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문화 키워드를 이야기합니다. 그 여덜 번째 키워드, 사(士)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많은 댓글과 구독 또한 부탁드려요 :) 매화선생: 조명화 교수 저서: 논어역평 (현암사) #논어 #유교 #선비 #사군자 #공자 #철학 #인문학 #동양 #대한민국 #문화정체성 #문화비판
한국어의 장단음에 유의하시는 분을 뵈니 반갑습니다. 그런데 현대 한국어에서 장단음 규범은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1988년 표준어 규범에 마지막으로 명시되기는 했지만, 그때도 사실상 의미가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존재하는 규범이기 때문에 방송국의 아나운서는 아직 규범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 분들도 실제적으로는 거의 지키지 않습니다. 제도교육에서도 1977년 규범화 시도가 실패한 뒤 사실상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장단음이 맡았던 낱말의 의미 구분 기능은 요즘 된소리가 대신합니다. 예컨대 ‘적다’(書)는 [적따]로 ‘적다’(少)는 [적ː따]로 발음하는 것이 규범이지만, 현대 한국어에서는 [적따]와 [쩍따]로 구분합니다. 다만 ‘밤’, ‘눈’, ‘말’, ‘굴’처럼 외글자 낱말에서는 어느 정도 장단음이 의미 구분의 기능을 어느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한국어에서 장단음은 애당초 중국어의 四聲만큼 결정적인 규범도 아니었습니다. 결정적인 규범이었다면 표기법이 있었겠지요. 선생님처럼 규범을 따진다 하더라도 士는 단음입니다. 자전에 의하더라도, 현대중국어 발음에 의하더라도 去聲이므로 단음이 됩니다. 언어는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에 세월에 따라 바뀝니다. 바뀌어 가는 것을 ‘틀렸다’고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현재 한국어 장단음은 사전마다 그 규범이 같지도 않습니다. 훌륭한 강의라는 칭찬에는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느낍니다. 더욱 더 공부하여 내놓겠습니다. 졸저에는 (현암사)이 있을 따름입니다.
본질이라는 게 있다는 주장치고 권력지향적이지 않은 주장이 없습니다. 굳이 현대 철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본질이 이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본질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본질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한자를 그런 식으로 破字해서까지 해석하는 경향은 한왕조부터 시작됩니다. 그처럼 관념적인 해석 방식은 얼핏 보면 논리적인 듯하지만 황당한 허구에 불과합니다. 한자의 기원에 대한 지식을 갖춘다면 그런 방식을 학술적인 방식으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중국에서 그처럼 관념적인 해석은 주역이 유행한 뒤로 더욱 성행하였습니다. 전형적인 책이 바로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입니다. 그 책은 황당한 관념론으로써 한자를 해석합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주역으로써 논어를 해석한다는 황당한 주장까지 등장합니다. 반지성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의 학계가 워낙 얇기 때문에 그런 반지성적인 태도들이 세력을 떨치게 됩니다.
사실 말장난이긴 한데 조선의 선비가 관료가 됐든 백수로 떠돌든 학식이 대단하고 글을 잘 쓰는 문사라는 의미로 널리 쓰이게 돼버려서 선비라는 번역이 거꾸로 어색해져버린 케이스죠. 그래서 사를 선비로 번역하고 보면 선비가 예악사어서수를 한다는 것에서 좀 의구심이 들게 됨. 여기서 어는 말타기로 번역하곤 하지만 원래 의미를 따지자면 사실은 수레 모는 걸 어라고 하기 때문에, 원래 사는 전쟁할 때 수레 1승을 몰고 참전해서 유효전력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는 계층의 인간을 사라고 합니다.
선비는 先輩에서 비롯한 말로 전해집니다. 그렇다면 그 뜻은 논어에 나오는 先進이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앞서 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이 강하다고 하겠습니다. 조선에서는 성리학적 소양을 갖추거나 수양을 하는 사람을 선비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름은 도덕적 책무보다는 좀 더 깊은 책무를 지닌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종교적 수행자로 보더라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선비로 불리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특히 복식에 주의하게 되고, 례를 이행하는 일에 엄격하게 됩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수양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