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연산이였으면 사림숙청 더하면 더했을듯 신하가 임금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고 간언하는게 아니라 그냥 지들 맘대로 할려고 성종때부터 노골적으로 나댄게 업보를 치뤘다고 생각함 성종때가 평화로운 시대였다곤 하지만 정작 성종이 후대를 위해서 강력한 왕권을 쥐지못한게 아쉬움
물론 반대하는것도 있고 문신들이 성종한테 너무한것도 맞습니다 연산군 완권강화를 한 이유도 어렸을때부터 그런걸 봤으니 그럴만 하지만 그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그걸 수척하고 거의 나한테 원하는말만해라 이건 정치를 모르는거죠 그럼 연산군 좋은말만 할텐데 이러면 나라가 굴러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연산군은 문제만 지적하지 자기가 고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문신들한테 니들 편할려고 이러지라면서 하는데 반대로보면 왕편할려고 이러는거처럼 보입니다
동물이 무슨 동물 말하시나? 성종도 왕자만 23명에 공주는 열 댓명 된다그러던데 후궁 좋아하는것에 반이라도 연산군에 관심을 가졌다면 조선의 역사가 바꼇을수도 있지. 연산이 처음 폐비사사 된것 안것도 성종이 신하하고 말하는것 듣고 알았다는 말도 있어.폐비가 모유가 적게 나와서 궁밖에서 보모하고 살아서 친엄마 몰랐다고 하고, 폐비 죽을때 7살이면은 그 후에 궁에 들어 왔을때 10살 넘었을거 같은데 연산을 내보내고 신하랑 단둘이 폐비 얘기 했어야지, 아무리 어리다고 열살 정도면 눈치채고 커가면서 곱씹지.
1. 무오사화의 본질은 왕과 신하의 기 싸움이 맞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왕이 사초를 봤다.'는 사실임. 원래 조선은 기록의 왜곡 등을 막기 위해 실록 작성 시 사초와 최종 기록된 실록은 왕은 열람할 수 없게 함. 천하의 세종조차도 현안에 대해 아버지 태종의 선택이 어땠을지 알고 싶어했지만 사초 열람만은 할 수 없었음.(이게 지켜지지 않아 후대에 난무한 게 '수정 실록')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사초의 내용을 왕이 알게 됨. 이게 제일 큰 문제임. 2. 이 당시 김일손과 김종직의 문제는 고발한 유자광도 법도를 어긴 개자식이 맞지만 근본적으로 이 사제지간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임. 김일손은 여러 기록을 보면 사관으로서 일을 하긴 했는데 문제는 이 사람이 사관으로 적합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는 사실임. 일단 세조 일가의 역린인 단종 문제를 빼고 봐도 며느리와 간통 같은 얘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게, 세조는 문제가 많은 왕이었지만 의외로 애처가라서 부인은 정희왕후 한 사람과만 평생 의좋게 살았음. 따라서 이런 여자편력에 대한 이야기는 명백히 비방임. 문제는 이런 확인되지 않은 거짓 소문이나 비방에 가까운 이야기는 본인이 잘 확인하고 걸러서 넣어야 하는데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사관의 자세가 안 된 게 그런 걸 가리지 않고 몽땅 다 집어넣음. 그렇다고 본인이 정말 사관으로서 의식이 투철해서 기록도 잘 하고 일도 열심히 했냐, 그것은 또 아님. 같이 들은 내용도 잘못 기재한다던가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아주 사관으로서의 자질 자체가 빵점인데 세조를 욕하는 데만 진심인 사람이었던 것. 즉, 단종에 대한 역린을 건드린 것도 문제인데 이렇기 때문에 기록을 엉터리로 남기니 더 문제가 된 것임. 이거 때문에 이극돈과 실록을 편찬하던 관리들이 이걸 어쩌면 좋냐고 상의하러 갔다가 김일손과 마침 사이가 나빴던 유자광이 얼씨구나 하고 일을 키운 거임. 게다가 김종직 세조의 치세에 녹을 먹고 살았으면서도 세조를 욕하는 조의제문 같은 걸 남기고 그 제자라는 김일손이라는 인간은 이걸 또 떡하니 기록으로 남겨 버렸으니 이거는 빼도박도 못하는 병크이고 연산군이 이 일을 알게 된 이상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는 거지. 그래서 이 때는 아무도 연산군을 말리지 못함. 모든 명분이 연산군에게 있는 상황이라. 3. 언론 삼사에 대한 얘기가 계속 나오고 연산군이 신하들 길들이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이용했다고 하는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림. 이 사건은 사림을 위시로 한 신권을 우선시한 대신들과 왕권 강화를 원했던 연산군 사이의 권력 다툼일 뿐임. 최 쌤이 성종 이야기를 하면서 폐비 윤씨 이야기를 했지만 이거는 사실 이후 갑자사화랑 관련된 거고 이것도 사실 연산군이 정치적으로 이용한 거지 정말로 죽은 생모에 대한 애틋함이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아무도 모름. 아무튼 무오사화만 놓고 보면 신하들이 오판한 게, 성종과 연산군은 정통성 자체가 다르단 거였음. 성종이 생각보다 신하들에게 기를 못 펴는 장면이 여럿 나오는데 이유가 성종의 즉위 자체가 명분이 없는 편에 가까워서 자기를 왕으로 올려 준 신하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였음.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의 적손 중 하나이지만 일단 형인 월산대군이 있는 상황이니 사실 이것만으로도 밀리는데, 문제는 의경세자가 죽은 뒤 대통을 이은 세조의 차남 예종에게도 원자가 있었음.(이게 다들 바보라고 말하는 제안대군) 사실 어느 쪽을 봐도 성종이 단지 똑똑하다는 이유로 왕위를 잇기에는 명분이 존나 약했고(할아버지 세조 이상으로) 한 마디로 택군이라는 절차를 통해 왕위에 오른만큼 성종은 신하들 눈치를 존나 볼 수밖에 없었음. 근데 연산군은 아님. 경복궁에서 무려 왕비가 낳은 첫 아들임.(심지어 폐비 윤씨의 아들이라는 약점도 성종과 신하들이 철저히 숨겨서 본인이 정현왕후의 아들이라고 알고 자랐어도 얘는 어쨌거나 태생이 적손이야.) 태어날 때부터 원자-세자-왕의 테크트리를 탄 혈통의 정통성이 있으니 절대적으로 이 정통성이 강한 사람을 신하들이 선대 하듯이 길들이려고 했으니 연산군의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음. 신하들 눈치 보느라 애완동물 사육 하나 제대로 못 하는 성종이라는 결이 다른데 이걸 똑같이 대하니 문제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연산군이 흑화하지 않게 신하들이 강약 조절을 잘하고 왕이 사초를 볼 빌미를 제공하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 이 사건이었음.
세조도 진짜 며느리 건드리고 조카 죽이고 또라이 나쁜놈이었네.. 조 뺴고 군 붙여라. 오히려 광해군이 더 나았다고 들음. 사초 정직하게 작성했는데 사지가 찢기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근데도 기록은 지우질 못했나. 학문적 양심을 지켜서 저런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도 기록한 사람들 덕분에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객관에 가까운 역사 기록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며느리를 진짜 건드린건 아니고, 저 사초는 본인이 본것도 아니라 지인한테 들은 찌라시를 악의적으로 왜곡한걸로 알고 있습니다 허반이라는 사람이 김일손한테 '세조가 상 중인 며느리한테 고기좀 먹으랫는데, 며느리가 거부하고 도망쳤다더라' 라고 햇더니 '세조가 며느리를 불렀는데 며느리가 거부했다' 라고 연산군도 연산군인데.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 김일손 부터가 사초랍시고 거의 왕실비방 수준으로 뻥튀기해서 죽을 짓 했어요 세조도, 세조가 가장 비판받는건 조카를 참하고 오른거랑 세종부터 오던 시스템을 붕괴시켜서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거라서 복합적인 평가가 내려지는거지 완전 무능한것도 아니었고. 애시당초 경국대전도 성종이 '완성했다' 지 실질적으로 시작하고 거의 다 해놓은건 세조였고. 일장일단이 있는 왕인데 군사정권 시절에는 너무 뻥튀기 됐고, 21세기 들어오면서는 또 너무 까이는거지. 각자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면이 많은 왕이지만 적어도 최악의 암군까지는 아님.
사초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있는것은 아니지요.. 물론 가짜라는 증거도 없지요. 원래 왕은 실록의 기록을 볼수없게 되어있고, 사초역시 마찮가지입니다. 그러나, 유자광은 조선조 통틀어 역대급 간신배이고, 그자가 자신의 영달을위해 어떤짓을 했을지는 짐작할수 있지요. 그 와중에 사초를 조작한대도 이상할게 없죠. 물론 증거가 있는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소문 확인을 안 한 정도가 아니었죠. 김일손에게 이 얘기를 해준 사람에 따르면 의경세자의 며느리가 상중에 기력이 너무 상해 세조가 안타까워서 고기를 좀 먹으라고 걱정해준 거였다고 합니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세조가 가족들을 끔찍히 아꼈다는 얘깁니다. 심지어 그 며느리는 세자의 정실이 아니라 후궁이었다고도 하니 시아버지 사랑이 대단한 거죠. 한 마디로 김일손은 그냥 주작질을 한 겁니다. 질이 아주 나쁜 짓이었죠.
만약 연도를 물어보는 문제면 연산군 재위기간이 1494년에서 1506년인데 연산군 때 일어난 사화가 무오사화랑 갑자사화잖아요 앞에 10간은 10년에 한 번 12지는 12년에 한 번 바뀌니까 1494년~1506년에 무오년이랑 갑자년은 1498년과 1504년 뿐이니까 연도 물어보면 이렇게 외우시면 됩니다 서력으로 맨 뒤에 숫자가 0=경, 1=신, 2=임, 3=계, 4=갑, 5=을, 6=병, 7=정, 8=무, 9=기 다시 0=경 순서로 돌아옵니다 이러면 연산군 재위기간 1494년=갑인년, 95년=을묘년, 96년=병진년, 97년=정사년, 98년=무오년, 99년=기미년, 1500년=경신년, 01년=신유년, 02년=임술년, 03년=계해년, 04년=갑자년, 05년=을축년, 06년=병인년(중종반정)
너무 재밌게 설명 잘하시네요~^^ 다만, 능지처사는 능지처참과 같은 뜻으로, 능지는 완만한 언덕을 뜻하는 표현으로, 완만한 언덕처럼 최대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형벌로, 주로 죄인을 묶어놓고 포를 뜨듯 뼈에서 살을 발라내는 방식입니다. 사지를 🐄에 묶어 죄인을 갈라죽이는 형은 거열형입니다~ 여튼 좋은 강의 감사합니다.
1:46 경국대전 2:15 성종의 경연 횟수는 8000회를 넘긴다 3:38 1479년 6월 1일 중전 윤씨의 생일이자 용안에 상처를 입힌 날 5:27 이미 중전 윤씨 폐의 논의가 있었다. 비상(독약), 방양서(저주를 담은 주술서)가 처소에 발견했기 때문 6:07 내쫓고 3년 뒤 사약 맥여 죽임. 그러나 아들인 연산군은 그 사실을 몰랐음. 새 중전이 된 3번째 왕비가 진짜 엄마인 줄 알고 자람 8:15 삼사: 언론을 담당하는 3개의 기관 10:00 무오사화: 반대하는 선비들 죽이기로. 조선 최초 사화 11:22 실록의 자료가 사초 13:50 사초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건을 키우며 밝혀낸 사람: 유자광(공작정치의 달인. 간신이자 악인의 대표격) ~~ 무소사화가 발생되는 2개 계기의 원인
속사정이 뭐든 사람 미친듯 죽인건 팩트 아님? 아픈 사정 있음 저렇게 미친듯 사람 죽여도 되나? 사도세자를 잃고도 성군이 된 정조는 그럼 뭐임? 참 희안한게 비슷한 상처를 안고있는데 대처하는 방안이 너무나 다름. 왕이라 부를 가치도 없는 인간은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성군이 되셨으니...진짜 희안하다니깐.
연산군이 삼사를 작살내려는 심정과는 별개로 그를 뚜껑열게 만든 사초 내용들은 불쌍한 단종에 대한 감성뽕 가득찬 근거없는 찌라시들을 바탕으로 사림들이 세조 엿멕이려고 창작한 것들이라 하는 의견도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없는게 아쉽네요. 연산군 입장에서는 울고싶은데 싸대기 맞는 정도가 아니라 눕혀진 상태에서 밟히는 심정같았을텐데.
대중 상대로 역사강의하는 수준이라서 얘기 안하는건지 내용만 보면 김일손이 무슨 학문적 자유와 자기 소신으로 권력에 맞선 투사처럼 설명하시는데, 실제로는 김일손이 저 사초에 집어넣은 내용이 소문 수준의 잡설이라 애초에 사초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내용이었다는 건 아예 언급이 없네요? 김일손이 선왕을 까는 글을 사초에 넣은 것과는 별개로 자기 파벌(사림)의 이익을 위해서 역사를 곡학아세한 것도 팩트이기 때문에 단순히 국가권력에 저항한 양심있는 지식인으로 묘사하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게다가 전근대 조선에서도 왕이 맘에 안들면 초야에 묻히면 되는 일이지 김일손처럼 치졸하게 왕 앞에서 고개 숙이다가 뒤로 왕을 까는 걸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구요.
사관이 기록하는 사초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관은 시중에 나도는 소문도 그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많이 기록했습니다. 사초 같은 1차 사료의 내용을 검토해서 실록에 기록할지 여부는 실록 편찬자에게 있습니다. 실록편찬이 완성되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사초는 폐기됩니다. 김일손이 시중의 소문을 채집하여 기록한 사초를 유자광이 미리 보고 연산군에게 고변한 것입니다. 세조는 정통성 있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됐습니다. 당시 민심이 세조가 잘했다고 지지했을 것 같습니까? 원래 소문은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돌아다니는 특징이 있습니다. 김일손이 시중에 없는 소문을 창작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세조, 이방원, 연산군 그 외 인간 같지 않은 왕들 프랑스식으로 시민이 보는 단두대 에서 처형 했었다면 현재 권력자들이 시민을 함부로 대하진 않았을텐데 프랑스처럼.... 조선의 꼴통 왕들이 살만큼 살았으니... 현재의 한국 양극화로 기득권만 뱃데지 가 부른 나라가 되어가니 에휴
유자광 입장에서 성질날 만도 하다. 궁지기 천민에서 장관급 장군으로 만들어준 세조인데 세조를 개망난이로 써 놓았으니 성질 안나겠는가, 더구나 세조는 유자광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물리치고 출세 시켜준 것이기에 세조에 대한 유자광의 충성심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한 것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