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영상은 시리즈 중 16번째 영상으로 이전 영상들을 먼저 보시면 더욱 좋습니다. (본 영상부터 보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 1. 칼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hfEzUsx3gbc.html 2. 창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KELXTgQmVqI.html 3. 활/석궁 시리즈 보기: ru-vid.com/video/%D0%B2%D0%B8%D0%B4%D0%B5%D0%BE-UipVIHOjxr0.html
미국에서 한중일 칼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방법으로 제작해서 강도 테스트 했는데 일본 칼이 제일 무르고 약했어요. 그래서 사무라이들이 칼 2개를 가지고 다닌 것이고 일본 칼은 몇 번 부딪친 후 망가져서 이후 상대방을 눕히고 작은 칼로 쑤시는 싸움을 했어요. 그래서 접근전에 필요한 유도가 발전한 것이구요. 우리나라는 철기문화가 세계에서 가장먼저 발달 된나라인데 왜도가 더 강할리 만무합니다. 국뽕이라고 호도하기 전에 일본의 거짓된 선전에 속지 마시고 미국 내셔널지오그래픽 테스트 영상 보고 이런 영상 올리세요. 당신 동영상 보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사실을 진실로 생각하게 될 지 걱정은 해 보셨나요? 고증을 하려면 다양한 문헌을 참고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세계 최고로 알려졌던 일본의 화지도 최근 우리나라 한지보다 품질이 못하다고 밝혀져서 세계 시장을 90% 이상 석권했던 각국의 유물 공예품 복원에 한지가 사용되기 시작했어요.
@@nuskinbiz 무기란 단순히 내구성만으로 위력을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차원적으로 생각치 말아 주세요. 그저 내구성만으로 무기의 우월을 가린다면 돌로 싸우지 왜 철로 싸워요? 제발... 다방면적인 생각을...;;; 제 영상 중 편이 있으니 보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당시 기록들을 살펴 보면 우리 조상님들이 직접 적의 무기인 일본도를 극찬하시고 또 따라도 하시고 가져다 쓰기까지 하셨는데 무슨... 그 시대를 살아본 적도 없는 우리가 백날 내구성 하나 갖고 우겨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역사는 부끄럽고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있는 그대로를 봐야 합니다.
@@Orang_Fantasy 일본도를 극찬했는 지 어쩄는 지는 모르겠고,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긴다는 이유로 일본도를 연구했다고 역사 다큐멘터리에 나옵니다. 극찬을 했다? 활로 말하자면 화살을 쐈는데, 꽂히는 게 아니라 툭하고 부러지면 적이 ㅋㅋㅋ 하고 비웃겠죠? 일본도도 툭 하고 부러지면...ㅋㅋㅋㅋㅋ 하고 웃을까요, 안 웃을까요? ㅋㅋㅋㅋ 혹시 일본도 칼 길이나 날이 예리하다거나 그런 거 칭찬했다면 몰라도 잘 부러지는 거라면 비웃음 당했을 거 같네요. 고구려군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가진 이유를 다큐멘터리에서 봤는데, 화살이 안 꽂히는 갑옷을 발명했다고 합니다. ㅎㅎㅎㅎ 일본도를 뿌러뜨리는 조선검이면 우월한데요. 단 길이가 짧은 걸 그대로 쓴 게 사실이면 뭐..... 설마 일본이 침략할 줄 몰랐어서 그런 거겠죠. 미리 알았으면 바보도 아니고 .... 일본을 미리 연구했겠죠
@@mathamour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일본도의 내구성이 나쁘진 않았습니다. 걍 귀찮으니 제 일본도 영상 ㄱㄱ 선생님이 본건 걍 무식하게 칼에 칼을 내리치는 실험이었겠죠^^ 그리고 말씀하신 게 맞다면 우리 조상님들은 왜 일본도를 수입해서 쓰셨을까~~~요? 그리고 왜 일본도 장인에게 기술을 배워와 똑같이 만드셨을까~~~요? 자꾸 내구성 하나 갖고 우기시는데 다각적으로 생각 안 하실거면 더이상 답글 안 달겠습니다^^ 걍 님이 맞는걸로~
@@내추럴햄력 각 군 특성따라 자위방위 틀리고 좁혀서 그안에 기능성맞게 훈련 다 맞춰서 돌아갑니다...시가전을 500만군이 할순 없잖아요 A B C D 상황에서 놓고 시가전을 하다 끝을보면 500만군의 인해전술이지 그게.. 본인이 2년 근무하셨던 하시면서 본 군체계가 다가 아닙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짧은칼을 쓴 이유를 또한번 정리하자면, 조선군의 편제 때문입니다. 조선의 전/후기 역사는 다들 아시다시피 임진왜란 전/후로 나뉩니다. 조선 전기는 영상에 나온데로, 조선군의 편제는 대부분 활, 창, 그리고 집단으로 운용가능한 무기를 대부분 운용하였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원앙진에서 알 수 있습니다. 원앙진은 창/대나무가지창(낭선)/장창/당파.... 그리고 방패와 함께쓰이는 환도를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왜구의 전투력은 생각을 초월하는 용병집단의 전문전투집단(대부분 해적)이였으며, 이를통해 정주문명인 조선, 명, 원 등은 대부분 병력편제를 징병으로 메꾸기에 이러한 전투력에서 극심한 차이를 보였습니다. 1) 이에따라 짧은 훈련기간/강도를 요구하였고, 이는 원앙진이라는 편제를 사용하여 왜구의 전투력을 상쇄하고 격퇴하였습니다. 따라서 개인의 전투력=칼의 길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개개인의 전투력이 높아 자유자제로 검술을 사용하던 왜구와 달리, 훈련이 덜 된 조선 등 국가 병력편제는 이러한 무기사용의 제한을 강요하였습니다. 이에따라 방어하기 수월한 방패와 함께 쓰일 수 있으며 휴대성과 운용성이 방패와 사용하기 편한 짧은 칼이 선호된 것입니다. 2) 또한 조선군의 편제가 수성전을 중심으로 한, 지역방위를 중심으로 한 편제로서 창, 당파를 많이 사용하였으며 중앙군 및 일부 지방군의 훈련이 잘 된 살수를 중심으로 활이 발전(이는 동북아에서 특이하게 발전된 형태, 활은 다루기 힘드므로 대규모 편제가 쉽지않음)하였고, 특히 15세기 말무렵부터 전파된 화약의 사용으로 총통 및 수포를 사용하는 편제가 더 보급되어 사용되는 시작의 시기였습니다. 한마디로 근접냉병기의 쇠퇴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화약은 보급/사용이 어렵고 관리가 까다로우며, 특히 화약의 주재료인 당시 초석은 생각보다 구하기가 어려워 조선도 대규모로 운용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임진왜란-조선 후기는 냉병기중 칼의 길이, 즉 환도의 길이가 길어졌다가 짧아진 과도기적 시기입니다. 일본군의 전국시대를 통한 정규집단의 개개인 전투력이 어마무시하다보니... 그리고 일본자체가 전국시대라는 긴 내전을 겪음으로서 여러 무기가 발전하였고, 특히 창의 길이가 가문별로 천차만별이나 조선보다 훨씬 길었고, 칼은 말 할 것도 없었습니다. 또한 타네가시마 뎃포(일명 조총)를 사용하는 왜군의 전술은... 전쟁준비가 전혀 되지않은 조선에게 선택과 집중을 강요하였습니다. 1) 이에따라 임진왜란에 의한 왜의 조선침략시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무기체계로 왜군을 상대해야했고, 왜란동안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위해 조선또한 공격적 편제를 강요받았고 전쟁을 겪으면 겪을수록 조선군도 단련되어 점차 긴 칼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임진왜란 간 일시적 현상으로 보입니다. 2) 이후 임진왜란을 겪으며 본격적인 명나라 참전에 의해 화포에 대한 군수보급체계가 확립이 되어가면서 화승총의 사용빈도 증가, 조선군또한 화포 및 수포, 조총편제 적극적인 사용에 의해 칼은 주로 주공격용 수단으로서가 아닌 이 사수들을 위한 사수의 자체 방어수단으로 점차 짧게 변화되어갔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임진왜란 이후 호란에서 본격화 됩니다. 조선에서의 칼은, 아니 동북아 한반도에서의 칼은 고조선 부터 삼국시대와 고려중기까지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고, 그 이후부터는 타국의 침략과 영향에 따라 달라졌다고만 보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선의 칼은 일본도를 배꼈다는 말이 나와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선도 분명한 보급체계에 따른 편제가 존재했으며 무조건적으로 그렇게 일본에서 왔다고 하는 말은 단순히 역사드라마만 본 개인의 오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꾹새 그러고 보니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한 중국도 화약무기 운용병력 육성의 어려움과. 유지 보수 난점. 초기 화약무기의 더럽게 낮은 신뢰성의 환장의 콜라보에 학을 때고 화약무기 발전에 그렇게 까지 투자를 못한 걸로.... (서양이야 국가가 전투에서도 많아봐야 몇천명이 깔짝거리는데... 중국은 내전에서 5자리수 이상의 병력이 격돌하는 나라다 보니... 보급 문제가 정말심각...)
핵심은 조선은 돈이 없슴. 이것저것 할려고 해도 돈이 없슴. 오줌물, 빗물 받아서 만드는 초석은 한계가 있고. 사회 자체가 사농공상 이라 엔지니어를 대우를 안해. 그리고 엔지니어가 다 노비야. 칼 겁나 잘만들어도 돈도 안줘. 이런저런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조선이란 나라의 체제가 가진 한계에 다 걸리게 되어있슴. 모든것이. 그래도 우리는 믿는게 있지. 반도의 지형과 기후는 1592년 한해 겨울 왜놈 8만을 보내 버렸지. 한반도가 만만한 땅이 아니거덩. 예전에 거란이 한번 들왔다가 첩첩산중에 추운겨울에 아작났지. 만주벌판에서 말타다 반도는 처음이지? 625때 중공군. 미군도 아작났지. 반도 의 천혜? 의 자연이 아니였다면 민족정체성을 아직까지 지키는게 가능했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감사해야 하나~?
오랜 평화때문에 오죽했으면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그냥 대충 활만 쏠줄 알면 군관, 즉 장교로 채용했다고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게다가 침입에 대비한답시고 축성을 하긴 했는데 방어에 비효율적으로 규모만 크게 쌓은데다 그마저도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의 반발로 무산되었죠. 그리고 아무리 수성전과 방어전이 주라지만 원거리는 잘싸우는데 근접만 붙었다 하면 깨졌다는 기록도 종종 나왔구요. 그래서 근접전이 딸리는데 근접전이 잦은 일본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명나라에서 척계광이 고안하여 훈련시킨 절강성 군사들의 전술인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훈련도감을 통해 삼수병 제도를 육성했을까요.
일단 성종때부터 문관등용에 힘쓰는것때문에 문약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게 200년동안 지속되다보니 아예 방진 자체를 만드는 장수도 없었다고 했고 또 임진왜란전 양민보다 노비가 많았으며 그나마 대비를 위해 성벽증축하는것도 백성들과 관리들 불만 폭주로 하다 만것처럼 됐으니....
영상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주관으론 조선시대에는 원딜의 민족이자 농사의 민족이라 할만큼 평소엔 농사를 하다가 전쟁 시 농사짓던 예비군이 자신의 소속 집결지에 모여서 지휘관을 따르는 방식이었기에 (물론 상비군이있긴하지만) 오히려 도검의 무기는 적합하지 않은 무기가 아닐까 생각됩니디. 실제로 편곤이라는 무기가 칼보다도 농사짓던 조선에선 더욱 유용했고 정기룡같은 명장들도 이러한 무기로 놀라운 성과를 갱신한 부분이있죠 거기다 이후 서적에 기록된 진법등을 보더라도 창과 편곤 활이 중심이지 칼은 중심적인 무기가 아니었던걸 보면 주력 냉병기의 차이일뿐 임진왜란 후반부나 정유재란때의 전쟁양상을 보고 감히 추측해보자면 당시 조선엔 굳이 검을 주력으로 사용하고 검을 강하게 만들 필요성이 없던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좋은 영상 감사합니다
조선도 북방영토를 확보하기 위해 여진군이랑 뒹굴때는 아직 두만강 압록강 경계를 확보하기 전이었고 물론 이후로도 여진족이 끊임없이 돌려줘를 시전했기에 기마전이 어려운 산악에서 백병전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때가 조선군의 검술실력이 가장 월등했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고려시절에는 술내기 밥내기도 칼,활로 놀이를 할만큼 헬반도였는데 비해서 많이 사람냄새가 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 조선의 경우 칼잡이들이 없는건 아니었습니다. 구름을 벋어난 달처럼에서 나오는 대동회 같이 조선에서도 칼잡이 집단이 있기는 했는데, 조선은 이미 군대 체제가 활과 화약으로 변화해 가던 체제였습니다.(현대에 와서는 대검 외에는 칼날이 남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칼잡이라고 하면 조선 사회에서는 십중 팔구 둘중 하나로 취급되었는데, 돈만 주면 누구든 죽여주는 킬러 혹은 반란을 꾸미는 수상한 무리 둘 중 하나였죠. 2. 철이 양산 되기 이전이라 칼이 비싼 무기인게 사실이지만, 사실 합성궁의 경우도 만만치 않게 비싼 무기였던게 재료부터 물소 뿔(당연히 동남아시아 국가로 부터 수입해야 합니다) 접착제로는 아교등등을 써야 했고 거기에 온도나 습도에 큰 영향을 받는 무기였죠. 그리고 화약의 경우도 초석을 생산해야 하는데, 고전적인 방법으론 화장실이나 처마 등등 같은 장소의 흙에서만 생산 가능했고 당연히 그 양도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3.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작은 전투는 그럴저럭 해내지만 국가 역량이 총 동원되어야 하는 대규모 전투에 대한 노하우나 역량이 없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봅니다. 즉, 소규모 왜구나 북방 오랑캐들의 침략은 그럴저럭 잘 대처합니다만 이상할 정도로 이게 중앙 정부의 판단이 들어가야 하면 일이 늘어지거나 판단이 꼬이기 시작하죠. 당초부터 어디서 어디까지가 현장 판단 사항이고 어디서 부터가 중앙정부 사항인가 하는 사항도 없다보니 현장만 골탕 먹는 이상한 지령이 내려오는 경우도 흔하고, 거기에 방구석 제갈 공명은 왜 그리 많았던지.
@@솔레미오네 사실 조선 왕조 내내 전면전을 각오해야 할 수준의 전쟁은 두번 뿐이었던데 반해서 지역의 반란은 상당히 자주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느쪽을 더 중시할까요? 몇백년에 한번 일어나는 큰일, 아니면 몇십년 주기로 일어나는 작은 일? 정답만 이야기하자면 둘다 준비를 해야 한다지만, 막상 내가 조선의 왕이 된다 해도 조선이라는 시스템 하에서는 그게 한계입니다.
보조무기라 패용 방식도 달랐을뿐더러 가격이 비싸 일반평민이 지닐수가 없는 무기였습니다 길이도 소태도 정도의 길이에 단병전을 하기에 애매했습니다 그리고 전술상 원거리 공격후 잔당을 처리하는 방식이었기에 검술자체가 별로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즉 쓰임새가 그리 크지 못했죠 이러한데 칼 또한 편수검의 형태에 일면평조형 도신이라 공격력 또한 극대화하지 못하는 단점으로 계륵같은 무기여서 효율성이 너무 떨어진것도 있고요
@@크레용-g7g 무슨 개소리고? 영락제가 조선세법을 칭찬했다는 소리는 있으나 립서비스고 숙종이 임진왜란 당시 단병전에서 썰린게 근접병기 교본이 너무 허접해서 그런건데 그거 보완 시켜보자고 군관 김체건 시켜서 일본 신검술 배워오라고 해서 숨어서 훔쳐배워서 왕앞애서 시전해보인게 8대 유파 검술이었다 화약무기 발달로 의미가 없어지는 냉병기 기술이라 그냥 흐지부지 됐고 환도의 개량화도 물건너 가서 그냥 왜도술이라는 이름으로 무예도보통지에 실린거다 천유류, 류피류, 토유류 등 4개만 남아서 기록된 거라고...이 나라에서 제대로 기록된건 본국검이랑 조선세법 딱 두개가 끝이다 그 중에서 조선세법은 24수에서 대부분 실전돼서 8수만 전해지다가 24기 같은 고전 무예 연구자들에 의해 12수까지 복원시킨게 다다 그것들이 예도라는 이름으로 실렸고 이 반도 역사상 검술로 이름을 날린적도 없고 경단이나 뫄한머루, 기천검 등등 예전에 내려오던 무예들은 전부 춤사위에 가까워서 실용성 떨어지는 사이비 무술이라고 욕처먹은게 언제적부턴데...역사를 아무리 파봐도 이런 계통은 기록이 거의.전무하다 일본도가 뛰어나단게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는건데도 이상한 티비 프로에 나오는 패널들 말만 믿고 국뽕 한사발 들이키면 너도나도 재야사학이 돼서 찬양만 하니 역사자체가 왜곡이 돼지 쯧쯧
대규모 전투가 없다뿐이지 북방에서는 여진족과 자주 충돌이 있긴 했었죠. 이 경우 여진족은 주로 기마 부대다 보니 치고 빠지는 걸 막는 전술이 발달하게 되었지만, 임진왜란 같은 전면전의 주로 밀고 들어오는 대 보병에 대해서는 전술이 미흡했던 것이 흠이었죠. 이전 전투방식이 대기병 전술이니 그냥 말이 못 다니게 하면 쉽게 막히는 것과 달리 일본군 보병들이 성벽을 기어올라오니 당황할 만하죠. 대보병 전술도 남부 명군을 통해서 도입되게 되죠.
가위바위보 개념이라기보다는, 임란이 경과되며 조선 북방군이 가세한 이후로는 지상에서도 대등하거나 우위에서 전투할수 있었습니다. 전면에서 총력전으로 털렸다기보다는 빈집털이 당한것에 가깝습니다.. 충분한 화약이 있던 젘투에서는 압도적인 불리함에서도 승리한 전투가 많구요. 결론은? 더 많은 화력이 필요하다...더 많은 화력....
조선은 세계 문명국 역사에서도 보기드믈 정도로 전쟁이 극히 적었던 평화로운 지역이었음. 더구나 일본, 청과 전쟁을 한번 하고나면, 그나라들과 다시없을 우방국이 되어, 수천년간 민족을 괴롭혔던, 해양과 북방으로부터의 침략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음. 조선이 인구에서도 세게 상위권이었음에도 전쟁한번없이 망하게 된것도 이런 오랜 평화로 인해 안보관념이 희박해지고 국민들의 투지도 약화된 탓.
세종대왕때 많은 총통의 개발이 이루어 졌고 실로 위력이 아주아주아주 뛰어났지만, 영상에서 설명했듯 왜놈들의 100년전쟁동안 조선은 너무나도 평화에 젖어 무능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부산성 동래성 등등 내륙에 들어와 전쟁할때만해도 그당시 총통의 사용은 거의 없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사용법도 잘 몰랐거나 보급또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거 같습니다. 이순신장군의 포를 이용한 전략이 왜놈들을 남해에서 숨도 못쉬게 할정도였는데, 그당시 지상에서 이순신장군처럼 포를 잘 사용 했다면 어쨌을지.. 안타깝습니다. 아 물론 무능한 장군들도 많았던것도 큰 변수였죠.. 오랜 평화의 조선...
조선이 근접전이 취약했어서 약했었다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원거리 능력이 월등했기에 이순신의 수상전 전략이 빛을 발할수 있었습니다 원거리 능력은 상당히 숙련된 기술이 바탕으로 깔려 있어야 가능합니다 즉 조선의 원거리 위주의 병사운용이 잘못된것은 아니였다는거죠 그 덕분에 우리의 이순신 활약에 바탕이 되어줄수 있었습니다 수상전에서 빛을 발했죠 일본은 배위에서도 원거리 능력이 취약하여 어떻게서든 붙으려 하였고 조선군은 붙어주지 않고 약올리며 화포전만하면서 늘 일본을 대파하곤 했습니다 조총은 평지에서도 명중률이 떨어졌기에 그들은 조총을 배위에서도 잘 운용하지 못한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이순신의 화포와 활들에게 늘 개박살나기 딱 좋았죠
한반도 세력은 대규모 회전과 백병전에 약한게 맞긴 하더군요 그래서 활의 민족이라 불리우져 ,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종류가 5미터 이상 만들려하면 무게가 엄청 늘어나서 사리사 급의 긴장창은 없었다 하더라구요 아쉬운점은 한반도의 철광석은 일본의 사철에비해 질이 좋다 들었는데 도검이 발전하지 못한거라 할수있겠네요 아마 경험치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창이 없다는게 동예의 2인용 창인 삭이나 삼국시대에 장창부대가 있었던 것을 보면 꼭 그런것만도 아닌걸로 보이며, 애초에 창이란 무기가 생각보다 싼 무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철촉에 대충 굴러다니는 나무 갈아끼우면 되는거 같지만 그에 맞게 곧게자라고 단단한 재질의 나무가 필요하며, 창이란게 생각보다 소모율도 높은 편이라 폴란드의 윙드후사르의 사례에서 전투에서 창이 부러지지 않은 자는 겁쟁이로 불린다고 했으니 과장해서 전투한번 벌어지면 소모되는 무기입니다.
@@Orang_Fantasy 저는 그 책에서 제시한 의견에는 동감하지는 않습니다. 일단 조선은 어떻게든 도량형을 엄격하게 관리하려 했던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환도의 길이만큼 일반적인 길이를 재던 주척이 아닌 건물에 사용되던 영조척을 사용한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문종 때 환도의 길이를 규격할 당시 이미 조선군 내에서 환도가 긴 것 자체가 거추장스럽다는 풍조가 만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함길도의 도절제사로 있던 이징옥이 환도는 짧을 수록 좋다는 장계를 올린 것만 봐도 길다고 생각하는 환도가 병사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sejinJ 주척 기준으로 한 길이를 감안하면 길이를 규정할 당시 백병전의 비중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없어지고 있던 상황임을 감안한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 영상에서도 수성전의 비중이 높다고 나와있습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보검은 태구련과 이무생이란 검장들이 만든 것으로 일설에 의히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남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들에게 잡힌 후 일본도를 납품한 경력이 있다고하니 일본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 무기만큼이나 아쉬웠던게 조선의 무장입니다.. 임란때 기록들보면 보고서마다 전투시에 왜군들의 도검에 병사들의 팔이 양 사방에 날아다녔다는 기록이 몇개나 있는데, 애초에 각집마다 무기와 갑주를 비치하고 항시 준비태세를 갖추게 제도까지 정비되었던 국가가 바로 조선이었다는게 참 아이러니합니다..
각 집마다 무기와 갑주를 비치했어도 싸워보질 않았으니 당연히 쓸줄 몰랐겠죠?ㅋㅋ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시대는 평화가 길었던 만큼 무기와 갑주를 가지고 있어도 사람이 그것을 쓸일이 없었으며 단순히 가지고만 있다가 군역때나 쓰고 다시 처박아두기 일쑤였죠ㅇㅇ게다가 농사짓기에 바쁜 농민들이 무기나 갑주에 관심이 있을리도 없었을테니... 무기에 관심이 없다보니 도검같은 본격적이면서 비싼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도 거의 없었습니다. 무기라고 해봐야 도리깨나 활, 도끼 같은 생필품에 가까운 물건을 군역때 지참하고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뭐 당연하겠지만 그 군역때 들고오는 생필품중 절대다수는 활이었고요ㅇㅇ
조선의 주력무기활도 문제인게 뭐냐면 활재료인 물소뿔이 몽고.여진 지역의 수입품이라는게 문제.. 자체생산도 안되고 조선이 냉병기중 활로 올인한다는게 한계가 극명함... 수성전에 화포무기 효율이 좋기도 한데 그래서 병자호란때 이런 조선의 강점을 알고 조선의 수도로 바로 급속 직행한 전술을 채택... 결국 고두레의 비참한 항복을...
정말 좋은 영상과 예전부터 궁금했던 일본도나 환도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게되었습니다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영상 만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 영상도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랑님의 무기백과 영상들과 다른 역사무기 유튜버들과의 자료를 보면서 느낀거지만 거의 대부분 무기들은 전투교리로 인해 무기가 발전하는거 같네요 무기백과 소재가 어느 정도 끝나시면 각나라나 단체등 전투교리쪽에 대한 소재의 영상도 부탁드리고 싶네요 무기편제나 병사편제 식량 탄약 보급등 가장 상위에 있는게 전투교리라는게 더 와닿네요
환도와 일본도경우 단순 날의 모양이라든지 길이가 아니라, 패용방법. 그니까 칼을 신체 어디에 어떻게 차는지. 에서 큰 차이가 나죠. 애초에 오른쪽에차나 왼쪽에 차냐부터 다른걸로 압니다. 칼의 모양에선 임진왜란이후 일본도의 영향을 꾀 받긴 했을꺼라 봅니다만, 패용방법이나 쥐는 방법의 차이는 다른만큼 특히 손잡이부분에 구멍은 다를수밖에 없죠.
당시 전쟁의 주력 무기는 언제까지나 창이었고, 칼은 보조 무기입니다. 왜군도, 조총 도입전에는 창이 주력 무기였고, 흔히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전문 칼잡이가 아니면, 사실상 다루기 힘든 무기였습니다. 그리고, 왜군의 칼은 두 손으로 휘두르는 무기이고, 조선의 환도는 한손으로 휘두르는 무기입니다. 더불어 조선군의 칼은 직도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칼날 휘어짐의 각도가 작았습니다. 말씀대로 찌르기 용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당시 인구 규모는 일본이 조선보다 두 배는 되었을 겁니다. 당연히 병졸도 많을 수 밖에 없구요. 이러면 머릿수에서 밀리는 조선군은 야전에서 명백하게 집니다. 거기다 대규모 병력을 야전에서 굴릴려면, 그걸 지휘할 능력이 국가 단위에서 있어야 하는데, 전국시대를 거치며 성장한 왜군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겠죠. 용인 전투를 보면 조선군은 야전에서 대규모 군대를 지휘할 능력이 없었던 걸로 보입니다. 임진왜란 당시의 무기의 흐름은 화약무기였습니다. 기마 민족이 아닌 이상 일본이나 조선도 보병이었기 때문에 일본도 화약무기를 써서 전투에서 성과를 이룬 겁니다. 조선은 일본보다 떨어지는 서양에서 핸드캐논이라고 불리우는 소형 총통류의 개인화기가 있었지만, 조총보다 한세대 뒤떨어지는 무기였고, 당연히 졌습니다. 일본도가 중국에서도 그렇고, 근접전에서 상당한 위력을 발휘한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일본도가 위력을 발휘할 때는 칼 휘두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전문 칼잡이들이 휘둘렀을 때입니다.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에 비해 구할 수 있는 철에 불순물이 많아서, 질이 상당히 떨어지는 쇠를 만들 수 밖에 없었고, 철의 품질은 당연히 조선이 우위였습니다. 일본은 철의 품질을 올리기 위해 상당한 악전고투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군이 조총으로 무장하기 전 까지는 숫적 우세를 앞세운 군대였을 뿐이고, 심지어, 을묘왜변 당시 제주를 침공한 왜구들은 1000명이 70명의 용호군에게 개박살이 났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의 양상은 과거처럼 칼과 창을 휘두르는 방식이 아니었고, 총기류와 화포를 사용했습니다. 숫자는 적었을지 몰라도 화약무기가 전투에 핵심이었던 겁니다. 조총을 든 왜군에게 근접전 무기는 보조 무기밖에 안되는 것이었고, 그나마 활이 도움이 되었겠죠. 조선은 과거부터 수성전이 주요 전략이었고, 성을 지키며, 지원나온 기마병이 적의 후방을 치는 형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수성에 유리한 무기와 전문 기마병이 전략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왜검을 가진 왜군이 중국에서 해적질 할 때는 왜검이 무적이었을지 몰라도 조선에서는 아니었습니다. 이순신장군의 난중일기에서는 왜선에서 저항하는 왜군의 장교급으로 보이는 자들을 조선의 장수들이 도륙하는게 꽤 나옵니다. 조선의 장수도 만만치 않았던거죠. 신립의 탐금대 전투에서도 패전을 앞둔 김여물이라는 장수는 혼자서 수십명의 왜군을 도륙하고 전사했다고 합니다. 즉 전문 싸움꾼간에 전투에서는 일본의 왜검이 무적이 아니었던 겁니다. 하여간, 조총의 존재 앞에 과거부터 이어져 왔던 수성전이 왜군의 막대한 병력과, 막강한 조총의 위력 앞에 어이없이 무너진 겁니다. 탄금대 전투가 그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탄금대는 단순히 뻘밭에서 기마병을 돌격시킨게 아니라 분명 옆에 성을 끼고 벌인 전투였는데...성은 모루역활, 기마병은 망치 역활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조총 앞에 가마병이 맥없이 무너진겁니다. 이러면 수성전도 아무 쓸모가 없죠. 전통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에 있어서, 망치가 부서져 버린 겁니다. 뭐 신립의 이상한 전술은 당연히 비판 받을 만 하지만, 상황 자체는 고전적인 수성전 전술이었습니다. 조선은 문치의 나라였고, 일본은 무력을 앞세운 봉건국가 였습니다. 당연히 고급 무기이며, 지배계급인 사무라이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칼 숭상문화가 있었고, 칼에다가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하는게 일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강력한 행정력을 가진 중앙집권 국가였고, 무력은 오직 국가가 거느린 군대만 가지는 것이었으며, 무기는 병사와 장군에게 주어진 무기 그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의 소총처럼 쓸모 있으면, 취하고, 불필요하면 버려지는 소모품이었을 뿐입니다. 조선이 이룬 성리학이나, 해시계, 천문, 지도, 이런 각종 학문은 이해하기 힘들고, 일본이 이룬 칼은 바보라도 금방 이해가 됩니다. 따라서 요즘같은 인스턴스 시대에는 칼이 주요문화로 소비가 됩니다. 때문에 일본의 사무라이와 칼은 현대에 와서 칭송을 받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왜검은 사치스롭게 치장한 칼로 살육을 하며, 일본열도를 지배하던, 그들의 잔혹한 문화의 아이콘일 뿐입니다.
에초에 일본은 봉건제도라 영주 한명이 각자 군대를 보유하고 육성하고 지휘하는 말그대로 하나의 완성된 지휘관이였죠. 때문에 어떻게 보면 장교육성에서는 가장 적합한 환경이였죠. 반면 조선은 중앙집권적이였고 나라자체가 군사쿠데타를 통해 형성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권력투쟁(1,2차 왕자의난, 이시애의 난)으로 인해 군권을 심각하게 견제하게 됬죠. 더군다나 전투경험도 북방군을 제외하면 그다지 없으며 북방군 자체도 약탈을 저지하기 위한 소규모 기동방어전의 경험이 다였기에 대규모 원정 혹은 회전을 경험했던 일본군 지휘관들에 비해 열세일수밖에 없었죠.
유언비어 입니다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또 예조(禮曹)에 물으니, 예조에서 말하기를, "시험하여 만들도록 하는 것은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하자, 전교(傳敎)하기를,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성종실록』 1482년 9월 24일 왜인 두로가문(豆老可文)에게 관직을 주고 기술을 전습받자는내용
일단 일본 칼이 약했던 이유는 불순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근데 이게 뽑기 운이라 일본군도 운 좋게 불순물이 적어 강도가 높게 만들어진 칼을 주로 썼다고 하더라구요. 그래서 최근에 만들어진 칼들은 충분한 실전을 거친 뒤에야 썼고요. 그래서 오래된 칼일 수록 비쌌다고 합니다. 이런 점을 미뤄보면 하급 병졸이 쓴 칼은 부러질 수 있었겠지만 계급이 조금만 높은 병사의 칼이었다면 꼭 그랬다고 보긴 힘들거 같아요.
@@user-sx5jmhfybb78 약한철을 강철로 만들었다 보기보다는 그냥 약한철로 일본 대장장이가 만들었고 비록 약한철이지만 그걸 쓰는 검객이 실력이 있어서 강해보이는게 아닐까요? 제가 용접학교에 있을때 잡철로 용접하고 공부했는데 잡철도 의외로 단단하고 잘못 맞았다간 죽을수 있다고 느낄정도로 무거웠어요 그걸 보고 과연 공장에서 사용하는 순도 높은 철은 얼마나 무겁고 더 단단할지 궁금하더라구요
@@kam5551 그때 당시 철이 거기서 거기라는건 조선환도또한 왜란이후 일본식으로 사철로 만들었습니다 카타나가 쉽게 부러진다는데 애초에 철과 철이 맞대고 치면 이나가고 부러지는건 상식입니다 또한 카타나가 약하다는 소문은 왜란이후 조선에서 화로기술의도입으로 칼을도장찍듯이 만들어내니 품질을 신경쓰지못한탓이고 검객의 실력을떠나서 칼을맞대고 싸우는건 칼과칼끼리 붇이칠수밖에 없습니다 일본의 고류검술또한 카타나날로 막고 반격하는 기술들이 있는데 내구성이 떨어지면 그럴이유가없죠
한가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일본도의 강력함은 사실 거품이 많이 낀 것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대부터 일본에서 나는 철의 품질이 나쁘다는 것이었죠. 삼국시대 때 가야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쌓았는데 특히 가야의 철은 일본에서 고급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만큼 일본의 철은 품질이 떨어졌고, 이 문제는 고대를 지나 중세, 근대까지도 해결되지 못 한 문제였죠. 심지어 현대에 들어서도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증거 중 하나가 2017년도 일어난 고베 제강 품질 조작 사건입니다. 여하간에 에도시대 사무라이들의 일종의 '정장'인 칼 2자루 패용의 기원도 알고보면 칼이 잘 부러지기 때문입니다. 전국시대 당시 전장에서 싸우다보면 칼이 금새 깨지거나 부러졌기 때문에 일부러 2자루 이상 들고 다녔고, 이게 나중에 에도시대에 들어서 칼 2자루를 차는 것으로 '형식화' 된 것이죠. 이런걸 보면 조선이 일본도 제작법을 배우려 한 것도 일본도를 직수입해보니 영 품질이 안 좋아서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뭔 헛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일본도의 우수성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고 임란이후 중국 사신들이 조선오면 항상 하는 소리가 일본도 꼬불쳐둔거 중국에게 바치라는 거였음. 다시말해 일본도 우수한건 조선 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상식처럼 알고있는 사실이었다는거. 딴거 다 떠나서 국뽕논리로 일본도 까는데 그럼 그 X도 구린 일본도에 숱하게 죽어나간 조상들은 뭐가 되는거냐?ㅋㅋ일본 욕하려고 조상들 얼굴에 침뱉는 짓거리를 하겠다는 거냐?ㅋㅋ
인터넷에서 많이 퍼진 거짓말입니다. 1. 사무라이들이 칼을 2자루 차는 이유는 칼이 잘 부러져서가 아닙니다. 사무라이들은 전투용 장검인 카타나와 호신용의 짧은 검인 와키자시, 이렇게 2종류의 칼을 소지한 것이며 와키자시는 카타나가 부러질 경우 대처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두 칼은 크기와 용도가 다릅니다. 카타나는 사무라이들만이 착용할 수 있었고 전투에 활용되는 공격용 무기였고, 와키자시는 짧은 검신 때문에 전투용 보다는 호신용 무기에 가까웠으며 사무라이가 아니라도 착용할 수 있었습니다. 2. 사철로 만든 일본 철은 품질이 열악해서 잘 부러졌다는 이야기도 사실과 다릅니다. 일본도에 대한 조선, 중국의 평가는 하나같이 일본도가 예리하고 단단하여 우수한 무기라 평합니다. 쉽게 부러지는 도검이였다면 애시당초 그런 평가가 나올일도 없고 일본도를 수입하거나 모방할 일도 없습니다. 철광석 산지가 많지 않아 사철을 이용해 철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로 인해 고대 일본이 철을 가야 등지에서 수입했던건 사실이지만, 중세 이후 일본의 기술자들이 담금질을 통해 어느정도 품질 문제 극복하면서 더이상 한반도에서 철 수입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3. 도검 품질은 양질의 철광석에도 불구하고 조선 도검이 더 나빴습니다. 그 이유는 제작 방식 때문인데요. 도검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공방과 전문 장인들이 양성된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 도검을 만드는 이들은 전문 도검장인들이 아니였습니다. 관아에 '장인'으로 명단에 올려진 사람들이였고 민간에서 대장간을 운용하는 대장장이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수는 그낭 농사짓던 농사꾼들이였습니다. 이들은 관아에서 도검이 필요할때마다 관아로 불려와서 도검을 만들 것을 강요당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 하는 일이 늘 그러하듯 이런 일은 일절 대가가 지급되는 법이 없는 무보수 열정 페이였습니다. 몇 안되는 대장장이들과 어깨 너머에서 이를 보고 흉내내보는 농사꾼들이 팀을 이뤄 관아에서 요청한 도검을 만들어야 했고, 이들은 이런 무보수로 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요. 관리들에게 푼질 문제로 트집잡히지 않을 선에서 적당히 모양만 내서 빨리빨리 만들어버리고 어서 생업으로 돌아가야하는 입장이였지요. 당연히 그 결과 겉만 멀쩡한 조잡한 도검들이 짧은 기간내에 만들어져 관리들에게 전달되었고 관리들은 겉보기 멀쩡해보이는 도검이 제때 공급된 것에 만족하고 장인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 못했던 일이 벌어지는데 에도시대 일본 도검 장인들이 이 조선의 대충대충 도검 만드는 공법을 도입한 겁니다. 자기들 일본도 만드는 것 보다 훨씬 짧은 기간내 여러 개의 도검들을 뚝딱뚝닥 만들어내니 매우 효율적으로 보였던거죠. 어차피 이제 전쟁도 없으니 칼의 품질을 그렇게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사회 분위기 탓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쉽게 부러지즌 저질 일본도들이 양산되었고 이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불만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지요. 이대론 지들 목이 달아나겠다고 판단한 일본 도검 장인들은 다시 전통 제조 방법으로 회귀하면서 품질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에초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이미 고전적인 전투방식에서 현대와 비슷한 화력원거리전으로 바꿨다는걸 해당됩니다. 다만, 서양식 총을 빨리 도입하면 그만큼 빨랐겠죠. 임진왜란 이후 전장식소총의 퀼이 일본과 중국대비 미쳤다고 하니깐요. 그리고, 조선초기때만해도 여럿 총통들이 있어 그럴수도 있고요.
@@TheMngl2005 그렇게볼수도있지만 그럴필요가없었던것에 더큰요인이 있습니다. 양난이후엔 동북아 자체가 쇄국 기조로 접어들기에 한중일모두 19세기 후반 전까지는 조총과 홍이포에 만족하는 경향이 만연했습니다. 냉전 종식 후 불과 30년만에 서유럽국가들의 군사력이 얼마나 약체화됬는지 보면 됩니다. 군사력도 근방에 위협이 있고 필요해야 강화됩니다.
@@닥치통조림 조선이 약해진 이유는 두 가지죠. 첫번째 병자호란 이래 적대국가가 없어짐. 놀랍게도 청-조선-도쿠가와막부 모두 열성적인 적대국이 사라짐. 두번째. 누가 군비를 책임질것인가? 이게 제일 큰 이유죠. 특히 조선... 임란 이후로 양반계층이 막 나가서 부패 와 내로남불 책임전가 엄청 났죠. 특히 땅문제. 너무 얽혀있어서 망할때까지 해결이 안 되었다는 게 크
와,, 설명대로의 환도의 5~60cm면, 창병들은 당연하고, 일반 인본도와의 전투에서도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겠네요 ㅜ ㅜ 길기로 유명한 노다치 들고 덤비는 왜병과의 근접전이였음 너무 끔찍했을듯 합니다. 이런사실은 또 처음 알았습니다.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오직 영상에서 말씀하신 칼의 길이에 대한 말입니다.^^;; 태클은 무서워요 ㅜ ㅜ)
조선군 근접약세는, 세조때 이후로 창기병 비율도 줄이고 근접보다 원거리 위주로 군제개편한것도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 조선 초기에 있던 창 제작법도 소실된거같고. 주적이 북로남왜로 바뀌고 군대도 주적에 맞춰 남북 이원화되면서, 북육군 남수군으로 편제가 고정된것도 원인이 아닐지. 북육군 기마위주 편제라지만 세조 이후로는 궁기 위주였다고하고, 남수군은 당연히 해상요격이 주목표니까 화포, 활 위주 원거리고. 육군도 적이 중장갑을 둘러야 근접 비율도 늘렸을텐데, 왜란 이전에는 활로도 충분히 대적 가능했으니.
조선의 주무기는 의외로 열병기.. 국립진주박물관, 화력조선을 보고 오시면 생각이 많이 바뀔겁니다 활보다는 열병기의 발전이 칼을 더욱 짧게 만듦 이는 금속활자급 빠른 변화였으나 문제는 전쟁이 없어 발전하다 말아버렸다는거.. 서양처럼 열병기가 지속 발달하고 칼이 없어지는 방향으로 추세전환에 실패..
좋은의견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하나 마상도에 영향도 있었 다네요. 말위에서 내려치는 칼은 길이가 좀 짧더라도 더강력하며 당시 일본에 카타나는 모래의 사철에서 재료를 취하여 날카로웠으나 우리에 환도와 부닦치면 깨저 버리는 일이 많았다네요.재질이 더 뛰어났죠 그래서 일본에 검술은 검끼리 부닦치는걸 피하고 검을 흘려보내고 싸우는걸 선호 했으며 창또한 너무긴 일본에 창은 찌르기 용이 아니라 후두려 패기용이란 말도 있네요. 그리고 기마용 검은 동서양을 막나하고 얇아지고 짧아지는 공통점을 가진 만큼 여진정벌의 여파로 환도가 짭아진것도 여러 이유중 한가지 이며 후기 다시 짧아진것은 병자호란 이후 더이상 국가간에 전투가 없었기 때문이라 보여 지네요....^^
일본도는 임진왜란때 가장 황당했던게 조선에 칼과 부닦치면 부러지거나 휘여저 버리는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품질이 떨어지는철에 문제와 강철과 연철에 접쇠로 그겄을 만회하고자 하였으나 그 방법이란게 두두려서 깨보는 방법아라 정확하지 않으며 지금 명검아라는 것들은 전쟁을 치르는 도중 수백개중에 안부러지는놈 1가 일본도에 전부인듯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도에 최고는 수십년간 기차에 무개를 견뎌온 레일로 만든 만철도이며 장군끼리 붙으면 일본도는 부러지고 일본군 장군은 패하는 경우가 많아쌌답니다 그래서 일본검에 무서움은 카타나가 아니라 장검 오타치 이며 그중 명검은 몇 안돼었으며 19세기 말 독일이 전수하기전 까지 제철수준은 처참 했으며 일본에 검술에서 서로에 칼날을 부딪치는 검술은 죽도로나 하는 방법이고 실제로는 검을 흘리며 적은 잡고 뒹굴 다가 짤은 칼로 갑옷 사이를 찔러 넣는 방법으로 전투를 했습니다 카타나에 위대함읃 애니메이션 이랍니다^^
@@gurehdtks1 ; 그쪽이야말로 일본인 일뽕 이신것 같은데 미국 다큐 운운하는 것을 보면 역사를 건성으로 배운 분 같네요 역사가 무엇인가요 당시의 자료로 사실 증명하는게 역사 아닙니까? 일본도의 내구성은 현대에 와서 고열의 제철 기술 떄문에 향상된 것이지 전근대 일본도의 내구성은 최악 그 자체였지요 그래서 사무라이들은 칼 하나만 갖고 다니지 않고 여러 개의 갖고 다니는게 아닙니까?
@@gurehdtks1내 깨저요 재료상에 문제로 잘 부러졌다네요 무예를 하는 장수끼리 싸우면 카나나가 부러져 이기는경우가 많았다네요 그리고 일본도중 가장 겅한것은 전통 도검이 아니라 철도청에서 오래된 철로 레일로 만든 만철도 였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때 일본구에 무기중 제일은 창과 2m게 달하는 장도 였습니다 그리고 카타나는 여러번 실전을 거친 오래된물건을 선호 했는데 이는 비로서 내 구성이 검증된것이였기에 그런것 이였으나 그마저도 환도와 부닦치면 부러져 버렸습니다😊😊😊
애초에 조선은 백병전 전문부대로 조선초에는 팽배수를, 후기에는 등패수를 운융해서 백병전 전문병과로 검방보병을 운융했습니다. 그래서 임란 때 조선군의 문제점을 따질 때 전문군인인 팽배수가 오랜 평화와 경제적인 문제로 거의 없어지다시피 한 걸 지적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이미 영상에서도 이런 저런 사정을 설명하지만, 굳이 환도가 일본도보다 약하다고 할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일단 동일선상의 무기라면 길이에서 그 승패가 갈립니다. 그래서 조상님들도 환도의 길이를 가장 먼저 지적한 것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실제로도 일본도에 많이 당하셨고... 그리고 방패 보병은 정말... 하아... 실제로 진짜 잘 싸웠다는데 역시나 정치나 오랜 평화로 다 쇠퇴했다죠. 안타까운 일입니다.
@@Orang_Fantasy 팽패수 검방보병을 기록에 따라 구현한 사진보면서 진짜 입이 떡 벌어지고 눈이 초롱초롱 해졌습니다. 이게 군단병이 아니면 뭐가 군단병일까 싶었을 정도로 멋있고 강해보였습니다ㅎㅎ 농담으로 조선이 로마의 후예다 라고 하는데, 조선후기 등패수들은 필룸같은 짧고 가벼운 표창을 던져가면서 적을 견제했다는 걸 보면 진짜 로마의 후예 그 자체 아닌가 싶었었습니다ㅋㅋㅋㅋ 역시 그 놈의 돈이 문제죠ㅠㅠ
@@kmyung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애초에 환도와 일본도가 등급의 무기가 아니라는 겁니다. 둘 다 칼이고 보조무기이긴 하지만, 당시 환도는 한손검이 주류이고 일본도의 대명사인 우치카타나는 한손 사용이 전제되지 않은 분명한 양손검입니다. 위에 말한 것처럼 환도는 주무기로 쓸때는 중세 유럽의 기사들이나 근세 스페인의 로델레로가 그랬던 것처럼 방패와 함께 사용할 것을 전제했습니다. 그게 바로 팽배수들이고요. 근데 정작 오랜 평화와 정치적, 경제적 문제로 팽배수가 소멸해버리고 백병전에 대한 숙련도와 노하우가 현저히 차이가 나서 밀렸던 것이죠. 그냥 조선군이 근접전에 못 싸웠던건데, 체급 자체가 다른 환도를 일본도랑 비교하면서 본받자는 당대 주장이 참 넌센스합니다. 그럴거면 편제대로 팽배수나 제대로 양성할 것이지...
박격포병... 정말 고생 많으셨네요. 정말로 군대에서는 가벼운 게 최고. 행군에 k2도 얼마나 무겁던지... 신발에 양말도 무겁게 느껴진 기억이 나네요. 그 때 생긴 무좀이 아직도 절 괴롭힙니다. 물집에 발바닥의 반이 떨어져 나갔으니... ㅠ.ㅠ 과거에 선택과 집중의 결과로 칼이 짧아졌다는 사실, 정말 놀랍고도 확 와닿으네요. 한가지 판타지 장르에서 알고 싶은 것은 갑옷에 대한 겁니다. 기사들의 플레이트아머가 너무 무거워 기중기로 말 위에 올렸다 하는데, 그 갑옷을 입고 뛰어다녔다고도 하고. 정말 그렇게 무거운 갑옷을 입고 서있을 수나 있는지 모르겠네요. 게임 하다가 가장 열받는 것이 무기 무게에 따라 기동성이 줄지 않는 건데 풀플레이트아머, 그레이트소드, 대형방패, 몇 십개의 포션을 들고 뛰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할까, 이게 의문입니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RPG게임에서 나오는 무기들의 무게와 플레이어가 그런 무기를 가지고 움직이면 얼마나 힘들 지를 알려주세요.
임진왜란 때 문제는 칼날길이가 아닌 소프트웨어 차이가 심한 것 같습니다. 항왜가 조선군들 검술 훈련하는 것을 보고 어린애들이 칼싸움 하는거 같다라는 기록이 있죠.. 도구(칼, 환도든 일본도든)는 있는데.. 사용법(검술)을 모르는겁니다. 쳐맞기 전까지 몰랐던 겁니다. 아니 쳐맞고도 몰랐던 겁니다. 무예도보통지가 정조시절이고, 당시 기록에도 일본검술 시연을 보고 왕(정조)이 크게 놀라죠.. 임진왜란이 1592년인데.. 정조대왕께서는 1750년대 인물이니 근200년 차이인데요.. 재밌는 점은 쌍수도(양손검), 왜도(일본도) 항목이 있는데, 둘 다 환도로 연습한다는 겁니다. 쳐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겁니다.
근데 어차피 칼은 전쟁에서 써먹기 힘든 병기라서 애초에 딱히 필요가 없긴 함 창보다 다루기 힘들어서 훈련이 엄청 필요할 뿐만 아니라 창병과 검병이 붙으면 진을 이루고 싸우는 시대 특성상 창병이 훨씬 유리함 그리고 검은 창보다 제작하기가 힘들기도 했음 참고로 일본조차 병사들은 창병이 월등히 많았음
근데 이 영상에서만 보면 일본도가 엄청 우수한 칼인 것처럼 나오는데 일본도는 소재의 한계상 내구성이 약하고 통일된 규격이 없듯이 철 탄소 비율도 제각각이라 무게 강도 등등도 칼마다 달랐음.. 사무라이들이 워낙 칼을 잘 써서 그렇지 일본도 자체는 그렇게 우수한 무기는 아님.. 환도는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고 사용자의 숙련도가 낮아서 그렇지 오히려 철강기술이 더 발달했던 조선이 내구도는 더 좋기도 함.
검의 길이도 길이지만 검술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어요 조선의 검술은 동작이 크고 주로 베기 위주였는데 일본 검술은 주로 손목 팔을 최대한 빠르게 공격하는 위주로 발전 했기때문에 근접전투에서는 일본이 이길수 밖에 없는것이죠.검도 시합에서만 봐도 주로 손목 머리를 빠르고 간결하게 치고 빠지는 것과 찌르기가 많이 보이는거죠
오늘날 여러 국가들의 군대들도 자국의 정세와 상황, 그리고 경제와 자원사정으로 인한 영향을 강하게 받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싶습니다. 당시 조선 역시도 자원사정과 정세로 인해서 군대의 양상역시 그렇게 발전했다고 느낍니다. 마냥 조선에 대해 비방하는것 또한 객관적으로 보는게 아니라고 생각이 드네요. 애초에 임진왜란 당시의 히데요시 휘하 일본군들은 무려 거의 1세기 동안 전쟁으로 잔뼈가 굵은 전사들이었는데 조선이 이정도 버틴것도 용하다 싶습니다.
@@Orang_Fantasy 천만에요ㅎㅎ 저는 그저 여기 댓글란에 조선 하면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어쩌다가 한 말이었을 뿐이니까요. 일본이든 조선이든 둘다 좋아하고 흥미롭게 보는 입장상 쌍방에서 일방적인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다고 느끼거든요. 각자 장단점이 있는거죠. 거기에 당시 일본은 거슬러올라가면 무려 남북조시대때부터 계속 전쟁했었으니 노하우가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죠...
아니 근데 조선의 주무기가 활이듯 왜군의 주무기도 창입니다 근접전이 벌어진다 해도 칼로 맞붙을 일은 생각보가 많지 않습니다 제승방략 하에서 활이 제일 중요한 무기일 수 밖에 없었을 거구요 도검 물량은 일본이 더 많았겠지만 설령 아시가루가 도검을 갖고있다고 해도 그 숙련도는 거기서 거기였을 거구요
전 개인적으로 환도나 일본도에 대해선 아는바가 없어서 잘 모릅니다.그러나 나름대로 국궁을 수련하는 사람이라 저도 들은 것이고 제가 들은 것이 맞는 이야기라 한다면 활에 대해선 약간은 압니다.요즘의 현대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은 기본 소양으로 양반이면 누구나 승마나 활을 쏠 줄 알았다 하고 그게 아니라 해도 병졸이거나 사냥꾼이 직업이면 환도보단 창과 활을 다룰 수 있던걸로 추정합니다.국궁의 경우 현재 70~80 피트 장력인데 이건 20대 성인 남자의 힘으로도 오래 수련하지 않으면 장시간 만작을 유지하기 엄청 힘듭니다.활시위를 당겼다가 미끄러져서 손이나 팔을 다치는걸 방지하기 위해 약 45도 각도로 활을 살짝 틀고 쏘는데요.. 그 자세 유지하면서 활시위를 뺨이나 귀까지 최대치로 당긴채 유지하는 것을 국궁에선 만작이라 합니다.하지만 당시 우리 조상들은 무관인 경우 평균 90~110 피트 정도의 장력을 가진 활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심지어 승마한 상태에서도 사용했었다고 국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그게 정말로 사실이라면 위력과 사거리가 능히 짐작가는 일이고 환도의 비중이 낮을만 합니다.사실 전쟁이란 반드시 이겨야 하는 집단 전투인데 그 집단전투시 바보가 아닌 이상 단병접전에서 불리한거 뻔히 알면서도 환도쓸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임진왜란때 조선군 병사 손목과 넙적다리가 아작 났다고 합니다 대부분 일본도에 의해서이죠 물론 왜군이 긴창을 이용했지만 산개해서 도망가는 조선군을 뒤쫒을때는 일본도였고 대부분 산이 많아서... 조선군의 환도는 불리했다고 합니다 칼이 짧으면 손목이 위험하고 머리나 다리가 위험하다고 하죠... 일본 고류 검술 참고해 보면 몸'을 배는 경우는 없습니다...검도인들이 스포츠 검도로 잘못 알고있죠...실전검술은 손목과 다리 목을 취약한곳을 노리죠...인체는 연약해서 10 센치 이상만 배이면 출혈이나고 인대가 끊어지면 못 움직이고 쇼크 상태로 빠지죠 힘들게 쇼크 상태에 빠진 부상당한 조선군 몸을 밸 필요가 없었다고.....합니다.
그건 조선병사들이 평화시대여서 훈련이 안되서 그런거고 장수들이나 사관들이 맞붙으면 오히려 일본 사무라이들이 수십명 둘러 싸놓고 환도에 썰려나가거나 병사들도 평화시대에 도리깨로 곡식 알맹이 털기에 단련된 편곤 한자루로 무려 400여명의 일본군을 처단하는등 일본도 보다 강한 편곤같은 강한무기에 그외에도 월도등을 쓰면 일본군들이 단체로 썰려나가서 기록등을 보면 일본도가 길어서 쓸모가 있다고 평해도 월도앞에서는 바늘이구나 라고 평했습니다
감히 제가 예상한건데 조선은 왜 근접전을 피하려고 했던이유가 아마 인구수때문인것 같습니다. 근접전일수록 병사들이 죽는일이 더 커질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엄폐물을 끼고 장거리전으로 활을 애용할수밖에 없었을것 같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땅이 비슷하거나 작을것으로 생각하시는분들도 있겠지만 우리나라보다 큽니다. 지금 일본과 한국의 인구수도 거의 두배 차이납니다. 그리고 조선이 애도시대때부터 치뤄왔던 전쟁의 노하우? 전략이 일본군에 있었기떄문에 근접전을 최대한 피하려고 한듯하구요
근대 애당초 일본은 섬지역에 외세의 침략보다는 내부의 내전이 있고 사무라이라는 직종 때문에 카타나가 유지되고 발전하게 됬지만 조선은 고려시절부터 툭하면 여진족이 쳐들어와... 일본 사회가 불안정하니 툭하면 해적이 등장해 한반도 털고다녀... 같은 냉병기 끼리의 싸움으로는 손해가 큼... 그래서 원거리 공격 그리고 없는자원 끌어모아서 화약병기를 발전시켰음... 서로 군사기술 발전 테크트리가 다르기 때문에 한중일의 냉병기 차이는 어쩔수 없는것임.
우리 나라 공인(工人)이 제조한 칼은 저들의 잘 단련(鍛鍊)된 것과 같지 못하니, 저들로 하여금 시험적으로 주조(鑄造)하게 하여 만약 보통 기구(器具)보다 특이하게 된다면 작은 관직을 제수하고 그들이 잇달아 왕래하도록 허가하여 우리 공인(工人)들로 하여금 전습(傳習)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갑오년의 예(例)에 의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칼을 만들게 하라. 성종실록 일본 검이 좋은 이유는 쇠와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쇠를 단련하는 기술이 정교하여서입니다. 우리나라도 남쪽에서 양질의 철이 많이 생산되니 백 번 정도 쇠를 담금질하여 두드려 만들기를 일본의 방법대로 한다면 또한 예리한 검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 영조 일본도(日本刀)는 크고 작고, 길고 짧은 것이 일정하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장도(長刀) 하나를 소유하는데 그 칼 위에 또 하나의 작은 칼(小刀)을 꽂아두어 잡무에 쓰기 편하도록 한다. 또 하나 자도(刺刀)로 길이가 한 자인 것을 해수도(解手刀)라 하니 이 세 가지는 몸에 지니고 반드시 쓰는 것이다. 칼이 매우 굳세고 날카로워서(剛利) 중국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무예도보통지 단도(单刀)란 왜노들이 만드는 칼인데 단련이 정교하며 만듦새가 가볍고 예리하니 다른 지방의 칼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단도법선 의령(宜寧)에 거주하는 선군(船軍) 심을(沈乙)이 일찍이 일본에 건너가서 칼 만드는 법을 배워 칼 한 자루를 만들어 올리니, 일본 칼과 다름이 없으매, 명하여 군역(軍役)을 면제시키고 옷 한 벌과 쌀·콩 아울러 10석을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여기서 열폭하고 병신같은 댓글싸는 놈들 있는데 당시 조선의 실무 담당자들이 너네보다 전쟁에 대해서 모르는 병신들이었겠냐? 아주 성종에 세종대왕님까지 친일파라고 할 놈들 존나 많네;; 아주 대단한 애국자들 나셨어;;;
가끔 일본도가 아니라 그 당시 일본의 도검제작 기술에 대해 우수성을 말하면 정색하고 덤벼드는 사람들 많더라고요. 일본에서는 그 당시 좋은 철이 없는데 왜 일본의 검제작기술이 대단했겠냐 일뽕이냐 라는 소리 들으면 ..어이가 없죠. 우리나라는 채산성 석유가 안 나는데 세계정유능력10위권 안에 들고, 반도체 제작용 희귀원소 없는데 반도체 강국 이라는 생각이 없는듯. .정치적 의도인지 무식한것인지 구별 안가는 사람들 너무 많아서 웃음만 크크크
철광석이 한반도에서 많이 나는 것도 중요한데 우리는 그걸 이용해 주조방식으로 철제도구를 만듦. 이게 재밌는게 현재 사용중인 고로(높은 용광로) 즉, 산업혁명 이후에 나온 제철기술하고 이론적으로 동일한 방식으로 순철을 얻는 기술을 사용함. 이에 따라 농기구도 철로 심지어 개밥 그릇도 철로. 작은 화살촉도 철로, 일반 병졸의 갑옷의 편자도 철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임.(철은 빠르고 많이 만드는 기술은 지금이나 예전이나 하이테크 기술 중에 하나임) 반면, 왜국의 경우 대량으로 철을 얻는 기술이 없어 우리가 현재 좋은 칼을 만든다고 오해하는 단조방식 밖에 쓰지 못하면서 철이 규격화되지도 못했고 만드는 사람에 따라 철이 제각각이었던 것임. 일제시대를 거쳐오면서 조선은 미개한 국가라고 교육을 받고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이들은 가르치다 보니 지금과 같이 조선은 망국 아무것도 못하는 나라라고 생각하는데... 조선은 생각밖으로 그당시 하이테크 기술을 가진 나라였음. 그렇기에 50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 이제 식민 사관에서 벗어나서 조선을 다시 볼 필요가 있음.
@@드레드노투스 높은 온도로 철의 강도를 높였다고요? ㅎㅎㅎ 온도 높으면 로에서 어떠한 결과가 나오는지 모르신 것 같은데요? 온도 안맞으면 철광석 안에서 타 버립니다. 일본은 명치유신 (산업혁명 이후) 이후 제철 산업이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한건 서양의 제철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부터구요. PS. 개밥그릇은 그렇다처도 무쇠 솥이나 농기구는 주조법 아니면 대량의 일반 민가에도 보급하기 어렵지요.
@@Orang_Fantasy 고려의 강감찬 윤관 조선의 김종서 권율 모두 군인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문과급제한 문관들입니다. 조선은 무과출신이 병조판서에 임명된 경우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문민통제가 잘된 나라였습니다. 팔도의 지방군권 역시 단병사와 겸병사제도가 확고했고요. 80년역사에 두번이나 군사반란이 성공한 대한민국과는 달리 500년이 넘는 긴세월동안 단 한번도 군사반란이 성공하지 못한 조선의 저력을 무반천대라고 간단하게 정의해선 안됩니다.
전투무기를 이해할 때는 무기 자체보다 전투와 전쟁을 먼저 이해한 후여야 합니다 판타지는 곤란해요 임진왜란을 생각할 때는 일본만 생각할 게 아니라, 동 시대에 칼도 변변히 없던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웠다는 것도 아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당시의 전투에서 칼은 그다지 효용성이 없었어요 보조무기 수준이었다는 겁니다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전쟁에서 기본은 원거리고, 최후가 근접입니다 그리고 전투는 원거리에서 결판이 납니다 이순신만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잖아요 선조도 아니고 닥돌만이 답이다를 외치면 곤란해요 고조선시대나 주나라 시대나 현대나 같아요 그래서, 칼이라는 전투 무기를 다룰 때는 전투나 전쟁이 아니라, 최후의 학살이나 전투후 점령지 관리에 포커스를 맞추는 게 맞는 겁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소총들고 전쟁하는 게 아니라, 포 쏘고 미사일 쏘고 비행기로 폭격하고 탱크로 밀어붙인 후에 보병용 장갑차로 보병 밀어넣어 점령하고, 소총든 보병으로 치안유지하는 거에요 칼은 현대전의 소총과 같은 포지션이지, 탱크나 자주포와 같은 포지션이 아니에요 그리고, 조선군 대부분이 쓰던 삼지창이면 일본군의 칼 따위는 상대도 안됩니다 조선군의 삼지창과 일본도를 비교하는 게 맞아 보이네요 마지막으로 이순신이 일본도를 연구 했다고 했는데, 적의 무기에 대한 이해를 위한 거였지, 강한 무기여서는 아니었습니다 조선칼이 일본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아닌 게, 문종 때나 정조 때나 표준은 같다는 겁니다 바르게 고쳤다가 맞는 거죠 명종 때 외척의 득세로 삼정이 문란해졌고, 선조 때는 무너진 왕권을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 했지만 임진왜란으로 왕권이 폭망했고, 허수아비 왕을 다시 세우려던 사대부들이 공공연히 광해를 추켜 올려 분란을 조장하다 광해가 왕이 된 후 꼭두각시 취급을 하려하자 반발한 광해를 내쫓고, 허수아비왕인 인조를 세우고 폭망의 길로 접어들었던 조선을 다시 정상으로 돌리던 기간이 바로 영조 정조 시절이었던 겁니다 송시열의 예송논쟁은 정말 치가 떨리죠 대체 왕권이 얼마나 추락 했으면 송시열 같은 게 살아나은 건지... 조선초였으면 능지처참도 부족해 9족이 멸했을 겁니다
저 당시 조선이 왜군에 대항하는 백병전 전략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방패 활용을 잘 하지 못했다는 점임. 일본도 같은 쌍수도는 방패를 든 한손검에 많은 약점이 노출됨. 쌍수도를 쓰는 무사의 천적은 팽배수 or 삼지창임. 환도가 약했다기 보다는 일본도에 대항하려면 환도를 이용한 창의적 전술을 고안하고 적용했어야 함.
근데 150년간 평화로웠던 남쪽지역에서 그런 전술을 파악했다 한들 바로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대전략을 세워서 호남 지키고 보급을 끊어서 전쟁을 이기는 식으로 근접전의 처절한 열세를 극복한 것이 더더욱 대단했다 생각합니다. 수성전은 대포의 본격적 등장 이전까진 든든한 국밥같은 것이었으니까요.
방패든 당파든 그걸로 일본도를 제압할만큼 숙련된 무사들이 충분히 있어야 가능합니다. 조선군 대부분은 훈련이 부족한 농민 징집병이였고 그들에게 방패와 당파를 쥐어준들 제대로 싸울 수가 없지요. 백병전이 벌어지면 열에 아홉은 그대로 도망치고 얼마 안되는 용기있는 자들만 외로이 남아 무모하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참고로 환도가 임진왜란때 찬밥신세였던 가장 큰 이유는 방어전 위주로 수행한 것이나 활 위주의 전투방식만 있는게 아니라, 성 밖에서의 게릴라 전투에선 포와 지뢰(사용 전적 있음) 등의 화기나 생화학 무기(보통 유황, 심하면 인분)로 사전 탐지된 적들을 엿먹이는 화력덕후+몰양심 플레이를 원체 좋아했던 것도 있죠ㅋㅋㅋ
추가로 무기및 병력 생산에 있어서 활은 제조시 높은 숙련도를 요구 합니다. 그래서 비교적 무기양산이 쉬운 창병위주로 갔고요. 병력양산면에서는 전투용 갑사가 쓰는 칼은 활보다 더 오랜시간이 걸립니다. 숙련된 갑사중 칼을 잘쓰려면 적어도 수년간 칼잡이로 많은 실전을 경험해야 합니다만 칼의 비용또한 비쌌고 무엇보다 활을 쏘는것은 칼잡이보다 쉬운일입니다. 짧은 칼의 경우 약점을 보완한 로마처럼 대형방패를 사각으로 밀집된 진법을 훈련해야 했기에 양산면에서는 기피대상 1호 입니다. 임진왜란 이전 단 한번도 대규모합동훈련을 진행한 일이 없었던 이유가 비용 때문입니다. 그 많은 군대 훈련비용을 댈만큼 조선의 국고가 튼튼한것도 아닙니다. 10만 군이 움직일때는 식량 및 무기 보급부대 예비부대 막사와 군영설치후 계속된 훈련체계등을 감당할 돈이 없었던 겁니다. 그만큼 부를 독점한 사대부와 양반들 때문에 국방력이 약해져있었고 가난한 국고는 전쟁대비를 감당할수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책으로만 존재했던 제승방략은 실패한 전략입니다. 한번 훈련에 나서면 그들을 일사분란하게 훈련시킬 갑사또한 부족하고 실제로 훈련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훈련도감같은 체계적인 군사훈련 진법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진법훈련의 중요성은 명나라 원앙진법을 모방해서 설치한 훈련도감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왜병들의 검술을 1:1 로 상대해서 이길 나라는 존재 하지 않습니다. 명나라 조차 절강성 원앙진법 외에 왜병을 상대할 마땅한 전투기술이 없었습니다. 왜군의 조총만 있던것도 아니고 창병도 상당수 있었고 왜군은 매우 일사분란한 체계를 갖춘 당시 최강의 부대입니다. 이는 성리학 중화사상에 물든 문신들의 행정독점과 부정부패 때문입니다. 이들은 입으로 만든 군대와 논리로 도덕경만 외우는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그 때문에 명나라와 여진족을 대할때는 여진족을 오랑캐라 부르면서 차별하였고 명나라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명나라를 정탐할 첩보부대조차 만들지 않았습니다. 왜를 작은 나라 오랑캐로 여겨 그곳에 비밀첩보요원들을 파견하여 동정을 살피는 일조차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내전이 발발하면 그곳나라가 전쟁중이므로 반드시 전투기술과 전쟁무기가 발달할 것이란 사실을 알았음에도 아무런 대비를 안한점 제승방략이라는 대규모 회전을 준비한 군대모집 훈련계획은 있었음에도 비용문제를 들어 한번도 합동훈련을 시도 조차 안한것들이 그 증거입니다. 현재 한국이 세계 6위의 군사력이라고 떠들지만 실전훈련에서 과연 어떤 결과물을 갖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실전훈련은 결국 보병의 시가전이고 그곳에서 가장 필요한 무기는 권총입니다. 소총은 길이문제로 코너에서 매우 취약점을 드러냅니다. 실전적 훈련을 위해서는 가장 쉬운것은 권총의 대량보급과 충분한 실탄의 확보입니다. 그리고 강도높은 실탄 훈련입니다. 실탄은 항상 1인당 기준 훈련시 지급받는 탄수에 8배를 확보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대당 독도법 숙지한 보병이 2명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야간 기동시 은밀히 아군집결훈련이 가능하고 실제 합류가 가능해 집니다. 한미연합훈련시 탄피줍는 짓거리는 한때 유명했습니다 지금은 그딴짓 안한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미군이 황당해 한것이 몇가지 있었는데 한국군이 훈련중에 자신이 쏜 탄피줍느라 정신없던점 과 매번 낙오하는 독도법 훈련부재 등입니다. 제발 파워포인트 만드는 그 열정에 절반이라도 분대당 2명의 독도법 숙지훈련병 양성과 2개의 충분한 GPS 지도를 보급해 주길 바랍니다. 이는 미군이 수차례 지적한 한국군의 고질적 문제점이고 시정요구사항 이기도 합니다. 미사일 1발 쏠 가격이면 상당한 GPS 장비를 분대에 지급할수 있을겁니다.
@@user-kq4jv9ef1g 그게 1610년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포루투갈 함상에서 백병전이 벌어진 대결인데 여기서 포루투갈이 이깁니다. 하지만 이게 1:1 대결이라고 볼수없는건 함상백병전 난전이란점이고 검역시 1:1 펜싱검이 아니고 함상백병전에 주로 쓰이던 컷앤쓰러스트검이었습니다. 당시 배위에서의 난전이란점 에서 보면 일대일 상황이 아닌 배위에서의 난전이라 정확히 어느 검술이 우위인가 가늠하기 힘든것도 맞습니다.
@@루디샤 이런 역사는 분명 기록이 있을테니 후대에 전해진 걸텐데 왜 사람들 말이 다 다르죠??? 누구는 배에서 내려서 서양검술이 1대1로 다 압살했다. (근데 서양검술은 검을 한번 맞닥뜨리면 뱀마냥 휘어서 계속 공격하고 일본검술은 검끼리 닿으면 뗐다가 다시 부딪치니까 뭐가 됐든 이론상으론 서양검술이 무조건 이김) 누구는 사실 검술대결이 아니고 포르투갈 선원들이 대포를 쏴서 침몰시킨건데 1대1 검술 대결이라고 잘못 와전됐다. (이건 일뽕이 적은 댓글이라 나도 긴가민가 했음) 누구는 지금처럼 난전이라 하는데 주장이 엇갈리는 이유가 뭘까요??
05:04 이야, 글라디우스(65cm)랑 비교를 하니 딱 감이 나옵니다! 진짜 짧네요 게다가 찌르기가 힘들고 베기가 주가 되는 곡도니까 진짜 실전에서 써먹기엔 무겁기만한 최악인 칼이네요. 환도가 차라리 찌르기에 용이하게 에스톡크나 글라디우스처럼 더 가볍고 뾰족했으면 차라리 용도가 있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무예도보통지의 90cm로 개선된걸 보면 반성을 할 줄은 알아서 다행입니다. 서양에 비해서 짧긴하지만 90cm길이면 동양에선 충분히 위력적이고 꿀리지 않게 훌륭하게 백병전을 벌일수 있는 좋은 스펙이죠. 조선이 원거리전에서 높은 명중률로 적은 피해로 전투를 치르는것이 좋았다는 판단을 내린건 큰 실책인것이 산업시대 강선이 달린 라이플소총이나 강선포가 나오기전까진 중동이던 동아시아던 유럽이던 장거리 명중률은 다 형편이 없을수밖에 없었고 대영제국 전열함과 스웨덴식 야포/유탄포들이 근접포격전으로 적을 압도했었죠 아무리 조선의 궁사들이 세계 최고급 수준이었다곤 하지만 강선이 달리기 전까진 명중률이 높아봤자라는게 현실이고 아주 높은확률로 원거리에서 적을 괴멸시키지 못하게 되니; 초기 화약무기시대까진 근접전을 잘하던 민족과 제국이 세계를 지배했죠. 총과 대포의 성능이 어중간하던(임진왜란 일본보다 우수한 성능이지만) 유럽에서도 꽤 오랫동안 장창병들을 잔뜩 운영하며 200~300년동안 사수들을 보호해줬죠. 한국도 신라시대 매소성전투에서 장창병을 잘 썼던 민족인데 이게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면 우수한 사수와 융합되어 임진왜란때 일본군을 많이 물리쳤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많이 아쉽습니다.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조선 본인들도 그 실책을 잘 알고 임란 후로 근접 보병을 제대로 양성하죠. 물론 다시 쇠퇴했지만요ㅜ 근데 당시 상황을 보면 수성전 위주였고 든든한 성벽이 있는데다 세계 최고 사수들이니 거기에 치우친 거 같아요ㅠ 아… 조선이 원정 전쟁만 했었어도 밸런스 맞았을 텐데 말이죠ㅠ
영상의 주제와 약간 다른 내용이긴 한데, 정작 북방군이 내려와 교전했을때는 기존 교리로 잘 싸웠습니다. 본질적인 문제는 조선의 경제적 쇠퇴로 인한 군비축소와 이에 따른 화약무기 감축, 소규모 기습과 농성을 해결하기 위한 방어시스템(제승방략), 그리고 원균의 헛짓거리로 보급선이 연결되어 왜군의 공세가 유지된 점 등이 있습니다. 물론 도검의 차이는 명확했고, 왜검에 주목해 많은 변화가 생긴것도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시스템을 갖춰놓고도 핵심이 되는 부분을 빼고 작동시켰으니 잘 될 수가 없죠.
한명련 같은 무장이 진짜 대단한것 같음 임란 이전에도 일본도 쓰는 조선 무관이 있었지만 한명련은 천민 출신인지라 순전히 전공으로 출세한건데 훗날 노획한 일본도를 썼을수도 있겠지만 초반에는 짧은 환도를 썼을건데 참 대단한 거 같습니다. 일본은 기후가 고온다습해서 좋은 활을 만들기 어려워 백병전이 발달했고 이게 조총 등장 이전에는 조선군이 원거리에서 활과 화포로 박살 냈을 정도로 조선군의 원거리 공격이 효과를 봤다고 합니다. 사실 사극과는 달리 임란 이전에도 조선군의 화약병기 운용도가 높아서 이시애의 난때조차도 화약병기 vs 화약병기의 대결이었죠. 옛날 사극보면 벙거지에 당파창 들고 싸우는걸로 나오지만... 그러다가 임진왜란때 왜군이 원거리에서 조총으로 엄호해주면서 돌격해버리니깐 농민군 위주의 조선군은 와해되고 말죠. 게다가 조선은 일본과 비교해도 기후에서조차 농업에 크게 불리해서 경제력 엉망에 상업도 발달하지 못해서 직업군인 키우기도 어렵고 그 이전에 세조 시절 창기병 총통위 팽배수 다 와해시켜놔서 궁병 위주의 편제인데 그 궁병마저 왜군 조총병에게 견제당한채 접근한 왜병에게 근접전에서 당하니 ㄷㄷ 임진왜란때 후반부로 가면 백병전에서 안밀렸다고 하더군요.
@@Orang_Fantasy 아 그리고 진짜 문제는 궁병의 환도 길이보단 근접 병과가 거의 사라진게 아닐까요? 궁병은 키우기도 힘든데 그 궁병이 근접전에서 환도들고 백병전 하는건 비효율적이라서 그건 최후의 수단일테고 애초에 근접 병과가 거의 없어진게 더 큰 문제 같습니다. 백병전 전문 부대가 대량 존재했다면 궁병이 보유하는 짧은 환도는 오히려 효율성 있는 무기일텐데 말이죠. 제가 알기론 세조때 반란 억제 차원에서 날려버린걸로 압니다 ㅜㅜ
@@lucasromi83 근접병과가 약해진 건 조선왕조의 의도였습니다 역모를 방지한다구요 한양같은 도시 골목에서 빠르게 치려면 장창같은 야전용 무기보다는 검이 더 좋으니 이런 검사들에 대한 투자를 사실상 심영이로 만들었다죠 정작 세조, 중종, 인조 등등 일어날 역모는 일어났다는 게 함정 애매하게 못 만든 조선의 도로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