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장혁진 기자입니다. 연휴 잘 쉬셨나요? ^^ 임용한 소장님과 함께 한 함께 보기 1부, 2부에 많은 관심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3부는 내일(27일) 오후 5~6시경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3부에서는 고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 대해 더 깊게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또 주말에는 미공개분까지 포함한 풀버전을 올리겠습니다(실제 소장님과 녹화는 2시간 가량 했답니다) 아울러 구독자 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소장님과 함께 영화 을 분석하는 영상도 준비 중입니다. 1월 중순에 업로드할 예정이고요. 그 전에 영화 많이 관람해주세요 ^^ 다사다난했던 한 해입니다. 내년에는 좋은 일이 더 많을 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임용한 소장의 저서] 『전쟁과 역사 2』 (교보문고) 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1326382 (YES24) www.yes24.com/Product/Goods/1422523
@@biankjg 947년(정종 2) 거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설치한 지방호족의 지휘 아래 있던 농민예비군이다. 후진(後晉)에 유학하던 중 거란의 포로가 되었던 최광윤(崔光胤)이 거란의 고려침략계획을 감지한 뒤 이를 고려조정에 알려옴으로써 설치하였으며, 그 수는 약 30만에 달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광군은 상비군이라기보다는 필요하면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도록 편성한 예비군의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대부분 농민출신이었고, 중앙과 지방호족과의 공동지배 아래 조직된 지방군이었다. 지방에 관리를 파견한 것이 983년(성종 2) 이후인 것으로 미루어볼 때, 광군의 지휘통솔 역시 중앙정부에서 직접 관장한 것이 아니라, 지방호족의 징발에 의하여 조직되고, 그 지휘권이 호족에게 속했던 것 같다. 즉, 광군의 관장기관인 광군사(光軍司)는 전국의 광군조직을 통제하기 위한 통수부로서 개경에 설치되었으며, 지방의 실권자인 호족을 통하여 운영된 듯하다. 그뒤 지방제도의 재정비시기인 1012년(현종 3)부터 1018년(현종 9) 사이에, 광군은 주현군 가운데 일품군으로 개편되면서 중앙의 직접 지배를 받게 되었는데 광군사가 이를 관장하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광군 [光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결론: 한마디로 농민 예비군으로 농사하다가 전쟁터 뛰어든겁니다. 직업군인이 아닌데다가 호족에게 동원령이 있었으니 중앙게집권화 되어있지 않은 고려왕실 입장에선 급조한게 맞죠....
고려군의 투구는 고증을 잘한거 같아요. 일본쪽에 여몽연합군 전투도가 있는데. 몽고군은 목가리개 있는 투구를 쓰고. 고려군은 목가리개가 없고 투구 좌우면에 불꽃인지 날개같은 장식이 있는 투구를 썻다고 그려져 있답니다. 또한 몽고군은 달아나지만 고려군은 물러서지않고 활로 응사하는 호기로운 모스브로 그려져 있고요. 물론 일본인이 그린 그림입니다.
고려시대때 서희가 되찾은 강동6주는 압록강 북쪽입니다 ‘강동’의 뜻은 강의 동쪽을 뜻합니다 즉 지금의 요하 동쪽에 있는 영토를 되찾아서 강동6주를 설치한 것입니다 만약 강동6주가 평안도라면 강남6주가 되어야 합니다 압록강 남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명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북서쪽 영토가 지금의 요하 동쪽 철령까지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고려의 북동쪽 영토가 두만강 북쪽 688리 지점인 공험진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교과서에 기술되어있는 고려의 영토는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한 [조선사]에 기록되어있는 것을 그대로 베낀것입니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한국인 역사학자들이 참여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병도, 신석호입니다 이들은 친일파 역사학자들인데 해방후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독립운동가들이었기 때문에 다 제거되거나 납북되어서 남한의 역사학계는 이들 식민사학자들만 남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일제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계승해서 왜곡된 우리 역사를 가르쳤고 그들의 제자들도 식민사학을 배워서 또다시 그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그들의 제자들은 다시 그들의 제자들에게 식민사학을 가르치고.... 그 결과 우리는 잘못된 역사를 배워온 것입니다 원나라가 무너진 후 명나라가 철령에 철령위를 설치하고 자신들의 땅으로 편입시키겠다고 고려에 통보하자 우왕과 최영이 요동정벌군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역사 교과서에는 철령이 함경도 안변이라고 기술되어있습니다 그러면 고려는 그 땅을 지키려면 어디로 군대를 보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함경도이겠죠? 그런데 왜 요동정벌군을 보냈겠습니까? 철령이 요동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몽골이 고려를 침공하자 당시 고려 북쪽 지방의 수령들이었던 조휘와 탁청 등이 그 지역을 갖다 바치고 투항을 했습니다 그리고 원나라는 고려의 북쪽 영토를 직속령으로 편입시키고 쌍성총관부를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쇠약해지자 공민왕이 그 땅을 수복하기 위해 인당과 유인우로 하여금 군사를 몰아 쌍성총관부를 점령케 합니다 이때 인당은 압록강을 건넜고, 유인우는 두만강을 건넜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쌍성총관부가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역사 교과서에는 쌍성총관부가 함경도 지역에 있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제가 완전히 왜곡한 것을 그대로 추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민왕이 북방 영토를 회복한 후 원나라가 북쪽으로 물러나자 명나라가 고려의 북방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고려에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이성계와 조민수로 하여금 요동을 정벌토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화도 회군에 의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의 태종때 명나라와 국경을 합의했는데 고려시대때의 우리 영토였던 철령과 공험진까지를 조선의 북방 영토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세종이 김종서와 최윤덕을 북방으로 보내 4군 6진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그 지역이 현재 우리가 간도라고 부르는 지역입니다 즉 4군 6진이 간도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전국에 있는 모든 대학교의 역사학 교수들, 그리고 역사를 다루는 국가기관인 '동북아역사재단'과 '한국학 중앙연구원'과 '국사편찬위원회'의 역사학자들은 모두 일제의 총독부 역사관을 추종하기 때문에 왜곡된 역사가 바로 잡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왜곡된 우리 역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국의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땅에 한사군(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했습니다 그런데 당나라의 사마정은 [사기 하본기]의 주석서인 [사기색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려는 여성의 파워가 상당했죠...ㅋㅋㅋㅋ 한국사 공부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지만, 어느날 박규란 관료가 첩을 두는 것을 법제화 하자고 왕에게 건의했음 그 사실이 같은 관료 부인들을 통해 저잣거리에 소문이 남 이후 박규는 길을 걸을 때마다 아낙네들에게 온갖 쌍욕을 처먹었다는 ㅋㅋㅋㅋㅋ
KBS 사극은 전투씬을 제대로 찍은 게 단 하나도 없어요. 2023년에도 칼들고 패싸움 하는 수준을 못벗어납니다. NHK 사극은 농민병이 창 쓰는 걸 제법 잘 묘사하곤 하는데 KBS는 전통적으로 전투씬에 돈 쓰는 걸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웬만한 건 다 정치 모략으로 떼우고, 전투씬은 경극처럼 장군들 몇몇 소리나 지르고 패싸움 좀 보여주는 게 전부. 문경새재에서 촬영한 것으로 아는데 압록강은 개울물 수준이고, 통주성은 낙안읍성보다 작죠. 광화문 앞 세종대로보다 더 넓었을 개경의 주작대로는 차 1대 겨우 지나갈 수준이구요. 스케일만 보면 TV 드라마가 아니라 뮤지컬 수준... 솔직히 외국인들 볼까봐 부끄럽습니다
몽고습래회사 이 기록 그림에선 우리 고려군의 투구가 옆모습이 털 같아 보이는데...더 후기인 몽골간섭기라... 그리고 누누이 주장하지만, 왜 말들을 꼭 커다란 서양말을 쓰는지...조선말 기록 사진을 보아도 체구가 작은 북방의 말들을 사용한게 보이는데 말이죠...당연 거란족이나 몽골이나 여진의 말도 다 그 유목하던 그 지역의 말들이라 그리 크지 않은 말들을 사용하였겠죠...기록에 의하면 서양말보단 작지만, 성질이 사납고 지구력이 좋다고 하였죠...괜히 천리를 간다는 말이 나온게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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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된 설명이 하나 있습니다. 요즘 같은 특수강....이어도 검은 전신갑옷에 쓸모가 없는데, 이걸 몰랐을리 없으니 조금 더 명확히 표현해 주셨으면 더 좋았을 듯. 즉,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은 특수강으로 제조 된 검이면 그래도 옛날 갑옷에 통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죠. 그리고 투구가 비싸긴 해도 실은 투구를 쓸 정도면 전신갑옷도 쓰는 것이고...대개 가난한 나라에선 판금은 못차고, 여전히 그 이전 방식을 조금 개선하는 식으로 땜빵했죠. 그런데 그 땜빵도 검으로는 뭘 해보기 어렵다는 거. 암튼 파괴력면에서나 절삭력 면에서나...어느 정도 방어구 수준이 올라온 시대부텀은 별 쓸모가 없었다는 거고, 창 아니면 해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