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수행은 정진력으로 내몸을 다스고 내몸을 다스려야 마음이 열리고 마음이 열려야 화두가 들린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두로 다스리고 조절할수 있어야한다 단전 호흡을 해야 몸이 열린다 참고로 송담스님 참선 법문을 참고 하기 바랍니다 열심히 정진해서 견성 하시길 기원합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은 버리라 하셨지만 두타행은 권장하셨습니다. 무문관은 그런 정신의 연장선으로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본래 부처 사상이나 화두 참구의 테크닉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지요. 대승을 공부하더라도 초기불교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바른 공부가 될 것입니다
석가모니가 이렇게 스스로 갇혀서 깨달음을 얻었는가? 저렇게 스스로를 얽어맨다고 깨달아지는가? 공연히 시봉하는 외부 수행자들만 고생시킨다. 이건 시봉하는 승려들에게 악업을 짓는 짓일 뿐이다. 차라리 스스로 밥을 해먹고 스스로 생활하면서 생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 바른 수행이다. 무문관 수행은 겉은 그럴싸 하지만 아무 쓸모없는 짓이다. 중국에서 전래된 이러한 수행은 실제 번뇌의 적과 마주해서 이기는데 아무 쓸모없는 짓이다. 마치 중국 무술이 실전력이 없어서 실전 격투기에서 전패하는 무늬만 그럴 싸한 무술이듯이 중국에서 시작된 무문관 수행은 번뇌 해탈에 실전력이 없는 겉모습 뿐인 헛짓이다. 그들이 깨달았다는 것은 결국 실상과 분리된 헛수행이 될 뿐이다. 석가모니가 수행 당시의 고행 수행자들의 수행 정신에는 탐복하였지만 그러한 수행이 깨달음에 오히려 장애가 되는 치우친 것임을 지적했듯이 무문관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저 수행자들의 수행 의지엔 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저러한 수행은 깨달음과 닿지 않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치우친 수행이 될 뿐이다. 왜 석가모니가 중도에 방법적 해답이 있음을 설했는지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간화선이 나오면서 선불교가 급속히 쇠퇴합니다. 간화선을 제창한 대혜스님께서도 간화선으로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간화선으로 깨달은 스님들이 대체 몇 명이나 나왔는가? 경허스님도 코구멍이 없다는 그 말에 깨달은 스님입니다. 화두로 깨달으신 분이 아닙니다. 화두로 깨달으신 스님이 나와야 그나마 변명이라도 하지? 서점에 가보시라 서양에서는 깨달은 분들의 책들이 즐비하다. 왜 한국 선방에서는 깨달은 자가 씨가 말라버렸는지요? 직지인심 조사선으로 깨달은 일반 재가거사, 보살들도 100여명이 넘어가는 세상이다. 더 이상 화두선을 고집하지 말라. 스님이 선방에 가면 조직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문이 없는데 문을 찾는 저어리석은 수행자들을 어찌할꼬 바다위에서는 그 깊이를 알수 없듯이 부처의 깊이를 마음으로 알수 있을까? 부처는 마음이 아니거늘 더이상 마음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는 지혜를 배우길 몸과마음의 중간 너와나의중간 신과인간의중간 절제와자유의중간 그어디에 자기자리를 잡을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