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 고3인 아들이 들고오는 비문학 지문들을 같이 읽어보고 생각하기 위해 주르륵 보고 있습니다…만… 저도 한계… 이해가 될때까지 반복해서 들어보렵니다. 애들이 커가니까 질문이 까다롭고 어려워집니다. 저는 완전 이과생이라 더욱 더 힘들어요. 엄마가 자판기도 아니고 기대에 찬 애들 눈빛이 완전 부담 백만배입니다. 근데 이런 지식의 확장이 즐겁고 행복해요. 고딩이 명제를 들고오다니 제가 복이 많은것이겠지요.
한계를 인정하시는 것이 겸손하신 분이라는 생각이들어요. 어제 프로이드를 찾다가 알게되어 철학에 대해서 이것저것 보고있어요.철학 책은 많이 읽었지만 머리속에 정리가 안됐어요.덕분에 공부한 내용들이 정리가 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책들 정리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러셀의 육성에서 그리고 좋아요와 구독하기는 꼭 해라.ㅋㅋㅋㅋㅋ빵터졌어요.ㅋㅋㅋㅋㅋ 너무 재미있으신 분으로 인정!
선생님의 설명으로 철학을 다시 사유하며, 그 의미를 곱씹어 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덕분에 쉬워졌습니다. 선생님 덕분으로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존경심이 마구 우러났습니다. 진정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을 선생님 설명으로 새롭게 만나게 되어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는 정말 위대한 철학자였네요. 훌륭한 설명 감사합니다.
그림 이론이 제가 평소 생각하던 언어의 본질에 관한 내용을 명확히 정립해 주네요. 진리함수 이론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항진, 항위 명제는 수학, 논리학이, 다른 부분은 과학에서 다룬다는 부분은 매우 흥미가 갑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고 싶고, 제가 꼭 이해해야만 하는 부분 같네요. 논리학을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네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감탄하며 봤습니다.
좋은 삶은 평온하고 내면의 에너지가 있는 삶이라 생각합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 삶 의미 가치는 끝없이 전개되는 안과 밖 경계에 있는 듯~ 하루하루 고민하는 삶이 나를 살아있게하고 충만하게 합니다 선생님의 노력에 경의를 표합니다.
비트겐슈타인 참 매력있는 사람이였군요. 마지막 모르는것에 대한것에는 침묵해야한다. 정확하고 맞는말이면서 어느면에서는 슬픈 말이기도 하군요. 사람이나 세계라는것은 알지 못하는 틀이 존재하는데 존재하는 사실들만을 사실이라 인식하거나 해나가고있는것이죠. 그 틀밖의 세상은 알수가 없는것이 말한것처럼 상상이 아닌 사실이여야하는것이여서 사실을 알지못하면 이름 조차 표현하는것 불가능하기 때문인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침묵 할 수밖에없는데 사기꾼들이 너무 많은것도 그사기꾼들에게 현혹되는것 또한 슬픈것이죠. 감사합니다. 기분 좋아지는 친구를 한 명 알게된 느낌이랄까.
말과 글을 업으로 삼다보니 종종 자괴감에 빠집니다. 언어로 표현되는 범위가 너무 한정적이라는 생각에. 이번 비트겐슈타인 편을 보니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네요. 비트겐슈타인조차 '말할 수 없'어 속으로만 품었던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영상 감사해요. 중간중간 못 알아들으면서도 자꾸 보게 되네요.
체감상 영상이 굉장히 짧게 느껴져 타임라인을 봤는데,18분짜리 영상이라는것을 보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명쾌한 해설과 적절한 미디어자료 가 합쳐지니 내용에 대한 각인이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철학은 ‘길고 지루할 것이다’라는 인상을 가지고 계신데, 이 영상이라면 짧은 출퇴근시간에도 가볍게 지식충전 가능할듯합니다. 좋은영상 감사합니다!
철학이 어려운 이유는 잘못된 학술용어, 잘못된 번역어의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utility의 경우 경제학에서는 '효용'이라고 번역하고 철학에서는 '공리'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리고 아이티 쪽에서는 컴퓨터 사용에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의미하기도 하죠. 과거 영국에서 초기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경우에서 보듯 철학을 겸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하자면 경제학에서의 utility를 논했던 사람들이나 철학에서의 utility를 따졌던 사람들이나 같은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같은 단어를 썼던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효용과 공리라고 따로 번역어를 씀으로 해서 그 단어가 같은 단어라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지금은 한자로도 안 쓰니 철학의 공리(公利)를 수학의 공리(公理)와 헷갈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왜 꼭 어렵게 현실에서는 쓰지도 않는 효용, 공리 따위의 단어를 써야 할까요? 그냥 경제학에서든 철학에서든 '쓸모'라는 쉽고 편한 단어로 통일하는게 적절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철학과 경제학 양쪽에서 같은 개념이었던 단어가 분리되지도 않고 쉽고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예는 굉장히 많습니다. 존 로크의 '인간오성론' 같은 책이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실생활에서 오성(悟性)이란 단어를 쓰나요? 원문을 보면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으로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글' 정도로 쉽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래도 '인간지성론'이라고 비교적 쉽게 번역을 하더군요. 이런 이유로 외국 학술서의 한국어 번역본의 경우 오히려 원서를 읽는 것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경우가 꽤 많습니다. 좋은 번역서라면 원서를 보지 않고 번역서 그 자체만으로 이해가 되야 하는데 오히려 원서를 읽는 것만도 못한 경우가 많은 것이죠.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 학술계가 아무 고민 없이 일본인들의 근대화작업-서양 학술어의 번역을 무비판적으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면서 일본어의 사용은 억제했지만 정작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번역어의 경우는 아무 생각없이 그대로 썼습니다. economy를 경제라고 번역하는 것이 타당한지, 차라리 '살림'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적절한 것이 아닌지 우리 머리로 고민을 해 본적이 없었던 것이죠. '번역과 일본의 근대'(이산)라는 책을 보시면 19세기 일본인들이 서양문명을 받아 들이기 위해 번역사업을 통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잘 나와 있습니다. 인간은 생각을 언어를 통해 표현하기 때문에 외국의 생각을 받아 들이려면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 소화를 시켜야 하는데 우리는 그 작업을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고 일본인들의 것을 그대로 가져오기만 한 겁니다. 19세기 일본인들이 나름 고민을 하긴 했다지만 지금 기준에서 보자면 그 번역어들이 적절한 것인지 많은 부분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분별한 한자어의 사용입니다. 예를 들어 경제-경세제민, 문화-문치교화 같은 단어들은 전근대시기에도 존재했습니다. 다만 저 단어들이 100% economy, culture라는 단어와 일치하지는 않는데 그렇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썼던 경세제민, 문치교화 라는 단어와 지금 우리가 쓰는 단어의 의미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위에서 이야기한 understanding-오성 같은 한자어를 사용한 신조어들이죠. 이런 신조어들은 기존 한자어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한자어 사전을 뒤져봐야 정확한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원래의 서양 언어를 분석해야 알 수 있는 것이죠. 현대어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文治敎化를 들여다 본다든지,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 經世濟民을 들여다 본다든지, understanding을 이해하기 위해 悟性을 들여다 봐도 원래 서양어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엉뚱한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경세제민에는 단순히 살림의 의미도 있지만 국가의 통치라는 개념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옛날 책을 보면 누구 누구는 '경세를 할 수 있는 선비'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나라를 잘 다스릴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제가 영어 실력이 부족하지만 economy에 국가통치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갑제 같은 노인네들의 국한문혼용론이 말이 안되는 것이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의 상당수는 서양어의 한자 번역어이고 그 본래의 의미를 알려면 원어의 의미를 파고 들어야지 한자 번역어를 파고 들면 미묘하게 차이가 있기 때문에 원어의 의미를 오해하거나 이해를 못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한자어를 사용한 번역어들은 언어사용자들로 하여금 개념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면서 한자에 대한 의존은 심화시키는 문제를 갖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우리는 지금 한글전용을 따르고 있고 한자 교육도 부실합니다. 90년대에 나온 학술서들은 국한문혼용이었지만 지금은 학술서들도 거의 한글전용입니다.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노인네들 같은 국한문혼용론자는 아닙니다. 한글전용론자 입니다. 그러나 한자어에 대한 교육은 지금보다 더 강화될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公利와 公理의 뜻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청와대를 청화대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꽤 있죠. philosophy의 그리스어 어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죠. 그걸 일본 학자가 哲學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哲을 밝을 철이라고 이해를 하고 있는데 이 '밝다'는 것은 지혜로워서 정신의 작용이 밝다는 것이죠. 明哲의 개념이지 물리적인 공간이 밝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아'나 '설문해자' 같은 고대 중국의 사전을 보면 哲을 知라고 뜻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philosophy를 哲學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서 번역한 것은 나름 적절한 결과물이긴 합니다. 다만 지금 사람들은 이 哲이란 글자의 개념을 정확히 몰라서 문제죠. 철학은 밝은 학문이 아니라 지혜의 학문이란 뜻인 겁니다. 그래서 서양개념어들을 좀 더 쉬운 단어-순우리말 뿐만이 아니라 한자어라도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친근한 말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언어생활에서 완전히 한자어를 몰아내야 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언어 순화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제대로 와 닿지 않는 공리, 효용, 오성 같은 비현실적인 단어들을 놔둘 필요가 있냐는 것입니다. 직관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단어들을 놔두기 때문에 번역이 망가지고 단어 사용이 잘못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죠. 저는 해당 언어를 쓰는 사람들의 생각의 범위는 그 언어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어가 담고 있는 단어들과 개념들이 영어 사용자들의 생각과 상상력의 범위이고, 한국어가 담고 있는 단어들과 개념들이 한국어 사용자들의 생각과 상상력의 범위인 것이죠. 즉 한국어의 한계가 곧 한국인들의 생각의 한계이죠. 그런 면에서 봤을때 우리가 이대로 서양 언어들을 19세기 일본인들이 번역한 단어들에 그대로 의존하는 것은 한국인들의 사유 작용에 있어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제 생각이 지나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현대 한국어는 여기저기 대충 꿰매고 땜빵한 누더기나 잡동사니, 부실건축물 같은 느낌입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위대한 학자, 사상가들이 나오려면 일단 한국어 단어들부터 근본적으로 손을 봐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유튜브에서 이런 강의도 들을 수 있다니 너무 감사하네요~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해 주셔서 유익하게 들었습니다~ 설령 비트겐슈타인이 설명을 했다고 해도 오해하거나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을 겁니다^^ 언어라는게 근사치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
유익한 영상 감사합니다^^. 언어를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한 비트겐슈타인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종교, 윤리학 등을 아예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세계 밖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는 모습은 경향성을 배제하기 위해선 '객관'뿐 아니라 '주관'도 필요하다는 칸트의 취미 판단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요.
@@티라미스킴 철학은 없던 개념을 만드는 학문임. 독일이나 프랑스의 원어민 독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번역자들이 아무리 잘 설명해도 한국인 독자에게는 또하나의 외국어일 수밖에 없음.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 자체의 특징임. 난 관념적인 폭력이란 말을 만들었는데, 한국어의 형식을 빌린 나만 아는 내 발명품이라서 타인과의 대화에서 써먹을 수가 없음. 말할 수 없는 말을 쓸데없이 시간낭비해서 개발한거임.
정말 감사합니다...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공자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을 안다고 할 줄 아는 게 도라고 했고 카뮈는 세상의 모든 악은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했으며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신전 기둥에 적힌 ‘너 자신을 알라’를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라라고 해석했으며 현재 학습능력의 주요 요인으로 알려진 메타인지는 쉽게 말해서 내가 뭘 모르고 아는지 아는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닌가요?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말까지... 어떤 경지에 오른 자들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하나의 빛나는 진리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가 싶기도 하고요. 영상 잘 봤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쉽고 흥미롭게 이야기 해주시다니...정말 최고이십니다! 가끔 상상했어요. 비트겐슈타인을 만나 질문을 하는 장면을 말이지요. 언어라는 것은 결국 발명을 통해 만들어진 것인데... 발명이전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대해 설명해줄 언어가 아직 없어서 이 세계를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더욱더 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세상을 알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더욱 명확하게 말하고자 노력해야 더 많은 세상을 볼 수 (발견) 있는 것 아닌가? 그것이 철학이라면 우리 인류에게 마지막 까지 남을 학문이 철학이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 말이지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