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 정거장 잘가세요 잘있어요 눈물의 기적이 운다 한많은 피난살이 설움도 많아 그래도 잊지 못할 판자집이여 경상도 사투리에 아가씨가 슬피우네 이별의 부산 정거장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 앉은 젊은 나그네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기적이 운다 쓰라린 피난살이 지나고 보니 그래도 끊지 못할 순정 때문에 기적도 목이 메어 소리 높이 우는구나 이별의 부산 정거장 가기 전에 떠나기 전에 하고싶은 말 한마디를 유리창에 그려보는 그 마음 안타까워라 고향에 가시거든 잊지를 말고 한 두자 봄소식을 전해주소서 몸부림 치는 몸을 뿌리치고 떠나가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눈물나고 가슴이 그립 입니다 우리조명섭군은 얼마나 고마운지요 그 고생한 어른신 그고통 받은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옛날을 생각하고 살아야 사람 인간이 진실한사람을 알아보지 서로 무시하지 않고 우리도 조명섭군 처럼 사람답게 몸에 베어서 흘러 나오는 그런 사람이되었으면 하고 생각 듭니다
@어수정 선생님께서 다른 댓글에도 언급하셨듯 예전의 레코딩 수준과 마이크가 남인수 선생님의 출중한 미성을 다 담지 못하는군요. 저희 세대들은 현재 남겨진 남인수 선생님의 레코드를 통해 또 그것을 올린 유튭 영상을 통해서만 명곡을 듣고 평가할수 밖에 없군요. 아쉽게도 바보 마이크로 녹음된 남인수 선생님의 노래보다 조명섭군의 노래가 더 맑고 아름답게 들리는걸 부인할수 없습니다. 정상적인 청음임을 감안할때요.
정말 가슴이 찟어지는 아픔을 주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쟁의 아픔을 겪지 않은 세대들은 알수가 없습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그날을..... 진주의 가요황제 남인수선생님 진양호반에 외로히 서 계시는 동상 지난날 화려했던 그시대를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현시대 어느 누구도 따라올수 없는 남인수선생님 생각 합니다
음악 교육을 전혜 받지 못했다고 하는 데 현존하는 가수중 이런 가수 있나요? 목소리는 천상의 목소리에다 인성이 극상품이고 바른생활 표준이고 소년 가장으로 자신을 비관해 방황하지도 않고 좋아하던 음악도 접고 등등 목소리 만큼이나 감동 주는 조명섭 가수님, 우리는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전통가요(남인수님, 현인님, 손인호님, 윤일로님, 배호님 등등,)를 사랑하시는 모든분들 지금부터 그 사랑의 조금씩만이라도 조명섭군에게 관심가져주세요~^^~ 명섭군에게 이분들은 스승님들이에요. 이분들의 노래와 창법이 좋아서. 닮고싶어서 따라하고 배우고 익혀서 지금의 근사한 조명섭으로 탄생했으니까요~^^~ 명섭군 안에는 이 선배분들이 계시는거라 생각하는데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세요???????
이별의 부산정거장~저는 겪어보지 않았던 시대지만 그 시절의 애환이 느껴지고 눈물이 납니다 본명이 '강문수'이시며 저와는동성동본, 할아버지 항렬이시라서 더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강범수, 아버지는 '대'자 돌림이십니다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이지만 존경을 보냅니다
My favorite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래입니다. 2절과 3절 시작 직후에 나오는 회면들.. 1.4 후퇴시 저는 8살.. 12월 하순에 부모님 그리고 저회 꼬마 4형제 ( 10, 8, 6, 2 세) Truck 짐 위에 붙어서 서울에서 대구까지.. 그리고 화물기차 지붕위에 얹혀서 대구에서 부산까지.. 나이 80 이 몇달 안남은 지금도 기억이 새롭습니다..
ㅠㅠ 맞아요...저희 아버지 29년생이신데ㅡ요양원 작년 가셔서 이젠 귀도 잘 안들리시고 가슴이 미어집니다.앞전 면회하러갔을때 일부러 젊은날의 아버지 인생을 추억하고 싶어서ㅡ세심하게 한마디한마디 전쟁당시 참전했던 용사때의 기억과 군번을 여쭈어서 기록 해 놓았습니다...제주도 서귀포에 기간병(기관병?)까지 다녀오신 이야기하시며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기억을 하시더군요...우리 8남매는 아무도 아버지께서 제주도엘 다녀오신 사실을 전혀 모르는데 말이지요...이제 언제 떠나실지도 모를 아버지를 생각하며..사는게 뭔지 경남고향쪽 요양원을 자주 찾아뵙지 못해 서울에서 가슴만 매일 적시네요.어려서 앞집 2살위 언니가 초등(국민학교)1년생인 나를 담벼락에서 자주 불러서 가면? 맨 남인수.고복수.이난영과 작곡가 박시춘 어쩌고하면서...등등 소개를 해 주곤 하던 특별한 추억이 있었답니다... 이 좋은 노래를 듣다보면.ㅡ돌아가신 어머님이 너무나 좋아하실거라 눈물이 납니다.
일제시대의 한과 625 피난살이의 한이 목소리에 그대로 담겨 있네요 넘사벽 레젼드 남인수 선생님 검색해보니 1918년 태생 1962년 제가 태어나기 전에 작고하셨네요 향년 44세 ㅠ ㅠ 좌파들이 친일파라고 덧칠했을때 선생님의 목소리만큼은 친일파가 아님을 노래를 들으며 혼자 생각했습니다 잊지말자 625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 들은 '유행가' "부르지말라" '내용이 저급하고 목 성대 늘어진다' 며 극구 말렸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남녀노소 모두, 이렇게 정겹고 쉬우며 친숙하게 듣고 부르는 유행가가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유럽음악가의 작품이나, 칸쏘네 팝송 샹송 발라드 도 좋겠죠. 예술 엔 국경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대중음악 인 우리의 유행가(트로트)가 최고입니다.!! 정말로 요. ' 수제천' '영산회상 ' 종묘제례악' '정가' 등은 특수계청이 누렸던 선율 이어서 대중적이지는 않거든요😅
6.25 전쟁 때 저의 집이 피난민들로 가득 했다고 부모님이 전쟁의 아픈 역사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6.25 때 저는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부모님 말씀에 구포다리까지 북한군이 처들어왔는데 공산군이 구포다리 건널 임박즈음에 맥아더 장군께서 인천상륙작전 후 밀고내려와 극적으로구포다리 공산군을 물리치고 공산군이 도망 후퇴하는 등 당시 부산이 마지막이라 더 피난갈 자리가 없어서 부모님은 우리집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있었다며 섬찟 했던 가슴 쓸어내리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서울 등 위지방에서 부산까지 피난보따리를 들고 밀려내려와 마지막 부산 피난길에 나셨던 피난민들은 노숙 등 저의 집에는 앞마당 뒷마당 창고 등 다비워서 피난민들을 쉬고가라고 부모님이 배려하여 집안에 피난민들로 꽉찼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당시 저의 가족 어린오빠들 언니들도 그같은 광경을 보고 자랐어요
시름없이 내다보는 창밖에 등불이 존다 He doesn't have anything to do except for leaving from BUSAN port, looking out to the black window of the night the lights all fell asleep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