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홍대선입니다. 어색함이 풀려서 지난주보다는 편하게 방송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 이강민 편집장님과 스텝분들 덕분입니다. 무엇보다 많은 관심 가져주시는 시청자분들께 감사말씀 드립니다. 저의 신간 의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아무래도 한정된 시간내에 모든 이야기를 할 수는 없어 아쉽지만 이렇게라도 소개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모두들 (많이)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한국식 산성방어 체제는 현대의 종심방어 개념과 비슷합니다. 이 부분을 첨언해주셨으면 더 잼있었을 듯 합니다~ 성이 하나 깨진다고 해도 방어선이 무너지는게 아니고 그 뒤로도 줄줄이 거점에 산성이 버티고 있고... 또는 점령이 힘든 산성을 우회해서 진격하면 우회된 산성에서 병력이 나와 적의 보급선을 끊습니다. 아주 영리하고 적에게는 골치 아픈 방어전략입니다. 산성이 발달하게 된 이유 중에 또 다른 하나가 청야전술입니다. 홍작가 님이 말씀하신대로 중국같은 경우 대군으로 밀고 들어오는 경우 많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장기간 전쟁을 하려면 보급을 엄청나게 신경써야 합니다. 그런데 한반도는 종심방어이다 보니 성을 하나 하나 깨고 진격하는데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고 이는 엄청난 보급을 요하게 됩니다. 이럴 때 적은 결국에는 현지에서 식량을 약탈 등으로 조달해야 하는데... 우리 조상님들은 영리하게 전쟁이 터지면 먹을 것과 물자를 싹싹 털어서 산성으로 틀어가 버리지요. 이런 청야 전술로 인해 중국에서 들어오는 대규모의 침략군은 엄청나게 속전속결로 전쟁을 끝내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이런 압박때문에 중국에서 온 침략군은 종국에는 삽질을 많이 하더라구요. 진짜 우리나라 산성은 고도의 방어전략 입니다~
또다른 것은 의병이죠. 한국인은 국가나 민족이란 개념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도 의병으로 일어나 싸우는 통에 일본군이 황당해하고 고전했다고 합니다. 일본 농민은 그냥 농사짓는 터라 그런가보다 구경하고 피하기만 하고 다이묘들끼리 전쟁하고 이기고 지고 뭔가 그들끼리 싸움이었는데 한국은 군대를 물리쳐도 백성들이 달려드니 수장을 잡으면 전투가 끝나는 형식이 아니었던거죠.
그러니 몽골 만주족 일본이 대단한거기도 하죠... 같은 종족이기도 해서 그런듯 합니다. 한족은 우리를 절대 못이겼죠. 만주족은 고구려 땅에 살던 후예들이고 왜도 백제 고려 유민들이 넘어가서 만들어진 나라잖아요. 일본이 한일합방의 이유 중 하나로 짇,ㄹ도 같은 민족이란 이유도 갖다 붙였죠.. 물론 북한하고도 남인데 천년을 갈라져 살았으니 같은 민족이라 할 수 없죠. @@김연진-l8i
직산전투에 5만대 1700명 싸움에서 일본군이 승리하면서 생겨난 소감같으네요. 그 연유라면, 이거 때문일겁니다. ‘제승(制勝)’이란 적을 제압하여 승리로 이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제승방략은 전쟁에 승리하는 전략인 셈이다. 조선 전기 국방 체제는 1457년(세조 3) 만들어진 진관 체제(鎭管體制)였다. 이는 병력 이동 없이 행정 단위에 따라 소속 지역을 지키는 전략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사와 군비(軍費)를 발생시켰다. 또한 진관 체제는 군사를 분산시키게 되므로 상습적으로 침입을 당하는 지역이나 군사 요충지를 선별하여 병력을 집중시키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조선 전기의 골칫거리였던 북방 여진족과 남해안 왜구와 벌이는 소규모 국지전에 대처하기에는 비효율적이었다. 조선 정부는 1510년(중종 5) 일어난 3포 왜란을 계기로 하여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 지역에 각 진관의 수령이 휘하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중앙 정부에서 보낸 군사 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전략, 곧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방어 체제를 구축하였다. 조선 정부는 비전문가가 지휘하는 분산적 방어 시스템을 전문가가 지휘하는 집중적 방어 시스템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변방의 국지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같은 전면전에서 제승방략 체제는 매우 취약하였다. 집중적 방어 거점 지역이 함락될 경우 후방에서 방어선을 다시 형성할 방법이 없었으며, 중앙 지휘관이 전선에 도착하는 시간보다 적의 진격이 빠를 경우 전장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본군이 삽시간에 수도를 함락시키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다. 결국 임진왜란 이후 국방 체제는 제승방략 체제의 취약점을 보완하여 중앙군을 강화한 5군영과 지방군을 강화한 속오군으로 크게 변화하였다.
유럽의 역사를 공부하다보니... 궁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유럽은 언어는 달라도 대부분의 문화를 공유했더라구요. 복식문화, 음식문화부터.. 유명 작가의 책, 음식, 미술.. 등 등 그리고 유럽은 왕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상간도 일삼고.. 또 왕족이 아닌 사람이 왕이 되었을 때는 귀족의 혈통을 수혈한다는 생각으로 다른 나라의 왕족과 결혼을 하거나 정략을 위해 결혼하는 등 서로 싸우면서도 많은 부분을 공유했던데.. 우리가 포함된 한, 중, 일은... 대부분의 문화에서 한, 중, 일의 차이가 확연하게 있죠. 미술 작품을 보면 이건 어느 나라 화풍이다. 라는 걸 알 수 있고. 음악도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유럽과 다르게 악기 자체부터 각 나라(민족)에 따라 다르고.. 복식이나 음식도 마찬가지고.. 왕족의 결혼도.. 아시아 쪽은 서로 피를 섞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피가 섞이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중국 대륙에 있는 나라들에 조공을 보내고, 왕이 바뀌면 승낙까지 받는 상황이이지만 그 소위 "대국"이라 불리는 나라들과 정략적인 결혼 같은 것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거나 전쟁을 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타국에서 정략적 결혼을 위해서 자식을 보내라고 하면 왕족이 아닌 사람을 왕족으로 속여서 보내기도 하고.. 심지어 외국인과 결혼해서 낳은 자식은 "튀기"라고 해서 업신여기고, 배척하는 등 유럽과 확연히 다른 문화적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이런 문화적인 차이는 왜 있는 걸까요?
다른 채널에서 봤는데. 우리 민족이 수성에 능하고 활을 잘 쓴것도 있는데. 무기 중에 도끼를 상당히 잘 쓰고 애용해서 수성이나 삼림지에서 유리한 면이 있었다고 해요. 중국 한족은 보통 넓은데서 방진짜고 보병위주로 창으로 대규모 회전이 특기인데. 우리는 애초에 삼림 지형에 전국민이 온돌 때문에 벌목이 기본 패시브이고 침략에 지키는 수성전을 많이해서 일반 백성도 도끼 마스터가 많았다고 함.
몽고의 침략당시 지배층은 강화도로 들어가고 백성들은 산으로 섬으로 들어가서 중앙정부에서 보낸 관리들의 지휘를 받아 효율적으로 싸웠습니다. 그게 먹혀서 30년동안 대몽항쟁 할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지배층은 백성을 버리고 지들만 살려고 강화도로 들어갔다고 가르치죠..
정월 대보름에 달집 태우기 풍습이 바로 전쟁 연습이었습니다. 물자 준비, 달집세우기, 다른 마을 정찰, 기회가 되면 상대방 달집(보급품) 태우기, 노약자 포함 마을의 모든 주민 달집에 동원, 경계유지를 위해 잠자면 눈썹 희어진다며 잠 안 재우기, 부럼(딱딱한 씨앗 또는 열매 위주의 식단) 등 모든 것이 전쟁연습에 맞춰져 있음. 일종의 민방위 훈련임
00:05 앞광고 00:47 ‘중국을 옆에둔’ 한국인의 전쟁법 🇨🇳🇰🇷 03:32 네 개의 중국 07:35 다른나라 성과 우리의 산성 🏰🏯 12:02 500 대 45000의 전설… 평양성전투 15:58 활과 사격의 민족 한국인 🔫 17:49 조선의 ‘메인무기’는 칼이 아닌 활이었다 20:57 못 맞추면 내가 죽는다 - 한국 활의 특징 22:53 결집의 힘이 되기도 하는 냄비근성 24:27 죽일 수 있을 때 죽여둬야 했던 한국인 27:08 노량해전에서 드러난 이순신의 천재성🌲 31:35 K-방역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분석
한국에서 전투용 활에 대한 연구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한국의 복합궁은 장력이 영국 롱보우와 별반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전근대 시절에는 표준화라는 개념이 없거나 미약했기 때문에 사용자에게 맞게끔 장력을 조절했습니다. 전문 활잡이들은 극도로 근력을 키워서 활을 사용했기 때문에 지금 현대인이 그당시 활을 사용하기도 힘듭니다. 조선시대에 활을 쏜 기록을 보면 20발로 활쏘기 시합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정도가 연속 사격의 한계였을 겁니다. 활을 많이 쏘았다는건 그 당시 개념이었을것이고 지금 현대 돌격소총처럼 한번에 30발씩 연사하는 개념이 아니었을 겁니다. 조선시대에 조총 사수가 20발 정도 휴대를 했고, 유럽의 전열보병도 대충 그정도 아니면 더 적게 휴대했다고 합니다. 다만 우리 선조들은 주변 민족보다 덩치가 컸을 수 있습니다. 일본인보다는 확실히 컸고, 중국 한족보다 컸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 만주족같은 북방민족이 우리와 비슷한 체격이었을 겁니다. 체격이 커서 활을 더 많이 쏠 수 있었다고 추정해 봅니다. 한국에는 연노라는 연발 가능한 노가 있었고, 활은 오랫동안 수련해야 하기 때문에 수련이 부족한 사람들이 쓰기 위한 노가 있었습니다.
냄비근성 = 유연성, 변화에 강하다, 요즘처럼 정보, 통신, 과학의 발전으로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덕목 = 냄비근성 그리고 , 진린의 손자는 자기 할아버지의 유언을 따라 조선의 남해에 귀화하여 광동 진씨의 시조가 되었다. 진린은 이순신을 두고 한 나라를 이르켜세울 귀재라고 여겼고, 노야라고 불렀다. 진린은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한 장수다.
이걸 보니까, 반사회적 범죄를 저지른 범인에게 왜그리 대다수가 잔혹하리만큼 비난하고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 범죄 대상이 나나 내 가족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항상 극대화되어 있을 것 같아요.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재발방지'에 매우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군요. ㅎㅎㅎㅎㅎ 단순 재발이 아니라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경서-l4r거 .. 역사를 초등과정 밖에 모르시는것 같은데요. 수성전 위주의 우리 민족 전략상 교환비에서 어느 정도 맞구요. 최근 베트남전에서도 여실히 자료가 많습니다.. 아녀자의 나라는 삼국시대 신라 하나 가지고 인용한건가요? 조선은 몰라도 고려때 까지는 거란 여진 몽골 정벌 방어전으로 유명했는데 어디서 줏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국뽕드립 비아냥 대지 말고 공부나 하고 들이대세요.
<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기 위한 책략 1 > 먼저 세계사적으로 어마어마한 대전이 한민족의 역사에서 있었다는 점을 왜 세계인들은 모르는가를짚어볼 필요가 있다. 1. 동이족 국가 진의 진시황은 같은 동이족 조선과의 경계로 만리장성을 쌓고 가급적 ....대치상태의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장량(장자방)의 책략으로 조선의 한 제후국인 ....의 역사(용사)를 동원해 진시황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실패함 ...이때 이후로 쇠약해진 조선의 서쪽 변방을 찬탈한 연나라사람 위만 일당이 ....자신들이 옛 조선 땅을 차지하고 있으므로 스스로 조선이라 자처하면서 ....역사기록에 등장하다가 망하였으나 이때 진짜 원래의 조선은 만주로 옮겨간 뒤였고 ....이렇게 만주 장당경 지역에 존재했던 조선은 완전히 쇠약해져 사라져 버렸다. ....이는 마치 중원의 주나라 왕실이 서주에서 동주로 옮겨간 이후 ... 초라하게 그 명맥만 유지하다 쇠잔해 사라진 것과도 같은 형국이었다. 2. 동이족 조선이 쇠약해지면서 조선의 강역안에서는 여러 열국들이 춘추전국처럼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때 조선의 한 열국에 해당하는 사로(중국식으론 흉노)와 ....한나라 고조 유방간 벌어진 에서 한나라 군대 수십만을 죽이고, ....한 고조가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남 3. 전한의 한무제가 사로(흉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사로(흉노)와 같은 편에 서 있던 ....낙랑(산동-북경일원)의 유민들과 조선(이때 조선의 옛지역은 발해만 북부일원~요서)을 ....공격하였고 ,수십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한나라군대 수십만이 죽으면서 옛조선 땅을 ....차지하여 여기에 옛조선의 제후국들이었던 명칭을 따서 창해,,낙랑,진번,임둔,대방, ....현도, 조선 등의 군현을 설치하게 되고 ,역사에서는 이러한 명칭만 남겨진 채 ....마치 그 잔재들이 없어진 것으로 해 놓았으나 ... 그러나 이는 옛조선의 열국들의 일부의강역에 지나지 않았고 본류는 여전히 ....요동~만주~한반도 일원에서 활약하고 존재하였으며, ....이후 부여,고구려,발해(=대진국),고려,조선 등에 이어지면서 꾸준히 수복되었다가 ....다시 빼앗기곤 하는 역사가 진행되어 왔다. 4. 이런 과정에서 사로(흉노, 신라)는 꾸준히 이 고토회복을 전개하였고 ....마침내 말갈(훗날 여진,만주 및 몽골이라 불리어지며 여기에는 고구려 유민들도 포함됨) ....등을 규합하여 엣조선의 강역이었던 만주에서 金, 후금(다시 청(淸))으로 일어나 ....중국 전역을 정복하고 통치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잠시 고구려 유민 중 다른 일파인 자들이 역시 말갈을 규합하여 ....몽골이라 칭하며 중국을 위시하여 인도의 무굴제국 및 서유럽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4. 다시 돌아와서 전한과 후한 사이에 잠지 등장했던 김왕망의 신(新)나라는 ....바로 사로(=흉노)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후한 광무제가 등장하면서 이 신나라는 무너지고 말았다. 5, 후한 말기에 이를 통일한 수나라 양제는 무려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 대다수가 전멸당하고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6. 당나라 고조~태종 이세민 때끼지 무려 연인원 70~80만명이 쳐들어 왔다가 전멸당하고 ....이 결과로 당 고조는 유언으로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 하고 죽었으나 ....이세민이 말을 안 듣고 쳐들어 왔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눈에 화살을 맞고 ....앓다고 죽으면서 다시금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고 유언으로 남기고 죽음 7. 고구려가 걸출했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일설에는 연개소문이 사망하지 않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천무천황이 되얷다고도 함) 내분으로 스스로 붕괴되었는데 ....이때 당나라는 신라마저 집어삼키고자 하여 신라가 무력으로 정복했던 ....고구려의 옛땅 지역 여러 곳에서 전쟁을벌여 당군 수십만이 죽었고 패하여 ....마침내 당군이 물러나고 신라의 통일이 완수되었다 ....이때 68년간 발해(대조영의 대진국))가 일어나기 전까지 ....통일신라는 요동~남만주일원~연해주남부 일원 등에 걸쳐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이때의 잔재가 바로 만주에 남아 잏는 길림성이다 ....이후 당-대진국(고구려를 자처하기도 함) , 신라는 협정을 맺어 ....요동~만주~연해주~대동강이북에 이르는 고구려 옛땅을 ....모두 대진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그 이남을 통일신라의강역으로 인정하되 . ....통일신라와 당나라간 육로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평안도 서해안 일부 강역과 ....요동남부 일부 강역에 대해서는 대진국과 당과 통일신라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교역 관리 영역을 두기로 하고 동북아에 잠시나마 평화가 찾아오게 됨, 8. 고려조 때에는 백두산 폭발과 한재 등으로 쇠약해진 발해(대진국) 내에서 ....권력투쟁의 여파로 내분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손쉽게 발해를 붕괴시킨 거란이 ...요나라 황제국을 자처하면서 송나라를 압박하고 있으면서 무려 26년간 3차례에 걸쳐 ...연인원 60~70만의 기병과보병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으나 궤멸되었고 ...이로 인한 타격으로 훗날 통일신라의 왕족이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을 이끌고 건국한 .. 금나라로 변신하는 여진과 송나라의 협공을 받아 멸망당하였다. 9. 금나라는 고려를 침략하지 않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자신들의 발원이 된 모국이요 같은 동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관계는 금이 몽골에 의해 멸망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0.금국을 멸망시킨 몽골은 또 다른 갈래인 옛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 유민들이 모여 .....붙여진 명칭이다. 몽골제국을 수립한 대칸 징기스칸은 몽골황실비사를 통해 .....자신의 원류가 고루려부터 시작되었으며, 고구려가 망할 때 ....첫째와 둘째 집안은 통일신라로,셋째 집안은 대진국(데조영의 발해)로 흩어지게 ....되었지만 이때 약조하기를 세 형제간의 혼인 관계를 지속하자 하였고 ....이 전통은 발해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나 이후 발해 귀족이 돤 ....징기스칸의 직계선조들은 또 다시 발해가 멸망당하는 시점에 현 몽골의 동쪽 변방에 .....자리잡고 있게 되면서, 그래도 집안 자체를 귀족의 집안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징키스칸인 테무친의 아버지 에스게이의 독살 이후 거의 멸문 수준에서 .....몽골제국을 세우는 경지까지 진행되면서 유언으로 나라이름을 몽골(고구려 및 ....고구려를 지칭했던 또 다른 이름인 말갈의 다른이름) 로 정하고 ....반드시 몽골의 황족은 옛전통을 이어받아 고려로부터 황족과 귀족의 여인들을 받고 ....몽골의 황족여인들 역시 고려의 황족에게 버내어 그 혼인 관계 지속 유훈을 ....잇도록 유언으로 남기게 됨 ...이로써 몽골은 고려를 복속시키려(처음부터 복속의도는 없었지만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살해당함으로써 복속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진행되었다) 무려 40여년간 ....모두 9차례에 걸쳐 연인원 60~70여마명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략했으며 ....이 과정에서 몽골군 수십 만명이 사상당하였고 마침내 강화가 성립되어 ....고려 공녀 약 400여명이 몽골로 가고, 몽골 황녀들이 대대로 고려 국왕의 처가 되는 ....혼인동맹이 강화됨으로싸 마침내 몽골의 황실은 황제를 위시하여 황후들과 ....후비들 및 황족 집안들의 자손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을 고려의 자손들이 ....장악하게 되고, 이를 통해 몽골 연경(북경)에 고려양,고려풍,고려속이라고 하는 ....것이 대유행하였다.
(1고수전쟁 당시 그 평양은 북경인가요? 아니면 심양인가요? 아니면 북한평양인가요? (2)고구려 영토(강역)는 동서 5천리(최대6천리), 남북 2천리라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데, 제시하시는 지도 는 어떻게 되어서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지요? (3) 고구려 주요 성들이 요동반도상에만 죄다 표시하 고 계신데요, 특히 안시성이 현재 그곳에 있었다는 증 거가 있으신가요? (4)성이 산속에만 있을 경우, 기마대를 활용한 역공이 가능할런지요? 특히 철갑기병인 고구려군은 산속에 서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 뻔하고, 말갈의 기병들 조차 기병을 활용한 전쟁수행은 불가능합니다. (5) 국내성도 고구려가 후연의 모용선비에 의해, 조상 들의 묘가 파헤처지자, 모용선비 이후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공동묘지로 운용한 집안지역을 국내성이라 고 공갈 치고있는 현상을 보면 웃어야 하나요? 울어야 하나요? (6) 본건 주제와는 달리 더 나아가 고구려 졸본성을 요동반도 골짜기의 환인시 오녀산성으로 비정하는 나라가 어디에 있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이래 국가를 창업하는 도 시나 성을 짐승들도 굶어 죽는 산골짜기에 비정하는 나라는 한국에 이름있는 학자와 역사학자들 밖에는 없습니다. ..................................................................................... .......................억장이 무너져서 그만 할랍니다.
625 때 잡아 먹힐 뻔 했죠. 북진하다가 중공군이 나타났다는 얘기에 그냥 튀어 버린게 한국군이었습니다. 그덕에 미군은 체계적인 후퇴도 못하고 그냥 한방에 38선 이남으로 철수 하게 됐죠. 그중 상당수 미군은 포로가 됐고. 너무 빨리 후퇴하니까 측후방 방어하던 터키군이 국군을 북한군인줄 알고 교전하고 포로로 잡고 그랬죠.
다만 산성에 관한 통찰에대해 제가 사족 한 말씀 드리자면 삼국시대 접경지역 특히 백제 신라 국경지대였던 곳의 산성들은 교통로 바로 옆의 비교적 낮은 구릉 정상부에 소규모 테뫼식 산성 여러개가 가까이에 모여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나 백제산성들 보면 둘레 300~500m 정도에 대대 규모 병력도 다 들어가기 힘들것 같은 그런 성들이 평균적으로 7~8km 간격을 두고 있습니다. 이 산성들은 아무리 봐도 백성들을 수용하는 그런 용도의 성들은 아닙니다. 물론 백제 말기에는 부여 인근을 비롯 충남 전북 지역에서 산성이 높고 험한곳에 대규모로 축성되는 경향이 나타나기는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