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필의 [조선사] 시리즈 몰아보기!* _하단 링크를 클릭하세요._ ru-vid.com/group/PL0lEEgMCRI84hKeFExVPgvY0LL9ciO8gc 역시 고수들 많으신데, 제가 볼때는 모기 다리 만지시는 분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궁궐 이야기로 계속 태클 거시니 답하겠습니다 1 경희궁은 원래 큰 궁궐이었다? 그렇죠1500칸까지 갔으니까요. 근데 그걸 광해가 크게 만든건가요? 인조 아빠 정원군집에 왕기 있다는 말을 듣고 집을 허물고 지은건데 여러분 같으면 크게 만들었겠습니까? 경희궁은 인조때 자기 살던 집터라고 증축하고 숙종때 1500칸에 도달합니다. 2. 인조가 왜 경희궁에 살았나요?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때문에 창덕궁과 창경궁 모두 불타서 그랬습니다. 그럼 누가 창덕궁 창경궁 또 다시 만들었을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3. 불탄 궁궐 재건하고 없는 법궁 만들자는게 그렇게 죽을 노릇이면, 가장 엉망인 세도정치기 끝나자 마자 7000칸 경복궁 절반 만들다 화재로 다 날리고, 그래도 다시 만든게 7000칸인데, 대원군도 폭군이라 하지않습니다. 4. 정조는 안만들어도 되는 화성 만들었고 수천명 이끌고 화성행차 다니면서 재정날렸으니 문제제기할수 있습니다. 화성행궁 뿐 아니린 천도하려했으니 얼마나 많은 궁궐 만들뻔했을까요? 그러나 누가 정조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노론 벽파로 인해 실추된 왕권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죠. 전근대의 왕권강화는 민생안정에 필요충분조건 관계입니다. 백성 수탈해서 뒷주머니 채워야할 탐관오리와 조정대신들 입장에서 그게 다 궁궐로 들어가니 환장할 노릇이었은것입니다. 광해군때 탐관오리 기록도 벌로없고~ 농민반란은 전혀없습니다.ㅎ 현실 정치인에 대한 평가도 극단적인 이 시대에 과거의 인물을 놓고 같은 판단을 할수 없다는거 압니다만,,,광해가 폭군이라는 전제에 동의하기 힘드네요. 이후 인조반정 영상을 꼭 보시구요. 주말 마무리 잘하시고, 힘찬 한주 되세요^^
결국 역사는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서 의견이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이완용이 사실 충신이었다라던가 등의 일선을 넘은 주장을 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선생님 말을 신뢰할거라 생각하니 그저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바가 있다면 그대로 밀고나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의 주장도 일선을 넘지 않는 이상 염두에 두시는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영상을 보고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싸우자고 그런말을 하는게 아니라 선생님이 이 시대의 진정한 지식인이라 믿어 의심치않기때문에 그런 사람이랑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싶어서 그런걸태니까요 전 선생님을 많이 존경하고 또 지금 이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오래오래 뵈었으면 좋겠어요! 화이팅입니다.
@@ohgwon7195 이글 신고해볼까? 5.18 왜곡하는글 쓰면 5년이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 벌금인데?! 얼마전 법안 통과 된거 몰라? 니글에 민간이 경찰먼저 치어 죽였다는 사건! 그 진실은 당시 공수부대원이 운행중인 버스에 최루탄 까넣어서 버스기사의 운전 불능으로 인한거였는데! 니가 쓴글 좋은말할때 내려라! 이거 5.18단체 신고 하면 넌 조사도 필요없이 바로 현행법 위반이다! 경고했다! 카운트다운 24시간 준다! 일단 니글 캡쳐는 했다!
세종, 광해 개인적으로 조선시대 군주중 가장 존경하는 인물들입니다. 평소에 혼자만 갖고 있던 의문과 생각들이었는데 너무 공감되고 반가운 내용의 강의였습니다. 역사는 남은자들에 의해서 그들 스스로 정당화 하기 위해 사실과는 다르게 쓰여진 것이 많을것이라 생각합니다. 황현필 선생님 같은분들로 인해 부끄러운 역사든 자랑스러운 역사든 객관적이고 정확한 해석으로 후손들에게 교육되어지길 바랍니다.
임진왜란이라는 시련을 극복하지 못한 기득권 서인집단과 성리학은 이때 꼭 심판받아야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점점 교조화해가며 결과론적으로는 여진에게 크게 당하기도하고 나라가 발전할 수 있었던 시기를 크게 놓친것 같습니다 만약 이때부터 개방적 태도로 상업위주의 실리주의를 키웠다면 어땠을까 하며 상상해봅니다
@@user-dl9nw8qb2r 광해군:얘드라~~ 너희들 돈도 많은데 인경궁 건설에 모금 좀 해줘~ 공명첩 줄게ㅎㅎㅎ 아 그리고 공명첩으로 얻은 벼슬은 명예직입니다. 공명첩땜에 지방수령은 무슨ㅋㅋㅋㅋ 정조가 세도가 권력 키웠다가 사후에 그 세도가들이 자기 집안사람으로 관리 앉히고 아첨하는 애들 돈받고 관직 주면서 탐관오리가 늘어난겁니다
그때 당시에는 궁궐 짓는게 너무 힘들었겠지만 조상님들 덕분에 지금 후손들은 좋은 문화유산은 물론 훌륭한 관광지로 후손들이 잘 이용하고 있습니다.조상님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중국 자금성,일본에 오사카성등등, 동서양 통틀어 세계 어느 궁이고 성보다 서울에 있는 경복궁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건물 하나하나 의미와 스토리도 좋구요. 여러분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경복궁 재건 사업을 정부사업으로 완전히 복원사업을 해서 세계가 와서 보고가는 세계적인 유산이자 관광지로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hannam63 신해혁명 때의 구호인 멸만흥한이 어떤 말인지는 알고 조선족이냐고 비아냥대는 건가? 중공이야 속지주의 역사관이라 지금의 중국 영토 안에 있었던 나라의 역사는 모두 자기네 거라고 억지를 부리지만, 중공 수립으로부터 불과 수십 년 전에는 몰아내자고 하면서 같은 나라 사람으로 취급도 안 했다는 건 알고 말하기 바란다. 또 하나. 일단 명이 망하고 중원이 청의 영토가 된지 오래인데도, 굳이 자극해서 불씨를 남겨 놓을 필요가 있나? 우리네 풍습을 못 지킨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 임금이 승하했을 때 묘호를 못 붙인 것도 아니야. 오랑캐라고 이를 박박 갈면서 무시하기 보다는 북학파처럼 배울 건 배워서 이기겠다는 마음을 가졌어야 건설적인 거지. 그동안은 치욕적이더라도 외교적으로 청의 연호를 쓰는 게 안전하고. 구밀복검이 어려운 상황도 아니야. 19세기 서구 열강의 발호로 청이 흔들리면서 조선을 서양 개념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한 건 있지만, 그 전까지는 전통적인 '겉만 속방'인 조공 관계였거든? 조공 무역으로 어느 지나 대륙 국가건 그만 좀 보내라고 할 정도로 무조건 빌빌거린 것도 아니야. 허점을 노려서 뜯어낼 건 뜯어냈다고. 저 정도는 해줄 수 있는 범위 내였는데 무슨 조선족 운운이야?
1. 전쟁이후 궁궐 지어야죠. 그거까지 뭐라할 수는 없습니다. 근데 광해군은 창덕궁을 중건하고 정작 창덕궁에 머무는 것을 꺼려합니다. 창덕궁을 다 지어놓고 창덕궁에 안갑니다. 창덕궁에 잠깐 머물다가 다시 경운궁으로 갑니다. 이후 무려 3년 반이라는 시간을 경운궁에 머뭅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왜란이후 왕실의 정통성을 세우고 위엄을 보이기 위해 궁궐은 짓는 수준 이상으로 과도하게 궁궐을 지은 것이 맞습니다. 2. 3:12 경희궁이 '지방의 큰 관아정도 되는 크기'라고 하신것은 현재 남아있는 건물 기준으로 말씀하신건가요? 《서궐도안》이라는 그림을 보고도 지방의 큰 관아정도 되는 크기라고 할 수 있나요?? 아무리 광해군이 "경덕궁(慶德宮)은 단지 잠깐 피하려고 머무는 곳인데(광해군일기 광해군 10년, 1618년 4월 5일)"라고 했다지만 엄연한 궁궐입니다. 그리고 궁궐을 아무리 작게 지어도 지방 큰 관아의 수준은 넘어요.... 3. 그리고 광해군이 사치를 안한 것처럼 말씀하시는데(궁궐에 대한 사치만 부린거라고 하시네요.)아예 안한것은 아니지않습니까? 사르후 전투 패배 후 명나라 만력제는 조선군 전사자의 유족들을 위로하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는데 쓰라며 조선 조정에 은 1만냥을 하사합니다. 그런데 광해군은 이 돈을 이렇게 씁니다. "지금 중국 황제가 내려준 은 1만 냥을 내림에 호조 참판과 색낭청이 받아가지고 갔다. 허술하게 하지 말고 십분 단단히 보관하라.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을 우선 값을 주고 일일이 서계하라. 그 가운데 용보(龍補)·겸금(兼金)·주옥(珠玉)·사라(紗羅)·능단(綾緞)은 나라의 용도에 합당한 물건이니, 먼저 내어 팔지 말도록 하는 일을 십분 상세히 살펴 하라."(광해군일기, 광해군 14년 1622년 4월 27일) 이게 일국의 군주가 할 행동입니까?? 4.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문구를 '역사기록은 승자가 무조건 왜곡했거나 승리자의 입장에 맞게끔 쓰여졌을거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됩니다. 이는 또다른 왜곡된 관점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특히 실록은 더 조심해서 봐야합니다. 일례로 실록엔 동일인물이 (편찬자가 속한 붕당의 입장을 반영하여)극과 극으로 평가받는 기록이 있죠. 그럼 왜 이런 기록이 남아있을까요? 왜 선조, 현종, 숙종, 경종 실록이 각각 2가지 버젼으로 존재합니까? 승자의 입장에서 패자의 기록을 지우거나 실록에 싣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왜 시간과 돈과 노동력을 더해서 다른 버젼의 실록을 만들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광해시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역시 역사는 되풀이 되고 있고 작금의 사태와도 언듯 언듯 평행으로 흘러 가는 듯한 착각까지 듭니다 ! 시대가 바뀌어 이제는 시민이, 국민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 소위 정치가 들에게 모두를 맡겨 두어서도 안되고 항상 감시와 격려를 하면서 같이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이 들어도 우리의 아들, 딸 들이 희망을 가질수 있는 대한 민국이 되도록 !!
@Byronic Hero 그게 모자란거에요 광해군이 궁궐공사 다음으로 제일 많이 한게 역모사건 친국이었죠 가짜역모는 신나게 때려잡으면서 정작 진짜역모는 술퍼먹고 무시하다가 화를 입었죠 오죽했으면 당시 상소에도 도둑이나 간통범으로 잡혀 온 잡범들조차 역모를 지어내서 고변하여 처벌을 면한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 허씨인데 이이첨의 계략으로 허균이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광해로부터 받았는데 고론게 조금 아쉽지만 선생님 말씀처럼 크게 보고 현 시점에서 보면 분명 광해군이 아닌 넓을 광에 광종 정도가 되시지 않으셨을까 합니다! 자세하고도 실증적인 강의 귓가를 울리네요! 원더풀입니다!엄지척 5개드립니다!^^
와.. 광해를 빠는 이유 1도 이해못하는 사람으로서 꼭 다른 왕을 불러서 비교하며 좋은 왕이다?라 어필을 해야하는지.. 여색을 밝혀도 태종한테 뭐라할넘 없었습니다. 근데 연산에겐 뭐라하죠. 왜그런건지 정말 모르는건지.. 광해는 폭군이다 아니다를 떠나 정치를 못했습니다. 최악의 군주 인조처럼 사람보는 눈이 없었으며.. 그런 인조도 정권장악능력은 있었으나 광해는 그것도 없었고 인조는 이괄의 난때 잘 튀었지만 광해는 그 튀는것조차 실패 광해때 탐관오리기록이 없다는건.. 선생님이 보고싶은 기록만보신겁니다.
인조반정은 성공한게 이상했을정도로 준비도 치밀하지 못했고 보안도 안되어서 이미 몇개월전부터 기밀이 새어나갔고 동원된 군사도 많지 읺았음 심지어 당일에도 고변이 있었음 이때문에 반정대장이었던 김류는 겁이나서 당일에 집에 숨어 떨고 있었다고 함 그럼에도 성공한 원인은 1. 도성내부의 군사력이 마비상태 도성내가 죄다 궁궐 노가다판이다 보니 군사들까지 공사와 자재 운송에 투입된 상황이라 도성을 지킬 군사가 별로 없었고 게다가 나라 재정이 파탄나다보니 돈이 없어 북방에 전념한답시고 도성수비는 포기한 상황 게다가 반정당일에 광해군은 술먹고 파티를 하느라 진압명령도ㅠ안내리고 보고되는 상황을 무시해버림 결국 반정군이 들이닥치자 술에 취해 내관에게 업혀 도주하나 다음날 체포됨 요약 : 나라꼴이 개판이었고 북인과 더불어 총체적 무능 부패로 몰락한 광해군 정권임
저번 영상 댓글에 광해군에 대해.비판의 글을 썼던 사람입니다 이래서 배워야하나 봅니다 광해군을 비판하는 영상과 책에 매몰되어 그것이 사실인양 생각해 왔습니다 선생님 강의를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왕들이 했던 일들을 비교하면서 광해군을 설명해 주시니 더 이해가 잘 가네요 역사를 역사답게 가르쳐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어쩜 너무 멋지잖아요 ㅜ ㅜ
광해군의 궁궐 중건으로 인한 민생 파탄은 결코 가볍게 볼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창덕궁 중건까지야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치지만, 경운궁, 경덕궁, 창경궁, 인경궁, 자수궁 등 4~5개의 궁궐을 동시에 건설한 건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이었죠. 게다가 광해군은 교하 천도까지 시도하는데 만약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쫒겨나지 않고 교하 천도를 시도했다면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들끓지 않았을 런지…….
오호 역시나 이런 인간이 있지 궁궐 짓는게 그렇게 폭정이라고? 우리나라 궁궐이 뭐 그렇게 대단히 크다고 자금성 만리장성 피라미드 같은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 인데 그 건물들 축조를 지시한 진시황 파라오는 위대한 왕이라고 칭찬 하면서 에휴 그리고 정조도 수원성[화성]을 짓고 수원으로 왕실을 옮기려고 했는대 정조대왕은 못 까겟지 왜냐면 반정으로 실각하지 않았으니까 당신 같은 인간들은 반정으로 실각한 광해는 그 만한 이유가 있을것이다 라고 답을 정해놓고 거기에 이유를 끼워 맞추는 것이지 에휴 그리고 인조 놈 때문에 병자호란 당하게 해서 죽은 몇십만명의 백성들은 불쌍하지 않아? 궁궐 짓게 해서 사람이 죽나? 백성들의 원성이 좀 있엇다고 해도 사람이 죽진 않자나 과연 인조 놈에게 쫓겨나는게 옳은 거야 그게 맞아?
저는 같은 시기 후금에서 지은 허투알라, 동경성터, 심양고궁을 다 가봤는데요 그 합친 크기와 광해군이 새로 지은 궁궐들을 합친 크기와 비교해보니 후금쪽 궁궐이 면적 상 더 넓었어요 현재 청나라(후금)이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경제 문제가 크다고 보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후금이 동시기 지은 궁궐보다도 면적 상 작은 궁궐을 지었다는 이유로 광해군이 폭군이라... 참 아이러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