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문득 '충분해 충분히 경험했어'라는 생각이 올라왔어요 충분하기 때문에 내려놓을 수 있는거구나 싶었고, 충분히 아팠고 충분히 힘들어했으니 이 경험들에 감사하고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어떤 분과 좋은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끝에 그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평온을 찾게 되었어요 근데 저는 불안하더라구요 이걸로 우리 관계가 끝나는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관계는 이어졌지만 뚜렷한 대화의 목적이 없어서 대화내용이 변질되고 결국엔 다툼으로 끝났어요 평온을 찾았을 때 이미 충분했던건데 놓지 못했던거예요 반응에 반응하는 식으로 소모전만 했던거예요 이미 충분했던건데... 반응에 반응하지만 않으면 저절로 사그라드는건데.. 억지로 붙들고 있었던거예요 반응에 반응하는 것 그러니까 현상에 반응하는 것은 놓으면 정화되는거 같아요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에서 어떤 걸 생각하면 창조되는거 같구요 그래서 시크릿이 성공하려면 정화해야한다 하고.. 예수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고 말씀하신게 아닌가 싶기도.. (그냥 제 생각이예요) 빚이 있어서 돈을 벌고 싶다면 빚에 대한 생각은 제껴두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생각을 해야하는거 같아요
언어에 속아서 인간이 착각을 이루고 있네요 석가의 철학의 이해는 자연의 이해와 우주의 이해같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그것을 이해하려면 기존의 의식를 깨고 다른각도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고 계속 공부하면 깨달음의 세계를 느끼면서 열반과 해탈의 세계로 갈 수 있을거 같습니다. 좋은 동영상으로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는만큼 보이고 아는만큼 들린다고 하는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있다와 없다에 익숙해 있지만, 보인다와 안보인다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것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것이 아닌데 우리는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믿습니다. 비우는것은 버리는것이 아니라 잠시 내려 놓는것이 아닐까요? 지식이 지혜를 위해 필요없는것이 아니라 지식을 품어야 그 속에서 지혜가 나오지, 지식이 없이 바로 지혜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태어나야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듯이 태어나지않고 다른것을 이룰 수 없듯이, 우리가 가진 모순도 결핍도 어려움도 잘못알고 있는 지식도 지혜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는 필요없는 것이 없다고 합니다. 병, 어려움도 필요해서 있고 그것을 어떻게 바르게 쓸 수 있을지가 중요한것 같습니다. 불행은 슬프고 아프고 어려운것이 아니라 행하지않고 나아가 바르게 행하지 않는것이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저의 생각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탓낫한 스님 비유가 참 아름답군요. 오온개공에서 공을 진리라고 바꾸어보세요. (오온은 모두 진리의 작용이다.) 진리는 무엇인가? 무아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가 아닌 것 즉 열반입니다. 열반은 무엇인가? 열반은 절대적 인식작용입니다. 열반은 실재합니다. 열반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오온을 통한 인식작용이 사라지므로 시체와 같은 것이 됩니다.
ㅡ생각으로 파악할 수있는 범위ㅡ 생각으로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생각자체, 몸, 오감, 감정, 자아의식, 잠재의식, 무의식 정도까지 이고, 그 너머는 파악 불가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밖은 유도 아나고 무도 아닌 것이고, 작용은 하지만 실체는 없다 하겠습니다.
몇일전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본연을 찾고자 이것저것까지 찾아보다 불교의 사상에서 무아에 대한것으로 편안해졌다가 그럼나는 무엇이지? 계속 한켠에 풀리지않은 것을 안고 살다가 영상을 보고 계속 생각한 끝에 오늘 뭔가 한꺼풀 벗겨보니.. 문득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아 참나 참 의미없는 논쟁이라고 봅니다 무아고 참나고 둘다 바늘로 찌르면 똑같이 아픕니다 그건 됐고 난 기본적으로 힌두교와 불교는 같다고 봅니다 이유는 둘다 불이법을 기본 사상으로 삼고있기때문이죠 불이법의 핵심의미는 나와 모든 대상은 보이지않는 에너지로 통으로 엮여있다는 뜻이죠 그래서 거울이라고도 많이 얘기하죠 중생과 깨달은자의 차이는 딱하나입니다 중생은 나와 세상은 분리돼있다고 믿어서 내가 살기위해서는 나만 생각한다는거고 깨달은자는 나와 남은 보이지않는 에너지로 엮여있다는걸 알고 상대의 눈치를 보며 조심해서 산다는거죠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 제발 몇천년전 어려운 한자용어 폐기하고 쉬운 한글로 용어 만듭시다 내가 불교도 쉬운말로 쓰져있었으면 진작에 라마나형 책 보지도 않았죠 누가 의사에게 물었는데 진료처방전 용어는 왜그리 어렵게 쓰져있냐고 물으니까 의사가 씩 웃으며 우리끼리만 알려고요 라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 오늘도 다들 행복하세요
ㅡ열반은 생각 밖에 있다ㅡ 열반은 생각으로 파악할수 있는 범위 밖에 있어서 적극적인 설명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 비열반을 제거함으로서 그것에 닿을 수가있다. 파도가 생각이고 개아의식이고, 열반이 바다라면, 열반은 진여심, 여래장과 같은 것으로, 열반묘심이라는 말을 쓴다.
써니즈님과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참나는 평화이다. 열반은 평화이다.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이다. 상호존재이다. 나는 모든 경험을 허용하는 텅빈 알아차림입니다..모든 세상은 오로지 마음이다. 상호존재합니다. 상호존재입니다. 하나가 전체를 담고 있습니다. 만법은 유심이다. 우리는 지혜이다. 색 수 상 행 식 ...오온은 마음이다.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비아.열반적정, 지속불이. 무주열반, 자타불이. 홍익중생..홍익인간.상호존재입니다. 우리는 전체입니다. 그리고 하나입니다. 개성진리체입니다 .감사합니다. 명상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명상합니다 .사랑합니다.
애초에 나는 태어날때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죽을때도 없고 죽은후에도 없다라고 갑자기 생각이 들었어요 참나는 생각과 하나일때 존재한다를 알수 있지 않나 모든것이 참나라고 하는 이유는 모든것(생각)과 참나가 하나이니깐 생각이 참나를 필요해하고 참나는 생각이 있어 존재감을 느끼는게 아닐까 본성이 사랑인 이유도 모든 생각을 분별없이 알고 (비추고)있으니깐 그렇치 않을까 🤔 생각해봅니다 ㅎㅎ
아이가 우는것은 불만족 때문이고 인간이 구하는것은 불안하기 때문이고 농부가 씨를 뿌리는 이유는 수확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만약 수확을 믿지 못하면 씨를 뿌릴수 없듯이 믿음은 인간의 행위에 중요한 동기가 됩니다 이 시대 인간들이 땅에 씨를 뿌리지 못하고 인간에게 씨를 뿌리는 까닭에 그 수확을 담보 못함을 인간들은 스스로 경험하고 있음에 마음이 병들고 괴로와 합니다 도는 자연의 섭리와 믿을수 있는것과 함께 할때 도를 도라 할수 있습니다 인간이 만든 이세상과 저세상 모두가 허망한것이라 그것에 의지하고 믿는다는것을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부처도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을 홀로 나아가라고 하셨고 믿을수 없는 이세상에 의지하여 감각하는것이 고통이라고 하신것 타인을 의지하지 말며 만들어진 이념 사상에 의지하지 말며 세상의 섭리를 청정한 지혜로 관조하며 감각을 멀리하며 평온함을 유지하라 배고프지 아이는 울지 않음을 내가 구하고 있다면 내안의 무엇이 불안해 하는지를 살피고 보살피시기를
자아가 없다는 뜻, 낙처는 내가, 즉 ㅡ참나ㅡ가 모양이나 형상이 없는 ㅡ법신부처ㅡ라는 뜻입니다. ♥ 진여자성, 즉 법신부처님의 본체, 본바탕은 텅 비어있으므로 ㅡ공ㅡ하다고 하고, 그 ㅡ공ㅡ한 가운데서 모든 현상계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작용하기 때문에 ㅡ공ㅡ하지 아니하다 합니다. ㅡ돈오요문론.p,170~ 180ㅡ.
ㅡ무아인데 누가 윤회하나?ㅡ 부처님은 무아라 했고, 불경에는 윤회 이야기가 나오니, 일반적으로 식(8식)이 윤회한다는데, 정확히는 "8식=생멸심+진여심"으로, 생멸심이 윤회한다고 하겠습니다. 진여심은 영화의 스크린 같은 것이고, 생멸심은 영상 속의 주인공 같은 거라하겠습니다. 중생은 그렇게 윤회하고, 아라한, 부처는 윤회 않는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