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패는 김헌창의 난 때 입니다 구체적 기록이 없어서 과정을 알 수 없는대요 김헌창이 여기에서 싸운 건 아니고 김헌창은 주요 지역의 세력을 포섭해서 일거에 지역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보은에 있던 김헌창 세력이 삼년산성으로 도주 또는 집결했던 것이죠. 사실 승패는 성의 방어력을 평가하는데 온전한 지표는 아닙니다. 성이 함락되는데는 정말 많은 요인이 있습니다. 구조적으로 아무리 최고의 요새라도 수비병이 적거나 싸울 의지가 없다면 지킬 수 없죠 식량이 떨어지거나 전염병이 돌 수도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도 실은 여러번 함락됬는데 안에서 문을 열어주면 방법없죠 사실 전투회수도 정확치는 않습니다. 참고적으로 이해하세요. 그래도 이런 요충에 자리잡고 기록되지 않은 전투도 많았을텐데, 큰 싸움을 몇 번 이겨낸 것을 보면 구조적으로 우수하다는 것은 충분히 증명되었다고 봅니다. 아 그리고 영상에서 조금 오해가 생길 부분이 있는데요, 서문쪽 성벽이 낮아서 서문 아래에 집결한 공격군을 공격하기 쉽다는 말은 성벽의 높이가 낮다는 의미가 아니라 성벽+고도)지형)을 합한 말입니다. 즉 산성이라고 하면 높고 험한 산 속에 있어야만 좋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신데 삼년산성은 그리 높은 곳에 있는 성이 아니다. 그 이유와 장점에 대해서 설명하고, 서문의 경우, 낮은 지세와 성벽의 전투에서의 장점을 말한 것입니다.
족보란게 나중엔 다 사고팔고 엉망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어쨋든 김헌창이 나오니까 남의 일 같지 않아서요. 저는 김헌창의 후손입니다.(강릉 김씨) 김헌창의 아버지 명주군왕 김주원이 저희 강릉 김씨의 시조가 되시죠. 흔하지 않은 본관이라 조상에 대해 궁금해서 알아보다가 평화로웠던 신라 하대에 되게 흥미로운 삶을 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박사님의 토전사, 휴, 순삭밀톡 등등을 유익하게 보고 있다가 이렇게 삼년산성과 저희 집안이 연결 되니까 뭔가 묘한 기분이 듭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비슷한 시기 지어진 사실상의 형제성으로 강원도 정양산성이 있습니다. 굳이 성벽을 축조하지 않아도 되는 절벽까지 성벽을 지어놓고, 모든 성문을 현문식으로 도배하고, 접근해 볼만한 경로로는 오로지 서문만이 출입구까지 이어진 길을 갖췄으며, 나머지는 앞이 절벽이거나 급경사지로 되어있으며, 서문을 뚫고 안에 들어가더라도 성내에 구조물을 설치하여 경로를 제한하는 걸로도 모자라 지형이 하단부터 최상단까지 고도차가 130m라는 험준한 내부지형 때문에 안그래도 전투로 지치는 인원들을 더 지쳐빠지게 만들어 위에서 내려오는 방어측 잔존병력에게 결국 엄청난 인명피해가 야기되는 괴물같은 방어구조를 채택하고 있죠. 거기다 후대엔 서문쪽 출입로에 외성을 쌓고 그 안에서 둔전을 하며 방어력을 강화하고 자립능력을 확보하여 계속 우려먹은건 덤. 거기다 이 시기 지어진 신라 산성들이 다 비슷한 양식이라고 하는걸 보면 산성 축성을 업으로 삼는 축성전문가 집단, 현대로 치면 건설 대기업이나 국토교통부(타국의 건설부, 주택도시개발부 등), 공병대 같은 집단이 있었을거라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런걸 보면 역시 신라인들은 죄다 우주방어에 환장한 방어변태들인건 확실하다 봅니다.
정말 이런 기획이 좋으 거 같아요 우리나라 성은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같이 외관이 이쁘지 않아 관심이 적었는데 많이 알아가네요^^ 두가지 더 보충해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1. 삼국시대 이후로 삼년산성이 전시 때 어떻게 쓰였는지 2. 그리고 수구의 모양(휘었다는게 뱀같이 휘었다는 뜻 일듯)이랑 돌기둥받침대 설명을 잘 모르겠어서 그림판cg로 하셔도 좋으니 설명 첨부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컨텐츠 부탁드려요
임진왜란을 마지막으로 삼년산성은 버려집니다. 항상 마르지 않던 우물이 왠일인지 말라버려서요. 그리고 성문의 돌받침대는 밀어서 여는 성문의 특성을 반대로 당겨서 여는 방식으로 만든거기에 저 돌받침대 하나로 성문을 아주 부셔버려야 들어갈 수 있게되죠. 문제는 저 구조인 서문에는 월성 형태의 옹성이 있어 충차를 끌고 가기 힘들다는거고 뚫었다고 들어가면 다 저수지에 강제입수에 사방에서 공격받죠. 동문은 절벽 기어올라 지그재그로된 옹성을 돌파해야하고 문에 도착해도 현문이라 사다리 걸쳐야하고 고로 충차 못쓰기에 망치질로 문부셔야죠. 남문은 낭떠러지 기어올랐더니 성문이 5m가까운 높이에 있네요. 충차 못쓰죠. 또 사다리타고 올라서 망치질 해야죠. 북문은 절벽타고 오르니 앞에 석제 참호가 있네요. 활쏘고 다음 참호로 도망가는 신라군들을 격퇴하니 이번에는 성문 앞 2중석축에서 화살이 날아옵니다. 뚫었더니 또 현문이라 사다리 걸치고 문에 망치질하는 생쇼를 해야하네요. 그리고 수구는 요즘으로 치면 배수로죠. 그런데 배수로 크기가 커서 적병들이나 아군들도 들락날락해내죠. 그런데 이 배수로를 휘어놓으면 앞놈이 죽어도 뒷놈은 모를 공산이 크겠죠. 거기다가 3년산성은 6.25때 국군과 UN군의 집중포화에도 견딘 어마무시한 맷집의 보유자이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