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임 집안 입장에서는 진짜 웃프네 그냥 중인집안에서 한 순간에 왕의 외척이 됐는데 갑자기 세자가 죽음 근데 딸아이도 죽음 근데 애 품은 의빈이 또 죽음 이 무슨 개억까임 정조도 솔직히 믿기 힘들었을 듯 기억이랑 흔적은 남아있는데 곁에 남은 사람들이 없으니 해피엔딩이 아니라서 아쉽다 문효세자 분명 잘했을 것 같은데 엄마가 착해서
그렇게 따지면 정조 입장에서도 나라에서 강제로 결혼시킨거니.... 근데 중전이랑 사이는 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함 오히려 자신의 최측근이자 왕이 되는데 1등 공신이었던 홍국영이 중전에게 앙심 품고 모함 좀 했다고 바로 영혼까지 털어버린뒤에 유배 보내서 죽여버릴 정도로 중전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이었고 중전이 나이 30을 넘긴 때에도, 매일매일 중천의 처소에 찾아가 후사를 만드려고 했으며(그 당시 여자 나이 30이면 지금 50대 인식이라고 보면 됨) 중전도 상상임신을 할 정도였던거 보면 나쁜 사이가 아닌건 분명함 굳이 따지자면 의빈 = 최애 중전 = 제일 친한 여사친 정도?? 그리고 정조가 "내가 모든 후궁 중에 가장 사랑하는 자가 의빈이다" 라고 했는데 모든 "여자 중"이 아닌 모든 "후궁 중"에서라고 한것으로 보아 중전의 체면과 위엄은 지켜준거 같음
덕임이 성격도 순하고 착한데다가 어린시절부터 함께 자란 사이라 의빈과 효의왕후의 사이는 좋았다고 해요. 의빈이 사망했을 때 효의왕후가 자매를 잃었다고 매우 슬퍼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 시대 관념 상 어차피 자기가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자기랑 가까운 여자가 세자의 모친이 되는 게 훨씬 낫긴 하죠… 세자의 법적 모친은 명목상 어쨌든 중전이니 미운 여자 애보다는 사이좋은 여자 애 돌보는 게 훨씬 마음 편한 거…
@@김레온-k6f화안옹주 이간질로 초반엔 중전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고 하더라고요. (정확히는 정조가 중전을 멀리했겠죠) 둘 사이가 화목하지 못한 것에 왕실 웃전들의 우려가 컸다는 게 기록상으로도 남아 있을 거에요.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엔 사이가 나름 좋아지긴 했는데 사랑보다는 존중의 느낌인 것 같더라고요. 의빈도 중간에서 중재를 많이 했던 것 같고.
@@이게뭐냐-f2n 기록상으로 보면 효의왕후 인품 자체는 온화하고 착했음. 한중록 보면, 사도세자 죽은 후 혜경궁이 세손과 옹주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나면서 세손빈(효의왕후)에게도 너네 친정으로 피접 가있으라고 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겠냐하고 울면서 혜경궁 친정으로 따라갔다고 해요. 또한 의빈(성덕임)과도 자매처럼 잘 지냈다는 일화가 많고, 의빈이 죽을 때도 통곡했다는 걸 보면 타고난 성품이 여리고 착한 편인 걸 알 수 있어요. 그리고 후사가 없는 걸 중전 탓만 할 수 없는 게, 기록에도 나오듯 정조는 여색을 멀리하기로 유명했어요. 그래서 대비전에서마저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함. ( 화안옹주의 이간질로 인해 중전을 멀리한 부분도 있지만) 정식 후궁인 원빈은 너무 어려서 죽었고, 화빈은 상상임신만 한 것만 봐도... 그리고 효의왕후의 경우,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합방 과정을 생각해보면... 후사가 없는 것도 이해가 감.
준호 얼굴로 미화돼서 그렇지 실제 정조는 다른 조선 왕들처럼 후덕한 아저씨였을 확률이 높고 정조가 성덕임을 사랑한건 맞지만 성덕임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름 왕의 구애를 두번이나 거절한다는건 죽음을 각오할만큼 마음이 없었거나 최소한 평범한 삶을 원했다는 건데 괜히 왕 눈에 들어서 시집 가가지고 같이 사는 내내 임신과 출산만 반복하다가 일찍 죽음. 정조 눈에 들지만 않았어도 천수를 다 누리고 갔을 텐데 안타깝지
정조가 35살 즈음에 모습이 흡사 노인과 같았답니다. 치아는 거의 다 빠졌고 머리는 백발이었고 우리가 현대식으로 생각한 서른이 아닌거죠 ㅠ 청선군주 남편 정재화의 30대 초중반의 초상화를 보면 거의 50대 아니 노인의 모습이죠! 알려진 정조어진은 상상해서 그려낸 어진이라는 사실! 얼굴이 크고 턱이 겹턱이고 코도 납작하고 그랬다니 인물은 그렇지만. 최고의 브레인 왕은 맞죠
덕임이 죽고 사랑하는 이를 다 떠나보내고 울화병에 종기에 급격한 노화에 삶이 그냥 버티는거였어서😢 술담배도 다 떠나보내고 그리울때마다 생각나서 가까이하시게 된것같네요😢 근데 노비개혁 앞두고 돌아가신거 보면 독살이 의심되네요 정순왕후와 탕약 들고 단둘이 독대한 후 돌아가신 것과 정조개혁 다 뒤엎고 정조 승하후 정순왕후 가문이 김귀주를 이조판서 추승 및 복원되고 심환지는 영의정으로 승진하고 심환지 가문의 진찰을보던 심인 이라는 의원을 승진시킨것이 이상하네요
@@라온-x4n 심환지에게 보낸 300여통의 편지가 나온후 독살설은 깨졌어요 정조는 스스로 약을 조제해서 먹었고 열이나서 이불에 눕지도 못하고 찬바닥에 누웠지만 잠도 못잤고 항상 얼음물을 마셨고 피를 한대접씩 뽑았다고 했고요 편지에 병세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요 나는 갑자기 눈곱이 불어나고 머리가 부어 오르며 목과 폐가 메마르다 뱃속의 화기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 약제를 몇첩이나 먹었는지 모른다 통증을 견디기 위해 양귀비를 피웠다 정조의 병세는 회복 불가능이라고 현대의 의사들도 진단했어요 그리고 노비개혁은 정순왕후가 했어요 정조의 정책을 그대로 시행한것입니다 정순왕후는 드라마에서 악마화 되었는데 실제는 정조를 많이 도운사람입니다
뭐 시대상으로 봤을 때 두 번의 거절을 그냥 넘긴 건 대단하긴 한데 옆에 사람 괴롭히는 쪼잔한 방법으로 지 옆에 붙들어 놨는데 애절한지는 모르겠음 물론 후사가 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위치에 두 사람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리 사랑했다면서 제대로 몸을 추스릴 시간도 안 주고 5년간 임신/유산/출산을 반복한 것만 봐도 진짜 성덕임을 사랑한 게 맞는지 모르겠음 그리 사랑했음 최소한 조금이라도 몸을 보호하고 추스를 시간은 줬어야 하지 않음? 걍 자기 사랑에 자기가 취한 듯
그 시대에 남,여가 유별했는데 아무리 정조가 의학에도 해박했다해도 남자이고 왕인데 여자의 임신에 대해서 제대로 알리가 만무하죠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후계자가 절실한 상황이니 빨리 임신을 시키고 아이도 많이 낳아야겠죠 또 많이 사랑하고 좋아했다면 더더욱 그랬을꺼고...안타까울뿐인거죠
그때 왕이 뭘 알겠어요 사랑하니까 그여인이 낳은 아들로 하루속히 후계자를 삼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겠죠 그시대는 금슬이 좋고 자녀를 많이 낳으면 사랑의 증표로 여깁니다 성덕임 입장에서는 몸도 마음도 병들었는데 계속 들이대는 정조가 마냥 사랑스럽지는 않았을겁니다 정조가 의학공부를 많이했어도 그건 주로 본인몸이 아프고 독살당할까봐 스스로 고치기 위한것이지 여자몸에 대한 공부는 안했겠지요
그 시절에 왕이 몇 십년 동안 첫사랑 간직하면서 기다려준데다가 의빈이 죽고나서는 사랑하는 여자가 영영 사람들 기억 속에서 잊혀질까봐 왕 본인이 손수 기록까지 남겼으니 드라마로까지 회자될 스토리인거죠… 너가 잊혀질까봐 두렵다 라는 말은 실제로 정조가 쓴 글에 나와있는 내용이에요. 저런 찐사랑은 요즘 시대에도 정말 보기 힘들죠…
그래서 굉장히 화제가 된 거에요.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덕임이에게 승은을 내리겠다고 했고, 덕임이는 '세손빈 마마에게 아이가 없는데 어찌 제가..' 라는 핑계로 울며 거절했는데 그게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어서... 당시엔 왕이 아니라 세손이었다지만 그래도 궁의 위계질서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근데 정조도 쿨하게 그냥 덕임이 의사를 존중해준 것을 보면 둘 사이가 꽤나친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혜경궁 사가 출신이고, 혜경궁이 양딸처럼 예뻐했다니 친분을 쌓고 호감까지 품을 여지가 꽤 있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