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도 회군은 한마디로 이성계가 사리분별 잘한것 이성계 나이 당시 53세, 우왕은 23세 쌍성총관부 그쪽 근처에서,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며 이성계 가족이 원나라 덕을 많이 본 가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민왕이 소환하니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과 쌍성총관부(1356년)를 탈환했지요.. 공민왕 어린시절부터.. 시작해서 공민왕 막판에 시해 당하는거, 흥망성쇠 다보고 그 아들 우왕때까지 약 32여년동안 이성계가 묵묵히 조선을 지켜줬지요 1388년 위화도 회군당시 , 당시 최영은 72세로 고령이었구요.. 그당시 70대면 지금으로 치면 90대도 넘은것으로 오늘 내일 하는것이지 역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도 엄청많음 당시 한나라(고려)에 덕망있는 장수가(이성계)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거부한것은 그 자체가 왕에 어명에도 위험을 무릎쓰고 소신발언 한것으로 출정전까지 , 이성계는 나라를 생각하는 소신있는 "충신"이라고면 됨 산전수전 다 겪은이성계 (당시 53세) 가 목숨걸고 왕에게 조언 해준거랍니다. 제발,,, 잘생각해보세요 고려가 약 98년동안 원나라(몽골)에게 점령당하였던 속국이었는데.. 아무리 원이 막장이라고 하여 그 틈새를 보리고 뎀볐다가 명나라와 서열정리 끝나면 명에 주원장이 가만 둘까요? 그혼란한 틈을 노려 교활하게 ,요동을 정벌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제발 분수파악하길.. 바람. 우왕은 요동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지 아비가(공민왕)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으니 정세가 혼란한 틈을타 , 내부 결속에 박차를 가하며 왕에 입지를 더욱 굳혔어야함 원나라를 잡은 명나라는 아시다시피 화약, 총포까지 개발한 나라입니다. 조공만 받치며 반속국처럼 대국에게 체제를 보장받고 명맥을 유지한 고려가 절대 못이기는 싸움. 그리고 요동을 정벌 할려면 1,2차때 했어야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왕이 , 우둔한 명령을 한것 쿠테타고 뭐고 어자피 모든역사를 보면 다먹고 먹히는 싸움 조선왕조 후기가 개판이어서 그렇지 당시 이성계같은 강자가 나라를 잡는것이 오히려 고려에 명맥을 살려준것 어자피 , 여차하면 주원장인 명나라에게 고랴는 또 먹힐수 있었음 세계지도, 아니 중국 지도만 봐도 알수있듯 역사는 그렇게 흐름 후손이랍시고 , 온갖 감정 넣어 비난만 하고, 결과론적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당시 상황을 검증하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 그것 만으로도 큰의미를 둬야함 글 읽어보면 역사를 모두 다 자기식대로 생각해서 어이없어 글남김
맞긴함 ㅋㅋㅋ 저때가 가장 시기적으로 맞았고 몇차례 공격까지 했던걸로 알고있음 그런데도 이성계가 계속 시간 끌고 여러가지 안되는 이유를 말하면서 시간만 끌다가 말 돌려서 돌아선거지 애초에 정도전 만나면서 이미 마음에 반역의 마음이 사라잡힌 시점인데 ㅋㅋㅋㅋ 반란이고 역적인건 사실임
@@노네이 아직 역사학 초보신거 같은데 당시 고려는 최영측 친원파,이성계측은 친명파로 분류되서 명이 선전포고 했어도 고려에서 친명파 군부가 출동하면 당혹스럽지. 그니까 치열한 전투를 쌍방이 예상 안했고, 여말선초 당시는 더더욱 고려하고 원나라 군사들 서로 싸우다가도 나중엔 고량주 한잔씩 하면서 하나의 거대 군벌을 만들어버린 결과가 됐어. 그 기폭제가 된것이 최탄이 평안도를 원나라에 들어 바치면서 평안도 제왕이 되면서 흥청망청 한것 때문인것도 있구그래 (원나라 장수와 술마신 사실 출처: 고 고우영 만화가 만화책 -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이 원나라 장수들과 산속에서 꿩 잡아서 술마시는 장면있음)
사불가론 해석하는 꼬라지들 보면 가소롭다. 以小逆大 一不可가 실록에 기록된 원문이다. 작음으로 큼을 치는 것이 첫째 불가이다. 이것이 정확한 번역이다. 그런데 역사학자들마다 이소역대를 작은 나라, 큰 나라로 번역한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이소역대와 같은 문구는 손자병법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어투의 글귀이다. 이성계는 손자병법을 빌어다 불가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화도는 압록강 중간에 위치한 섬이 아니다. 1900년대 초반 일본인 학자가 거기를 위화도라고 부르면서 중국도 자기들에게 유리하니까 거기를 덩달아 위화도라고 불렀다. 실제 위화도의 위치는 압록강을 건너 현재 중국 땅 속으로 80Km 들어간 데 위치해 있다(유튜브, 이덕일, 위화도 위치, 로 검색) 따라서 여름철 강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어서 수백명이 죽었다는 것 또한 사실일 수 없다. 이성계는 위화도에 머무르면서 장계에 말하기를, 여름철 장마로 여기저기 시내가 형성되어 적진으로 전진 시 군량을 수송할 수 없으므로 가을철에 다시 출병하게 해 달라고 상소를 올린다.
너무 이성계의 편에선 강의 인것 같습니다 1) 평양출정식이 4월 3일, 위화도 도착은 5월초라 합니다. 장마철과는 무관한 시기인데, 장마비로 진군을 못했다는 말은 전혀 일리가 없습니다 2) 철령이북토지를 내놓으라는 명의요구에 굴복해서 그 땅을 그대로 내주어야 합니까? 그때는 원 명이 치열하게 싸울때라, 요동은 힘의 공백상태에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후손으로 충분히 해볼만한 전쟁인데, 자신의 사병들을 데리고 회군한 것입니다 3) 마치 이성계 혼자 전쟁에서 나라를 다 구한것 처럼 얘기 하는데, 그 당시 최영장군은 백전불패의 명장이며, 왜구를 물리친 홍산대첩이 있으며, 청렴결백한 충신입니다 마치 권문세족의 부패한 우두머리인 것처럼 묘사되 있습니다 4) 역사가 이긴자의 기록이라 하지만, 4불가지론은 수긍이 가질 않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사대주의를 뿌리 내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봄에는 농사 시작할때라 않되고, 여름은 장마철이라 않되고, 가을은 추수때라 않되고, 겨울은 추워서 않되고~~)
맞음 쿠테타 일으켜 놓고 제일 먼저 한게 전국에 호족들 사병 철폐 ㅋㅋㅋ 진짜 이성계와 정도전은 생양아치임 소박함이 미덕인 유교를 국교로 삼는 바람에 가난한 조선 호족들 사병 철폐로 군사력 약화 외세에 탈탈 털릴 최적의 상태를 스스로 만들어 놈 조선초 군사력이 얼마나 형편 없었음 율곡 이이가 십만 양병설을 주장 했을까
이 동영상에 나오는 위화도가 얼마나 넓기에 원정군 5만이 주둔할 수 있다는 건지 이해가 안되네요. 더구나 장마에 물이 불어 강 수위가 높아졌다면서 강 한가운데에있는 섬에 주둔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겁니까? 물이 더 불면 전부 수장되거나 고립되어버리는데요? 지금 북한과 중공의 국경에 있는 위화도가 그당시의 위화도인 것은 확실한가요? 뭔가 말빨에 속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 그런 건가?
비에 젖은 갑옷이 무거워 못 걸었다니 뭔가 이상한 상상력이다. 일반 병사가 뭔 갑옷. 여름이니 가장 얇은 옷을 입고 고작 창 하나 어깨에 걸쳤을 것을. 옷이 젖으면 행군 도중 쉴 틈에 벗어서 쭉 짜면 될 것이고. 승리한 편의 역사 조작에 편승을 넘어서는 자아도취적 아전인수 상상력
흔히 요서 혹은 만주지역은 부여땅이였고 이후 문자왕때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이때가 한반도 최고의 영토였고. 나당연합군에게 고구려가 패배함으로써 요서지방은 다시 이민족의 땅으로 돌아갔고 다시 발해를 건국해서 남북국시대가 이어짐. 발해가 거란족에게 멸망당해서 이후 만주지역은 더이상 우리의 영토로 남아있지않게됨.
혁명을 성공하면 영웅이 되고 혁명을 해서 실패하면 역적이 될뿐~위화도 회군을 않고 요동을 얻었다면~우리땅은 달라지고 남북이 갈라지지도 않았을것임.나중에 정도전과 이성계가 요동을 공격하려고 함.이방원이 일어나 정도전을 죽임.즉,이성계는 싸울 의지가 없었고 핑계가 필요했을뿐~나중에 남한에 군사혁명이 일어날때 이성계 얘기가 나옴~장수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된다.고려에 최고 역적은 이성계임
역사는 길게 봐야 하고 그래서 역사는 길게 오랜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는건지도 생각해 보게하는것이다 최영은 백전 노장이고 전쟁터에서 늙었다 요동은 명나라가 다른전쟁으로 성이 비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가기만 하면 승리하게 되있는것은 자명한 일이었을것이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이 세워젔지만 그로 인해서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되었고 그냥조공이 아니고 처녀들을 잡아다 500년동안 조공을바칬다 그리고 사대주의 사상으로 백성들을 양반 상놈으로 노예화 시켰다 국방을 소홀히 하고 외세의 침략이 많았고 사대부들의 당파싸움과 부패와 무능으로 나라를 일본에 뺐기고 이조 오백년 막을 내린다 북한의 세뇌 공작이 지금도 되고 있지만 그건 명나라에서 정해준것만 보고 듣고 배우고 했기 때문이고 그외에것은 전혀 보고 듣고 배울수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김씨 왕조를 통해서 지금도 이조 500년동안 해왔던 세뇌 정치가 지금도 그대로 행해지고 있는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대폭 한반도내로 축소되고 지금도 중국은 동북 공정으로 우리의 역사를 외곡하고 자기의 역사로 만들고 있는것이다 명나라와 조선의 기득권 양반세력 그들의 세뇌 정치로 인해서 외국의 문물을 늦게 받아들인 죄로 조선은 일본에 36년동안이나 명나라의 노예에서 일본의 노예로 전락한 후에 그명을 다했다 지금 우리는 이조500년동안 사대주의로 세뇌 되어지고 속아서 외곡된 한반도내로 좁아진 반도사관의 역사를 옳바로 복원하고 자유 우방국가와 함께 미래를 대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할것이다 국방을 포기하고 강대국이나 남의 나라에 얺혀서 안일하게 편하게 잘살겠다는 기득권층의 사대주의 사상은 절대 다수인 국민을 속이고 기만하는것이다 오늘 북한이 잘말해주고 있고 남한에도 인구의 절반이상이 공산 사대주의 주사파인데 거기다 공산주의 라는 속임수 까지 한수 더한것이다 이것은 남의 나라에 의존해서 국방을 소홀히 살아온 조선 500년 역사의 비극이고 수치의 역사다 조선이 망했듯이 북한 공산주의 남한의 주사파들은 반듯이 척결해야 하고 망하게 될날이 가까와 오는것이리라
내가 30년전에 배운 위화도 위치가 똑 같아요 대군을 이끌고 강 중간에 진을 치는 장수가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냥 교과서 저렇다고 얘기하니 사실인줄 알고있었는데 실저ㅣ 위화도 위치가 어떤지 아시나요 사료에는 압독을 넘어 위화에 진을 쳤다고 조선실록에 쓰여있어요 지금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거짓이 너무 많아요 위화도 위치를 통해서도 조선의 영토는 압록강 위에 우리영토 라는게 화인됩니다 궁금하시면 허영범 인터넷 검색하시면 됩니다
저는 이성계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계는 싸움의 명장으로써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요동을 차지해봤자 실익이 없다는 것을요. 고려가 초기에 현 북경을 수도로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 심양을 차지하고 있을 때나 요동이 중요했지, 후기 고려는 요동을 지킬 능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요동을 포기하는게 조선을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의견부탁 그리고 왕의 그릇이 아닌 선조가 왕이 된걸 봐선 막장도 그냥 막장이 아님 오히려 중후기는 거의 고려만도 못한나라가 이씨 왕조 심지어 고려라면 이순신을 대 고려국 수군대총사 로 삼고 문하시중에 봉하여 조정 신료 들 중 최고의 지위에 올려놨음 그러나 선조라는 놈은 그런 그릇조차 되지 못해서 나라를 구한 장수를 그렇게 반죽여 떡을 만들어놓고 그리고 고려가 그토록 요동수복을 중요시한 그 이유조차 망각한 놈들 요동은 본래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발해멸망이후 되찾아야 할 우리의 영토인데 명나라의 개가되어 기는놈들이 고려를 욕할 이유는 없죠
@@의견부탁 세종이요? 국민이 굶어 디져도 중국에 보낼 말이랑 소, 금 은 다 긁어모으라고 한 세종이요? 중국에 처녀랑 화자 가장 열심히 갖다바친 세종이요? ㅋㅋㅋㅋ 너무웃깁니다.. [[세종실록9년 -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는것만 생각하고 진헌(중국에 바침)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겠는가 전년에도 진헌을 못한데다 지금 또 진헌을 못한다면 이는 될 수 없는 일이다.]]
위화도 회군은 한마디로 이성계가 사리분별 잘한것 이성계 나이 당시 53세 우왕은 23세 쌍성총관부 그쪽 근처에서,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며 이성계 가족이 원나라 덕을 많이 본 가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민왕이 소환하니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과 쌍성총관부(1356년)를 탈환했지요.. 공민왕 어린시절부터.. 시작해서 공민왕 막판에 시해 당하는거, 흥망성쇠 다보고 그 아들 우왕때까지 약 32여년동안 이성계가 묵묵히 조선을 지켜줬지요 1388년 위화도 회군당시 , 당시 최영은 72세로 고령이었구요.. 그당시 70대면 지금으로 치면 90대도 넘은것으로 인생 말년에 , 오늘 내일 하며 사는것이지 무슨 일부러 보냈다는둥 어떤 나라가 안되는 싸움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군을 지원해 줍니까? 역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도 엄청많아서 답답하네요 당시 한나라(고려)에 덕망있는 장수가(이성계)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거부한것은 그 자체가 왕에 어명에도 위험을 무릎쓰고 "소신발언" 한것으로 출정전까지 , 이성계는 나라를 생각하는 소신있는 "충신"이라고면 됨 이성계에 위화도 회군이 만약 그전부터 계획이었다면 굳이 4가지 이유를 들어서 반대를 할이유도 없음. 정확한 댓글이 없어서 너무 어이없음 상식에 근거하여 발언하길.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 (당시 53세) 가 목숨걸고 왕에게 조언 해준거는 맞지 고려가 약 98년동안 원나라(몽골)에게 점령당하였던 "속국"이었는데.. 아무리 원이 막장이라고 하여 그 틈새를 보고 뎀볐다가 서열정리 끝나면 , 명나라 주원장이 가만 둘까요? 혼란한 틈을 노려 요동을 정벌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움? 어이없어서 묻고싶네.. 우왕은 요동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지 아비가(공민왕)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으니 정세가 혼란한 틈을타 ,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내부 결속에 박차를 가하며 왕에 입지를 더욱 굳혔어야함 우왕이 , 현실감각 1도 없죠 원나라를 잡은 명나라는 아시다시피 화약, 총포까지 개발한 나라입니다. 조공을 바치며 반속국처럼 수백년간 대국에게 체제를 보장받고 명맥을 유지한 고려가 절대로 못이기는 싸움. 그리고 요동을 정벌 할려면 1,2차 때 했어야지 쿠테타고 뭐고 어자피 모든역사를 보면 다먹고 먹히는 싸움 조선왕조 후기가 개판이어서 그렇지 당시 이성계가 회군해서 잡을만 했음 그가 나라를 잡는것이 오히려 고려에 명맥만을 유지해준것. 어자피 , 여차하면 주원장인 명나라에게 고려는 먹힐수 있었음 세계지도, 아니 중국 지도만 봐도 알수있듯 역사는 그렇게 쉼없이 , 동물의 왕국처럼 흐름 후손 이랍시고 , 온갖 추측과 섞어서 감정까지 실어서 비난만하고, 결과론적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당시 상황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며 살펴보는 것 그것 만으로도 큰의미를 둬야함 글 읽어보면 역사를 모두 다 자기식대로 생각해서 애들이 볼까봐 너무 어이없어 보다못해 글남김.
위화도 회군은 한마디로 이성계가 사리분별 잘한것 이성계 나이 당시 53세, 우왕은 23세 쌍성총관부 그쪽 근처에서,오랫동안 터를 잡고 살며 이성계 가족이 원나라 덕을 많이 본 가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민왕이 소환하니 이성계 아버지 이자춘과 쌍성총관부(1356년)를 탈환했지요.. 공민왕 어린시절부터.. 시작해서 공민왕 막판에 시해 당하는거, 흥망성쇠 다보고 그 아들 우왕때까지 약 32여년동안 이성계가 묵묵히 조선을 지켜줬지요 1388년 위화도 회군당시 , 당시 최영은 72세로 고령이었구요.. 그당시 70대면 지금으로 치면 90대도 넘은것으로 인생 말년에 , 오늘 내일 하며 사는것이지 역사를 좀 안다는 사람들이 이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사람도 엄청많아서 답답하네요 당시 한나라(고려)에 덕망있는 장수가(이성계) "4가지 이유"를 들어 요동정벌을 거부한것은 그 자체가 왕에 어명에도 위험을 무릎쓰고 "소신발언" 한것으로 출정전까지 , 이성계는 나라를 생각하는 소신있는 "충신"이라고면 됨 이성계에 위화도 회군이 만약 그전부터 계획이었다면 굳이 4가지 이유를 왜들어서 반대를 하나..;;;? 상식에 근거하여 발언하길. 산전수전 다 겪은 이성계 (당시 53세) 가 목숨걸고 왕에게 조언 해준거는 맞음 제발,,, 잘생각해보세요 고려가 약 98년동안 원나라(몽골)에게 점령당하였던 속국이었는데.. 아무리 원이 막장이라고 하여 그 틈새를 보고 뎀볐다가 명나라와 서열정리 끝나면 명나라 주원장이 가만 둘까요? 그 혼란한 틈을 노려 교활하게 ,요동을 정벌한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움? 묻고싶네.. 우왕은 요동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지 아비가(공민왕) 그렇게 비참하게 죽었으니 정세가 혼란한 틈을타 , 내부 결속에 박차를 가하며 왕에 입지를 더욱 굳혔어야함 그게 현실감각이 없는것임. 원나라를 잡은 명나라는 아시다시피 화약, 총포까지 개발한 나라입니다. 조공을 바치며 반속국처럼 수백년간 대국에게 체제를 보장받고 명맥을 유지한 고려가 절대로 못이기는 싸움. 그리고 요동을 정벌 할려면 1,2차 때 했어야지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왕이 , 우둔한 명령을 한것 쿠테타고 뭐고 어자피 모든역사를 보면 다먹고 먹히는 싸움 조선왕조 후기가 개판이어서 그렇지 당시 이성계같은 강자가 나라를 잡는것이 오히려 고려에 명맥을 살려준것 어자피 , 여차하면 주원장인 명나라에게 고랴는 또 먹힐수 있었음 세계지도, 아니 중국 지도만 봐도 알수있듯 역사는 그렇게 흐름 후손이랍시고 , 온갖 감정 넣어 비난만 하고, 결과론적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라 당시 상황을 검증하며 최대한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 그것 만으로도 큰의미를 둬야함 글 읽어보면 역사를 모두 다 자기식대로 생각해서 어이없어 글남김
똑같은 역성혁명이지만 왕건과 이성계의 비교가 왕건에게 모욕적인 이유 1. 왕건은 폭군 궁예를 몰아낸거지만 이성계는 멀쩡한 국왕이었던 공양왕을 명분도 없이 폐위시킴 2. 왕건은 폐주하던 궁예를 죽이지 않았음(공식적으로 도망가다 백성에게 맞아죽음)궁예의 후손들도 잡아 죽이지 않았음 하지만 이성계는 고려왕씨를 조직적으로 학살했고 왕위에서 물러난 공양왕과 그 아들들을 모두 참수함(중국왕조는 전왕조의 후손들을 잡아 죽이는게 흔했지만 한반도 왕조중 저렇게 잔인한 학살은 이성계가 유일함 그 신라조차 원수인 백제왕실을 저렇게 학살하진 않았음) 3. 왕건은 반쪽짜리 나라로 후백제와 신라를 멸망시켜 한반도 통일을 완성시켰지만 이성계는 찬탈이후 아무 업적도 없이 아들과 권력싸움하다 아들에게 왕위에서 쫓겨남 4. 왕건은 비교적 자주적인 왕조를 표방했지만 이성계의 조선은 처음부터 중국에 굴종적이고 나라이름조차 중국에서 받아옴 우리가 흔히 아는 조선이라는 국명은 단군조선이 아니라 중국인 기자가 세운 기자조선을 계승한다는 의미임 가끔 이성계가 왜구와 홍건적으로부터 나라를 구했다 미화하는데 이성계가 싸운 대상들은 정규군이 아님 해적(왜구), 산적(홍건적), 망한 원나라 잔당들(나하추군대) 정규군이랑 싸운건 없음
최영장군의 붉은 무덤은 1976년까지 풀이 자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 초에는 조선 왕실에서 무덤에 풀을 심는 일도 있었고, 후에는 최영장군의 후손들이(보통사람들은 최영장군의 묘에 풀이 없는 것을 더 가치있게 볼 수도 있지만, 후손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숱하게 풀을 심었지만, 그 때마다 얼마 못가 풀이 죽어 붉은 무덤이 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도중 1976년에 후손들이 과학자들의 힘을 빌려, 그에 따른 조치를 취했는데, 그 이후로는 풀이 자란다고 합니다.
님이야마로 역사 공부 제대로 안하신것 같은데요 전쟁이란건 쉽게 일으키는것이 아니며 그땅을 점령해도 그걸 유지하는건 몇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전국토가 황폐화되 있고 백성들이 송곳 꽂을땅 하나 없는 당시 고려 경제력으로 그게 가능했을까요? 거기다 명이랑 전면전도 해야하는데 이건 어쩔건가요 이미 이성계는 1차 요동정벌 성공해서 요동을 점령했음에도 식량이 부족하여 바로 퇴각해야 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상황에서 그때보다 더 피폐해져 있었는데 회군을 결정한게 잘못했다 할 수 있나요? 그리고 세계사적으로 무슨 흐름을 거스른건지 설명해보십시오
어떤 영화에서 본 명대사가 생각나네. 비가 와서 공격 못하겠고, 큰 나라로 섬기는 지라 공격 못하겠고, 뭐 가 문제라서 공격 못하겠고, 이래서 저래서 못하겠고... 정벌 전쟁 하겠다고 군사 일으켜 나와서는 한다는 말이 전쟁 못 할 핑계꺼리 찾아서 회군해서 쿠데타로 엎어버린 비열한 새끼 얘기를 마치 무슨 큰 정의감으로 미화시키
역사는 승자가 쓰는것입니다 병사들이 도망가고 죽고 지쳐있었다고 했지만 .... 위화도 회군때 그 지쳤다는 이성계의 가별초가 개경까지 도착한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압니까? 병들고 지치고 탈영병이나고 다죽어 간다는 이성계의 가별초가 개경에 도착한게 3일입니다 3일 다 지친 병사들이 어떻게 그먼 거리를 3일만에 주파합니까? 그래서 최영은 군사를 모을틈도 없었습니다 이성계는 회군한 핑계를 만들었고 권력에 탐욕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맞죠. 당장 세종시기 4군6진을 개척할때에도 사민정책 등 엄청난 출혈을 동반하였는데.. 만일 요동을 운좋게 점령하였더라도 영토유지는 물론 백성들을 그곳으로 이주시켜야하는데.. 이에 백성들의 반발역시 해결해야하는 등 과제가 산더미인데.. 차라리 요동정벌 안하길 잘한것같긴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