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내의 시대라면 당시의 사형은 우리가 생각하는 흉악범들에게만 내려지는 처사가 아니었음. 지금으로 따지면 경범죄인 절도에도 사형을 구형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범죄에 대한 처벌이 무거웠음. 내 생각에, 당시는 현대시대와 같이 범죄자를 빠르게 추적하여 잡아내는 게 불가능했던 시절이라 형벌을 강력하게 하는 방법으로 범죄를 구제하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판단해서라고 생각함.
페스트를 읽을 때 저는 그 구절이 가장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그 구절을 단순히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사형수에 대한 변호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철학적 상징으로 해석했습니다. 사형 선고 역시 페스트와 같은 일종의 재난 상황인 것이며, 살아있는 생물로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누구나 본인의 죽음조차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일종의 페스트나 사형 선고와 같은 재난 상황에 처해있는 것과 다름 없다는 일종의 철학적 상징으로요. 제가 과대해석한 것일 수도 있지만 까뮈의 다른 대표작인 에서 주인공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그가 실제로 저지른 죄와는 상관도 없는 일을 이유로 죄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며 끝내 사형을 선고 받습니다. 그리고 집행을 기다리며 그에게 다가온 신부에게 인간은 모두 사형 선고를 받은 존재라며 울분을 토하는데 이 장면과 에서의 타루의 과거 회상 장면이 겹쳐보이더군요. 이 지점에서 까뮈는 그의 작품 속 사건들은 단순히 작품 내의 사건으로 국한시키지 않고 인간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부조리임을 상기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에서 예심판사 오통의 아들이 페스트로 고통 받다가 죽고나서 리외는, 이전에 페스트는 오랑시민들의 죄 때문에 신이 내린 벌이라던 파늘루 신부에게 "그 애는 아무 죄가 없다"며 화를 냅니다. 서구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거칠고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죄를 지은 자는 신에 의해 벌을 받고, 선한 일을 한 자는 천국을 간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삶이 그런가요? 정말 오통의 아들은 죄를 지어서 벌을 받은 것일까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것은 그가 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악한 인간이라서일까요? 페스트에 희생된 다른 오랑시민들은 어떤가요? 혹은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은 수많은 전쟁, 테러, 재난, 가난 등에 의한 희생자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일까요? 산다는 것이 그런것임을 까뮈는 사형선고에 빗대어 말하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장면을,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것 (혹은 페스트에 감염된 것)과 다를바가 없고, 우리는 그 어떤 이유도 없이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에 불과하다는 삶의 부조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짓지 않고, 선한 일을 하여 축복을 받았기 때문인 것이 아닌, 단순히 운이 좋게도 재난 현장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고, 테러 현장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고, 페스트에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굶어 죽을 정도로 가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그런 삶의 부조리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