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이 말한 무의식이란, 기의를 내포한 기표라는 말이 이 강의에서 핵심적으로 다가오네요. 그것이 개인사적 맥락에서 그럴 수도 있고, 인류사적/문화적/상징계적 맥락에서도 그럴 수 있음으로 이해해 봤습니다. 강의를 들어가며 제 이해도도 변화하겠죠.. 감사합니다 예도 선생님!
선생님~ㅎㅎ 오랜만에 라캉 강의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소쉬르가 결국 기표.기의의 결합을 예비하며 공시, 통시로 가져갔던 부분을 라캉은 기표의 우위를 전제함으로써 무한히 미끄러지는 의미화사슬(기표화사슬)로 가져가며 이를 언어화된 무의식의 구조, 나아가 사회구조의 기반인 언어체계로 설명해내는군요ㅎㅎ! 예전에 듣다 어려워 접어두었던 강의인데 명쾌한 설명에 감탄하며 들었습니다🎉
복습합니다~ 연속된 문장구조같은 연사, 단어들을 대체하고 들어오는 부재와 대체의 계사야말로 언어의 구조, 의미화가 이루어지는 사슬구조인데 이 구조는 인간 개인의 주체적 사고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사상.언어 등 전반이 형성되는 무의식적 구조(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처럼)를 가리킨다 기의보다 기표가 중요하다는 것. 모든 의미와 창조성은 기표들의 연쇄에서 나온다는 게 니체의 관점주의.데리다의 원문자처럼 인간 사고의 저변에 언제나 해석이(인류학적 관습 등) 끼어들 수밖에 없다는 말이 만나는 지점이겠지요?ㅎㅎ 연쇄하는 관습.의미,법률.도덕의 기표사슬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 의미는 때에 따라 힘을 가진 자들의 임의적 해석에 맞춰 변화하고 마니까요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ㅇ이번 강좌에선 고민을 불러일으키는군요. 마치 네 생각과 입장을 드러내라 하는 듯 합니다. ㅡ알겠다 하면 동의하나 라 묻겠고, 모르겠다 하면 부정하나 라 묻겠군요. ㅡ좋은 길은 선택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내 생각을 짚어내는 것이겠지요. ㅇ고타마의 담마(법, 지혜)에 따르면 자신이 발견한 것을 연기 혹은 중도라 말하지요. ㅡ여기서 중도는 양극의 한 가운데, 혹은 균형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고 배웠지요. 중도는 양 극에 쏠리지 않으며 이를 알아차리는 의식, 동적으로는 깨어있음을 말하지요. ㅡ라캉의 기표/기의 혹은 의미화사슬 이야기를 들으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어떤 것을 느낍니다. 그것은 체계/주체 도식 혹은 억압//창조-의미 도식이겠어요. 얼핏 본다면 기표와 기의를 수직과 수평으로 혹은 연쇄/사슬과 부재로 설명하나, 결국은 어떤 양극을 표현하고 있는듯 하군요. ㅡ고정점이 기표와 기의의 균형점(양 극의 균형점)을 말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면, 제 입장은 양 극에 대한 선택도 그 균형(고정)도 선택하지 않겠다 입니다. 라캉이 소쉬르의 임의성/상호연계를 떼어내었던 바는 적절해 보이기도 합니다. 고정점은 우연한 것이지요. ㅡ고정점에서의 센결합과 느슨한결합은 내재화된 체계와 분열된 주체간 조우에서 비롯된 절망/광기일 수 있겠어요. ㅡ양 극의 관계와 엮임에서 절망/광기가 표출된다면, 그건 한 극일 수 있는 주체란 무의식에서 표출된 바가 아니라, 표출된 그 자체가 무의식일 수 있겠어요. 그래야 양극의 선택이나 쏠림 본질과 어떤 실체론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양자역학에 측정시에 드러나는 위치와 운동량 처럼요. ㅡ문득, 프로이드와 라캉이 신과 이성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지만, 무의식이란 정신분석에 다시 포획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군요. ㅡ그런 면에서 프로이드가 정신분석을 초생물학적인 어떤 것으로 펼쳐보려고 하는 것과 라캉이 정신분석을 언어학을 너머 문화인류학으로 전개시켜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르겠어요. ㅡ개인적으로는 정신분석이든 현상학이든 고타마의 담마 든 마음 혹은 심리에 닻을 내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자연(생명, 유기체)과 문화(소통,사회)의 사이 어느 곳에요. ㅇ설명에 따라 유추하면, 히이데거는 기의를 라캉은 기표를 강조한 셈인데, 거꾸로 하이데거는 선현의 텍스트를 라캉은 기의의 창조성/피억압성을 은연중에 높이 평가하며 응원하고 있는 것으로도 여겨져요. ㅡ좀더 짚어보면, 니체와 라캉이 하이데거의 언어에 대한 신뢰를 모두 파괴할 수 없어 보이네요. 이러한 언어가 가진 양측면은 결국 언어는 어떤 체계/구조라기 보다는 매체/매개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이기도 해요. ㅡ결국 라캉이 소쉬르의 기표/기의 긴밀한 연관성을 분리한 것은 좋은 전개이나, 그렇다고 따로 떨어진 기표에 기존의 기의와는 다른 엄청난 를 부여하는 것은 과도해 보이기도 해요. ㅡ예전에 루만을 읽은 기억을 살리면, 라캉이 언어와 음악을 기표와 기의로 파악하는 것을 형식/매체로 설명했지요. 라캉이 고정점에서 이야기한 쎈/느슨함으로 같이 표현되지요. 루만의 경우는 기표의 연쇄와는 달리 형식/매체가 서로 전환되어 구성되는 중층성이 추가되겠네요. ㅡ수직선상의 부재는 의미의 창조성의 공간으로 들리는데, 침묵과 무에 대한 보완설명에도 연기적(구별에 의한 차이작동)인 어떤 것으로까지 이해되진 않아요. 일테면, 1)한 극단(축) 2)다른 극단(축) 3)균형점(지점)의 A-(관계/균형)-B 도식으로 보이네요(체계/주체, 억압/창조로 해석할 경우). ㅡ불가의 중도 관점은 ( )-중도-( ) 라 볼 수 있을지도요. 여기서 괄호는 실체(실재)가 없는 구별된 양상일 뿐이지요. ㅇ라캉이 살아서 이야기하듯 생생함이 담겨져 있는 강의였어요. 견문을 많이 넓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