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나 그 이전 시대나 국민의 평균 수명이 짧은 것은 맞지만 그건 사실 통계의 착시 때문이에요. 그 당시는 태어나 1살도 못 살고 죽는 영아 사망률이 워낙 높아 그것이 전체 평균을 확 낮춰 그렇지 일단 죽지 않고 잘 버텨 넘기면 그때부턴 현재 우리와 별반 차이 없이 천수 누리며 잘 살다 갑니다.
@@baejoonhan 맞는 말씀이신데 지금 만큼은 못살았죠. 당시 평민이든 천민이든 고희 그러니깐 만70이 되면 나라에서 정3품 벼슬을 명예직으로 주고 녹봉도 일정 부분 챙겨줄 정도로 기념해준 걸 보면 70이라는 나이가 엄청 고령으로 간주되는 것 같습니다. 정3품관이 영감이라는 호칭을 받으니 고희를 넘긴 할아버지들을 영감이라고 불렀고 그래서 영감이라는 표현이 지금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을 부르는 걸로 굳어진 것 같습니다.
@@박세정-k8c 효종때는 왕이 앞장서서 되도않는 북벌을 한다고 사기를 치고 자빠졌는데 분위기 잡는답시고 무과 급제자의 수를 1만명까지 늘리는 바람에 이때 합격자의 대부분은 평생 보직을 받지못하고 늙어 죽는 바람에 무과 급제증명서를 변소휴지 내지는 집안의 장식품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마니-h9i 아들 박취문의 경우 1644년 12월10일 울산에서 출발하는데 출발 다음날부터 좌수댁 노비와 동침을 한다. 이어 12월15일 노비 분이와 동침하고 12월16일에는 술집 여인 춘일이와 동침한다. 17일에도 술집 여자 옥춘이와 자고 12월19일에도 여자 노비와 잔 것 같고, 22일 술집 여인 향환과 자고, 26일 삼척 동문밖 술집 여인 예현과 동침하고 12월30일에는 강릉 기생 연향과 동침하며, 다음해 1월2일에는 강릉 명기 건리개와 동침한다.
근데 중간에 돌아가는 노비는 어떻게 잘 돌아갔는지 궁금... 주인이 집 돌아가는 길이라는 서찰을 쥐어주긴 했겠지만, 노비 거느리고 가는 양반도 대접 제대로 받지 못한 시대에 노비들은 집 가는 동안 어디서 숙식을 해결하고 했을지... 지금으로 치면 말하는 소나 말이 집 돌아가는 길인데 중간에 누가 잡아가 자기 노비로 쓰진 않았을지 궁금 ?
하나 둘 돌아가는 노복들도 역시나 최대 80일 이상 가야할텐데, 1. 그 여비는 또 어찌 해결하는지, 2. 예전에 산적, 호랑이 같은거 만나면 돈, 목숨이 위태로웠을텐데 그런 불상사는 없었는지, 3. 돌아가는 길에 노복이 도망가는 일은 없었는지... 4. 마지막까지 함께한 노복은 총 왕복 180일을 길 위에서 보내야하는건데, 180일 뒤에 집으로 돌아간 노비가 있긴 한건지... 궁금하네요.
1. 그거 다 고려해서짐 꾸려가지고 온거겠지. 2. 호랑이랑 도적은 산 넘을때 무리지어서 통과한다고 했음. 3. 조선시대 제법 사는 양반가 노복이면 현재 중견기업 회사원이랑 다를게 없음. 추노들은 주인들이 제대로 안맥이고 졸라 핍박할때나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론 노비되면 먹고살 걱정도 줄어들고 흉년와도 비교적 안전해서 나쁘지 않았음. 4. 당연히 돌아갔겠지. 못돌아간애들도 당연히 있었을 테고
거리도 거리지만 저때는 한반도에 늑대, 표범, 곰, 호랑이 등 맹수들이 우글우글거릴때... 흐미... 호랑이가 문을 뚫고 들어가 일가족을 몰살시킨 기록도 있음 ㄷㄷㄷ 지금이야 가뿐한 마음으로 산책 빨러 다니지만 저때는 먼길을 나설 때 유서를 쓰고 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ㅜ
"이땅에 그 많던 말과 마차들이 다 어디갔나? " 고려멸망,이조선개국 3년후 평양과 한양을 방문한 송나라 학자가 한 말입니다. "이땅에 그 많던 말과 마차들이 다 어디갔나? " 송사 궁월록에 기록된 학자 평한림의 이조선 방문기입니다. 단 30년도 아니고 단 3년만에 사라진 말과 마차들이 거리에 붐비던 고려시대 도성의 모습을 연상할수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평한림은 맨끝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모든 상인들이 개나리봇짐을 등매고 걸어서만 조선팔도를 다닌다 왜 말이나 마차를 안타고다니냐고 물어보니 나라에서 금지시켰다한다. 말을 타면 4일만에 다녀오던 길을 조선인들은 걸어서3개월동안 다닌다. 이건 아니지 않나"? " 집집마다 말이 있던 고려는 사라지고 마차는 가마로,말대신 도보시대가 되었다 아 ~ 비오듯하던 고려의 말문화가 사라졌다~며 아쉬워하던 대목.... 고려인이나 조선인이 쓴 방문기가 아니라 외국인 방문자가 쓴 기록입니다. 여러분들이 알고있는 고려와 조선은 완전히 달랐다는 역사적 증거가 됩니다. 국내 유일의 바른역사 연구회 참역사 펌: 참
존경하는 kbs실험실님 안녕하세요~저는 40년째 국내외 역사를 연구하고있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동북공정이란 단어를 언급한 사람입니다.그만큼 국내사학계에서 둘째가라면 서운한사람이죠.동북공정이란 중화사상 즉,중국중심의 역사개념이고 우리역사에서의 동북공정 핵심은,중국이나 일본이 아니라,놀랍게도 바로 조선왕조라는 팩트입니다.아시겠지만 조선왕조는 중국지방왕조로 오백년 중국식으로 통치했고 대표적 제도는 식민제도로써 상놈신분제도(노예,노비,백정,관기제도/전국민96%)특히 관기제도는 세금으로 모든고위공직자위한 음주섹스제도)등이죠.이조선오백년으로 인해 현재 우리는 무의식적인 중국인 최면상태입니다.예를들어 국사의 기본이 중국이죠.중국글(조선한자)이 아니면 전혀 인정못합니다.(예를들어 독일고고학논문(가야이주론),일본서기(천황은 고려계),원,청기록은 물론 터키교과서(중2 같은 몽골계열),프랑스,네덜란드(고려제국기),심지어 교황청(만주의고려영역)등의 모든 국제적 기록까지도 절대 인정안합니다.인정안한다기보다 못한다고 보는것이 타당하리라 보입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식도 아닌 완전히 중국계이씨왕족만을위한 소중화지상낙원을 만들어 오백년넘게 통치한 사실은 분명합니다. 대표적으로 현재 나라이름(대한韓민국)국기(태극기/주역그림 복제판)뿐아니라,현재 국민거의 중국한자석자이름을 남이 지어주는 중국식민픙숩으로 내공된 내면 지식(뇌해킹된상태)라고 말하기에 충분 합니다.조선때 고려지명(예:고려지명 완산주(중국지명 전주로 개명)외,강릉 양평등등)까지 중국지명으로 바꾼상태입니다.(서울,동울(강릉)등) 모두가 남이 써논거(주로 이조선때 지들중심으로 멋대로 그럴듯하게 마구조작해쓴내용)을 마치 종교계 성경암기하듯 외우고 시험보고 가짜논문 학위로 졸업하는 현실(전국 대졸자99%가짜학위)생각성자체를 말살된채 정작,진실은모른채 옛것이 무조건 진실,정의인양 인식하고 암기한 지식(죽은지식)한번도 그 진위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볼수없도록,검증자체가 죄악시된 뇌색용 교육으로 현재 사학자중 단 한명도 검정못한채 지식이라며 떠드는 세습상태 한국사학계 모습,풍습...결론은 우리국민은 천민,죄인(상놈)무뇌이고 오직 이세종,이순신이 위대하다는 식의 비상식적인 상태 바로,철저히 노예화된 뇌상태 아닐까요? 아무튼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생활하고있는 상태의 진행중인 현실 즉,전국민 무의석적인 반중국인상태인 내면적 실체을 깊이 생각해주시길바랍니다.조선왕조 즉 중국계 이왕조는 고려말 원나라에서 망명,귀화한 오리지널 화하족 이자춘(전주이씨 시조)가족이고 자식대 신분세탁후 쿠데타로 왕족된 사실,이후 오백년간 중국식 식민통치로 지네 이씨들만 급번식(현재 650만/이완용계)한,전관예우=황금만능/남욕남탓/내로남불 정신병 퍠헤 현실이라는 점 알려드립니다. 우리는 본래 고려인이고 고려가 바로 우리자신이란점! 님이 중국계이씨가 아니시라면 절대 이조선왕조를 칭찬,찬양,우상하시면 절대 안되겠습니다.만약,그런다면 이씨들 개돼지가 되기때문입니다.또하나,고려사상으로는,당신이 이세종 이순신보다 더 훌륭한 분이십니다.그러나 조선사상으로는 우리는 천하고 상놈이기에.절대로 이세종이나 이순신이 될수없죠.좀더 우리역사의 진실을 알고싶다면 참역사 카페 논문방을 참고 바랍니다.항상,건강하시기바랍니다~펌:참
@@vksvlfls7555 답답하시네요 평현림일기는 송나라 출신으로 명대사람입니다. 갱상도나 전라도 출신 사람이란 뜻입니다.님의 생각과같이 현재 韓국사개념은 암기만으로 생각되기때문에 질문과같이 내용에 생각성이 없죠. 최면현상이란 겁니다...ㅠㅠ..그래서 가짜논문99% 백년째 무노벨상 교육계 현실인거죠~
이 영상에서 주의 할 점이 있다. 저 당시 관아가 숙식 제공에 어려움을 격을 만하다는 것이다. 부방 길에 오른 박계숙이 집에서 출발 한 시기가 1605년 10월 17일이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1598년 12월 16일에 끝났다. 즉, 임진왜란이 끝난지 겨우 6년 10개월 된 시점이다. 임진왜란이 얼마나 큰 전쟁이고 조선의 물적 인적 자원이 모두 소진된 전쟁임을 생각하면, 저 시기 상황이 꼭 조선 전체의 상황으로 보기는 어렵다. 역사를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하면 오판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가지를 살펴 보고 확인과 검증을 거쳐야 한다. 이 영상은 임진왜란 직후 이야기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한 가지 더 추가하려고 수정을 했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장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다. 그래서, 세금을 적게 걷고 대신 직접적인 노동력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이 농업 중심의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세율이 매우 낮은 국가이고 대부분의 경우 노역으로 대체한다는 점을 생각 할 필요도 있다. 쉬운 예로 조선의 세율은 10%대였는데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를 점령하고 함경도민이 스스로 항복하자 기분이 좋아서 세율을 낮춰 준 게 50%였다. 전국시대 일본에서 세율 50%는 보기도 힘든 수준의 낮은 세율이였다. 심한 경우 70%는 그냥 넘었다. 즉, 당신이 농부이면 농사 지은 쌀의 70%를 정부가 가져간다. 조선은 적게 걷는 대신 국민들 스스로가 대부분 자율적으로 노역을 하고 정부의 의무에 사비를 쓰도록 하는 방식 이였다. 조선 말기 이런 방식이 부패와 연관되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만, 조선은 500년이나 지속된 나라다. 조선 말기 부패에 얼룩진 기간보다 정상적인 행정을 시행했던 시기가 더 길다. 당장 우리가 흔히 조선의 전성기라 부르는 임진왜란 이전 조선 시대만 해도 근200년이다. (1398년~1592년)
@@trust1006 아니 그렇지가 않아요 노비의 도망이 많아지는 건 조선후기의 일이고 저때만 해도 노비가 도망가다 잡히면 거의 죽음에 처해지거나 아니면 죽을만큼 때렸기 때문에 도망노비는 거의 없었습니다 퇴계이황(1501~1570)의 경우 일생동안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벼슬살이를 했고 그가 물러나 쉴때에는 장남이 지방관으로 여러곳을 전전하며 근무했기 때문에 자식들(대부분 장남)에게 1천여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편지의 발신일을 보면 거의 3~10일 간격으로 편지를 발송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과 비교해 봐도 어마어마한 편지의 양입니다 퇴계는 조선제일의 노비재테크 전문가로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는데 자신의 기록만으로도 거느린 노비의 이름이 4백명이 넘을 정도로 노비가 차고 넘쳤기 때문에 연락원 역할을 하는 노비들이 정해져있어서 이들이 서울과 안동을 오가며 편지들을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물론 그 노비들이 오고가는 동안에는 숙식비 등 상당한 비용을 지불했겠지만 퇴계가 워낙 부자여서 그런것은 개의치 않았겠죠 다만 당시에도 농뗑이를 치는 노비가 있었는데 편지에 보면 서울에서 억만이라는 노비를 고향집으로 보냈는데 돌아올 시기가 지났는데도 오지않자 추가로 보낸 편지에서 "억만이 그늠에게 일찍 출발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도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는걸 보니 그 굼벵이같은 늠이 틀림없이 제때 출발안하고 게으름을 피웠을것이다"고 책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회재 이언적도 57세때인 1547년(명종2년)에 평안도 강계로 유배를 가서 그곳에서 63세때인 1553년 사망했는데 6년간 유배생활동안 노비를 시켜 경주 양동마을에 사는 동생 이언발과 수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여러가지 집안문제 특히 재산관리 및 양자를 들이는 문제를 상의했습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박취문은 그리 부자가 아니어서 임지에서 울산 본가로 1년에 7통만의 편지를 보냈고 그것도 현지로 떠나는 인편(주로 아마 장삿꾼인듯)을 수소문하여 간신히 부탁을 한것 같습니다
근데 조선시대가 암울한거임요 고려시대까치는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주로 말이나 마차로 이동을 했어요 군 보급품도 더 빨리 수송할수있었구요 실제로 고려시대때는 대군을 동원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금나라 성종이 쳐들어왔을때 강조가 30만 대군을 일으켜서 맞서 싸웠고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을 할때도 19만 이였음요 윤관이 여진정벌 할때도 17만 대군이였구요 반면 조선은 폐쇠적인 전략으로 적이 침략을 하지 못하게 멀쩡한 길을 파괴하고 이동을 불편하게 만들었죠 오히려 이게 악재가 되어서 보급이동이 어려워 지고 마차와 말보다 가마 나 그냥 걷는걸로 대체 되었죠ㅋㅋ 따라서 군보급도 늦어지고 대군을 일으킬수도 없어서 조선시대에 5만 이상 거병한 경우가 거의 없음요ㅋㅋ
@김현중김현중 모르시는건 님이구요ㅋㅋ 고려는 말이 중앙집권왕조 이지 실상은 봉건국가 나 마찬가지고 호족들이 사병을 가지고 있었어요ㅋㅋ 대호족들은 수천의 사병을 소유하고 있었고 보통 수백의 사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전국 호족들의 사병을 모으면 5만~8만 사이였어요ㅋㅋㅋㅋ 거기다가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가 3만이였구요ㅋㅋㅋㅋ 국경요새를 지키는 군사도 1~2만정도였어요 이것만 합쳐도 10만이 넘구요 강조가 30만 대군을 동원할때 백성들을 동원했죠ㅎㅎ 사병+정규군+동원된 백성 조합이였니다ㅋㅋ 여튼 군사적으로는 조선보다 월등했습니다ㅋㅋ
@김현중김현중 님이야 말로 제말을 이해를 못하는군요ㅋㅋ 누가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발단한 체계라고 했습니까? 봉건제가 덜 발달된건 당연한거 아닌가?ㅋㅋ 고대 중국왕조도 다 봉건제였는데ㅋㅋ 주나라 와 한나라가 봉건제 였던거 누가 모름?? 내말의 요지는 군사적 의미로 봤을때는 암울했던 조선시대 보다 낫다고 한거지 누가 봉건제가 중앙집권제보다 발달한 체계라고 했음?ㅋㅋ 그리고 헌종 이야기 했는데 님 말대로 도망다니다가 다시 권력 회복 할수있었던 계기가 먼줄암?? 바로 본인의 직속영지 였던 나주의 세력 때문임ㅋㅋㅋ 그건 알고 있남?ㅋㅋㅋ 그리고 세조때 100만?ㅋㅋㅋ 세조 때 조사한 실제 기록이 있고 전국팔도의 군사가 19만이라고 기재 되어있었는데 먼 개소리임?? 이것도 실제 병력이 아니라 병적에 이름 올라와있는 백성들을 포함한 숫자임ㅋㅋ 당시의 실제 기록이 적혀있는 서책이 있는데 무슨 개소리를 함???ㅋㅋㅋ 님아 책 좀 보고 이상한 유튜브 나 넷상 글보고 현혹 되지 마시고 저보고 공부 못한 티 낸다고 했는데 댁보다 학벌 좋다고 확신함ㅋㅋㅋ 아! 그리고 실업계 이야기 하는데 나 한국학교 안다녔음ㅋㅋ 호주에서 살다가 대학교는 영국대학 다녔음ㅋㅋ
@@Komiopa 조선은 기본적으로 군역에 필요한 장비를 상당 부분 자기 부담으로 해결했습니다. 더군다나 무과 준비에 필요한 장비는 가격이 비싸기 때문에 나라에서 그걸 다 제공하는 건 불가능했죠. 전시에 보급을 해주는 경우는 있었겠지만요. 조선 전기에는 무반이 아닌 그 밑의 계급인 갑사를 뽑을 때도 재산을 보고 뽑았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말 목장의 감소로 말은 더 귀해졌고요. 농경국가에서 기병이 된다는 건 재산이 있거나 재산이 없어도 전투력이 뛰어나서 말과 장비를 얻을 능력이 있다는 걸 뜻하죠.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조선은 문무반을 불문하고 양반들에게는 지상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저때는 호랑이만 걱정하면 되지만 요즘은 시도때도없이 교통사고를 걱정해야하지요 저때 호환보다는 오히려 요즘 교통사고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높아요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수는 2015년 4621명 2019년 3349명인데 통계가 없어서 정확히 말할수는 없지만 조선시대 호환 사망자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1개도에 연평균 10명이 안되는것으로 압니다
@@이통영-y9v 사기꾼 국사학자의 농간 - 본인이 하시는게? 양반에게는 지상천국같은 나라... - 뭐 SKY대 가기 힘들면 유학가서 하버드 가면 되잖아요? 공부할 때 배고프면 빵 대신 케이크도 좀 먹어가면서... 기승전 빠구리 - 지상낙원 별 거 없었네요. 돈이나 빽만 있으면 누구든지 프리패스?
방송 보는데 와와 잡음좀 넣지마라 .시끄러워 방송 못 보겠다..조선시대가 썩어 문드러진걸 다시 느꼈다 요즘 정치인의군미필이나 면피용 군복무대용 사회복무등 떳떳해 보이지않는다. 과거 무관의 대우가 부족한것이 조선왕조의 국가 관리에 큰 오점을 보여준다. 그러니 나라가 툭하면 전란에 왕조는 피난을 가고 애꿋은 백성만 생사와 온갖 고생을 했다.결코 미화시키기만하는 조선왕조는 이제 그만 해야 한다.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조금더김숙희-t7y 아니지요 집안의 노비들도 회령에 있는 주인을 모시러 오고가는 동안에는(약160일) 집안의 온갖 힘든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이고 여행도 하면서 산천도 구경하며 유유자적 하는거죠 물론 아마도 주인의 짐을 바리바리 싸서 지게로 져야하니까 그것은 좀 괴로웠겠지만
저때 부임지까지 노복들을 많이 데리고 가는것은 부임지까지 가는 주인의 기본적인 짐에다가 저때만 해도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않아 물물교환 경제였기 때문에 밥값 여관비 등을 모두 실물로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주로 식량 아니면 무명 비단 등) 그짐이 엄청났을 것입니다 박취문의 부북일기에 보면 회령으로 가는길에 강릉에서 예쁜 기생과 빠구리를 하고 그 사흘후 또다른 기생과 빠구리를 했는데 앞서 빠구리한 기생이 매독환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뒤 빠구리 기생이 자기에게 전염될것을 우려해 엉엉 대성통곡을 하자 박취문이 미안한 마음에 약값으로 하라며 무명 두필을 주자 기생이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게 물물교환 경제여서 화폐대용으로 지불할 물품이 엄청났겠지만 그걸 노비들이 나눠서 지게에 지고 주인을 따라갔다가 부임지가 가까워 올수록 점점 짐의 양이 줄어들자 노비들을 차례대로 돌려보낸것입니다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
두가지 이유가 있음 조선은 세금이 쎈나라가 아님 길을 닦으려면 예산 소모가 극심한데 길을 닦아 얻을 이득이 구까 재정을 쓴거에 비해 이득이 크지 않다고 판단함 화폐보다는 물물 교환 경제 시스탬이라서 더더욱 그럼 두번째 한반도의 ㅈㄹ같은 토질임 한반도의 암반은 화강암이 많음 화강암은 단단하고 무거워서 가공이 어려움 이로인해 토목공사에 어려움이 큼
박지원이 청나라를 다녀온후 쓴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발전의 근원은 수레와 바퀴의 사용에 있다고 이를 활용해서 지역간 이동과 유통을 활성화시켜서 경제와 산업을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멍청하고 어리석은 임금 정조는 열하일기의 문체가 정중하지 못하고 튀는 문장이 많다는 이유로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하고 박지원에게도 스스로 사상검토(오늘날의 북한체제에서 하는 자아비판 및 사상토의의 모티브가 되는)를 하도록 했습니다 근본적으로 조선의 왕들은 부국강병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이 그보다는 어떠한 외부의 불순한 문물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자신들의 왕조가 영원히 유지될수 있도록 천년 폐쇄국가 체제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사이코패스 독재자 세종의 유훈이기도 했고요
후대에 지은 경부선 철도도 소백산맥넘는 영동구간보면 선형 환상임 경부고속도로로 그 구간에 옥천터널같은거 만든다고 생고생을 함 지금은 선형개량을 했지만 당시 지어진 옛 경부고속도로 구간들 지금 보면 저기서 운전하라고???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노답임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도 힘들었는데 당시엔 정말 노답인것
사기꾼 국사학자들의 농간에 전국민이 놀아나는데 조선은 문무반을 불문하고 양반들에게는 지상천국 같은 나라였습니다 박취문이 쓴 부북일기(이책의 번역본이 전국 방방곡곡 어지간한 도서관에 있음)에 보면 부임길에 3일에 한번꼴로 방방곡곡에 있는 유명한 기생들과 빠구리를 실컷하고 부임후에는 관찰사로부터 직방기생이라는 근무기간동안 나라에서 빠구리용으로 정해주는 기생을 배정받아 원없이 빠구리실컷하고 군복무를 합니다 심지어 중간에 근무지가 바뀌면서 새로 배정된 직방기생은 남편이 있는 몸이라 수청을 거부하자 말발이 안서서 열받은 관찰사가 그 기생의 어머니와 오빠를 불러서 공갈용으로 곤장 한대씩을 때리자 놀란 기생이 하는수없이 빠구리를 허용했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