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필의 [조선사] 시리즈 몰아보기!* _하단 링크를 클릭하세요._ ru-vid.com/group/PL0lEEgMCRI84hKeFExVPgvY0LL9ciO8gc 18분 10초 허준의 생몰이 잘못 표기되었네요. 허준(1539~1615)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주말 영상은 광해군 폭군설에 대한 반박영상입니다. 주말 마무리 잘하시구요^^
ㄴㄴ 잘못알고 계신거임 그때 당시의 기득권은 광해와 북인들이였음 광해가 집권할때도 인목대비의 외척세력인 소북파 제외하고는 모든 당파가 광해지지파였음 그냥 광해가 정치 못해서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거임 영상에서도 나오는데 선조한테 광해세자 건의하다가 날라간 세력이 서인세력이였음 심지어 저때가 임란전임 즉 광해가 분조맡기전의 상황이였음
@@unfortunately5516 애초에 광해는 다 쓸고 다시 시작했어야함. 붕당정치 붕괴시켜야했는데, 못해서 결국 기득권들이 자신의 것을 내놔야한다고 하니. 지들이 다 죽여놓곤 광해한테 뒤집어쓰게 하고 유배보낸 거임. 그럼에도 광해를 따르는 신료들이랑 유생들이 있어서 죽이지는 못한 거임. 죽지 못해서 살게만 함.
광해는 명군입니다. 임진란때 북인 의병들과 함께 땅에떨어진 조선의자존심을 그나마 지켰습니다. 아무것도 없이 분조를 이끌고 백성들과 함께 먹고자고 조선을 지켰습니다.전후에는 복구사업도 열심히 했구요. 남들 다 도망갔어도 광해는 물러서지않는 멋진 군주입니다. 저는 광해대왕으로 부릅니다
@땅콩 당신이야 말로 말 참 고깝네 하시네 ㅋㅋ 모르면 가만히 있던가 ㅋㅋ 오히려 단종은 폐위당한 뒤 생전에 광해군보다 대접 안 좋았던거 모르시나?? 단종은 폐위 당한 뒤 아예 살해까지 당했는데 광해군은 오히려 18년 더 잘 살다가 나이들어서 죽었잖아 거기다가 광해군은 죽은 뒤에 경기도에 묻히기라도 했지 단종은 살아서 왕 됬던 분인데도 불구하고 강원도에서 시신이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고 말이야 그리고 단종의 복권이 세조랑 세조 다음 왕들에게 정통성 문제 유발할 수도 있는거 맞아 단종 복권 시키는게 정통성에 문제가 안 됬으면 왜 한참 지나서야 숙종 때 간신히 복권이 됬을까?? 이는 단종을 복권 시키면 세조와 세조 다음의 왕들의 집권 과정에 대한 정당성에 문제를 유발하기 때문이지 세조는 계유정난 성공 못했으면 왕 못 되고 세조 다음의 왕들은 모두 세조의 직계후손이라서 세조가 왕 못되면 지들도 왕 못되니까
@@ohgwon7195 헐! 김대중이가 총칼로,??.다까끼 마사오와 전낙지가 그런거고,..체육관선거가 국민대다수의견이라고,ㅋㅋㅁㅊ.72년인가 대선에서 다까끼가 부정선거로 김대중한테 겨우 90만표로 이겼다 그 후 곧바로 유신독재가 시행되었고. ..이나라 현대사를 일베본국 일본에서 배웠나.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해외인식은 장기독재자로 낙인,
광해만큼 재평가 되어야 할 인물이 김대중 대통령이다. 간첩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북에 나라 바친다. 친일이라 일본문화 개방해서 우리 다 죽인다 별의별 유언비어가 다 나왔던걸로 아는데 지금의 IT선진국 소리 듣고 문화 선진국 소리 듣는게 그분의 업적이라고 생각함. 이명박 박근혜 정권만 정신 차렸어도 지금보다 더 대단한 나라가 되었을텐데. 땅이나 파고 기업들 삥이나 뜯는 정권이 들어와서는...
ㅋㅋ전후복구사업은 좋은데 궁궐5개씩 지으면서 파병보내는 군주가 무슨 복구입니까.. 대동법도 부정적이던 사람인데..게다가 재정파탄 난다고 반대하는 신하는 내치고 이이첨같은 대북파만 총애하면서 간신까지 등용하는 분을 딱히 재평가까지는 필요없다 생각합니다. 물론 인조에 의해 어느정도 왜곡될수는 있으나 세자시절 명군급의 전시군주 활동과 대동법 유지 기타 전후복구 등+ 궁궐병+국방력 강화+파병으로 정예 1만 증발 등 명군은 아니고 딱 평군 정도.
이런 댓글 달까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저도 정말 많이참았는데 광해군 이야기 들으면서 능력있는데 아버지의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설움 받은 지나간 나날들이 많이 생각났었습니다. 정치적권력관계 이유가 아니라면 광해군은 새어머니 인목황후와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아끼는 성군이 되었을거에요.
적장자라는 것만으로도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는 조선에서 서차자가 왕위에 오른 상태에서 살아있는 적장자는 존재자체부터가 당연히 가만있어도 위협일 수밖에 없죠 게다가 광해군이 세자인 시절 인목왕후는 영창대군을 세자급의 옷을 입히는 등 간접적으로 왕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으니 영창대군의 비극은 예고 되었죠
꼭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광해군 지위나 입지는 매우 탄탄한 편이었고 이는 광해군이 즉위 후 상당히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것만 봐도 드러나죠 그리고 당시엔 적장자가 없는 상황에서 서자가 가통을 이었을때 훗날 적장자가 태어나더라도 이를 번복할 수 없는게 사대부의 국롤이었습니다 즉 광해군이 세자가 된 상황에서는 영창이 태어났더라도 이미 군신간의 의리가 정해졌기때문에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죠 선조도 정작 폐세자는 입밖에도 안꺼냈죠 팩트 : 영창대군이 태어났다고 해서 광해군이 위협받진 않았음
박근혜는 삼퍼센트였어 .그리고 무슨 민주주의가 성공한 그리고 완벽한 정치체제라고 누가 그러디? 다만 최악을 거를 수 있는 그리고 국민이 책임을 지는 민주주의 제도가 현재 다른데 나와 있는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 유연성있고 시대에 맞기 때문에 채택을 하는 거뿐이야.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님이 언제 총칼을 불렀니? 니가 착각하나본데 총칼 쿠테타하면 미얀마나 전두환 이나 박정희 같은 새끼들을 말하는 거야. 지금 어디에서 총칼을 휘두른다고 하니? 그리고 마지막으로 댓글에 대댓글이면 주제에 맞게 얘기해라. 갑자기 왜 나와서 허위선동이냐?
조선의 멸망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이 존화사상인데 광해군 집권시기가 명청교체기 였음을 감안할 때 이때 광해군이 성군으로서 장기간 통치했더라면 존화사상에서 벗어난 자주독립국가로서 존속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한 실록과 사관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개쓰레기 인조는 선조보다 더 찌질입니다 우리역사에 악영향을 끼친 망군입니다 두가지 축면에서. 첫번째는 인조 반정으로 현군 광해군을 몰아내고 명을 섬김으로 병자호란을 겪어 만백성에게 씻지못할 치욕과 고통을 야기시켰고 두번째 개혁군주감인 소현세자를 독살로 조선새혁을 차단시킨 개망나니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성리학을 교조화해 아시아 문명을 오로지 중화로만 해석해서 명이 망했으니 조선이야말로 아시아의 유일한 문명국이라는 단편적이고 아집적인 생각이 조선을 망하게 했죠. 광해때야말로 조선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걸 놓쳤으니 허상같은 중화, 존화사상에 갇혀 죽어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인조반정때 광해한테 붙인 죄목들은 너무 과장된 죄들이 많음... 페모살죄는 권력투쟁 성격이 좀 강했고 후금한테 사대하고 명에 대한 의를 저버렸다고 하기엔 명나라가 요청한 파병에서 조선군은 너무 열심히 싸움... 중립외교라고 해서 후금한테 바로 항복한걸로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데 사르후전투때 열심히 싸우고 피해도 제법 줌
@@sssu6572 그건 흔히 아는 강홍립에게 밀지를 줘서 여차하면 바로 항복해라설이고요. 실제로는 그딴거 없이 18000중 전투참여가 13000이고 그중 7천에서9천이 궤멸하고 나머진 포로, 도망, 처형이 합쳐져 2700생환으로 사르후 파병에 있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에 나옵니다.
..절대 명군 아닙니다. 폐모살제는 그렇다 치고 어떤 명군이 임란의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궁궐5개를 동시에 지으면서 군사력 강화를 하면서 18000을 파병보내면서 간신등용을 합니까.. 민심은 당연히 개판이였습니다. 심지어 그 대동법마저도 광해군은 부정적이였고 폐지까지하려다 못하고 확대는 절대반대했습니다. 18000중 전투참여13000은 2700명만이 생환했죠.
@@user-pt5fe8kt2l 승연님 저도 언급한 내용 알고 있습니다. 제가 명군이라고 한 적은 없으며 그렇다고 폐주, 혼군, 암군이라고 하기에도 아닙니다. 저의 댓글에 괜한 시비 걸지 마시고 황 강사님께서 에 대한 반박 영상 UPLOAD 예정이라고 하니 그거 조용히 보고 입장 정리하세요
@@user-pt5fe8kt2l 그리고 님께서 알고 있는 내용중에 잘못된 내용이 있어서 제가 수정해 드리면 라는 대목에서 광해군은 이원익의 건의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시행하려 했지만 당시 양반 지주층의 격렬한 반대로 경기도에서만 시행하는 것으로 입장을 선회합니다 (이후 전국적 실시 : 평안도, 함경도, 제주도 제외 / 까지 100여년 소요) 그리고 언급한 거는 심하 전투 (명의 요청으로 인한 후금으로의 파병) 를 말씀하시는 듯 한데 당시 강홍립은 이 전투의 대패로 인해 심양 (초창기 후금의 수도) 으로 들어가 누르하치에게 항복하며 조선의 입장을 광해군의 당초 지시대로 전했고 전사자가 많게된 것은 광해군도 예측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영화 광해도 좋은 영화였지만, 드라마 킹덤의 세자 이창도 광해군을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 같아서 보면서 광해군 생각이 많이 났었습니다. (전장을 누비며 사람들의 구심점이 되는점이나, 자기 보다 어린 중전 등이 비슷하죠) 광해군도 재평가가 필요한 안타까운 군주였지만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와서 서양문물을 일찍 접한지라 이분이 만약 왕이 되었더라면 조선이 빨리 개항해서 근대화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두사람 다 암군인 아버지 때문에 고생했는데 한사람은 반정으로 쫓겨나고, 한사람은 왕이 되어보지도 못하고 사망해서 제대로 뜻을 펼쳐보지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광해군편 끝나면 소현세자도 다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제가 기억하는 광해군은 어릴적 국사시간에 배운게 다였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좋은 왕 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광해군일까 왜 폭군일까 라고생각했었고 국사선생님께질문을 해도 납득할만한 대답을 못들었었습니다. 영화 광해를보고도 그리 개운한기분은 아니었는데 쌤의 강의로 후련한 기분이 드네요 제생각이 여~~~~엉 틀린게 아니라는는 생각이드네요 좋은강의 너무 고맙습니다
이건아니죠. 어떻게 형제간의 다툼과 부모에 대한 공격이 같나요. 조선은 유교국가로써 근본을 효에 두고 있습니다. 불효는 강상의 죄로 불충과 더불어 가장 큰 죄에요. 지금시대에도 형제끼리의 다툼은 흔하지만 부모에게 덤비는 자식을 용서못하는데 조선왕조에선 말 다했죠. 불효를 저지른 임금에게 과연 누가 충성할것인가. 결국 반정의 명분이 될수밖에요.
@@ojl307 태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그리고 태종은 아비에 대해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배다른 자식들에 대해 공격을 하였고, 실상 태종은 태조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 마음이 통했는진 몰라도 결국 태조는 태종을 인정했으니깐요. 인목대비에 대해선 살아있는 모친에 대한 공격입니다. 사후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 한것과, 생모를 서궁에 유폐시킨것이 과연 같은 논리로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34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영상을 보고나니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용상에서 고독함을 느끼던 이병헌의 연기가 떠오릅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영화에서의 광해를 떠올려보니 광해군이 그당시 느꼈던 심리가 더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여기서 언급한 임진왜란중 선조의 양위파동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정말 잘 묘사되었는데 보다보면 진짜 피말립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는지 정말 안타까울 지경입니다.
@@user-er6wq2hd3k 홍타이지는 원래부터 조선을 칠 생각이었습니다^^ 이건 외교로 해결할수없는 문제입니다. 이미 후금은 영원성 패배로 인해 공세종말점에 달했었고 물자,노예보충을 위해 조선을 정리할 생각이었고 홍타이지는 즉위 전부터 조선정벌론자 중 하나였습니다. 또 심양이 함락된 시점에서 명나라 개입도 불가능했고요. 생각보다 일방적으로 당한 전쟁같았지만 후금 내부 경제 상황상 궁지에 몰린 일종의 쇼부충 전략이였기때문에 청나라 역시 꽤 아슬아슬하게 이긴 전쟁이였지만 어찌됐건 명나라는 큰 소모없이 조선을 정벌했고 그만큼 전리품도 챙겨서 명나라를 재침공하기위한 물자를 보강할수있었습니다. 또 광해군이라고 특별히 전쟁대비를 잘했던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었으면 궁궐공사로 나라 재정 박살내서 국방비도 거덜낼게아니라 국방에만 힘썼겠죠. 물론 일어난 전쟁수행 자체는 인조보단 나았을지도 모르지만요
광해 이혼을 너무 과대평가 한다는 말도 있지만 광해를 자세히 평가할라면 아주 객관적으로 좌우를 살피며 봐야 하겠습니다.물론 폐모살제를 한 죄도 있지만 무너진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과정에 조정신료들에 의해 폐위되고 인물평가가 많이 왜곡되었다고 생각됩니다.어느세대 지금 현대 사회도 개혁하자면 거부감이 들기 마련이지요... 광해 이혼은 전쟁을 겪은 세대임을 알아야겠습니다.그런데 조정신료들은 그때를 잊고 싶었나봅니다...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것을 잊었나봅니다.
이번영상도 너무 재밌고 흥미롭습니다. 다음주가 아주 기대됩니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광해군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학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조금 더 빨리 흥선대원군같은 개혁적 지도자가 왜 광해군의 역사적인 재평가를 하지 않았을까하는 점이 의아하네요. 정치적으로도 광해군을 복권했을때 서인 뿌리의 세도가문에게 압박을 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조선 14대 군주 선조 역시 조선 왕조 27 분의 군주 중에서 인종, 경종, 정조와 더불어 독살설이 언급되는 군주입니다. 고등학생 때인가 읽은 조선 국왕 독살 관련 책에도 (선조는 동궁에서 보낸 찹쌀밥을 먹고 승하하셨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서 아쉽네요. 그런데 황 선생님이 강의 영상 도중에 언급하신 선조의 승하에 광해군과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허준이 관련되어 있을 지도 모른다 라는 말씀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번 강의 영상도 잘봤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
영화 광해군을 보며 저 모습이면 참으로 멋진 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에 전에 선생님께 광해군에 대해서 한번 조명해 주셨으면 했었는데 뛰어난 리더에 뛰어난 인재가 함께 하기는 참 싶지 않은 듯 합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면 역사와 현실은 크게 다르지도 않은 듯 하구요... 이번에도 잘 보았습니다. 앞으로도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가는데 지속적으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에 주셨으면 합니다~ 훌륭한 역사관을 안고 살아가는 자긍심 최고의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