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번성 전투는 관우의 급발진이였죠. 입촉 때 장비가 큰 공도 세우고, 장합도 잡고 한중 쟁탈전에서 유비 또한 조조와의 1티어 단두대 매치에서 승리함으로써 두 형제는 자신의 군재를 증명했는데, 관우는 형주만 지키고 있었으니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전에는 유관장이 자신들의 전투를 이긴 적이 없죠. 이 관우의 급발진에 촉나라 전체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지 않았을까? 유비조차 관우의 급발진을 어떻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두 거북이처럼 엎드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봉 맹달도 이런 가운데, 성도와 형주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 관우의 구원 타이밍을 놓친 것으로 보입니다. 도데체 유비가 이 관우의 급발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수가 없었거든요. 중국인을 접해보면 유봉과 맹달의 행동이 십분 이해가 되죠. 근데 유비도 이렇게까지 관우가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결국 이릉 전투도 너무 두고만 본 유비의 후회 이런것이 가장 큰 원인이 아니였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국인의 감성이라면 최후의 불꽃 강유라고 생각합니다. 나라는 약해, 정치는 안 도와줘. 그래도 굳굳히 홀로 나라는 지키는..
유비는 한중에서 조조의 침공을 막으며 촉의 사활을 걸고 싸웠습니다. 형주를 제외한 촉의 모든 물자와 장수진 올스타를 투입시킨 전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총력전이었구요. 217년에 시작된 전쟁은 219년 5월이 되어서 끝이 났고 전쟁에서 승리한 시기와 관우가 군을 일으킨 시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우금이 조인을 지원하러 간게 7월이니 6~7월이라고 할 수 있죠) 촉 본토는 이제 막 전쟁이 끝나서 사후처리와 수습, 정비중인 때에 관우가 홀로 북진을 했으니 유비 입장에선 딱히 뭘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관우의 승전보가 계속 들려오고.. 상황이 좋게 돌아가고 있었다고 판단할즈음 형주가 오에 넘어가고 관우가 쫒기고 12월에 전쟁이 끝났습니다
그건 미방을 카바 칠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관우의 성정이 외골수에 오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스타일이었더라도 명실상부한 그 지역 총사령관이 위기에 빠져 적군이 코앞에 들이닥쳤는데 교전 한번 없이 성을 내준게 쓰레기지 사람새끼입니까? 애초에 관우의 잘잘못을 떠나서 미방은 유비를 모신 세월까지 따지면 더더욱 말이 안되는 새끼입니다.
그렇다고 배신을 해요? 그냥 배신자가 쓰레기인거지 뭔 개소리임 애초에 미방이 병신이라 군수물자 싹 다태워먹었고 관우한테 욕 바가지로 처먹으니 나중에 관우가 돌아와서 처벌받을까봐 무서워서 배신당한 인간쓰레기를 무슨 배신을할 이유가 없어요. 제대로 모르면 아는척좀 하지맙시다.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을 완잔무결의 능력자로 믿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우나, 오히려 너무 완벽한 영웅은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더군요 그래서 오히려 결핍과 결점을 찾아보게되고 그 과정의 빈 공간을 상상하고 맞춰보는게 즐거운거 같습니다 손찬이형 늘 고맙습니다
인간이 멋있는건 아니지않나? 걍 가오충인거 같은데 싸움존내잘하고 의리는 있지만 똑똑한사람이나 많이배운사람을 싫어하고 누가 자기보다 일 잘하거나 앞질러 나가면 싫어하고 견제하고 그냥 주변에 있으면 피곤한 스타일 그렇다고 일을 잘하지도 않음 단지 형이 사장이고 형에겐 무한충성임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에겐 의리 있지만(그 울타리 안에 들어가기 겁나 어려움-스타팅멤버 아니면 못들어간다고 봐야함) 그 이외의 사람에겐 더럽게 무례함 주변에 이런 사람 있으면 진짜 개극혐인부분 아님? 이런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인간자체가 멋있고 응원해요?
실제로 관우가 호승심이 강했기에 마초가 유비에게 귀순했을 때나 황충이 자신과 동렬인 사방장군에 임명되었을 때 엄청난 땡깡을 부렸죠. 그때마다 유비나 제갈량이 달래줘야했던..; 그래서 한 번 빨아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좋아하면서 어깨 으쓱 올라가며 바로 기분이 바뀌는 굉장히 감정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ㅋㅋ 또 관우 스스로가 유비에게는 자신이 언제나 최고. 라고 생각하며 자만했던 것 같기도.. 그러니까 제갈량, 마초, 황충 등이 유비한테 사랑 받을 때 허구언날 질투해대고 전공 세울테니까 관심 좀 가져달라고 북진한거 아닐까요ㅋㅋ
정말 그랬다면 촉한은 유지된게 기적이고, 당연히 망해야 할 나라였다 생각합니다... 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게... 이거 그 어둠의 독립군 무다구치ㅡ렌야 스타일이잖아요 ㅋㅋㅋ 아무리 의협집단에서 출발했다지만 형님의 대업에 이제 몇만의 군대를 이끄는 집단의 수장으로서 출병을 이렇게 아무 단서도 없이 사소하게 한다는건 납득히기 힘든듯.. 차라리 주인장처럼 오해가 있어서 츨병했다 정도면 모르겠지만..
(관우 스스로가 유비에게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했다기 보다) 사람이란 속성이 아무리 의형제 사이라도 부하인 관우 입장에선 전시에 군공도 없고 자기 보다 아래 직급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자기와 비등한 직급으로 치고 올라 오고 하니까 아마 초조했을 겁니다 거기다 늙은 쓸모없다 생각했던 황충 같은 사람도 사방장군으로 봉해지자 나도 군공 세우게 한중으로 좀 불러달라고 몇 차례나 애원하는 서신도 보내죠 이런 점을 보면 아무리 유비와 의형제 결의형제를 맺고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진다 하지만 관우 입장에선 자기도 나이 들고 늙어가는데 (그때 52세)별 군공도 없고 유비랑은 천리 만리 떨어져 있고 몸이 멀면 마음도 멀어지듯이 세월 지나면 아무리 결의형제라도 그 사이가 변치 않는다고 말 못하죠 몸과 마음이 초조해져 가는 중에 모든 전권을 쥐어 주는 가절을 받은 시점에 스스로 내 세울수 있는 빛나는 전공을 세울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상황이라고 생각한거죠 북진이라는?? 근데 현대 시점에서 전해오는 사서만으로는 과연 당대 관우가 북진할 만한 전략 전술 상황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음 그리고 관우의 패인은 북진하기 전 남군태수 미방 공안태수 사인 상용성주 유봉 맹달에게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해 놓아야 되는데 오히려 미방 사인 등이 출전 전야에 군수품 사고로 태형을 때리고 관우는 유봉도 유비의 양자로서 인정 안하고 이런 점이 원한을 사고 형주성 주위 여러 연계 성들과 화합을 도모해야 되는데 모두 악연을 쌓고 출진함 이런 일련의 일들이 쌓여 있는 중에 오의 손권으로 부터 기습을 당해 형주성도 잃고 미방 사인 유봉 맹달 등에게 구원군을 청했지만 모두 거절함 이런 모든 상황을 보면 관우의 지휘관 즉 군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은 아주 무능하다고 보아야 함 즉 스스로 내부 단속과 화합을 못해서 패인을 자초한 꼴임
어디서 봤었는데 한국은 선비의 충성을 상징하는 제갈량을 일본은 무사의 충성을 상징하는 조자룡을 좋아한다고 하네요. 중국은 왜 관우를 기리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ㅎㅎ 장군의 충성이었을까요. 여하튼 중국에서 관우상을 만들어 모시는 모습이 이색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속 신앙에서 최영 장군을 모시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겠죠.
@@BJHan-dr6ef 상업을 하는 사람의 신이였고 나중에는 민간의 신이 되버렸죠 상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신용이 중요한데 의리하면 당연히 관우고 또한 상업을 하면 산적이나 도적들에게 당할 위험이 높으니 무력이 높은 관우를 신으로 모셨고 또 머리가 안좋으면 상업을 잘 할수없으니 또 머리도 좋은 관우로 신으로 제격이니.. 산서성의 상인들은 전부 관우를 신으로 모셨는데 나중에는 그게 민간으로도 퍼져서 정말 중국에서는 신이 되버렸습니다.
유비가 한중을 점거하고 맹달을 보내 상용까지 쳐서 확보하니까 당연히 관우도 양양 번성을 빼앗아 확보해놔야 유비가 관중으로 진격할때에 맞추어 양동작전으로 허창을 노릴 수 있으니 관우 입장에서는 무조건 진격해야 옳다. 세갈래 물길이 만나는 곳에 기각지세를 이루어 철벽방어진을 치고 있는 양양 번성 라인을 떨어트리지 않고서는 절대 형주에서 중원으로 갈 수가 없음. 게다가 전장군에 가절월까지 받았는데 안 움직인다?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관우는 손권과 영토할양을 매듭지은 마당에 평화를 유지했어야 옳았다. 아니면 군량 부족하다고 마음대로 손권땅인 상수지역 농작물을 약탈하지를 말던가. 평화도 깨지고 상대방 곡식까지 털어서 침략 명분을 줬으며 후방을 지키는 미방 부사인은 하필 또 관우랑 사이가 좆같았음. 결과는 뻔하지. 😎
오록에서 발췌한 정사 여몽전 내용입니다. "당초 남군성 내에 실수로 불이 나 자못 많은 군사기물을 태웠다. 관우가 미방을 질책하자 미방이 내심 두려움을 품었는데 손권이 이 일을 듣고 그를 꾀자 미방이 몰래 서로 화합했다. 그러다 여몽이 (남군을) 공격하게 되자 쇠고기와 술을 지니고 성을 나와 항복했다." 관우 북진이 원래 219년이 아니라 218년에 진행하려 했다는 설이 있어요. 한중공방전이 벌이던 와중, 완의 후음 반란이 218년 10월이고, 조인이 진압하러 올라가는 사이 그걸 관우가 놓치지 않고 가려고 했으나 그 때 군사기물을 태워(이 시기에 대해서는 219년 관우 북진 이후인지, 그 전인지는 확실치 않음) 바로 북진하지 못하고 다시 준비하여 219년에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는 설이 있긴 합니다. 아무튼 218년이든 219년이든 책임자인 미방이 실수로 한 번 군사기물을 태워먹은 건 사실이니 갈궈댈만 하죠. 관우 성격이야 유명하고, 굳이 미방을 쉴드치신 건 아니겠지만 이후 미방이 했던 행태들을 보면 솔직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user-vv5zj5dc8z 능력이 있어서 남군성군사기물 다 태워먹나요. 남군태수직도 그동안 유비 지원해준 집안영향이 80프로는 된다고 봅니다. 나중에 항복한 반준이 더 능력있어서 오에 쓰였죠. 미방은 항복한 후에 그냥 잘먹고 잘살았어요 아무 공도 없이. 전 미방이 가진 능력에 비해 과거 유비지원 빨로 과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재라고 쳐도 군사기물은 군량과 함께 보급문제입니다. 보급의 실수는 전쟁의 승패가 달린 일인데 관리소홀이든 뭐든 태워먹었다면 관우가 아니라 누구라도 싫어 할만 하지 않을까요. 다루지 못한게 아니라 쟤는 능력은 그닥인데 그동안 유비 지원에 끝까지 따라는 다녔고, 있는 집안이라 공부도 했으니 안 쓰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쓴게 크다고 봅니다. 실제로 한중왕 등극 후 벼슬은 높아도 명예직에 불과한 간손미 지위와 실세직인 제갈량 법정 등이 다르지요
사실 ㄹㅇ 삼국지 처음 봤을때 관우가 너무 좋았고 나관중이 형주 털려버린 ㅄ짓을 '와 형주 다 먹고 허도까지 그냥 먹는 건데 아 여몽 이쉐키, 크으 우리 관우 다 잃었음에도 저 당당한 위용봐'로 바꿔버림 매력적인 캐릭터지만 조운 다음으로 미화된 삼국지 장수 중 하나인 것 같음
관우 신격화는 아다리가 좀 잘 맞은 듯 함 1. 관우 죽은 지 얼마 안 돼서, 관우토벌에 나선 장수들 다수 사망(여몽 반장 등), 조조도 얼마 안 지나 사망 =>관우의 원혼이 다 죽였다는 썰 풀기 쉬움 2. 관우가 조조 밑에 있을 때 여포가 조조한테 패하고 죽음 =>여포의 적토마가, 여포 사후에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았는데 관우에게만 길들여졌다고 썰풀기 좋음
아 이 영상을 보니 관우 참수이후에 유비가 왜 손권을 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지 이해가 갑니다 관우는 유비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그것을 유비는 묵인했으니 사실상 관우를 손절치고 계획대로 움직이지않았다라고 말해야하거나 관우가 자신의뜻을 따랐는데 비겁하게 손권이 뒤통수를 쳤다라고 말했어야했을 것입니다 유비가 한 행동이 관우의 충심에대한 이미지를 깎아내리지 않기위해서, 또 유비가 밑에 사람들을 컨트롤 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서 권위가 내려앉지 않기위해서 선택한 결론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관우가 양양을 치려고 마음먹었다면 손권과 관계를 좋게 만들고 후방을 안정시켜야했음. 본진 싹 비우고 출정가는데 그런 정치적 상황은 고려안하고 자기 군재와 군사만 믿고 정벌을 나간게 문제임. 그리고 결과론적이지만 정벌 안나가고 형주 잘 지키고만 있었어도 휼륭한 선택이었을거라고봄.
@@user-if1bk9sg3v추가로 형주 그 큰땅을 텅비우고 간것도 아니고, 미방 부사인이면, 특히 미방은 충신 of 충신인 미축의 가족관계인데 홀랑 항복할거라고 예측이나 했겠습니까? 시간 조금만끌어줬어도 관우는 생환했을거고 그렇게 우르르 무너지진 않았을겁니다. 여몽이 머리를 잘썼죠 통신수단 다끊어버리고 관우가 들은 첫소식은 형주 함락됐는데요? 이거였다하니,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상황인겁니다. 손권은 처음부터 형주를 먹을생각이었던거고요. 그걸 관우가 몰랐을거같진않고 나름 대비한다고했는데 이렇게 어이없이 뚫릴것까지는 몰랐던거죠
역시 이 분이 가장 전지적 시점으로 해석을 잘 함.... 관푸치노에 대한 당시 사람들과 후대 사람들의 평에 대한 해석이 저랑 거의 같네요.. 당대에서 유명했던 것도 맞고 허명이라는 평으로 일생을 끝낸 것도 맞음.. 지휘관으로서 군공이 아예 없는 수준인데.. 좋은 평이 나올 수가 있나? 송대 때 요, 금, 몽골에 짓밟힐 때 기득권들이 백성들에게 " 못난 나라도 내 나라다. 너희들도 관우가 못난 유비에게 한 것처럼 충성하라! " 라는 의미로 의도해서 만든 영웅임.. 코에이 게임상 통, 무가 95. 97 정도인 것 같은데 85, 97 정도가 맞다 생각함.. 형주 자리 잡고 난 후 정도부터의 기록을 살피면 장비가 85, 98이 아니라 90, 98이 맞음..
@@user-pb4ff4ij2n 운빨로 이겼다고 할만한건 우금의 7군 수몰인데, 근데 그 이전에 양양 번 완까지 관할지역에 있는 조인이 만총까지 데리고 패퇴해서 번성에 짱박한거도 운으로 치부할수 있을까요? 심지어 조인이 자살 고민까지 하게 만들정도로 말이죠. 그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던 그 조인이요. 그리고 장료 사후 대오전선의 책임자이자 위나라의 승상까지 지낸 만총이 있었는데 말이죠? 그거도 관우가 울부짖음에 군사들이 겁먹고 모랄빵이라도 친건지요? 괜히 당시 관우의 진격에 천지가 진동했다고 한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장비나 황충도 기록 부실과 한 전선에서 싸워 이긴거로 평생 울궈먹는다고 까여도 할말 없는거 아니겠습니까? 조운까지야 그렇다쳐도 관우는 명백히 전술적으로는 만인적이라는 평과 당대 책사들의 평이 허명이 아니라는걸 조조의 1픽이나 다름없는 조인과 만총을 상대로 보여줬는데, 아예 보여준게 없는 범장의 거품이라고 까는건 너무 갔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 조인도 유비를 1번이지만 이긴거로 역시 허명이 아니라고 올려주는거랑은 너무 대조되게 단 1번이지만 제대로 보여준 관우에게는 내려치기가 참 가혹하다고 생각이 드네요.
조인,만총 정도의 사령관급 인재가 아니었죠. 삼국이 첨예하게 대치하는 꼭지점이 형주인데 그 상황에서 먼저 움직인쪽이 불리한건 요즘 전략시뮬좀 해본 꼬맹이들도 압니다. 남군을 보존하고 지키는것만으로도 대단한것인데 후방에 적대세력을 남기고 먼저 움직이다니… 그것도 군수물자 보급선도 잘릴 확률이 매우 높은 상황인데.. 일단 움직이면 빠르게 속전속결로 양양과 번성을 먹어야하는 시간 압박에 놓이게되는데 훗날 몽골도 대규모 원정을 와서 양양 번성 먹는게 글케 어려웠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릴때 마냥 무신에다 코에이 삼국지에서 무력 짱 센 무장으로 기억하던 관우는, 어른이 되어서 보니 그냥 스스로 자기 능력 과신하다 망테크 탄 허언증 환자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닌 듯. 평생을 모시던 주군이 말년에 겨우 창제한 나라를 보좌하고 싶었음 본인의 군공 욕심을 낮춰어야하지 않나. 그게 2인자인데. 1인자를 빛내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관우가 급발진 하지 않았더라도 융중대가 결국 성공했을까..하는 부분은, 두고두고 아쉽긴 하지만 사실은 희박한 계획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 언제든지 구호탄랑의 형국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밸런스 게임이라는 점에서, 삼국시대의 묘는 강대강의 일대일 구도가 아닌 첨예한 삼각구도에서 오는 긴장인 듯 해요. 그나저나 정말 후대의 이미지 메이킹의 위력을 느낍니다. 지금은 레트로 아방가르드 패션의 성지 같은 재밌는 이미지로 유명해진 동묘도 본래 동관왕묘, 관왕, 그러니까 관우를 모신 묘라는 사실이 문득 떠오르네요.
중국사 역대로 봤을 때 형주, 익주 양동작전이 제대로 수행된 적이 전무합니다. 물론, 융중대라는 대전략 자체가 굉장히 그럴듯하긴 합니다만 고대의 물리적인 거리나 연락 수단 등을 고려했을 때 과연 맛깔난 묘수냐? 라고 물어본다면 애매하죠. 훗날의 모택동도 제갈량의 융중대를 비판했던 적도 있구요. 또 촉과 오가 동맹관계였지만 제대로 타이밍 맞춰서 동시 북벌을 감행한 적도 거의 없죠.
연의와 게임으로 많은 이들의 삼국지 첫 사랑이 된 새끼.. 실상을 알면 알수록 얘는 대체 뭘까하는 거품 밖에 안 보이는거 같은 새끼... 근데 잊을 수 없는 첫 사랑처럼 마구 까기에는 마음이 아픈 그런 새끼.. 하필 또 뒤통수 맞아 죽어 손권이 안그랬다면 하는 생각이 드는 새끼...
안량을 베고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퍼포먼스는 적들에게도 경외심을 주었죠. 6년상으로 스타가 된 원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시 유교가 교조화 되었기 때문이죠. 그러한 유교적 퍼포먼스와 더불어 적장을 참한 용맹이 겹치니 여몽이나 조조도 관우에 대해 오판할 수 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더구나 명성 자체가 군대의 결집력과 기세를 올리는 요소이기도 하고요. 이미 신격화가된 김성근이가 한화에서 말아먹어도 사람들은 한화에서 문제를 찾듯이, 관우가 여기저기서 말아먹어도 사람들은 관우말고 다른 곳에서 이유를 찾게되는 것이죠. 적벽의 승세를 타고도 악진과 문빙에게 패한 것, 5천의 정병으로 겨우 천명의 감녕군에게 막힌 것, 노숙이 연약한 군세로 우릴 이길 수 있냐고 일갈하니 입을 다문 것, 홍수라는 호기를 입고도 양번을 함락 못 시키고 서황에게 참패한 것 등- 관우의 지휘능력은 좋게 봐도 평균 수준인데 지나치게 고평가 받았죠.
오나라 노숙에 관해서도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요코하마 미쯔테루 전략 삼국지로 입문해서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장해서 읽고 있는데 여기서 노숙은 제갈량한데 외교력이나 전략이나 완전 털려서 주유가 한심해 하는 부분이 많이 나오거든요 근데 주유가 죽을때 자기 후계인으로 노숙을 정하더라구요 다른 정사 삼국지 영상을 봐도 노숙이 상당한 사람으로 나오는거 같은데 어떤 인물인지 궁금하네요
정사 기준으로는 변검 좀 칠 줄 아는 서서나 기습으로 우두머리 죽이고 태연하게 내가 죽일만해서 죽였으니 날 따르라고 일갈하던 유엽, 보즐 급으로 한 성깔하는 양반이었을지도.. 진짜 문무에 다 뛰어난 엄친아였음. 하지만 그 성깔 죽이면서 전면전 분위기 피하려고 했던건 매우 인상적임.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하지 않고 깨끗하게 죽어야 했다. 그건 좀 아닌듯 합니다. 당시 하비성에는 관우말고 유비 식솔들도 있었는데.. 관우는 자신을 제물삼아 조조로부터 유비식솔을 보호하는데 임무를 다한거라고 봅니다. 만일 관우가 죽음을 택했다면 유비식솔들은 조조에게 어떤 대접을 받았을지 모르죠.(노예가 되었던지..죽었을수도.) 연의가 대체적으로 촉 인물들에게 버프를 많이 넣었는데.. 관우의 하비성 항복부터 유비에게 다시 돌아가는 장면은 연의+정사에 동시에 나오는 몇 안되는 명장면이라고 봅니다.
정사에선 문무 모두 능하고 털복숭이가 아니라 쾌남 이미지의 미남이라고 하죠 삼국지연의에서도 잠깐잠깐의 편린이 보이는데 전술로서도 재능이 있었습니다 자식 농사도 괜찮았는데 딸들이 좋은 집안으로 출가했고 촉이 망할때 관우의 자손들은 거의 멸문의 화를 당했지만 장비의 자손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는 후문도 생전에 덕도 나름 쌓았었다고 볼수있는
결론은 급발진이야 어쨌든 전공도 세우고 나름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 있었는데 통수를 도저히 이겨내지 못했다는건데; 형주가 당장에는 맛있어 보였어도 2대1해도 될까말까를 그렇게 통수쳤으니 저때 삼국지 끝났다고봄 오히려 관우가 어글지리게 잘 끌때 오도 북진해서 뭐라도 주었으면 이후 한결 편했을텐데 인간의 욕심이 이리.무서움
정확한 걸 모르고 한 질문입니다만... 후음의 난이 (관우팀의 공작+유비의 승리)일 가능성 한중 공방 와중에 관우가 손가락만 빤게 아니라 일종의 견제를 하고 있었고 (그 성과 중 하나가 후음의 난일 수는 없었을까요?) 애초에 관우의 북진 자체가 일종의 융중대책의 일환일 가능성은? 형주 북진의 와중에 그게 혹여 관우의 독단이라도 한중 방면에서 어그로를 끈다거나... 하는 후속 대책을 추진했어야 정석 아닐까요?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요... 아무리 관우가 당대와 후대의 투신 이미지를 감안해도 관우는 죽기전에 심각하게 고립이 되어 있었죠.(촉에서 응원도 없고, 위.오의 네임드를 다 상대해 내야했으니) 역설적으로 이런 고립된 상황에 몰린게 지휘관 관우의 역량부족이라면 부족일 수도 있겠네요...
후음의 난이 유비군에 의한 공작이라 함은 사서에 근거가 나오지 않고, 보통 관우 북진의 정당성에 인용됩니다. 추후 번성 포위에 완의 난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료상의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완의 난이 영향을 끼쳤다면, 번성의 조인이 존버를 하지 못할 정황상 근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결국, 확보된 보급로로 인한 서황의 원군으로 관우는 패퇴하게 됩니다.
원래 대전략이, 하변전투로 페인트 하고 한중을 먹고, 한중을 정비한후 하변. 무도군을 정리하여 마초를 하변의 태수로 앞세워 서융의 호응을 이끌어 낼려고 했는데,( 촉한과 서융은 하나다.) 그 과정에서 법정이 죽음으로써 잠시 멈춰지고, 그 시간을 끌어주기 위해서, 관우가 중앙 폭격기로 양양을 노렸는데, 문제는 3만의 포로 먹일 군량미가 없어서 강릉의 공동 식량창고를 털어 버렸음. 손권입장에서는 관우의 행동이 추후에 오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거라는 생각이 안듬. 일단 후환의 새싹은 잘라내야 하기 때문에, 형주 차지하고 나서 관우의 반응을 한번 봄. 자기가 한 행동 모르고 다시 형주 찾으러 오고, 실패하니깐 촉으로 도망가서 군사 이끌고 복수전 할 기미를 보임.
@@user-pb4ff4ij2n 배신은 했겠지만, 관우를 통수 치는 배신은 아니었을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녀석들도 관우라는 걸출한 장수를 땜방으로 위나라를 막을수 있다면 자기들이 손해볼꺼 하나도 없거든여, 그런데 워낙 강한 관우가 군량 창고를 털어가니, 딱 봐도 수틀리면 자기들 업신여길게 뻔하니, 빨리 판단하여 수를 쓴거죠
진짜 미스테리임..타임머신이 개발되지 않는 이상 풀릴 수 없는 일인듯. 한중의 안정을 위해 시간을 벌려고 견제하려고 나갔다는 썰도 있고.. 관우가 출진했다면 당연히 형주에 원군을 주던가 뭔가 대비책을 마련했어야 되는데 그것도 전혀 없었음. 한신 같은 별동대 작전이었나 싶기도 하고..
유비가 관우에게 시호를 내려주지 않은걸로 보아 관우랑 각별한 사이인거랑 별개로 본인의 야망을 더 각별하게 여겨서 관우가 형주를 잃은 실책때문에 자신의 야망을 망쳐버린것에 대한 서운함이 있었던것 때문에 시호를 내리지 않은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장목후라는 시호를 보면 촉한 지배층이 관우가 형주를 날려먹은 것에 대한 원망도 있는것 같습니다.
그냥 저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관우의 북벌은 생각보다 너무 잘풀려서 망한전쟁이라고요. 기왕잘풀릴거면 ㅈㄴ 잘풀려서 성까지 잠겼으면 괜찮았을텐데 결국 그게 잠기지 않아버린거죠. 즉, 잘 풀리긴했는데 하늘이 돕다가 말았음.. 차라리 이렇게 안풀렸으면 지지부진하다가 유비의 영을 받고 물러났던지 했을것 같은데 영상에서 언급되었듯이 대승 보고가 들어오니 뭐라하지도 못하고 그러다 어버버 속전속결로 털려버린... 물론 미방의 배신의 지분이 매우크긴합니다. 미방이 성문 그렇게 쉽게 열어주지만 않았어도 적어도 관우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거 같아요. 이릉대전은 이러한 유비의 허망함을 나타낸 전쟁이다 라는 표현은 처음 들어봤는데 맞는말이겠다 싶기도 하네요.
형주도독은 관우말고 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1.제갈량이 촉으로 들어갈 때 관우는 유비 말고는 컨트롤이 안됨. 2.지가 잘난 놈은 누구 말 안들음. 3.파촉지방과 한중지방을 안정시켜야 하는 시점에서 많은 엘리트 인력들이 필요함. 4.유비가 그 외 믿을 사람은 관우 말고는 없었습니다.
관우가 급발진 한게 아닐듯. 유비가 한중 먹고 상용까지 확보할때 같이 호응을 해서 형주북부를 공격한것으로 보임. 단지 형주군 만으로 공격과 방어가 원활하지 않았던 병력이 문제라고 보여지고. 부족한 병력을 제갈량이 왜 지원을 형주에 내려보내지 않았을까 하는게 문제. 관우가 형주북부를 공격할때. 병력도 넉넉하지 않을걸 알수가 있고 오나라가 가만히 지켜보지 않을거라는걸 제갈량이 몰랐을까? 모른척 했을까가 문제... 관우도 오나라가 뒷통수 칠수도 있지않을까하는 설마하다가 당한걸수도 있고 제갈량도 오나라가 뒷통수 칠걸 예상못했을수도 있겠지만... 결국은 제갈량의 무능 때문...
이 주제에 대해 다른 유튜브 채널에 다뤄서 한번 봤는데요 거기서 가장 많이 지지 받은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관우가 자신의 역할을 오버했다 : "한중대전이 217~219년입니다. 관우의 출병은 219년이구요.촉나라는 국력을 다해서 겨우겨우 위나라와 싸우고 있어서 군사적 압박을 덜기 위해서 관우한테 양양을 치라고 한겁니다. 관우 패망을 보면 한중대전이 끝나고 서황이 대규모 지원군을 계속 보내서 지게된겁니다... 관우가 한중대전을 승리로 끝났으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우금의 3만 위나라 포로를 데리고 형주로 귀환했어야 했는데 놀라운 승리로 번성와 양양이 떨어지기 일보직전이니 욕심을 내다가 패망한거 같습니다. 또한 맥성 위치가 강릉 바로 옆입니다. 관우가 양양에서 패하고 바로 촉으로 도망갔으면 살았을텐데 강릉을 다시 탈환 하려고 가까운 맥성에 가서 한달넘게 전투를 하다가 도망가다가 죽었습니다... 2)관우 하나 잡을려고 위와 오 에이스들 다 출전해서 관우를 담가버렸다 : "관우하나 때문에 천하가 진동하였죠. 이 관우 한명 잡기위해 우금 방덕 조인 서황 여몽 육손 등 위 오 에이스들이 다 개입된 삼국지 세기의 번양공방전 "
1번 전반부는 카더라아님? 유비가 한중칠때 관우보고 양동작전 해달라 지시한 기록이 있는 기록서가 있나요? 한중전투와 양번전투가 시기와 타이밍도 애매함. 당시 치안이 불안정해 위촉오 죄다 수시로 난이 일어날때인데 후음이 난 일으키니 조인이 잠시 빠졌고 관우가 기회다 하고 북진한거로 밖에 안보임. 7군 잡았으면 그만하고 돌아가도 되었는데 보급도 시원찮은 마당에 이왕 나았는데 양양정도는 먹어야지하고 군공세우려다 개털린거지요 뭐. 장수가 나가야할때 물러나야할때를 알아야 하는데 나갈줄만 알지 물러날줄을 모르니 군재 병신스러운거 맞죠. 조인이 서황 올때까지 관우랑 맞서 수성하며 버틴 인원이 겨우 5천정도라 현재추정하던데 6배정도 되는 인원으로 포위해서 성과없으면 물렀어야 했음. 더우기 관우는 보급도 개판에 군수무기 화살도 모자랐던 상황이었다던데... 당시 공성무기도 제대로 없던시기에 화살이 없으면 포위하고 뭐하자는건지 강강수월래라도 하려한건가? 말려죽이기하려 한거라던데 정작 본인도 포로먹일 식량도 없어 노략질 하던 고나우;;; 장기전 단기전 감도 없고 플랜b도 없었던 지휘관이라... 다만 형주에서 행정하며 병사 3~4만까지 양성하며 전쟁 대비해온건 그나마 인정 2번은 관우가 대단한거 이상으로 당시 형주라는 땅이 대단하니 위와 오가 총력전 수준으로 대처한거. 오나라 입장에서도 북진하려면 양동작전에 형주가 매우 필요. 위나라도 허도의 목줄기가 거기라 형주방어 매우 중요 거긴 잡장이 출격해도 위는 총력으로 막아야함. 위나라 최고장수 조인 박아 놓은 이유가 있죠
관우가 공격을 서두른 것은 단 하나의 이유라고 보는데 바로 나이 입니다. 관우 본인이 알았겠죠 전장에서 병사를 지휘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장비가 57세에 죽었으니 관우도 50대 후반이었을거고 한번 사는 인생 꿈 하나 바라보고 평생 고생하며 왔으니 얼른 조조랑 한판 뜨고 천하통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 놓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성격상 후대에 대업을 맡기는 것 보다는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 라고 생각했을 것 같네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음의 난도 있고, 김의도 난도 있고 북방이 흔들거리는데 조인이 쳐내려온다하니 예방 전쟁식으로 시작한건데 연승이 이어지자 양양하고 번성까지는 점령하자. 일단 그거 2개만 점령하고 추후 생각해보자. 했지 않나 싶습니다. 사실 지정학적으로도 양양과 번성을 차지 해야지 장강 이남의 형주 지역들이 안전해지니까요. 사실 장비보다는 약자에게 관대하고 동정적있던 관우가 고단한 민중들에게는 더 인기가 좋을 수밖에 없죠.그 민중들의 민심을 얻어야하니 역대 임금들도 관우를 높여준 거구요.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당대의 명성과 평가도 그렇고 양번 공격전에서의 연승을보면 당연히 군재도 뛰어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연전연승했다 쳐도 별볼일 없는 자가 북상한다고 해서 조조가 수도까지 옮기려고 하지 않았겠죠. 관우의 군재를 인정하니까 조조도 천도까지 고려했겠죠. 개인적인 여담이지만 제가 중국에서는 관우교 신자로 등록되어있습니다. 어떻게 관우 사당에 방문했다가 인간 관계 관리및 사업상의 필요 때문에 명부에 이름 올리고 소정의 돈도 냈습니다. 그런 이유로...어차피 원래 어렸을 때 어린이 삼국지 읽고 나서 관우 팬이었기도해서 등록했죠. 어른이 되고 난 이후부터는 제갈량으로 바뀌긴 했으나 그래도 관우는 삼국지 입문 후 첫 팬이기도해서 여전히 팬심은 유지 중이죠. 그러므로...저는 오나라를 싫어합니다. 특히 손권, 여몽, 육손...아주 싫어합니다.
조조의 관우 짝사랑이 그 당시의 평가를 업시켰다고 보는 게 맞을 거구요.. 사서 여러 내용을 봤을 때 조조가 수도를 업성으로 옮기려했다는 건 사실이라 보기 힘듭니다.. 사서에 나온 그대로 번성을 잃으면 허창이 코 앞이니 수도를 옮겨야 되는 것 아닌가? 란 말 뿐 없었어요... 구절 구절 찾아보면 조조가 지 사이드 라인에 자문을 구할 때 이렇게 엄살구는 표현이 여럿 나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로 무엇을 지시한 사실은 전무합니다..
일단 촉이랑 오가 서로 내심 반목하고 있다는 데에서 융중대 전략은 결국 실패하지 않았을까 싶네요....관우가 형주에서 급발진을 하던 말던... 합비에서 거듭되는 실패로 성과에 목말라 있는 손권에게 있어 위나라 보다는 옆에있는 촉나라 쳐서 성과 얻어내는게 더 쉬웠을테니...
중국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능력보단 관계문화가 너무 강하죠. 꽌시. 능력은 위연, 황충이 더 큰 그림의 지휘관급 장군감이고 관우는 맹장급 돌격대 대장급으로 생각합니다. 유비군의 지휘, 전략,전술은 전부 유비 본인에서 나온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자체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장비,관우,조운 등등 인물들이 유비의 능력을 알아보고 따라다닌거 같구요. 또한 유비는 인덕보다 상대의 능력과 사람보는 눈이 탁월합니다. 꽌시는 꽌시대로 사람을 배치하고 능력은 능력대로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를 잘하는 인물같습니다. 조화. 입촉후 각각의 자리에 인물 배치를 보면 유비가 사람보는 눈이 탁월한것을 알게됩니다. 한편 관우는 능력이 다소 과대평가된거 같습니다. 맹장으로 대단할지언정 전략,전술적 인물은 못되는거 같습니다. 관우가 형주에서 패해 도망갈곳을 찾으려해도 갈곳이 없고 우후죽순 다 배신을 때리는 현들만 보더라도 관우의 능력은 한참 못미치는데...형주라는 자리를 관우에게 맡긴 유비의 마음은 이해가 갑니다. 난세에 믿을건 꽌시뿐...동거동락했던 장비에게 양평관 , 관우에게 형주...능력보단 꽌시배치였죠. 위 두동생의 능력이 부족한 것을 알고 있는 유비는 동생휘하에 능력있는 인물을 많이 배치해두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간사업이죠...반면 조조는 능력있는 인물을 너무 많이 배치하되 견제했지만 그 견제가 영원하지못해 사마씨에게 먹힌거구요. 손권은 아무도 믿지않고 독불장군처럼 행하다 후계문제로 자중지란에 빠져 오나라 스스로 약하게 만든 형국이 되어버렸구요...한 왕국의 왕조가 창조되고 유지한다는건 모든것이 조화를 이루어야하는데 삼국 모두 그렇지못했습니다.
제갈량의 삼분지계는 언더독에게 매우 합리적인 전략이었지만 당시 손권, 유비, 관우 모두 컨트롤이 안 될 정도로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들이었음. 원래 이런 스타일의 인간들은 적벽대전에서처럼 기브앤테이크가 완벽할 때 행복해질 수 있는데 수비형 관우, 의리 져버린 유비, 동맹한테 개무시당하는 손권 너무 안 좋은 상황으로 흘러갔죠. 형주를 손권에게 양도하고 옹양주에 관중까지 먹을 수 있었다면 베스트였겠지만 익양대치의 시한폭탄은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다는게 문제.
설명이 워낙 깔끔해서 덧붙일게 없는 관우 종결 영상입니다. 저와 생각이 똑같네요 ㅎㅎ 조운과 더불어 삼국지연의의 최대 수혜자이자 그에 걸맞는 최대 거품 관장생 형님. 평생의 유비 휘하일때보다 단기간 조조밑에서 군공이 더 임팩트 있었던 아이러니;;; 손찬님 황충좀 다뤄 주시라요 제발.