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시간에 본 까닭에 관객이 15명 정도 있었지만 저 혼자만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고 있더군요. 눈물이 자동으로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종교도 없고 미신같은 건 더더욱 믿지않지만.. 정말 성웅 이순신장군님 만큼은 그 힘겨웠던 삶 대신 다시 태어나셔서 그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한번이라도 살아보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순신의 일기는 원저인 한자로 읽어야 한다. 한글판은 의도적으로 오역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한자로 읽으면 어떻게 봐도 한산도 해전 후에 이순신이 승리한 싸움은 없다. 원래 이순신이 23전 23승이라면 조선수군은 부산항을 탈환해 일본군의 보급을 거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군에게 이순신은 강한 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 일본 측 기록에 이순신의 이름은 한 번밖에 쓰지 않았다. 그의 사망 기록뿐이다. 와키자카가 이순신을 라이벌이라고 생각한다든가,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순신을 존경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모두 한국인이 날조한 거짓말이다.
배설은 정확히 알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칠천량에서 원균과 함께 패전하기까지는 용감한 장수였고 또 친천량에세 판옥선 12척을 피신시켜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대승을 이룰 수 있게한 공이 있다. 그러나 명량해전에서 참전하지 않고 탈영했다가, 그 죄로 전후에 참수되었다가, 그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신원이 회복되었다
이순신이 부산앞바다로 가토를 잡으러 못간건 거짓정보라는 의심도 있지만 부산앞바다에서 가토오기를 막연히 기다릴수있는 상황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산까지 항해하려면 격군들이 쉬도록 정박할 곳이 있어야하는데 모두 왜성뿐이라 정박했을시 공격당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었죠..실제 그렇게 몰살당한게 원균의 칠천량대패죠
노량해전을 승리로 마무리한 후 진린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거둬 당시 명나라 수군 사령부가 있던 지금의 완도 고금도로 옮겨와 명나라의 전통 장례절차에 따라 사당을 짓고 100일 동안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안치해 그를 기렸습니다. 그후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충남 아산으로 옮겼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제일 먼저 기린사람이 진린 장군입니다.
우리 썬킴샘께서는 단순히 세계의 역사를 말씀해주시는것뿐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과 관련된 역사에 있어서는 잊지않으시고 몇번씩이고 다시한번 상기시켜주시고,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 선조들의 노고를 잊어가고 있는 현실을 일깨워주고 계시죠. 모든 역사가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과 달라지고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지금의 젊은세대들이, 지금의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걸고 싸워주신 선조들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주었으면해요. 지금 애써 주시는 역사학자들/역사스토리텔러분들이 시간이 지나 안계실때가 되면, 누가 그 일을 하게될지 감히 노파심마저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