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오웬은 키 173cm에 몸무게가 53kg밖에 안되는 마른 체형의 복서입니다. 팔과 다리는 앙상하고 몸에는 근육을 찾아볼 수 없지만, 목숨을 다하는 훈련과 노력으로 유럽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고, 세계챔피언에 도전하다가 안타까운 사고로 비극의 주인공이 됩니다.
전세계 많은 복싱 매니아들은 성냥개비 복서 조니 오웬을 기억합니다. 야윈 몸으로 복싱을 할 수 없는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싱을 아주 잘하던 선수였지만, 세계타이틀에 도전해서 세상을 떠난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김득구 선수가 1982년 맨시니와의 경기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기 2년 전, 전세계 복싱계는 조니오웬 선수의 죽음으로 우울증에 빠졌으며, 서구 언론들은 모두 그를 애도하는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삐쩍마른 체격에 크게 튀어나온 만화귀, 창백한 얼굴에 고르지 않은 치아 그리고 작고 얇은 목소리를 지닌
조니오웬은 마른 체형으로 프로복싱에 발을 들여놓은 후, 세계타이틀에 도전까지 24승 1무 1패를 기록합니다.
그는, 복싱이란 체격과 몸이 아니라 정확도와 기술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전세계에 알려준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사망한 후에, 조니오웬이 그의 복싱 메니저에 의해 굶겨진 선수라는 것이 밝혀집니다.
매니저의 무리한 체중 관리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결국 모든 스포츠는 자기 몸에 맞는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로 남게됩니다.
조니오웬은 밴텀급에서 활약했으며 키 173cm에 몸무게 53kg을 가진 선수였습니다. 이 신체사이즈는 요즘 잘나가는 여성 레이싱 모델과 비슷한 수준일텐데요.
밴텀급에서 활약하는 선수치고는 큰 키였고, 그 정도의 키라면, 보통의 경우 두,세체급 위인 라이트급이나 웰터급에서 활약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그의 메니저는 그의 펀치력이 약했기 때문에, 낮은 체급인 벤텀급에서 계속 활약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훈련과 스파링을 많이 했지만, 낮은 몸무게를 유지하기 위해 식단을 조절해야했습니다.
1956년생인 조니오웬은 영국 웨일즈의 가정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8남매중 4번째 아들로 태어납니다. 할머니는 광산에서, 할아버지는 철공소의 노동자로 일했으며,
아버지는 광부였고, 병약한 어머니는 출산 후유증으로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 중이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든 미국이든 복싱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스포츠였듯이 웨일즈의 시골마을에서 자라던 가난한 백인 소년에게도 복싱은 그의 꿈이었습니다.
조용하고 수줍어하는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조니오웬은 복싱을 잘하면 모든 가족이 불편함 없이 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후, 8살때부터 그의 형들과 함께 복싱을 시작합니다.
정식으로 복싱을 배울 돈이 없어서,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아마추어 복싱클럽에 가입하며 복싱 스킬을 배웠으며, 학창시절에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 과정을 거쳤고, 20살 성년이 되고나서 프로복싱에 데뷔합니다.
당시 웨일즈의 프로복서, 코니는 그를 보았을때, 너무 말랐고 약한 몸에 싸울 능력이 없다고 단정짓고 가르치기를 거부했습니다.
오웬은 자신의 신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한 훈련하고, 코치가 정해준 뛰어넘는 시간동안 런닝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운동해도 근육이 붙지 않는 체질.
그래서인지, 펀치의 파괴력은 약했을지라도, 오래버티는 힘은 강했습니다.
처음 프로에 데뷔했을때 그의 목표는 영국챔피언 정도였으며, 그 이상의 꿈은 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외로, 패배없이 연승을 이어가게 됩니다. 상대 선수들보다 큰키와 긴 리치가 유리하게 작용을 했습니다.
조금씩 살이 붙게 된 오웬은 이대로 체급을 올리면 지금과 같은 성적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 계속 밴텀급에 머물 수 있도록 관리에 들어갑니다. 먹는 것은 줄이고 훈련은 오래하는 방식이었죠.
데뷔 이래 16연승을 질주하던 그는 목표했던 영국챔피언은 이미 취득합니다.
영국챔피언이 되고 번 돈은 2,500 파운드 (4백만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유럽챔피언을 위한 도전을 위해 최초로 영국을 떠나 스페인으로 해외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유럽챔피언 후안 로드리게스는 100g 초과체중으로 타이틀전을 위한 계체량을 통과하지 못했지만, 스페인 복싱협회는 터무니없게도 이 매치를 정식 승인하고 경기를 강행합니다.
오웬의 몸상태를 처음 본 스페인 관중들의 심한 조롱과 함께 시작된 이 경기에서 스페인의 극심한 홈텃새는 조니오웬이 우세한 경기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강제로 1패를 안게 합니다.
1라운드로 마친 후, 오웬의 아버지는 아들의 몸에서 이상한 기름 냄새가 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기름은 로드리게스의 글러브에서 새어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심에게 이 사실을 알려고 항의했으나 무시당합니다. 오웬이 경기중에 일시적으로 눈을 머는 현상을 호소하자, 영국복싱협회 감독관이 기름과 관련된 상황임을 항의하자
무장경찰이 나타나 경기가 끝날때까지 경찰 경비하에 제재를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죠.
스페인의 이 챔피언은 고의적으로 버팅을 시도하고, 지속적으로 팔꿈치를 불법으로 가격하는 등 더티플레이로 일관했지만, 심판은 12라운드가 들어서야 경고를 보냈습니다.
이런 악조건에서도 오웬은 우세한 경기를 펼쳤지만, 결국 판정패를 당합니다.
조롱과 반칙, 비정상적인 판정까지 말도 안되는 경기를 치른 오웬은 이로인해 해외원정 경기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게되는데요,
결국 그 다음에 영국 홈경기로 치루어진 로드리게스와의 리턴매치에서 이겨 유럽챔피언을 획득하게됩니다.
그 직후, 오웬의 두번째 해외원정 경기가 준비됩니다. 멕시코 출신 세계챔피언 루페 핀토르와의 WBC 세계타이틀 매치.
그때까지 오웬은 얻어걸린 패배를 제외하고 25승을 기록 중에 있었습니다. 흥행을 위해 미국 LA에서 펼쳐지는 경기.
LA는 멕시코계가 많아, 핀토르의 홈경기나 다름 없었습니다. 경기전 도박사들은 6:1의 비율로 핀토르가 유리할 것으로 점쳤습니다.
1980년 9월 오웬은 LA에 노숙자들이 많이 있는 값싼 호텔에서 짐을 풀고 경기를 준비합니다.
스페인 원정 경기때와 마찬가지로 멕시코 관중들은 오웬을 조롱하고 심지아 물건을 집어던지는 행동까지 하는데요,
경기 시작 후 백중세를 펼쳐가던 오웬이 9회 첫 다운을 당합니다. 그리고 10 라운드 부터는 챔피언의 상승세였습니다.
12라운드에 핀토르의 강력한 펀치가 오웬의 턱을 강타하고 몸이 무너지듯 쓰러집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된 링닥터는 급히 엠블란스로 이송을 하지만, 그 와중에 사태 파악이 안된 멕시코 관중들은 들것을 든 사람들의 발을 차고,
누워있는 오웬에게 맥주컵에 집어던지는 악행을 벌입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3시간 후 뇌에서 혈전 제거 수술을 받고, 2차 수술을 받던중 폐렴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지며 결국 7주만에 24세의 나이로 사망을 합니다.
오웬이 사망한 후, 병원측은 오웬의 두개골이 정상인보다 얇았으며, 강타당한 턱뼈가 깨지면서 뇌에 손상을 입혔다고 밝혔습니다.
조사위원회에서는 오웬의 약한 몸상태가 사망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사망할때까지 병원비는 94,000 파운드로 오웬의 세계타이틀매치 파이팅머니의 13배에 달했고, 보험료는 병원비의 1/4 만을 메워줄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영국의 모금 활동을 통해 128,000 파운드가 전달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병원비를 제외한 차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합니다.
오웬의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핀토르는 은퇴를 선언하지만, 오웬의 가족들은 그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그가 복싱을 계속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이로인해 많은 멕시코인들이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22년후, 웨일즈의 중심가에 오웬의 동상이 세워집니다.
이 건립행사에 많은 멕시코인들이 찾아와 그를 기렸고, 어릴때 오웬의 경기를 보고 충격을 받아 늘 안타까워했다던 마이크 타이슨은 오웬의 고향 웨일즈 마을을 찾아가 기념식수를 했다고 합니다.
삐쩍마른 몸으로 복싱계에 입문하여,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각과 편견을 극복하며 거둔 전적은 24승 1무 2패의 훌륭한 성적을 남겼습니다.
가족과 함게 살 집을 짓기 위해 복싱을 시작한 오웬은 죽을때까지 그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죽을때까지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단 한번도 여자친구를 만들지 않고 오로지 복싱에만 전념한 오웬의 집념도 김득구의 집념과 많이 닮아보입니다.
오웬과 김득구의 죽음은 세계 복싱계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습니다. 이 대형 비극들로 인해 WBC는 선수들의 안전을 위해 라운드를 12라운드로 줄이는 계기가 됩니다.
그의 동상에는 오웬이 "역경과 비극에 직면 한 웨일즈 노동 계급 공동체의 이상과 고통과 용기를 모두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고 표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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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мар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