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근 목사님, 팔레스타인 땅은 제 1차 세계 대전 까지는 오스만 터키의 땅이었습니다. 그 땅이 별 볼일 없으니 황무지로 있다가 18세기 후반 부터 여기 저기서 몰려들기 시작 했다 해도 그들은 대부분이 오스만 터기의 지배아래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차 세계 대전에서 터키가 독일 편에 서서 망하는 바람에 영토가 쪼그라 들어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가 튀르키예(터키)가 되었지만 팔레스타인 땅이 결코 임자없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오스만 터키의 영역이 유럽의 일부와 현재의 이라크 지역,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튀니지 까지 오스만 터키의 영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행하신다는 걸 저도 믿습니다. 그치만 요즘 이스라엘의 행태를 보면 성경적이지도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도 않구요 그들이 팔레스타인 사람에게 하는 거 보면요 과거에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한 걸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라를 단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기도를 해 주고 축복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눈을 가리 신 것은 우리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서이며 이방인들의 수가 차기까지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 수도 행할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눈이 가려진 것을 안타까와하며 그 수건이 벗겨지도록 하나님의 애통하시는 마음을 구하며 기도해야할 줄 믿습니다ㅠㅠ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며 판단해서는 물질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영적 상황을 분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영적 전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들을 말씀에 의거하여 적용하고 생각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이고 그 언약의 말씀을 지금 폭풍 같은 상황 가운데서도 절대 주권으로 지키시며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넘어짐으로 인해 말씀을 받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대속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말씀의 성취의 개념에서 바라보고 기도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할 줄 믿습니다~^^
@@김혜란-w9s7m 근데요 이스라엘 주변 아랍권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의 후손으로 알고 있구요 또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들도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룰 거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글구 요르단은 롯의 두 딸들이 낳은 아들로써 아브라함의 후손은 아니지만 이들도 같은 히브리인입니다. 이집트와 터키는 함의 후손이지만 시리아, 이란은 셈의 후손이구요 이스라엘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서로 씨를 말릴려고 싸우는 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식빵집사-n4c 예, 맞습니다! 이스마엘도 예언대로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 모두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한 가족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을 약속의 씨(이삭의 후손)를 없애려는 선택받지 못한 자(이스마엘의 후손)의 질투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전지구적 영적 흐름을 주도하며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때에도 재림때에도 이 말씀의 성취를 막으려는 엄청난 세력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전세계가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말씀의 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고 둘이 원수된 것을 육체로 허무셨습니다. 십자가의 화목과 용서가 모든 어둠의 통치자들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이 십자가의 승리를 온 땅, 특별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 이 진리를 몰라서 고통하는 온 땅에 선포하며 가장 기쁜 복음의 소식을 전하러 더 빨리 나가야겠습니다!
좋은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ᆢ "이방인의 때"에 대해서는 오해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방인의 때의 주요 특징은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압제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B.C 586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침공했을 때부터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바로 그때까지입니다. 아직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예루살렘은 회교사원이 버젓이 자리하고 그들의 실제적인 통제하에 있습니다. 아직은 이방인의 때입니다.
이방인의 때'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방인의 때' 이해 방법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강조하신 말씀은 종말과 관련된 세 때였다. 곧 예루살렘의 멸망이 있게 될 '징벌의 날'과 '이방인의 때'와 이 땅에 다시 오실 '재림의 날'이었다. 이중에서 '이방인의 때'는 '징벌의 날'과 '재림의 날'을 이어주는 중간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는 시점은 분명하다. 비록 주후 132년 바르 코흐바의 주도 하에 일어났던 또 한 차례의 로마항쟁으로 일시적인 회복이 있었긴 했지만, 이스라엘이 주권을 상실한 채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기 시작한 것은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된 때였다. 그 이후 예루살렘은 세계를 지배했던 일곱 제국(로마; 비잔틴; 이슬람; 십자군; 마물룩; 오스만 터키; 영국)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때'는 언제 끝나는 것인가? 그에 대하여 누가복음 본문은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이방인의 때'가 '재림의 날'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것(눅 21:27)이고, 다른 하나는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밟힌다는 것(눅 21:24)이다. 전자가 인류구원의 최종 완성과 관련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구원의 수단으로서 이스라엘의 역할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날을 위한 전제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또한 예루살렘의 회복이라는 가시적 증거와 관련이 있다. '이방인의 때'가 찼음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역사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때'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의 예루살렘 회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모든 역사는 최종적인 결과와 함께 그것을 향한 과정들로 구성된다. 그래서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는 말이 생겼다. '이방인의 때'에도 그런 역사공식이 적용된다. '재림의 날'이 '이방인의 때'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최종 증거라면, 예루살렘의 회복은 '이방인의 때'가 끝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과정으로서의 증거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 비유는 그런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눅 21:29-30). 여기에서의 '여름'은 '재림의 날'을 의미하고, 그것이 가까이 다가옴을 알려주는 '싹'은 예루살렘의 회복으로 이해할 수 있다(눅 21:30). 봄철에 싹을 내기 시작하는 무화과나무는 여름의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여름'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이츠'는 '마지막'을 의미하는 '케츠'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스라엘에서 여름은 한 해를 마감하는 마지막 계절이다. 무화과나무의 새싹이 마지막 계절인 여름의 도래를 알리는 것처럼, 예루살렘의 회복도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있음을 알려주는 바로미터인 셈이다. '이방인의 때'에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이'는 '카이로스'의 복수형이다. 헬라어에서 시간은 '카이로스'와 '크로노스'로 구별된다. 결정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카이로스'는 정량적이고 순차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런 두 종류의 시간은 단지 이해를 위한 분석일 뿐이지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의 때'는 '카이로스'로서 하나님의 결정적인 사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런 사건들은 '크로노스'라는 물량적 시간 속에 담겨져 있다. '재림의 날'이 카이로스 중의 카이로스라고 한다면, 예루살렘의 회복은 '크로노스' 속에 담겨있는 과정들로서의 '카이로스'로 이해할 수 있다. 복수형 '카이로이'가 사용된 것도 그런 의미를 전달하기 위함이다. 주후 70년과 135년 두 차례에 걸친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사건으로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그렇게 시작된 '이방인의 때'는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1967년 예루살렘 관할권의 회복으로 그 기간이 끝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은 마지막 때인 '재림의 날'이 가까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징조이기도 하다. *권혁승 박사(서울신대 구약학 명예교수)의 논문 에서 발췌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