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사치와 항락에 빠졌다기보단 지나치게 강대한 신하의 힘을 견제하고 억누르려다 왕권 강화의 타이밍을 잘못잡아버렸고 그걸 지나치게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신하 견제를 위해 성충을 숙청했다고 봐야할듯. 실제 궁궐을 증건하긴 했으나 그로인해 백성들이 엄청난 고역에 시달리고 국가재정이 휘청였다는 기록은 없었는데다가 삼천궁녀 프레임을 하기엔 백제의 도성은 그걸 담을 정도로 규모가 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성충의 마지막 상소에서 사치, 항락, 음란 등의 단어가 없었다는 점. 또 사치를 부린다는 왕이 백제 멸망 1년전에도 신라의 독산성과 동잠성을 공격하라하는 활발한 군사적 움직임을 취했던 것을 보면 의자왕의 정책은 그리 초심을 잃지 않았다고 봄. 다만 신라가 무열왕부터 왕권 강화에 성공하여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면, 백제는 왕권강화의 타이밍을 잘못잡은데다가 실패하였고 이로인해 안그래도 당과 신라 양면 전선 속에서 전력을 다해도 모자랄 판에 귀족들의 협력을 모으기 힘들었다는 점. 그리고 요새의 형식을 띠는 웅진성으로 피난을 해 고구려의 지원이 올때까지 결사 항전을 다짐했으나 웅진성은 백제의 22대, 24대 왕이 신하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귀족의 힘이 강했던 곳이었던 점. 그리고 예식진이 배신을 때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봅니다.
@@user-yy3qy4if6u 일단 전 백제 멸망의 이유에 예식진의 배신도 큰 이유라고 했지 다른 이유가 없다고는 안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큰 이유로 꼽은건 그 한 사람의 배신이 백제라는 문짝을 아예 때버린 거나 다름없을정도로 큰 배신이었으니까요. 다른 것도 아니고 자기내 나라 왕을 강제로 잡아 당나라에 항복해 갔다바친건데 그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면 뭔가요... 그리고 수도인 사비가 뜷리긴 했어도 애초에 사비는 평지성이라 방어가 용이하진 않았어요. 그래서 의자왕도 백제의 옛 수도이기도 했고 요새의 형식을 띤 웅진성으로 들어가 항쟁을 하며 점차 지방의 귀족 세력을 규합하고 고구려와 왜의 지원을 기다릴 수 있었던 상황이긴 했습니다. 그때 당시엔 백제라는 문짝을 완전히 땔 정도의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죠.
사실이 아님 벌써 신라가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관산성전투에서 영혼까지 털리고 나서 백제는 관산성전투이후 감히 신라에 대항도 못함 그뒤로 침략만 당하고 방어에만 주력한게 그당시 백제임 신라가 관산성 전투이후 남으로 가야 통일 북이로 한강 이북지역을 점령 그리고 고구려 동쪽도 정벌함
@@sunyoung4377 그보다 먼 옛날 백제 아신왕이 먼저 잉본이랑 손잡고 신라를 치길래 신라한테 지원요청받은 고구려 광개토왕한테 백제 일본군 개박살나고 아신왕이 광개토왕앞에 엎드려서 영원이 당신의 노객이 되겠다했음. 반대로 만약 그때 아신왕이 일본이랑같이 신라멸망시켰으면 아신왕 욕하겠네요?
백제가 힘이 더 세기도 했고 당시 고구려랑 백제라는 양면전선을 해야하는 신라와는 달리 백제는 고구려와 동맹이었는데다가 저 밑에는 백제와 친한 왜나라까지 있었으니까요. 말그대로 고립된 상황이었고 거기에 돌궐도 고구려랑 동맹인 상황에서 유일한 동맹 수단은 당나라 뿐이었음. 그냥 백제 멸망시켜야겠다 하고 선택으로써 동맹한게 아니라 신라 입장에서는 이거 동맹못하면 우린 죽는거다 이런 거라고 보시면 될듯. 그리고 백제도 신라에게 군사력이 그리 밀리지 않는편이었는데 왜 황산벌때 5천밖에 못했냐면 왕권강화정책의 성공여부였죠. 신라는 진덕여왕때부터 김춘추의 건의로 집사부의 설치를 했는 것과 더불어 그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며 집사부를 활성화 시키면서 왕권강화를 원만히하고 성공했지만 이와 비슷한시기 왕권강화를 꽤했던 의자왕의 경우는 급격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인해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하필 타이밍도 좋지않아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병사소집을 하려했으나 불만이 쌓여있던 백제 귀족들이 반발하며 안이루어지게되고 소집에 응한건 계백같은 몇몇 밖에 안되었다고 봐야할듯. 그 이후 뒤늦게나마 사비성을 포기하고 요새의 형식을 띈 웅진성에서 세력규합을 해서 대응하려 했으나 예식진의 배신을 하며 끝이 나버렸죠... 백제가 힘이 약한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이후 부흥운동에서 보여주는데 백제 멸망후 신라는 백제 귀족들을 금관가야때와는 달리 5두품 ~ 4두품의 낮은 하위급의 귀족취급을 해주었고 이에 반발하며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을 왕으로 올리며 부흥운동을 펼치죠. 이때 세력을 규합하여 몇만에 이르는 군사를 모으게되고 흑치상지가 군을 이끌며 200여개의 성을 빼았을정도였는데 이는 당나라 장수 소정방마저 토벌을 하지 못하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허나 이후에 복신과 도침이 서로 싸우며 분열이 일어나게되면서 부흥운동 세력은 급격히 쇠퇴하게되고 세력이 돌이킬수 없을정도로 약화되자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마저도 당에 항복하게되며 자신들의 손으로 임존성을 치기에 이르게 되면서 결국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죠
이유는 정확하진 않습니다만.. 고려 충렬왕 시대의 제왕운기에도.. 신라는"羅" 라 로 줄여서 표현을 합니다.. 신라의 이름이 신라인지 서라인지 사라인지 여러 이름이 있다보니 알아볼수 있는 라 로 쓴거같습니다 백제도 전해지는 얘기로는 십제에서 백제로 국호가 바뀌다보니.. "濟"제 로 줄여서 쓰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ㅎㅎ 고구려도 고려와 국호가 같으니 알아볼수 있게 려로 쓰지않았을까 싶습니다 고구려 (麗) 백제( 濟) 신라(羅) 려 제 라 로 줄여 부른것은 고려시대 부터 시작된거 같습니다
어떤자료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길래, 의자왕 사치스럽고 향락을 했다고 말하고 있나? 적지않은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이 사치스럽고 성향이 달라졌다는 건 망국의 이유를 후대가 교훈으로서 잡기위해 조선사학계의 의도라고 보며 솔직히 사치스러운 의자왕 설은 이제 소수에 불과하구만 ;;;; 무엇보다 50년도 더된 역사책에서 스스로 성취해서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배운대로만 떠드는건 역사쪽 가치관이 아닐텐데 ;;; 역사를 논하는 분이라면 한마디에도 고민해야 된다고 보는데 이분은 몇차례 영상을 나올때마다 시키는대로 스피커 역할만 하고 계시네 ....
@@user-qz5nc4zw7i 그런 사고방식은 진실이나 역사가 아니라 편견이잖아요 나라가 망했으니 군주는 어떠하다. 이런건 판단에 가깝죠. 우리는 누군가의 판단을 역사라고 배우지않죠 그래서도 안되구요 일반인이 역사를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하는거야 전혀 상관없지만 방송에 나온 역사강의는 좀 달라야한다봅니다
삼국유민 의식은 이미 신라가 통일한후 230여년간 동화되었고.. 그후 여전히 남아있는 유민의식때메 후삼국시대가 열렸는데.. 그것마저도 고려가 통일한후 약 450여년간 동화되었고.. 그후 조선이 들어서고 다시 500여년간 동화되었음 ㅋㅋ 약 1200년가까이 동화화되었는데.. 뭔 개소리를 하시는지 ㅋㅋ 낭만창출났네 아주그냥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