다르지만, 사람 기용에도 소심성으로 주도 면밀히 봤을턴데, 마석과 공명은 아무리 봐도 그림이 안어울립니다 개인적인 느낌입니다
@@청화수 네 네~ 역사는 상당히 입체적인 사고가 필요한 연유인지 남성이 보다 더 흥미를 느끼나 봅니다 돌려 말씀드리자면, 뉴스 같이 팩트로 전달받는 것만으로 받아들일 만큼 제게 역사란 퍽 흥미로운 영역이 아니었지만 청화수님 영상 덕분에 그야말로 역사의 참 맛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노동을 겸하는 중에 많은 자료들 융합하여 긴~ 영상 제작 힘드실텐데 역사 사랑의 청화수님 열정 덕에 많은 유익을 누리니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
저는 예전 가정(천)을 가본적이 있어요. 실제 가면 마속이 싸웠던 남산에 유적지도 있고 장합이 동쪽에서 왔던 루트도 확인할수 있지요. 공명이 길 입구를 막으라 했던 곳을 실제 보았는데... 개!!!! 넓습니다!!!! 100명이 지킬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에요... 그냥 졸라 평지입니다. 이런 곳 을 어떻게 길을 막습니까? 마속이 졸라 바보는 아니었기에 산으로 향했던 거지요... 그런데 또 산으로 올라가려니 남산과 북산 두 지역이 있는데 북산은 물이 흐르긴 하지만 이건뭐 말 만 산이지 언덕수준입니다. 남산은 그래도 지형이 어느정도 높은 산악지형의 산이지만 물이 흐르지 않았구요... 이러할때 지휘관이 내릴수 있는 전략은 식구사 있지만 3~5미터 되는 언덕을 포기하고 험난한 산지로 들어가는게 당연시 될수도 있다고 봅니다. 식수는 비한번 내리면 될거라 생각할수도 있구요. 그리고 또 하나의 고난에 빠지는데 왕평이라는 부하장수가 말을 졸라 안듣는다는 거죠... 합심해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이런 말도안되는 전략이 어디있냐 라는 말 을 해대다 내분 직전 까지 빠지게 되는 상황을 연출합니다. 결국 전장은 대패... 남만정벌때도 7종7금의 전략을 건의했던 마속이 정말 바보 였을까요??? 공명이 기산을 점령하고 가정으로 가기 전 한 지역이 있는데 그곳을 뚫지 못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말은 기산, (조위 의지역), 가정...즉 기산과 가정사이의 땅 하나를 공명은 점령치 못하는 상황이었고 장안에서 가정으로 향하는 루트는 4가지 길이 있을 만큼 다양한 루트가 있습니다. 조진이 조운에게 승리하고 가정으로 향했고 장합또 정예군을 이끌고 가정으로 향하는데 이미 마속은 고립된 상태였죠. 다들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제갈량은 정치와 내치에 타고난 인재였지... 군사적인 전략가는 아니었다고 점점 밝혀 지는 바 입니다. 후대에 써진 연의라는 소설에 의해 뻥튀기 된 인물들중 하나였지요... 그러한 부분은 현대 고고학으로 점점 더 많이 밝혀 지는바... 그냥 제 생각엔... 위나라의 국력에 이길수가 없었을겁니다. 그냥 조위가 너무 쎗죠!!!!!!!졸라 쎗다구요. 당시의 위나하 군주가 조예였는데 폭군도 아닌 명군이었습니다. 정치체계 또한 구품중정제가 자리를 완젼히 잡은 변혁기를 거처가는 나라로 탄생했었구요. 더이상 많은 호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던 강력한 군주국가 였습니다. (고구려가 일개 관구검이라는 성주하나한테 멸망당할뻔한걸 보면) 정답은... 그냥 졸라 쎗습니다 ㅠㅠ
문득 이영상을 보고 예전에 장비에게 유비가 성을 마끼고 원술치로 간게 생각나네요 성을 마속에게 마꼈는데 머리는 좋지만 사람다루는게 그렇게 썩 좋지않아 갈등이 생겼고 그걸로 내분으로 빼앗겼다 어떤가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주변 사람이 인정 안해주면 갈등이 생기는건 당연하니...
백전노장장합이 제갈량군대와 싸우러가면서 마속군을 뒤에두고갈수없으니 무조건 마속군을 격파하려했을거고 마속입장에선 오래버티는게 목적이니 우위를 점하기위해 산으로올라가 장합군과 싸울생각이었을거같아요 물은 위에서 아래로흐르기때문에 경계만 확실히 했다면 수원걱정은 별로 하지않았겠죠 장합도 처음엔 고전했을거고 기책으로 수로를 막았다는건 별동대가 마속군 경계를 뚫고 목숨걸고 산위로 올라갔다는건데 그만큼 가정산의 지리를 잘알았던 사람이있었겠죠 결국 마속군이 방심해서 진거지 그 전략은 나름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님 말대로 농서지방을 점령하는것은 공명의 오랜소망이었죠 양주와 병주를 얻으면 공명사후라도 북벌이 쉬웠겠죠. 허나 왜 가정에 굳이 마속을 보낸걸까요? 그렇게 중요한곳이면 당연히 상장군을 보내거나 아니더라도 상대방이 장합이라면 당시 위 최고의 명장인데 누가봐도 상대가 되지않는 싸움입니다. 그리고 마속이 형양사람이라해도 진을 치는데 식수는 제일중요한것입니다. 그것을 간과하고 산에 진을 쳤다면 그건 변명도 안됩니다. 지금것 삼국지를 수없이 읽었지만 오늘 님 동영상을보니 가정의 중요성과 공명의 선택에 참 안타깝네요... 만약 마초가 살아있었다면 농서는 쉬이 얻었을것인데 너무 아쉽죠. 게다가 마속이 도망까지 갔었다면 제갈량과의 친분과 신의도 무시했다는 것이니 더욱 씁쓸합니다. 정말 잘봤습니다.^^
지형은 잘모르겟지만 모식도만 봤을때 만약 산에 숨어있다가 위나라군이 지나가고 산에서 내려와 뒤를 칠 계획이지 않았을까요 길목만 막으면 서쪽만 먹는 형태지만 위나라군이 자나가고 양쪽에서 싸서 싸우면 매우 유리한 상황이라거 생각해서 올라갔다... 이정도로 생각 되는데 첩보같은거 때문에 들통난거를 몰라서 포위 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또 다른 생각도 해봅니다. 마속이 직관적 천재적인 인물이면 이러한 생각으로 올라간게아니면 좀 이해하기는 어려울거 같네요
가정 직접 촬영한 영상 봤습니다. 1. 남산 북산 사이의 길목은 꽤 넓었다. 2. 그 와중에 북산은 동산 수준이라 군사가 넘어올수 있다. = 애초에 작전이 미스였다. 3. 마속이 주둔한 남산은 고지대가 평평했고 시야가 좋았다. 4. 마속은 식수문제를 너무 가볍게 봤다. 비도 안내렸다(기후) 5. 완전한 틀어막기는 안되더라도 식수문제가 아니었다면 꽤나 장합의 진격을 저지했을 법 하다. 6. 어쨋든 작전의 실패였지 마속 등반이 승패를 뒤바꾸진 않았다. 7. 책임은 마속이 지게 되었다. 8.명재상 제갈공명
여담입니다만.. 저 역시 영상중 1차 북진 루트는 좋은 선택이자 촉의 입장에선 유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장안을 직격했다면 위가 무혈입성을 시켜주더라도 1년도 못 버텼을 겁니다. 장안은 곡창지대도 아니었고, 향후 장안 좌우의 견제와 이남의 형주지역의 세력이 커져 오의 시기를 더욱 사게될 것이고, 이북의 위 조정과 친화적인 이민 족까지 촉 입장에선 절대로 지리적 이점이 있는 위치가 아닌 적진 한 중간에 스스로 들어가는 셈이 되는 곳이죠. 말씀대로 촉지역에서 군량 조달은 절대로 힘들었을겁니다. 보급을 위한 부대를 또 나누어야 했을 것이고, 장안에 주둔한 많은 사병의 군량 역시 절대로 못댔을 겁니다. 산세가 준험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많은 양의 보급은 꿈도 못꿀 것이고, 보급이 0순위 과제라는 것을 위 역시 알것이기에 보급로 차단에만 힘을 쏟으면 되었을테니 전략적으로 위는 서너점 깔고 바둑을 두는 셈이었을겁니다. 고로 당시 촉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것이 교역로 개발이었을 겁니다. 남만은 지금의 동남아를 통과해 인도로 이어지는 교역 루트를 뚫을 수 있기에 중요했고, 영상중 C루트 역시 교역로를 염두에 두고 장기간 위를 압박하기 좋은 혈맥점이 아니었을까 생각됩니다. 동탁이 병사를 크게 모아 조정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 역시 교역로 장악을 통해 군비 준비가 용이했기 때문이고, 제갈량 역시 해당 지역을 장악하여 촉의 장기전을 놀려보고자 했을겁니다. 위는 당장 군비 조달에 어려움을 느끼고 이민족에게 무리한 조공을 요구하게 될것이 뻔하고 양세력간 불화가 잦아질 것이며 경제적 고립은 가중 될것이 뻔하죠. 오의 지원(자의적 타의적) 없이는 온전히 독립하기 힘든 촉이 교역로를 뚫게 된다는 것은 동남쪽으로는 국력이 제법 탄탄한 오의 위세력 견제에 종국적으로 날개를 달아 주는 셈이 될 것이죠. 위는 사방에 강적을 두게 되는 형국이 더욱 확연해지게 되는 것이죠. 다시 말해 제갈량의 미래형 국정운영 계획의 첫 발걸음이 될 이 번 출사는 안전하고 미네랄이 풍부한 멀티 지역을 확보하는게 우선이라 생각했을거라 생각됩니다. 사족이었습니다. ㅈㅅㅈㅅ
애초에 C루트를 선택한게 잘못된 선택은 아니었을까요? 속전속결로 장안을 냠냠하고 허창을 공격해서 위나라 심장에 비수를 꼽아야 이기는데... C루트로 농서지역을 확보하고... 가정에서 방어를 한다? 견고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백전노장 장합을 상대로 과연 마속이든 누구든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결국 가정을 실제로 본 마속은 실제 지형을 보지 못한 제갈량의 판단미스라 생각하고 이기기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을거라 생각합니다... 마속이 바보도 아니고 본인목숨 왔다갔다 하는데 물공급도 어려운 산에 진을 쳤을까요?
흐름의 전개를 논리적인 간파로 생각하면 되게 추측이 쉬워질수도 있읍니다..마속이 산으로 갔다..왜? 당연히 성에서 위나라 군사를 못막는다 혹은 오래 버티지 못한다는 판단이 든건 당연한 추론입니다..산으로 가면 위군이 마속군을 무시하고 지나간다?? 절대 불가능입니다..뒷통수를 맞는건 너무나 당연하므로 마속군을 제거하지 않고는 진격이 불가능하죠..그래서 산의 마속군사를 제거해야하므로 산으로 돌격해올것이다..하지만 산으로 진격해오는 적은 마속군보다 많지만 기병이 산으로 돌격한다는건 불가능하죠..즉,위군의 자랑인 기병을 묶어두고 산에서 농성하는것이 오랜시간 위군을 묶어둘수가 있고 위병보다 적은 병력으로 산에서 농성하는것이 훨씬 유리하다고 판단했을거죠..그렇게 적당히 농성하다보면 공명의 군사가 원군을 와서 동시협공으로 충분히 이길수 있다고 판단했을것으로 확신합니다..공명의 성농성전보다 이게 더 나을수도 있었읍니다..이게 100% 맞는 추론인걸로 확신합니다..마속의 전략은 그리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충분한 식량도 산위에 옮겨 놓았을거고 위치도 좋았고 기병을 무력화 시킨것도 좋았고 하지만 물이 문제였읍니다...물을 생각못한거죠 이건 정말 추론을 못하겠읍니다..설마 물을 다막을줄은 생각도 못한거죠..그리고 인간이 물이 없으면 며칠도 못버틴다는것도 생각 못한건지..물이 역사를 바꾼것입니다..가장 중요한 기본적인 인간삶에 필요한 물을 인식못한건 왜인지?
마속의 욕심이었겠죠 지키는 싸움만 하기에는 본인의 욕망이 충족이 안되었을겁니다 유비의 평가가 진실인지 지어낸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딱 맞는 행동이었네요 요즘말로 주인공병 관심종자 병력 배치도 너무 머리를 쓰다가 가장 중요한 기본을 놓친 전형적인 헛똑똑이로 보입니다 공명이랑 같이 판을 짤 때야 본인의 계책이 엇나가지 않도록 막아주던 더 높은 권력가 권위로 찍어누를 수 있는 인물이 있었지만 마속이 결정권자가되면 얘기가 전혀 달라지죠
마속 안댸겠녜.. 영상에서 말했듯이 제갈량이 황제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네요. 통일 후 자신의 정치적 세력을 다지기 위함까지 내다보다가 당장의 현실을 말아먹었다고 밖에... 어찌됬건 저찌됬건 공통점은 과욕이 부른 참사는 명백하네요. 근데, 중요한 점은 제갈량이 마속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한 부분에서 이미 제갈량 잘못 아닌가?
마속은 기대를 그렇게까지 받으니 공을 세우고 싶었던거겠죠. 상대 장수가 장합이란것도 알고 있었고, 좀 무력으로 유명한장수라 무식하게 정면대결을 하려고 따라 올라올것이고 높은곳에서 싸우면 아래로 활만쏴도 손해없이 이길수있으니, 그러다가 기세좋게 산에서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적들을 치면 쉽게 대파 할것이라고 생각한듯 싶습니다. 그런데, 장합이 물길을 막고 말려죽일거라고 과연 생각을 했을까. 간단하게 말해 마속은 큰 공을 세우고싶었습니다. 그런데, 너무중요한곳에서 욕심을부리다 실패해서 전쟁전체를 망쳤구요. 제갈량이 조조처럼만 살았었으면, 강등시키고 다음에 공으로 갚게라도 했을텐데 아쉬운 대목이죠
3 года назад
당시 가정에 마속 머물고 있던 시기는 하루가 멀다하고 비가 내리는 때였고 산으로 올라가면 비로 질척한 산을 기병으로 올라올수 없고 보병 또한 마찬가지이니 위에서 아래로 공격과 방어가 쉬움 하지만 이상기온으로 비가 전혀 며칠동안 연속해서 내리지 않아서 악수가 되어버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