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에 유화의 보존성 문제는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 원초적인 이유가.... 유화는 저 성당 만들어지고 수백년 후에나 발명됨.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오늘날 유화라고 부르는 형태는 미술사에서 15세기 얀 반 에이크에 의해 정착됐다고 봅니다. 물론 교수님께서 그걸 모르시지는 않았을테고, 서양미술사에 좀더 관심이 있었다면 나오지 않았을 저 질문에 질문자 부끄럽지 않도록 멋드러진 엔딩 멘트로 잘 마무리 지으신 듯. 그걸 현장에서 즉석으로 센스있게... 언어로 예술을 하심.
발가 벗으면 남자나 여자나 여자 쪽이 더 볼품없다 그런데도 좋은 미사 어구로 포장 하며 예술이다 뭐다 근본은 그 모태로부터 받은 사랑의 결핍으로 보아야 한다 자랄 때 양껏 모유를 받아 먹지 못한 부류라 봄이다 그 갈증이 뼈 속 깊이 박혀 한이 되었을 것 같다 벗어나기 힘든 각인이 된 것이다
제가 미술사 수업을 들을 때도 노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콘크리트는 확실히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재료였다고 합니다. 다른 분이 말씀하셨듯이 석굴암은 무너져 본존이 노출된 상태였구요. 다만 문화재의 보존이라는 것은 검증되지 않은 신재료보다 오랜 세월 검증된 보수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당시로서도 비전문가들에 의한 너무 성급한 복원이었으며, 이는 훼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웬 할머니가 예수 벽화를 복원이라는 명목으로 망쳐놓았던 사건...아시죠? 거의 그럴 뻔 했어요. 보물 666호를 검색해보세요. 이 석불도 일제가 시멘트로 망쳐놓은 것을 근래에 들어서야 그나마 볼만한 형태로 수정했었죠.
@@earlybird_ 애휴~ 우리나라 문화재 복원 실패 보시면 전문가들 다 친일파 몰이 하실 분이네... 그때 당시에는 엑스레이 기술이나 내시경 같은 게 없어서 실패 사례가 많습니다. 특히 스페인 같은 경우 실패 사례가 너무 많아서 손 대지 말라고 까지 하니까요. 그리고 석굴암은 천장 보수공사 하다가 실수로 잘못 맞춰 무너져서 시멘트로 메꾼 거 사례로 다 나왔습니다. 숭례문도 2008년에 화재로 망가졌는데 지금도 제대로 복원 못하고 있습니다. 그때 부실 공사 한 분들도 친일파 후손이라고 낙인 찍으실 건가요? ---- 미술 평론가 유흥준씨가 말 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조선보다 과학기술 우월성 보여주려고 보수 공사했다가 망한 거라고. 당시 일본이 조선보다 과학기술은 우월했을지 몰라도 신라보다는 못 했다 라구요
예 이전엔 방치되었다가 일본에의해 복원됐습니다 그러나 그과정에서 고대건축에대한 이해도와 복원기술이 떨어져 상황을 악화시킵니다 그후 박정희때 다시 복원이 진행되었지만 그땐 더 심각해져 습기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고 결국은 임시방편으로 에어컨등으로 강제로 습기를 제거함과동시에 지금처럼 관광객이 내부로 들어가지못하게 차단하게됩니다
저걸 아직도 훼손이라고 하네. 당시 콘크리트는 최신기술임. 훼손하려면 걍 부수고 말지. 그냥 기술이 없던거임. 석굴암의 원상태가 그만큼 정교했던거고. 지금도 복원할 기술이 제대로 없는데 저때라고 있었겠냐. 그마저도 안했으면 지금은 완전 복구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름. 그래도 일본은 복원하려고 하기라도 했지 조선이나 대한제국은 뭐하고 자빠졌었냐
@@cielbleu8232 누가 감사드리나요? 제가 언제 고맙다고 했나요? 다만 마치 일본이 일부러 망쳐버렸다는 망상을 버리라는 겁니다. 모든 것을 일본이 했으니 나쁘다라는 생각은 아무런 도움도 안되죠. 일본 문화재 콘크리트 복원 사례도 있으니 더더욱 그런 생각은 그만 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